한번 맛본 인도는 잊기 어렵다
印度 이야기(10)/ 봄베이는 마침내 끝이 났다고 훌훌 털어버리며 만족스러워할 수 없는 곳이었다

정인채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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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람 봄베이

정치 일번지가 델리라면, 인도의 경제 일번지는 단연코 봄베이(現 뭄바이)다. 인구 2000만 명에 이르는 인도 최대의 메트로폴리탄. 인도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를 만난다는 생각에 흥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 기분은 델리와 마드라스(現 첸나이) 등 이제껏 발길이 닿았던 여느 대도시들과는 또 달랐다. 마침내 풍요로운 도시에서 현대인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도 컸다. 모던한 카페에 앉아 책을 펼치고 여유롭게 차 한 잔을 즐기는 상상. 마침 휴양지 고아(Goa)에서 제대로 여독을 풀고 온 나는 봄베이에서 2층 버스가 오가는 도시 런던을 꿈꿨다. 아직도 인도가 어떤 곳인지 몰랐던 것이다. 어슴푸레한 새벽길, 자욱한 안개 속에 모습을 드러난 뭄바이의 첫인상은 여지없이 그러한 생각을 재고하게끔 만들었다. ‘아, 역시 인도는 인도구나.’ 참 간사하게도 금세 인도 여행자의 본분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라비아海를 면한 바닷가의 도시 봄베이의 밤은 무척 추웠다. 안개가 자욱한 길을 뚫고 도심으로 향하는 사이 아직 바다가 보이지도 않건만 몇 겹으로 껴입은 옷깃을 연신 여미고 있었다. 그것은 상상 이상의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한 때문이기도 했다. 길을 달리며 넋을 놓고 주변 풍경을 바라보는데 무언가 조금씩 꼼지락거리는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저 길가의 노숙자들인 줄 알았다. 노숙자라면 인도의 여느 도시는 물론 선진국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어둠에 익숙해지자 그 작았던 움직임은 마치 강물이 바다로 합류하듯 이내 그 너머의 거대한 풍경으로 이어졌다. 끝을 알 수 없는 슬럼가의 바다가 몇 킬로미터에 걸쳐 너울져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었다. 아시아 최대의 빈민촌이었다. 한국에서도 꽤 알려진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본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하고는 했다. 정말 그런 곳이 있느냐고 말이다. 그 실체를 처음으로 목격했던 순간이다.

시골의 궁핍한 삶에서 내몰리듯이 도시의 일거리를 찾아왔고, ‘봄베이 드림’을 꿈꾸며 이곳에 정착했다. 빈민가의 배고픈 삶이야 살아보지 않고서 어찌 얘기할 수 있겠느냐만 돈이 있는 근처에 머물러야 돈을 벌게 되는 법이라고 했다. 인도에서 가장 부유하고 물가가 비싼 봄베이 언저리는 이들에게 절망 속 희망의 끈이 닿은 곳이었다. 시골에서 소작농을 하는 것보다 그나마 도시의 하수구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길거리에서 푼돈을 버는 편이 더 나은 것이 현실이다. 최대의 슬럼가는 인도 최대의 도시 곁에 자리 잡았고, 단순히 인도의 극심한 빈부 격차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되고, 칸 영화제 황금 카메라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타임지 선정 최고의 영화 중 하나(The Best 1000 Movies Ever Made)로 꼽힌 미라 네어 감독의 1988년작 <살람 봄베이>를 통해 우리는 간접적으로나마 그 막연한 꿈과 희망이 잉태한 도시 봄베이 빈민가의 뒷골목, 그 아찔한 이면을 경험해볼 수 있다. <살람 봄베이>에서 살람(Salaam)은 이슬람어로 평화(peace)를 뜻한다. 왜 평화일까? 가난, 범죄, 마약, 창녀…… 봄베이의 하수구로 흘러들어와 우여곡절의 삶을 경험하며 성장하는 소년 크리슈나의 시선은 인도의 모습과 군상을 담아낸 또 하나의 뷰파인더다.

일곱 섬의 도시

일곱 개의 섬? 그렇다. 봄베이(現 뭄바이)는 원래 부근 일곱 섬을 중심으로 어부들이 거주하며 형성된 어촌 도시였다. 식민지 시대 이전까지 이곳의 역사는 이미 몇 차례 언급된 인도 역사의 대세적인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원전 3세기경 인도 최초의 통일 왕조 마우리아의 남진과 더불어 그 영토에 편입되었고, 아소카 대(기원전 273~232년경)에는 서인도의 불교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대대로 힌두 왕조가 다스려오다가 14세기경 델리 술탄 시대에 이르러 이슬람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고, 1534년 구자라트의 술탄에 의해 포르투갈에 할양되었다. 이때부터 포르투갈은 이 지역 일대를 봄 바하이(Bom Bahai)로 부르게 되지만, 사실 당시만 해도 이렇다 할 지역 개발과 발전이 이뤄지지는 않은 상태였다.

경제 중심지 봄베이의 역사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다. 1661년 영국의 찰스 2세와 브라간자(Braganza, 포르투갈의 귀족 가문) 집안의 캐서린이 혼인하면서 섬의 일부를 다우리(결혼 지참금)에 포함시켰던 것인데, 1665년 영국은 일곱 섬을 모두 확보했고, 얼마 뒤, 영국 정부는 다시 명목상 단돈 10파운드의 연간 임대료만을 받고 동인도 회사에 넘겼다. 이후 이곳은 봄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며 무역의 중심지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불과 20여년 만에 동인도 회사의 거점은 수라트(Surat)에서 봄베이로 이동하게 되었다. 항만 등 각종 기반 시설이 본격적으로 들어섰음은 물론, 지역 내 종교 자유 등 영국 정부의 적극적인 장려책이 결실을 맺어 인도 전역의 상인들이 봄베이로 이주해 정착하기 시작했다. 구자라트 상인, 페르시아계인 파르시 상인과 더불어 포르투갈 등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주한 주민들도 있었는데 이러한 이주민 정착은 봄베이(現 뭄바이)가 다문화 사회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과 동인도 회사의 의도대로 봄베이는 식민 경제의 컨트롤 타워이자 인도 서해안의 핵심 허브(Hub)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요새가 지어지는 한편 18세기부터는 일곱 개의 섬을 잇는 토지 개간 사업이 시작되었다. 당시 봄베이는 아직 식민지화되지 않은 주변 내륙 지역으로부터 고립된 상태였는데 19세기 초 영국은 이들 지역까지 세력을 넓혀 복속시키기에 이르렀다. 증기선이 드나들던 해로에 이어 내륙을 관통하는 철로*가 확보되었다. 미국의 남북 전쟁으로 차질을 빗던 목화 생산의 대체 공급지로 인도는 각광받고 있었고, 면화 공장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봄베이의 경제는 활황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853년 뭄바이와 그 광역권인 타네(Thane)를 잇는 노선이 처음으로 개통되었다.

1864년 영국의 식민지 지배는 공고해졌고, 봄베이를 둘러싼 요새는 허물어졌다. 대신 봄베이는 이제 메트로폴리탄의 풍모를 갖춰가지 시작했다. 이곳은 이제 富를 꿈꾸는 자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대도시가 되었다. 이어진 수에즈 운하의 개통(1869년)은 인도 최고항의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봄베이는 명실상부한 인도 경제의 중심이자 교역 창구로써 성장했다. 한 때 일곱 섬의 도시였던 봄베이는 이처럼 인도에서 바라보는 세계, 세계에서 바라보는 창(窓)이 되었다.


두 얼굴의 뭄바이

마드라스, 캘커타가 식민지 시대의 명칭을 버리고 첸나이(1996년), 콜카타(2001년)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듯이 봄베이도 뭄바이(1996년)로 변경되었다. 비록 이 글에서는 도시의 역사를 상기하며 옛 이름으로 언급하는 경우가 잦지만, 이들 식민지 시대의 거점 도시들은 여전히 지금의 인도를 대표하고, 묵은 때를 벗기 듯 식민지 시대의 이름을 지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자존심 문제도 있고, 성명학과 사주를 떠나 개명(改名)은 상징적인 의미에서 인도의 새로운 미래에 대한 천명일 것이다. 하지만 이름만으로 역사의 흔적이 지워지거나 도시의 정체성이 새로워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이곳은 어떤 곳일까?

봄베이를 돌아다니며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먼저 밤거리의 풍경. 빅토리아 터미누스(Victoria Terminus)* 역사(驛舍)를 비롯해 발치에서 우러러보듯 건물을 밝힌 조명 속에 드러난 도시의 윤곽은 무척 아름답다.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영국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식민지 시대에 세워진 유럽풍 건축물이 많았고, 백년도 훨씬 넘은 유서 깊은 건물들이 흔했다. 이실직고 말하자면 인도가 아닌 것 같은 그런 모습에 무척 매료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침이 되니 그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빅토리아 터미누스(Victoria Terminus)-1878년 완공된 건물로 1996년 CST(차트라파티 쉬바지 터미누스)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세기 고딕 양식으로 유명하다. ‘차트라파티 쉬바지’는 무굴 제국에 맞서 싸운 17세기 중인도의 힌두왕이다. 이 건물은 2004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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뭄바이의 화장을 지운 민낯은 충격이었다.



간밤의 모습은 어둠속 신기루에 불구했다. 적나라한 모습이 눈앞에 드러났다. 전깃줄이 이곳저곳 무질서하게 널려 있었고, 칠이 벗겨지고 갈라진 도심의 건물들은 피골이 상접해 보이기까지 했다. 잔뜩 꾸민 채 45도 얼짱 각도에서 셀피(Selfie)를 찍듯 낡은 건물들은 화장발이었던 셈이다. 화장을 지운 민낯은 충격이었다. 올드 델리 구시가지 찬드니 쵸크의 영국풍이랄까? 오랜 시간 보존되었다기 보다는 겨우 숨통을 유지한 흔적이 역력했다. 건물 위로 빼곡한 간판들, 그 안으로 수시로 드나드는 사람들만이 이 건물들이 여전히 살아 기능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생체 신호였다.

또한 이곳의 교통 사정은 생지옥에 가까웠다. 봄베이는 여느 인도 도시들과는 달리 오히려 릭샤가 드문 곳이었고, 2층 버스나 택시의 모습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오랜 건물들 사이에 끼어 확장될 수 없는 도로였다. 거리 위로 차량은 빼곡한데 오랜 도시 계획의 한계를 보여주듯 비좁은 도로는 그야말로 점입가경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인도 최악의 교통 체증이었다.

물가도 살인적이었다. 오일 머니의 영향이라고도 하는데 현지인의 주거비용도 상상을 초월한다. 여행객의 입장도 마찬가지여서 숙박비가 꽤 부담스럽다. 해안가 변두리의 숙소를 정했는데 어느 도시에서보다 많은 비용을 들였지만 숙소는 누추한 편이었다. 객실 사이의 천장이 뻥 뚫려 있고, 온수를 바구니로 길어 왔다. 그래도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본 셈이니 불편해하기보다는 그 상황 자체를 즐기기로 했다. 옆방 외국인이 코를 참으로 찰지게 골았던 기억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해안가를 산책하며 본 모습이었다. 숙소에 나와 인도문(Gateway of india)* 쪽으로 걷다가 인도 최고급 호텔인 타지마할(Taj Mahal) 호텔**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이 호텔이 생긴 배경 등 재미있는 일화가 얽힌 곳이라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로비에서부터 휘황찬란했고, 그 안의 인도인들은 화려한 의상과 장식으로 치장해 거리 밖의 사람들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호텔 앞에는 한국에서도 보기 드문 고급 스포츠카들이 가득 주차되어 있었는데 일찍이 인도 어디에서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봄베이가 정말 부유한 곳이라더니 과연 실감이 났다. 순간 나는 코를 킁킁거려 오랜 여행을 암시하는 나 자신의 체취를 맡아보았고, 구경도 좋지만 조금 부끄러워져 서둘러 호텔을 빠져나왔다.

*인도문(Gateway of india)-영국의 왕 조지 5세 부부의 인도 방문을 기념하며 1911년 건축되었다.
**타지마할(Taj Mahal) 호텔-파르시 상인 출신으로 타타그룹의 창업주 JN 타타(1839~1904년)가 외국인용 호텔(왓슨스)의 입장을 거부당한 것을 계기로 바로 그 앞에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세웠으며 1903년 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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뭄바이 해안가를 산책하며.


호텔에서 불과 몇 백 미터를 걸어 나오니 손을 벌리고 구걸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인도문에서 방향을 틀어 시계탑이 있는 뭄바이 대학 방향으로 걸으니 살풍경한 옛 건물들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봄베이에는 낡음과 새로움, 풍요와 빈곤이라는 극명하게 다른 두 얼굴이 버젓이 공존하고 있었다. 여느 도시보다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봄베이가 부유할수록 두 얼굴의 차이는 더 커 보였다. 식민지 시대에 탄생한 화려한 도시, 인도인들은 앞으로 이곳을 어떠한 모습으로 만들어나갈 것인가.

봄베이의 또 다른 이력이 떠올랐다. 안타깝게도 2008년 빅토리아 터미누스와 타지마할 호텔 모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뭄바이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살람 봄베이, 반어적인 영화의 제목만큼이나 봄베이는 평화롭지 못한 것이다. 2008년의 테러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이슬람 테러 단체의 행위였지만 그 외에도 봄베이는 이제껏 수차례 그에 못지않은 암담한 사건이 발생해왔던 곳이다. 다문화 사회를 기반으로 발전한 도시지만 경제적 성장과 함께 점차 많은 인구가 도시에 몰려들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뭄바이 테러-2008년 11월 26일 파키스탄 테러조직 ‘라쉬카르 에 타이바’의 5개조 10명의 테러범이 타지마할 호텔, 빅토리아 터미누스, 트라이던트 오베로이 호텔, 레오폴드 카페 등 장소에서 서양인들을 타깃으로 테러를 벌여 195명 사망, 350명의 부상자를 낳은 테러 사건이다.  

농촌 이주민들이 몰려들면서 도시의 기반 시설이 인구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다. 지금도 도시 인구의 태반은 물과 전기가 부족한 상황에 처한 것은 마찬가지다. 여기서 봄베이가 위치한 마하라슈트라 주 출신의 사람들 사이에 지역주의적 성향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무슬림과 非마하라슈트라人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풍토가 형성되었다. 다문화 사회의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1992년 ‘아요디야 사태*’로 갈등이 분출되며 이후 폭동과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인도의 富가 모인 곳, 인구가 늘어나고 슬럼화된 도시에서 범죄 조직이 암약(暗躍)했음은 물론이다. 봄베이의 마피아는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히는 범죄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각종 이권은 물론 정치적인 폭동과 테러의 배후에도 연루되었다는 說은 공공연한 얘기다.

*아요디야 사태-아요디야 유적지를 두고 힌두와 무슬림이 서로 성지라고 주장한 것에서 촉발되어 2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전국적인 폭동으로 이어졌음은 물론, 이후 지속적인 종교분쟁과 보복, 테러로 이어져왔다.


간디가 떠난 항구

대낮, 택시를 타고 활 모양으로 꺾인 마린 드라이브(Marine Drive)의 해안로를 달리며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축축하게 차오른 땀을 식혔다. 현지 주민들의 더위를 식히고 있는 이곳을 지나치며 멀리 수평선을 향해 대형 선박과 군함들이 눈에 들어왔다. 봄베이는 연 평균 기온이 30도*에 육박하며 겨울철(11월~2월)에도 낮 기온이 40도에 육박할 때가 있을 정도로 무덥다. 반면 밤에는 일교차가 심해 무척 쌀쌀해진다. 날씨가 오락가락하니 봄베이의 부정적인 면이 더욱 부각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모습 그대로가 인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봄베이는 인도의 축소판 같았다. 아픈 곳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것도 애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0~2월 최고 기온 30~33도 (최저 17~23도), 3~5월 최고 기온 31~33도 (최저 21~26도), 6~9월(우기) 최고 기온 29~32도 (최저 24~26도)로 겨울철 일교차는 심하고, 낮 기온은 대체로 30도를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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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간디 기념박물관(Ghandi Memorial Museum), 마니 바반(Mani Bhavan). 간디가 처음으로 물레를 돌린 곳이기도 하다


그러는 사이 또 다른 얘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식민지 시대 경제와 교역의 요충지, 봄베이는 영국인의 흔적이지만 그들만의 도시는 아니었다. 1885년 인도 최초의 정당인 INC(Indian National Congress, 인도 국민 회의)가 최초로 소집된 곳이 봄베이였다. 향후 인도 독립 운동에 상당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또한 마하트마* 간디(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1869~1948)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유학을 다녀와 뒤늦게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되었으며, 그의 인생에서 새로운 전기(轉機)를 찾아 다시 남아공으로 떠났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여기에는 당시 간디가 머무르던 자택도 남아 있는데 또 하나의 간디 기념박물관(Ghandi Memorial Museum), 마니 바반(Mani Bhavan)이 바로 그곳이다. 그가 처음으로 물레를 돌린 곳이기도 하다.

*마하트마(Mahatma)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의미로 시인 타고르 지어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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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는 집안 대대로 수상을 지낸 명문가* 출생이다. 간디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면, 절대적인 지지 만큼이나 비판도 존재한다. 지주, 자본가, 상층 카스트 등 기득권을 대변했다는 시각이 있고, 스스로 지지했던 농민 시위가 영국의 폭력 진압으로 초리초라(Chauri Chaura) 농민 봉기로 확산되자 중단을 촉구하며 불복종 운동을 철회했던 반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립을 보장해주겠다는 영국의 회유에 동조하며 인도의 참전을 지지해 비폭력 사상의 모순점을 노출하기도 했다.

*간디는 인도 서부의 항구도시 포르반다르의 명문가에서 출생했다.

그의 사생활에 대한 몇 가지 불편한 이야기들도 전해진다. 당시 상황과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 인물 평가가 필요하겠지만, 아마도 단순한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우상화된 까닭에 그런 비판에서 더욱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의 성공은 인간적인 결함으로부터 밑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당시 풍습에 순응해 13세의 나이로 조혼*을 했고, 성욕에 빠져 아내와의 잠자리를 탐하다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기도 했다. 영국처럼 강해지기 위해서라며 채식을 버리고 육식을 취하는 등 경험을 통해 각성의 계기를 마련한다. 자신도 자서전의 제목을 ‘나의 진리 실험이야기’라고 했듯 간디는 스스로 성공과 실패라는 인생의 실험을 거듭했다.

*간디는 7세에 처음 약혼했고, 약혼녀들이 요절해 세 번째 약혼자와 13세에 혼인했다.

간디는 집안의 의지에 따라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변화된 사회에서 유학파 출신 변호사는 되어야 정부 요직을 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유학을 가는 이유는 특별할 것이 없다. 하지만 당시 상황이 좀 달랐다. 당시 힌두교에서는 유학이 부정적이었는데 종교적 전통과 관습상의 문제가 있었다. 때문에 유학을 결정하자 카스트의 일부 원로들는 이에 반발하여 그를 퇴출하다시피 했다. 유학에서 돌아온 간디는 변호사로서 큰 수완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처음에는 법정에서의 변론조차 힘들어했던 그였다. 하지만 인도로 돌아온 그는 영국인 관리에게 모욕을 당하고, 남아공으로 건너가 차별을 겪으면서 점차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마하트마, 초인은 아니었다.

한편, 간디에 대해 얘기하면 사히드* 바가트 싱(Bhagat Singh, 1907~1931)이라는 인물을 언급할 필요성을 느낀다. 봄베이의 나리만 포인트(Nariman Point) 근처에는 ‘사히드 바가트 싱 거리’가 있다. 간디만큼이나 그의 인생을 되짚어 보는 것은 흥미롭다. 어린 간디가 당시의 전통에 순응했던 것과 달리 바가트 싱은 결혼을 종용하는 집으로부터 출가해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3세의 짧고 굵은 삶을 살았는데 그런 까닭인지 인도 아동들을 위한 바가트 싱의 도서를 살펴보니 다소 신화적이기까지 했다.

*사히드(Shahid)는 순교자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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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트 싱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소카 왕 등 역사적 인물의 연극에 심취했고, 결혼이 자신의 길에 방해가 된다며 독립 운동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그가 실제로 얼마만큼 조숙했는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그가 일찌감치 독립 운동에 투신한 것만은 사실이다. 처음에는 그도 카디(Khadi)* 운동 등 평화적 운동 노선을 따랐다. 하지만 영국인들의 무자비한 시위 진압을 목격하면서 비폭력 운동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카디(Khadi) 운동-외국의 옷과 책 등 물건을 태우는 운동이었다.
**간디는 바가트 싱의 행동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라호르의 시위에서 정치 지도자 랄라 라지파트 라이(Lala Lajpat Rai, 1865~1928)*가 경찰의 무리한 진압으로 사망하자 이 사건을 계기로 비가트 싱은 당시 책임이 있던 영국인 경찰 서장의 암살을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경찰 살해범이 된 그는 도주자의 신분이 되었다. 시크교 출신이기에 이발과 면도를 터부시 했지만 그런 불문율을 깨고 변장을 한 덕분에 그는 추격을 뿌리치고 무사히 탈주할 수 있었다. 양복 차림에 페도라(중절모)를 쓴 변장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이후 영국의 악법 제정에 항의해 의회에 폭탄을 터뜨렸고, 그는 ‘혁명이여 영원하라!(Inquilab Zindabad!)’는 말을 남기며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랄라 라지파트 라이(Lala Lajpat Rai)-INC 당원으로 인도 독립 운동가로 펀잡의 사자(Lion of Punjab)로 불렸던 인물이다. 인도 대책 평가 회의의 위원회 구성에서 인도인 대표가 포함되지 않았던 것과 관련 시위에 앞장섰다가 경찰의 구타로 사망한다.
**바가트 싱은 경찰 서장인 John Scott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오인하여 부관이었던 John P. Saunders가 피살된다.

당시 폭탄 테러에서 희생자가 없었던 것은 바가트 싱의 의도적인 계획이었다고 하는데 아무튼 그는 이미 잡힐 각오를 한 상태였다.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총살을 요구했지만 청원은 기각되었고, 그는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유혈 투쟁을 벌인 바가트 싱은 인도 독립사에서 특별한 인물로 기억되며 수많은 인도인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그는 타협과 순응이 아닌 강함에 대한 인도인들의 자부심인 것이다.

불나방 같은 열사의 투신과 긴 인생에 걸친 사상적 투쟁은 독립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추구한 인물의 대조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바가트 싱은 급진적인 성향의 사상가로도 알려졌다. 반면 마하트마 간디는 비폭력의 성자로 추앙받지만 무슬림을 포용하려던 중 힌두 급진단체에 의해 암살되고 만다. 굴욕의 역사 속에 피어난 도시, 테러의 흔적이 짙게 남은 봄베이에서 ‘순국자’ 바가트 싱과 테러로 생을 마감한 ‘마하트마’ 간디를 동시에 떠올리는 기분은 묘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냐는 것을 떠나 화려한 ‘혼혈’ 도시 이면에 되새겨야할 비극으로 절절하게 와 닿았다.

두 인물을 동시에 보는 것은 인도를 바라보는 균형적인 시각에 대해 되새기게 만든다. 언제나 어느 한 측면으로 판결을 내리면 또 다른 한 측면이 나타나 재심을 소구하는 곳이 인도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든다. 결과론적이지만 간디보다 거칠고 바가트 싱보다는 부드러운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가 최종 생존자였다는 것이다. 네루 자서전은 아홉 번의 옥살이를 통한 그의 기나긴 투쟁과 기다림을 기록하고 있었다. 독립 이후 대대손손 정치 명문으로 자리잡아온 것은 네루家였다.


춤추는 영화관

봄베이에 대해 풀어낸 이야기들은 밝지만은 않다. 그래서 이 도시에는 어떤 희망이 있는 것일까, 이토록 치열한 도시에 왜 무수한 사람들이 몰려들까 궁금해졌다. 그러자 갑자기 한 편의 발리우드(Bollywood) 영화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인도의 대표적인 여배우 아이슈와라 라이 주연의 영화 <딸(Taal)>이었다. 시골에서 상경해 배우의 꿈을 이뤄가는 모습이 아직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봄베이는 매우 드라마틱한 도시다. 배팅 액수가 클수록 짜릿함을 느끼는 도박과도 같다. 이는 또 하나의 ‘봄베이 드림’인 ‘발리우드 드림(Bollywood Dream)’에서 두드러진다. 발리우드를 동경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출세와 성공을 꿈꾸거나 영화 산업의 일자리를 쫓아 봄베이를 찾아온다.

발리우드란 무엇인가? 인도는 언어와 지역별로 다양한 시네마 컬처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중 봄베이를 중심으로 힌디어 및 영어 영화권을 지칭하는 것이 바로 발리우드다. 발리우드는 인도 영화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데 한마디로 전국구라고 볼 수 있다. 겨우 영화가지고 그러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인도라면 얘기가 틀리다. 이는 금욕적인 종교 관습과 경쟁력과 소비 능력에서 기인한다. 술을 전혀 안마시고 여행을 다니지 못한다면 딱히 무엇을 할지 생각해보면 된다.

인도에서 살면서 어지간히 많은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인도인들의 대중문화는 곧 영화라고 해도 무방하다. 평균 소비 수준에서 일상 속에 인도인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 컨텐츠로는 그에 필적할 만한 것이 아직은 없다. 인도 영화 산업 규모는 세계 1~2위를 다툰다. 가볍게 얘기하자면 규모적으로 1위에 가깝고, 질적으로는 미국 할리우드에 이은 2위에 가깝다. 인도에서는 연간 1000여 편의 영화가 쏟아지고 연간 관객 수는 30억 명에 육박한다. 발리우드만 연간 200여 편을 제작하고, 그 심장이 이곳 봄베이다. 봄베이가 위치한 마하라슈트라 주는 최대 규모의 영화 제작 인프라 등 지역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적인 지원 아래 성장해왔다. 누구나 봄베이를 동경하기 마련이다.

발리우드 영화의 특징은 간단하게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인도 영화에서 ‘흥(興)’의 표현으로 갑자기 춤과 노래가 등장하는 뮤지컬 요소가 그 첫 번째 특징이다. 다음으로 인도의 상업영화는 다양한 장르를 한 작품에 아우르는 특징이 있는데 이를 일컬어 ‘맛살라인도의 혼합 향신료를 빗댄 표현 무비’라고도 지칭한다. 이는 인도인들의 취향이라고 볼 수 있다. 발리우드 맛살라 무비의 대중적 영향력은 대단하다. 히트작의 영화 음악이 곧 인도의 최신 인기 가요로 생각하면 되고, 배우의 옷차림이 곧 유행하는 패션이라고 보면 된다. 국민배우 아미타브 바찬이나 <세 얼간이>로 한국에 알려진 아미르 칸과 같은 배우는 문화계의 명사(名士)다. 이러한 배우들은 시사 프로그램을 제작, 출연할 정도다. 때로 선거 운동 등 정치에 관여하고 오피니언 리더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문화적 파급력이 큰 것이다. 우연히 찾은 영화관에서 그 의미를 체감할 수 있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 앉자 곧이어 한 줄기 희망처럼 새하얀 빛이 스크린을 향해 비춰졌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낡고 오래된 단일 상영관이었다. 머리 위로 빛이 내려와 마치 꼭두각시 인형극을 하듯 눈앞 스크린 한가득 이국의 무희들이 군무를 추며 노래하는 모습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영사기를 돌리는 영화관이었고, 인도의 영화 배급 시스템이 디지털화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지금은 인도 역시 모든 극장이 점차 멀티플렉스로 바뀌어가는 추세인데 이런 곳을 경험할 수 있었다니 나는 꽤 운이 좋았던 셈이다.

스크린 속의 배우들은 알아들기 어려운 속도로 대사를 읊조리고 주위는 생소한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영화관은 어두운데 까무잡잡한 관객들의 실루엣은 더욱 짙은 어둠을 드리웠다. 혹시 피부색이 밝은 내가 그들의 영화 감상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영화는 당시 초대형 히트를 기록하고 있던 맛살라 영화였고, 전반부는 로맨틱 코미디물로 가볍고 유쾌한 내용이었다. 낯선 타국의 영화관은 웃음으로 가득 찼다. 이윽고 영화는 중간 휴식 시간을 맞았다. 인도 영화는 대부분 러닝 타임이 세 시간 이상이라 무척 길다. 상영관에 불이 켜지자 인형술사는 꼭두각시들을 머리 뒤로 거둬들였고, 대신 인터미션(intermission)이라는 글자가 화면 가득 떠올랐다. 현지 관객들은 기다린 듯 너나 할 것 없이 화장실로 향했다. 또 다시 웅성웅성, 따라나서기에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의 인파였다.

휴식 시간이 끝나자 다시 극장 안은 어두워졌다. 쉬는 시간동안 진귀한 것을 발견한 듯 몇몇 관객들이 나를 힐끔 바라 보며 키득거렸다. 역시 방해가 되는 걸까? 나도 미소로 응했다. 하지만 곧 영화관은 정숙해졌다. 영화의 내용은 로맨틱 코미디에서 극한의 멜로로 이어지며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어릴 적 친구와 헤어지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고 찾아 나선다는 내용이었다. 어느새 정색한 관객들은 삐걱거리던 객석의 소음 대신 옷깃을 스치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남녀노소할 것 없었다. 모두 영화에 몰입한 순간이었다. 감수성이 충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주인공들이 재회하고 영화는 슬픔과 웃음이 교차하며 관객을 들었다놨다하더니 장대한 뮤지컬로 바뀌어갔다.

영화는 해피엔딩이었다. 대사를 몰라도 주위 관객들의 몸짓을 통해 충분히 그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인도 영화는 일종의 바디 랭귀지 같았다. 클라이맥스로 이어져 영화 속 남녀주인공의 사랑이 이루어지자 기쁨에 겨운 관객들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곧이어 마치 뮤지컬과 같은 춤과 노래가 스크린을 메우자 갑자기 관객들이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손을 들고 몸을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충격적이었다. 혼자 앉아 있기 어색해서 어중간한 자세로 함께 일어났다. 술자리에서 혼자 물 잔을 홀짝이는 느낌이었다. 기립 박수를 치는 것 외에는 따라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까마득한 실루엣들이 어둠 속 가득 들썩이는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영화관도 등급에 따라 좌석이 구분되지만 이 순간만큼은 어떠한 제약도 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인도인들의 삶에서 ‘흥(興)’이란 무엇인지 체감할 수 있었다. 희망이라는 것이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딸(Taal)의 뜻은 ‘리듬’이다. 그 리듬이 몸을 맡기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낙(樂)’인 것이다. 그렇다면 봄베이를 향하는 인도인들의 희망이 이해되었다.


첫 여행의 마침표

첫 인도 여행의 마지막 도시 봄베이는 두 번째 여행을 암시하고 있었다. 착잡하면서도 눈길을 뗄 수 없는 곳이 봄베이였고, 그 어떤 곳보다도 혼란스러웠지만 더욱 인도다웠다. 각기 현란한 광채를 발했던 인도 남북의 도시들, 그곳들을 거치며 갖은 진귀한 풍경들에 도취되었고, 인도와 인도인들을 미약하게나마 알아가는 사이 때로는 그 경이로움에 환희하며 찬탄을 마지않았고, 때로는 그 이면의 모습에 실망하며 끝 간 데 없는 피로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꽤 긴 시간 여행을 했지만 인도는 한 번에 모두 담아내기가 버거웠다. 아마 너무 많은 모습을 한꺼번에 본 탓도 있을 것이다.

인도는 대륙에 대한 나의 로망을 자극했다. 욕망을 절제하는 종교가 뿌리를 내린 곳에서 반대로 나는 걸신이라도 들린 사람마냥 인도에 대한 ‘식탐’에 빠져들었다. 소화불량이지만 그 포만감이 싫지만은 않았다. 북인도의 화려한 유적들, 남인도를 향하며 접한 대륙과 대자연의 풍경이 나를 사로잡았다면, 어디를 가더라도 빽빽한 대륙인들은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기차 여행에 지치고, 마드라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많은 인파와 대도시에 대한 기피증도 생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힘이 이끌리듯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봄베이는 그 최종 목적지였다. 하지만 봄베이는 마침내 끝이 났다고 훌훌 털어버리며 만족스러워할 수 없는 곳이었다.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고, 인도에 대한 여운과 아쉬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그랬다. 어쩐지 아쉽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런 것을 보면 참 좋은 여행이었다.

공항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영국의 마지막 군대가 봄베이를 통해 철수했다. 무수한 사람들이 이곳을 통해 드나들었고, 나 역시 이곳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봄베이는 인도 여행의 대미를 장식한 출구다. 하지만 한번 맛본 인도는 잊기 어려워 보였다. 마침표를 쉼표로 바꿔야 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기필코 인도 최남단에 가봐야 할 것 같았고, 이제 인도 대륙의 종단을 꿈꿀 차례였다.


 

-글쓴이: 鄭仁采 inchaijung@mac.com

[ 2015-05-08, 17:3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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