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경찰과 관리들을 상대해야 하는 고통
印度 이야기 (12) / 인도 사회의 적나라한 부패相

鄭仁采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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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알아가는 ‘수업료’

많은 이들이 인도 사회에 만연한 부패를 비판하고 있다. 사사롭게는 길거리의 교통 단속부터 여장(女裝) 남자(차카) 단체에 대한 상납, 인허가 획득과 갱신은 물론 조세(租稅) 당국에까지 의례적인 ‘수업료’를 지불해야 한다. 이것은 특별히 비난할 수 없는 공공연한 사회의 관행이다. 때문에 그런 삭막한 얘기들을 나열하기 보다는 인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흥미로웠던 경험담 하나를 털어놓는 게 좀 더 나을 것 같다.

인도에 거주하면서 겪은 일이다. 체류 중 사정이 생겨 급히 임시 비자(VISA)를 발급 받아야 했다. 보통 2~3주 정도면 발급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앞서 언급한대로 인도에서 시간은 돈이 아니지만 그 시간에서 돈이 나온다. 민원인(民願人)은 다급하고 난처하지만 해당 관공서의 입장은 바쁠 일이 전혀 없다. 비자를 신청하고 2주가 지나도 감감무소식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담당 직원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고, 막연히 해결될 것이라는 낙관론만 되풀이했다. 여기선 당연한 일인데 어쩔 도리가 있냐는 것이다. 사실 그런 일까지 신경을 쓰면 화가 치밀어 버텨내기 어려운 곳이 인도였다. 포기하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게 상책(上策)이었다.

기사본문 이미지
인도 뭄바이 全景



찾아가보니 신원 확인을 위해 경찰서로 넘어가야 할 서류가 여지껏 계류(繫留)되어 있었다. 한 여름이라 바깥 기온이 45도를 훌쩍 넘은 상황에서 몸 안팎이 들끓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인도의 관공서에서는 절대 화를 내서는 안된다. 관료주의에 익숙하고 권위적인 공무원들을 자극하는 행동은 毒이 될 뿐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직접 서류를 들고 경찰서로 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확인하고 넘겨서 도장을 찍으면 될 일임에도 가만히 놔두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면 몇 주가 지나도 상황은 그대로다.

서류 보관함을 여니 繫留 중인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가득했다. 여권을 포함한 두툼한 서류들은 처음 제출한 상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정을 거듭해 어렵사리 서류를 들고 경찰서로 갈 수 있었다. 얼굴을 보여주고 그 자리에서 신원을 확인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경찰서를 찾아가도 제대로 응대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경찰 한 명이 우리와 눈을 마주쳐 서류를 건넸지만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서류를 놔두고 돌아가라며 고개짓을 했다. 하루면 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한 단계 진행시켰으니 다행이었지만 불안했다. 경찰의 신분 확인은 하루면 끝난다고 했지만 아직 태반의 절차가 남아 있었다. 그 다음 절차로는 서류가 비자 발급 관청(官廳)으로 보내져 이미 제출했던 관공서로 돌아와야 했다. 계산해보니 그 기간이 꽤 길었다. 귀국까지는 일주일이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고, 주말까지 겹쳤던 터라 마음은 더 불안해졌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늪


사흘이 지났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관공서에 확인을 해도 묵묵부답이었다.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모두 만사태평이고 일정 때문에 애가 타는 것은 나 혼자였다. 다시 수소문해 보니 경찰이 신분 확인을 위해 등록된 집 주소로 가봐도 아무도 없더라는 것이다. 직접 집에 찾아갔지만, 아무도 없었다는 이유로 보류라고 했다. 일찌감치 일정을 미루고 포기했어야 했다. 이제 일정을 변경하면 비자는 또 언제 나온다는 걸까? 주변의 知人들에게 하소연하니 자신이 신청한 비자도 몇 달 째 소식이 없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인도는 벗어나고 싶어도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늪이란 생각이 들었다. 절망스러웠다.

문득 누군가가 스치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웃집에는 건설업을 하는 인도인이 살고 있었다. 델리 외곽의 노이다(Noida)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산업 지구이지만 점차 외곽의 주거지로 각광받으며 아파트와 쇼핑몰 등 신축 공사로 건설붐이 한창이었다. 예전에 관공서 앞에서 그 이웃과 마주친 적이 있는데 확실치는 않아도 기대를 걸어볼 만 했다. 우연히 마주쳤던 그는 나를 알아보더니 줄을 서서 대기하던 나를 이끌고 바로 업무를 마치게 해줬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했다. 사실 이런 상황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내겐 그의 전화번호도 없었다. 그의 집으로 찾아가보니 아무도 없었다. 현관에는 매우 현실적인 은덕을 베푸는 것으로 알려진 *가네쉬 신상(神像)이 모셔져 있었다. 몇 시간을 서성이며 기다리자 마침내 그의 아내가 아이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가볍게 목례만 하는 사이였다. 내 사정을 듣자 아내는 기꺼이 나서주었다. 한국에서 가져간 몇 가지 물품을 건네주기도 했다. 남편은 건설업 외에도 가족 대대로 BJP 당원으로 활동해왔는데 인허가 관련 업무 때문인지 인맥(人脈)이 있었다. 가끔 그의 집 앞에는 무장한 경찰이 지키고 있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실낱같은 희망이 보였다.

*코끼리 머리에 어린아이의 몸을 한 신으로 주로 상업과 성공의 神으로 모셔진다.

아내의 전화를 받은 남편은 얼마 후 집으로 돌아왔고, 나는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것 같은 반가움에 그와 격렬한 악수를 나눴다. 우리는 다같이 쇼파에 둘러앉았다. 이웃은 경찰서와 관공서의 담당자들을 꿰차고 있었다. 인상착의를 묘사할 정도였다. 그는 몇 군데 전화를 돌리더니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전화를 끊었다. 그는 의자 뒤로 등을 한껏 젖히고 있었고, 나는 조아리듯 등을 구부리고 신중하게 그의 답을 기다렸다. 이웃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전혀 문제없어, *알 이즈 웰. 내일이면 받을 수 있을거야!”

*‘All is well’의 인도식 발음이다. 영화 <세 얼간이>에 등장한 말이다.

순간 나는 표정을 감추려 애썼지만 솟아오르는 광대를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그런데…’라며 다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표정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번외의 급행료, 즉 ‘수업료’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도 각 과목 별로 아주 많이.


‘수업료 잘 챙겨왔냐’

다음날 오전, 이웃과 함께 평소 자주 지나치던 사거리의 파출소로 향했다. 왕래가 드물었던 우리는 가는 도중 절친한 친구처럼 행동했다. 어깨도 툭 치고 농담도 하면서 말이다. 도와주는 것은 고맙지만 무언가 감이 좋지 않았다. 이틀 전 경찰서에서도 그랬지만 파출소 안으로 들어가보긴 처음이었다. 설마 그곳이 파출소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살색의 시멘트 건물은 겉보기엔 공중 화장실처럼 보였다. 

빨간색과 파란색 바탕 위에 폴리스라는 글귀가 새겨진 표지판이 길가에 세워져 있었다. 바로 이곳이 나에게 인도란 어떤 곳인가를 가르쳐줄 ‘체험 교실’이었다. 이웃은 나를 잠시 바깥에 세워둔 채 안심하고 기다리라며 건물 안으로 홀로 사라졌다. 아마 그는 전화상 사전 합의했던 내용을 재차 확인하는 듯했다. 아무리 인도라도 상황에 맞는 격식이 있어 보였다. 다시 밖으로 나온 이웃은 마른 침을 몇 차례 삼키더니 내게 “경찰 앞에서 너는 아무 말도 하지마”라고 했다.

파출소에 들어서니 무더운 기운이 감돌고 사무실 건너편 문 틈으로 제복을 벗은 채 땀을 식히는 경찰들이 눈에 들어왔다. 열 평이 안되는 사무실 정면에는 긴 탁자와 의자 몇 개가 보이고 출입구 바로 우측에는 허름한 간이 침대 겸 소파가 하나 놓여 있었다. 휴게실에서는 짜이왈라가 차를 나르고 있었다. 사무실 벽을 따라 무전기 몇 대가 눈에 띄었는데 아마 유치장은 휴게실 너머 맨 안쪽에 위치한 것 같았다. 이웃은 사무실 탁자의 좌측에 앉았고, 나는 조금 간격을 두고 소파 귀퉁이에 걸터앉았다. 소파의 풀어진 스프링이 반동하며 달그락거렸다. 조금 긴장되었다. 인도에 와서 이렇게 조신해보긴 처음이었다. 당당해 보이려고 모은 다리를 일부러 벌리니 되려 어색했다.

얼마 후 담당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맞은 편 휴게실의 문을 통해 제복 상의를 걸치며 걸어나왔지만 단추는 그대로 풀어놓았다. 상석(上席)에 앉은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뿔사! 어디서 본 사람이다 싶었더니 이틀 전 경찰서에서 마주쳤던 사람이었다. 서류를 몇 번 펼쳐보이더니 마치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두고 가라고 했었던 바로 그 경찰이었다. 그는 탁자 쪽으로 다가오라며 내게 손짓했다. 그리고는 수차례 사진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서류를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나를 시험이라도 하는 듯 매우 느릿느릿하게 서류를 넘겼다. 수북한 서류 중에는 자신을 증명하는 신분증, 여권, 회사의 보증서 외에도 주거지에 대한 임대 계약서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모든 서류는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경찰은 한 장 한 장 넘겨보더니 아주 사소한 문제를 발견, 지적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귀국 예정이라 임대 계약을 갱신하지 않고 주인과 협의해 *보증금을 돌려받지 않는 대신 연장된 기간 동안 머물고 있었다. 그 경찰은 임대 계약서의 계약 기간이 지났으니 주거(主居) 상황에 대한 증빙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도에서는 보증금으로 2~3개월의 임대료를 예치해 놓는다.

인도式으로 이해하면 서류에 문제가 생긴 것은 맞다. 원하는대로 제출하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 인도다. 그렇다고 새로운 집 계약서를 만들 수도 없을 뿐더러 계약 일자를 갱신하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서류를 고치면 되지 않느냐고 묻겠지만 정상적인 임대 계약서 공증(公證)을 받으려면, 관공서에서 하루 종일 머물러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실상 없었다. 그런 사정은 경찰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원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바로 추가 수업료, 즉 ‘보충 수업료’의 납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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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뭄바이의 도심지



이웃과 경찰 간에 몇 마디 대화가 이어졌다. 처음에는 딱딱하게 나왔지만 이웃이 구슬리자 점차 방법이 보이는 듯 했다. 굳이 문제삼을 일도 아니지만 경찰의 눈은 먹잇감을 발견한 매처럼 날카로웠다. 사실 그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더라도, 관공서 담당자 중 누군가는 반드시 걸고 넘어졌을 일이었다. 차라리 일찍 발견한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경찰서를 가는 날 아침부터 ‘수업료를 잘 챙겨왔냐’고 거듭 확인하던 이웃은 내게 경찰의 요구사항을 정리해주었다. 임대 계약서 상의 문제를 빌미로 원래 금액의 두 배를 요구했다는 것이었다. 직감 상 이웃도 수업료를 분배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통 한국에서 받는 급행(急行) 비자 비용의 몇 배에 달하는 큰 돈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이웃의 의견과 순리에 따라 행동했다.


부패이기 전에 관행
 

그후 비자는 순식간에 경찰의 신분 확인을 걸쳐 당일 특송(特送)으로 비자 발급 부서에 보내졌고, 귀국 하루 전 비자 발급 담당자에게 또 한 차례 수업료를 지불한 뒤 여권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이 일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지분이 있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 업무는 원래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인도는 원만히 해결되는 것은 없지만, 안되는 것도 없는 나라다. 땡볕 아래로 이동하며 그 과정이 무척 고달프고, 하나 하나 엄청난 노력이 들어가지만 밀어붙이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그런 편법을 조장하고, 인도의 치부(恥部)를 고발해 흠집을 내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애초에 그런 일 자체를 만들지 말고, 그런 상황이 닥쳐도 ‘인도(印度)의 상식’ 에 맞춰 순응하며 융통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일은 인도인들에게 부패이기 전에 관행일 것이다. 사회적으로 심각한 부패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석탄 비리 등 인도 국민들을 공분(公憤)시킨 사건들이 많다. 작은 일들이 사회 전반의 부패와 비리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쉽게 생각할 수는 없다. 인도에서 겪은 여러 부조리한 일들은 이 경험과 비교해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개혁을 천명한 선거 이후에 겪은 일이다. 큰 개혁이 과연 점차 사회 전반으로 확대될 수 있을지 무척 궁금하다.  

*석탄 채굴권 분배를 두고 일어난 비리로, IMF 극복을 주도한 인물로 존경받아온 맘모한 싱 前 총리가 2005년 오디샤州의 채굴권을 애초 배정 결정을 뒤짚어 ‘힌달코社’에 배정한 일로 국민들의 공분을 샀으며 맘모한 싱을 포함한 정재계 인사들이 기소되었다.

인도에서 경찰은 수업료를 통한 副수입이 상당해, ‘꿈의 직장’이라고 한다. 인도가 세계 속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변해야 할 부분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무리 실망하고 비판하더라도 그 사회 자체가 변화의 필요성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現地에서 이런 일들에 당하다 보니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게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차라리 인도를 배운 과외비를 지불했다고 생각하자.’


변할 일만 남은 인도

“인도가 변하겠어?” 인도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들어보면 모두들 인도의 변화에 부정적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변하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인도도 변할 일만 남았다. 비록 많은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말이다.

변화에 대한 갈망은 외부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인도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입장을 들어볼 수 있었다. 그들도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다만, 가족이 이해 당사자일 경우가 있는 등 각자 처한 입장이 서로 다르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단 이야기도 했다. 그래도 선거를 통해 드러난 개혁과 부패 척결에 대한 기대는 무척 고무적이다. 변하지 않고서 누가 인도를 기회의 땅으로 보고 찾아올 것인가.

공공기관의 관리자이면서 양심적이고 청렴한 사람들도 있다. 의례적인 식사 자리도 정중히 거절하며 인도의 명절을 맞이해 보낸 가벼운 화환이나 선물도 마다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희망적인 부분이다. 변화는 대승적 차원이지만 인도는 한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수렴(收斂)의 과정이 길고 그만큼 급속한 개혁과 변화가 쉽진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인도의 한계다. 완만하고 느리지만 융통성을 가지고 서서히 변해갈 수 있는 곳이 인도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인도의 잠재력이다. 인도에서 조바심을 내면 결국 자기 손해다.

인천에서 홍콩, 다시 홍콩에서 아마다바드를 거쳐 델리에 이르기까지 여행의 시작부터 진을 뺀 것은 험난한 여정(旅程)에 대한 암시였다. 인도는 자신을 채찍질하는 자신을 잠시 내려놓고, 먼 목표를 내다보며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지 않으면 표류하게 된다. 비행기는 다시 자욱한 안개를 뚫고 델리로 향하고 있었다. (계속)

[ 2015-05-19, 15:2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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