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변화’를 갈망한 인도인들의 선택
印度 이야기(11) / 나렌드라 모디가 총리에 오를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

鄭仁采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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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라트에서의 표류

이미 목적지에 도착했어야 할 시각이었다. 경유지 홍콩 쳅락콕 국제공항을 어렵사리 이륙한 에어 인디아 소속 홍콩發 델리行 여객기는, 예정 시각보다 반나절 연착된 다음날 아침 무렵 도착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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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라트 부즈의 염전 全景



하지만 잠자리처럼 인도 상공을 맴돌던 비행기는 또 다시 기상악화로 발이 묶였다. 하강하며 낮아지는 고도에 잔뜩 기대의 무게중심을 실었건만 비행기는 델리가 아닌 구자라트(Gujarat)州의 아마다바드(Ahmedabad) 공항에 임시 착륙했다. 발을 동동 굴리던 승객들도 이젠 자포자기의 심정이었지만 담요를 덮어쓰고 계속 잠을 청하기에도 엉덩이가 욱씬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인도 여행에 요긴한 담요를 접어 짐가방 속에 구겨 넣었다.

마치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야 아차하며 뒤늦게 선물을 구입하는 듯한 그런 의뭉스런 동작이었다. 일교차가 심한 겨울철 인도 여행에서 담요는 그만큼 요긴하다. 델리 공항의 심각한 안개로 연착된다는 설명이 전부였는데 무한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답답한 승객들을 위해 비행기의 탑승구를 열어 바람을 쐴 수 있게 해준 게 그나마 ‘인도(印度)’주의적 조치였다. 그것도 활주로 한가운데였다.

수동식 탑승 계단 밑에는 무장한 軍人과 몇몇 항공사 직원들이 지키고 섰고, 굽은 허리를 펴기 위해 내려온 승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렇게 여섯 시간 정도였을까? 새로운 21세기, 다시 인도 여행의 기회를 잡은 나는 바뀐듯 전혀 바뀌지 않은 인도로 가는 길목에 정체(停滯)되어 있었다.

아마다바드는 구자라트 주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도시로 한때 구자라트의 *주도(州都)였다. 인구 6000만의 구자라트는 북쪽으로 파키스탄과 접경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1600 킬로미터의 해안이 이어져 있다. 원래 뭄바이(舊 봄베이)가 위치한 마하라슈트라 주와 함께 봄베이 주에 속했었으나 언어적인 문제로 1960년 분리되었는데 다시 말해 구자라트는 구자라트語(Gujarati)를 쓰는 사람들의 지역이다.

*현재 구자라트의 州都는 간디나가르(Gandhinagar)다.


이곳은 부즈(Bhuj)의 광활한 소금 사막으로 유명한데 바다의 밀물을 이용한 대규모 염전(鹽田)이 자리잡고 있다. 염전에서 나오는 소금은 우리가 아는 소금과 달리 조약돌 크기만 하며 이를 다시 부수어 소금으로 만들어 낸다. 그 밖에 구자라트는 인도에서 가장 뛰어난 직물과 자수품으로도 유명하며 포르투갈의 흔적이 남아 아기자기한 디우(Diu)가 위치한 곳이다. 디우는 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양지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구자라트의 지리적 위치는 마치 인도라는 수목(樹木)의 나이테를 보여주는 것 같다. 아리안의 유입, 이슬람의 침략과 제국 건설 그리고 식민지 시대를 거쳐 독립에 이르기까지 북인도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구자라트는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인도 지도자의 산실이라고 할 만하다. 대표적으로 *마하트마 간디와 *사르다르 발라바이 파텔(Sardar Vallabhbhai Patel, 1875~1950)의 고향이며 우리가 만나는 인도인들 중 파텔이라는 姓을 가졌다면 바로 구자라트人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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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간디의 자서전은 구자라트語로 쓰여졌다.
*인도의 정치가 및 독립 운동가로 INC(Indian National Congress)를 이끌었으며 부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독립 과정에서 500여개의 토후국을 인도로 통합하는데 기여했다. 사르다르(Sardar)는 우두머리(chief)를 뜻한다.


시대적으로 동 떨어진 인물이지만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 1950~) 역시 또 한 명의 구자라트人 정치가다. 파텔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온 그는 원래 가난한 *짜이왈라 출신으로 선거 선전원으로 시작해 정치에 입문했다. 전임자의 건강 문제로 공석(空席)이 된 구자라트 총리직에 임명되었고, 2014년 16대 총선(로크 사바)을 통해 마침내 인도 총리직에 오르게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파텔의 생일과 前 총리 인드라 간디가 암살된 날짜(10월 31일)는 같다. 통상적으로 인드라 간디의 추모식에 참석한 뒤, 파텔의 생일을 기념했지만, 모디 총리는 관례를 깨고 인드라 간디의 30주년 추모식(2014년)에 대신 파텔의 생일 기념하는 행사(통합 행진)에 참여하기도 했다.
*짜이왈라란 짜이 판매 장수를 뜻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한참 멀었다. 지금까지 그는 *구자라트 학살 당시 무슬림 학살 사태를 방조 및 방관했다는 비난을 받았던 반면, 공격적인 개혁을 통해 단시간 만에 구자라트의 경제 성장을 주도하며 총리에 올랐다. 개혁의 아이콘으로 현재 인도의 부패 척결과 경제 개혁을 이끌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1992년 아요디아 사태 이후 힌두-무슬림 간 갈등은 지속되고 있었다. 2002년 구자라트州 고드라 역에서 열차 화재로 58명이 사망하자 주정부의 조사 위원회는 무슬림의 방화로 지목하면서 무슬림에 대한 집단적인 보복 학살을 부추겼다. 재조사 결과 열차 방화에 대한 진실은 미궁에 빠졌다.



변화와 개혁에 대한 기대

내가 구자라트의 공항에서 표류할 때는 아직 그가 두각을 나타내기 전이었다. 16대 총선에서 인도 국민들은 네루-간디 집안의 새로운 황태자 라훌 간디 대신 불도저같은 개혁가를 택했다. 인도인들이 전통과 명분이 아닌 변화와 개혁을 선택했다는 것은 주목해야 한다. 일찌감치 달아올라 인도 역사상 최대 규모였던 선거 열기는 뜨거웠다. 그만큼 변화는 불가피해 보였다.

부패와 비리로 비난받던 인도 제1당 INC(Indian National Congress)가 어느 정도 선방해내느냐가 관건이기도 했다. 과거 패배 속에도 어느 정도 지분을 유지해온 전통의 정당이었다. INC를 중심으로 한 연합과 BJP의 연합 간의 대결에서 어느 정도 지분만 유지하면 막후 이합집산을 통해 세력 균형을 맞추는 것이 인도 정당 정치의 묘미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 속에 변화와 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강한 힘을 받지 못하고 유야무야 되고 마는 것이다. 최대의 민주주의란 어떤 정책을 공격적으로 추진하기에 이해관계가 많다. 이것이 바로 중국보다 더딘 *‘만만디’(중국어로 慢慢地) 인도의 문제다.

*중국이나 인도 모두 각기 이해 관계나 필요해 의한 만만디이기는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난 선거 결과는 BJP(Bharatiya Janata Party)의 승리라기보다는 모디의 일방적인 승리였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카스트나 小집단 단위에 대한 로비를 통한 선거가 아니라 SNS가 큰 영향을 끼친 선거이기도 했다. 인도인들도 흘러가는 국가의 상황과 정보에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民心이 직접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인도를 모바일 사회로 만드는 것은 지난 10여 년 간 불가항력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사실 부패의 측면에서는 INC나 과거에도 정권을 잡은 바 있던 BJP는 크게 다를 바 없다. ‘변해봐야 얼마나 변할까?’라는 정권교체에 대한 내외부의 회의감은 여기서 출발한다. 다만 이번에는 인도 유권자들이 특정 인물에 크게 힘을 실으며 역사상 유례없는 대승(大勝)을 안겨주었다는 면에서 다르긴 하다. 6주에 걸쳐 진행된 투표와 개표 과정이 끝나자 인도인들은 새로운 변화에 대한 기대로 충만했다.

현장에서 목격한 그 분위기는 이렇다. 마침 인도에 머무르며 퇴근길을 직접 운전하고 있었는데 경찰이 곳곳에 배치되어 사방의 길을 통제하고 있었다. 도로 위에는 끊임없이 경적을 울리는 트럭(마침 인도 트럭의 후미에는 ‘Blow Horn’ 또는 ‘Horn Please’라고 적혀 있었다)에 올라탄 인도인들이 깃발을 흔들고 춤을 추는 등 광란에 가까웠다. 외곽의 위성도시가 이러한데 델리는 더했을 것이다. 나는 가급적 거리를 유지한 채 그 뒤를 따르다가 서둘러 우회로로 빠졌다. 

또 다른 인도인들, 무슬림의 입장은 아무래도 미묘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무래도 정치와 종교가 뒤섞인 화두(話頭)였던 셈이니까 말이다. 변화는 원하지만 원한(怨恨)은 남아 있다고 해야 할까? 설사 심정은 복잡해도 두려워해야할 만큼 극단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란 게 일반적인 예상이었다.

묻기에는 다소 곤란한 질문이었지만, 외국인의 천진함과 무지를 빌려 주변의 무슬림 직원에게 이에 관해 물어보았다. 당시 주변에는 힌두교 직원들이 태반이었는데 그의 대답은 어땠을까? ‘No Problem!’ 그것도 크고 단호한 목소리로 아무 문제없다고 답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자신도 모디를 지지한다’고 덧붙이는 것은 매우 인상 깊었다. 그가 실제로 투표한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서명 지옥

인도 여행의 장점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생각할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종교와 철학에서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까지 실로 다양한 화두들이 머릿속에 맴돌 수 있겠지만 나는 당장 눈 앞에 펼쳐진 불만으로 벅찼던 게 사실이었다. 그만큼 자기 앞가림, 실수로 쓴 획을 지우고 끊임없이 고쳐쓰기를 반복하기에도 바빴다. 도대체 인도는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도대체 몇 년 전과 변한 게 무엇인가?

승객을 주워담은 비행기가 서서히 활주로로 움직이고 있었다. 여행의 시작부터 내 인내심은 시험대에 올랐다. 뭘 좀 안다고 자만했더니 금세 더한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너무 자신만만했다가 힘이 빠지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첫 여행에서 인도의 매력에 빠진다면 두 번째 여행에서는 인도의 본질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구자라트에서의 표류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인도에 관련되다보면 아직 여러 가지 고충이 많다. 델리와 뭄바이로 제한된 항로와 일상적인 연착 등 교통의 불편도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한 문제도 있다. 비자 발급 절차만해도 수시로 바뀌는 것이 문제다. 관광 비자의 경우 최근 도착비자가 생겼다고 하지만 아직 보완해야할 부분이 있다. 인도 유람보다 사업적인 방문은 더하다. 취업 비자 등은 까다롭고 복잡한 편이다.

여기까지도 괜찮다. 現地에 있다 보면 기막힌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가령, 현지에 회사를 세운다고 하자. 설립 과정을 밟으며 과도한 문서화로 엄청난 서류 작업에 시달려야 한다. 거기다 융통성 없는 양식이라든지 각 관계 부처 간의 불필요한 혼선은 상당히 괴롭다.

외국 기업이 현지에 진출하는 것은 인도 정부도 바라는 일이다. 경제, 고용 증진 그리고 기술 이전 등 여러 가지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 차원의 우호적인 접근과 실제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르다. 어렵사리 투자를 결정했는데 그들의 편의만 고수하는 것은 안타깝다. 가끔 서류 한 장 통과시켜주는 것에 감사해야하는 것인지 허탈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관공서에 서류를 제출하던 중 재미있었던 일이 많다. 외국인인데도 서류 상에 부모의 신상 정보를 일일이 기입하고 날인까지 해야 하는데 부모님의 여권 사본이 필요하고, 본적까지 영어로 적어내야 한다. 모든 일에 집안과 출신을 기재해야 하는 것은 법적으로는 철폐된 신분과 계급이 인도 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게다가 현지인들이라면 이해하더라도 외국인까지 똑같이 적용한다는 것은 문제가 많다.

손님의 신분을 확인하며 부모까지 들먹이는 것인데 정작 부모님은 현지에서 나를 보증할 수 없다. 국제화 시대에 맞지 않음은 물론, 비합리적인 형식 절차를 고수하며 비롯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공증의 문제도 있다. 진행 과정에서 모든 서류를 영문 서류로 만들어 공증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각 증빙 자료를 인도의 요구 조건과 서식에 맞추다보면 애매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번역본은 때로 약간 변경해 공증(公證)을 요청해야하는 융통성이 필요한데 사실 공증 서류는 원본과 번역본이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 당연하지만 국내의 공증 기관에서는 속사정을 알아도 공증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한편 인도 대사관과 관공서 측은 한발도 양보하지 않는다. 각자의 요령이 필요한 부분이다.

인도의 관공서를 찾아가보면 서류 파일이 얼마나 많은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 전산화가 진행된다고 해도 과연 언제쯤 마무리될지 미지수다. 신기한 점은 환경이 매우 열악한데도 오래된 자료들도 매우 잘 보관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개인 정보는 물론 오랜 회계 자료도 귀신처럼 서류철에서 찾아내 확인하는 것이다. 이렇듯 인도는 서류 문화인데 많은 서류 작업도 비효율적이지만 문제는 그 양식이 상황에 따른 내외 구분 없이 같다는 것이다. 서류를 다루는 공무원들도 관리자, 심사인과 보관자 등등 그 역할이 세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각자 자신의 구분된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쉽사리 바뀌기도 어려운 이유다.

한편, 이런 업무를 진행할 때는 현지 직원의 융통성이 중요하다. 어차피 외국인이 모든 과정을 직접 수행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다만, 현지인의 입장에서는 평생 당연하게 여겨온 부분으로 수동적으로 대처하기 쉽고, 이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일이 곤란해질 때가 있다. 능동적으로 적절히 순발력을 발휘하는 직원이 중요한 이유다. 차라리 세부적인 일들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도 방법이기는 하지만 이 경우에는 필시 본사(本社)와의 호흡과 소통 상에 간극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오랜 시간 인도에서 사업을 해온 사람들의 말로는 만약 변화가 필요하다면 인내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직원 교육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물론 습관을 바꾸는 것처럼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서류 작업의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서명’이다. 법인 설립 업무를 진행한 경험이 있는데 거의 매 페이지마다 빠짐없이 서명 날인을 해야 했다. 사본(寫本)도 유효하려면 서명을 해야 한다. 서명까지 복사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立證)하기 위해 파란색 펜으로 서명을 하기도 하고, 인쇄된 부분과 여백 사이를 가로질러 서명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에 직인을 찍거나 서명을 해야하는 경우도 많다. 시작할 때는 마치 유명 연예인이 되어 팬사인회를 연 것 같지만 실상은 한자(漢字) 연습장을 채워나가는 기분이 든다. 때문에 인도에 간다면 아주 간단한 서명을 하나 준비해놓는 것이 좋다. 어쨌든 自國의 규칙이 외국인들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되면서 손님에 대한 편의는 그다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부분은 인도의 행정당국 스스로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 쉽사리 변화하기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간소화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합리적일 필요가 있다.

이런 부분이 해소되어 효율화성이 높아진다면 인도를 찾는 사람들이 반길테지만, 절차의 생략과 편의는 많은 고용 인구를 감당해야할 인도 행정부에서는 毒이 될 수도 있다. 인도인들의 입장에서는 과연 누구를 위한 일일까 의문이 든다. (계속)

[ 2015-05-17, 20:2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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