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인도 기차에서 뛰어내리기
印度이야기 (14) / 공수부대원들이 落下하듯 뛰어내린 승객들

鄭仁采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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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망명

느슨해질 수는 없었지만 강의실과 기숙사를 오가는 생활은 차츰 지루해졌다. 여행한다는 것과 체류한다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인도에 머무르면 단순히 먹고 사는 일에 집착하게 된다. 특히 매 끼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매일 되풀이되는 고민이었다.

나는 점차 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숙소의 인도食에 질리면 이따금씩 델리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코너트 플레이스(Connaught Place)의 패스트푸드점을 찾아가 끼니를 때웠다. 지하 쇼핑가에서 영화 VCD를 구입하거나 환전을 하기도 했다

거대한 원(圓)을 따라 건물이 둘러싼 코너트 플레이스는 가운데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그 둘레를 안쪽 원(Connaught Pl), 중간 원(Middle Circle)과 바깥쪽 원(Connaught Circus)이 에워싸고 있다. *A부터 N까지의 구역에 각종 상점, 레스토랑, 은행 등이 밀집했는데 배낭 여행객들은 주로 이보다 조금 북쪽에 위치한 뉴델리 기차역 주변의 빠하르간지(Paharganji)에 묶지만 때때로 이곳으로 내려와 회포를 풀었다. 기숙사에 머무르고 있던 내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시내 곳곳에 들어선 대형몰(Mall)로 가면 되지만 당시에는 먹거리를 찾거나 볼 일을 보기 위해서는 코너트 플레이스로 향했다.

*I와 J는 제외

시간이 허락할 때는 올드 델리에 있는 이슬람 사원인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나 랄 낄라(Red Fort), 뿌라나 낄라(Old Fort), 꾸뚜브 미나르(Qutb Minar) 등 이미 내게는 익숙한 이슬람 유적지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뉴델리 기차역에서는 앞으로의 여행을 대비해 열차 일정표가 수록된 타임 테이블(Time-Table)를 구했는데 인도에서 기차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타임 테이블을 수시로 탐독해야 했다.

역(驛) 주변의 메인 바자르(Main Bazaar)에서는 인도인 코스프레를 위한 의복과 장신구도 골랐다. 일행들은 그때부터 남녀를 불문하고 다들 의상이 조금씩 바뀌어갔는데 특히 여성들의 경우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적인 욕망 때문인지 상점을 수소문해 매우 화사한 *사리(Sari)를 맞춰 입기도 했다. 그 모습이 아름답기는 한데 다소 과한 면이 있었다. 너무 화려한 나머지 오히려 현지인들과 명확히 구분되어 불필요한 주목을 받았는데 멀리에서도 누군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실크로 만든 숄은 모두의 전리품이었다.

*인도 여성들의 전통 의상

먹거리가 궁하다보니 볼거리보다는 먹거리를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당시에는 자장면 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을 찾아 헤매기도 했고, 육류와 입맛에 맞는 음식이 그리울 때는 티벳티안 콜로니(Tibetian Colony)라고도 불리는 마주누까틸라(Majnu-ka-tilla)를 찾아갔다. 사실 맛집을 찾아다녔다기 보다는 먹이를 찾아 이곳저곳 어슬렁거렸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릭샤를 탄 일행은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며 길을 달렸다. 듣기로는 그곳의 음식들은 가격도 저렴하고 우리 입맛에 꼭 맞다고 했다. 해가 뉘엿거리며 저물어가는 시간, 마침내 다다른 마주누까틸라 첫 느낌은 마치 오아시스 같았다.

우리는 마음에 내키는 식당에 들어갔고 오랜만의 포만감으로 만족스러운 밤을 맞이할 수 있었다. 과거의 추억도 있고 최근 마주누까틸라를 다시 찾아가본 적이 있다. 지금이야 한식, 중식, 일식할 것 없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먹거리가 다양해진 델리지만 그래도 여전히 입에 맞는 한 끼는 그리웠다. 대낮에 다시 본 마주누까틸라의 모습은 기억과는 달리 무척 초라해보였다. 하지만 음식의 맛 만큼은 신기루가 아니었고, 그 미각(味覺)의 반가움이란 당시와 비교해 결코 덜하지 않았다. 문득 식량을 찾아온 난민같은 심정이 되었는데 그도 그럴것이 실제로도 마주누까틸라는 티벳인들의 *망명촌이다.

*마주누까틸라는 1960년부터 티벳 난민들이 정착한 곳으로 지금은 난민 2세대들이 거주하고 있다.


아그라의 ‘공수부대’

다시 델리를 돌아본다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그만큼 델리는 볼거리가 풍성한 곳이다. 또한 세상 어느 곳이든 한 번으로 충분한 곳은 없다. 이미 가보았던 곳이라도 틈틈히 찾아가보니 더욱 내밀하게 알게 되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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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라의 타지마할 全景


첫 주말에는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를 다시 가게 되었다. 토요일은 오후 델리의 니자무딘(Nizamuddin)역에서 출발해 아그라로 향했다. 열차는 세 시간 연착되어 오후 여섯 시 반에 출발했다. 아무래도 타지마할이 기본 코스이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섰는데 나 역시 첫 여행에서 타지마할과  뒤편의 야므나 강에 대한 아스라한 기억도 있고해서 기꺼이 동참했다. 하지만 많은 인원이 서로 보조를 맞추어 움직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일한 목적지에 가기 위해 여러 대의 릭샤를 한꺼번에 잡아야 했고, 일렬로 쭈욱 늘어선 릭샤들을 차례로 설득해야 했다. 뒷꼬리 부근으로 다가갈수록 ‘100루피?’, ‘오케이’하는 대화가 되풀이 되었다.

사건은 아그라에 도착할 즈음 벌어졌다. 점차 아그라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열차는 어떤 역에 잠시 정차했다. 우리는 아그라 칸트(Agra Cantt)역에서 내려야 했는데 이곳이 어느 역인지 혼선이 왔다. 어쩐지 내려야할 것만 같아 주변의 인도인 탑승객에게 확인했는데 그는 여기가 칸트 역이 아니라고 답했다. 하지만 주저하다가 다시 역무원에게 물어보니 이곳이 칸트역이 맞다는 것이다. 역의 푯말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내려야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는데 인원이 많아 한꺼번에 하차(下車)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열차는 다시 출발할 찰나였다. 우리는 서둘러 내릴 준비를 했다. 사실 실수로 역을 잘못 내리더라도 다 같이 내리는 한 큰 문제는 없었다. 다시 찾아가면 그만이다. 문제는 일부는 내리고 일부는 열차에 남는 것이었다. 좀 더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 행동했어야 했다. 하지만 인원이 많아 전달이 늦었고, 잠깐 사이에 역에서 내려야 하니 모두들 갑작스럽게 허둥지둥했다.

‘빨리 다들 내리라고 해!’ 재빨리 준비한 일행들은 먼저 열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심하고 있다가 준비가 늦어진 일행도 있었다. 칸트역에 정차(停車)했던 열차는 이미 발차(發車)를 알리며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열차는 점차 속도를 높였고, 탑승구에는 내리기를 주저하는 일행들이 보였다. 더 늦으면 곤란해질 터였다. 나는 아마 그때의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간격을 두고 한 명씩 뛰어내리기 시작했는데 가방을 맨 그들의 모습이 마치 공수부대의 낙하(落下)를 연상하게 했다. 바닥에 닿은 그들은 그대로 바닥에 뒹굴렀다. 발 밑으로는 플랫폼이 세찬 물결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도 플랫폼으로 몸을 던졌다. 그 순간 가속이 붙어 몸을 크게 휘청이더니 그대로 바닥에 뒹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큰 사고는 없었다. 그렇지만 마냥 웃을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인도 여행을 할 땐 낙법(落法)이라도 배워둬야 하는걸까? 몸의 균형을 찾고 주변을 돌아보니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뒤늦게 뛰어내린 일행들이 마치 모를 심은 듯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가 하나 둘 씩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많은 인원이 움직이다보면 그만큼 결정도 빨라야 했다. 기차를 타고 인도를 일주했으면서도 나 역시 내릴 곳을 착각했다. 문득 별도의 교통편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이렇게 단체로 돌아다녀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지마할은 여전히 아름답고 그 뒤를 도도하게 흐르는 야므나江도 그대로였다. 다만 기억보다는 강물이 조금 말라 있을 뿐이었다. 사실 두 번째 아그라行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일은 뜻하지 않았던 칸트역에서의 낙하(落下)였다. 이번 여행에서는 심상찮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이마저도 내가 간직하게된 인도 여행에서의 진귀한 추억이기는 하다. 이젠 그럴 일도 없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아그라 고속도로(Agra Expressway)가 개통되었고, 델리에서 아그라까지는 차를 이용하면 3시간 만에 주파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히말라야를 만나는 길, 나이니탈

우여곡절을 겪었던 아그라에서 돌아와 연수 두 번째 주(週)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연수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아그라에서 큰 코를 다쳤지만 우리는 또 다시 새로운 일을 꾸미고 있었다. 히말라야가 보이는 나이니탈(Nainital)에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델리 이북으로 올라가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리는 연수 담당 교수에게 면담을 청했다. 토요일 오전 강의를 양해받아야 했고, 가능하다면 대절할 택시 업체를 소개받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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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니탈 全景



나이니탈까지는 차를 이용해야 했다. 주말을 활용할 예정이지만 길이 멀었기 때문에 토요일 이른 새벽부터 출발해야 했다. 사실 이런 부탁은 부적절했다. 교수는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했지만 인도인 교수들의 시각에서 결코 올바른 처신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꾸만 떠나고 싶은 마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우리는 계획을 감행했다. 타타(TATA)에서 만든 지프를 한 대를 대절하여 一行들을 차 한가득 실었다. 차는 새벽 6시에 숙소를 출발했다. 사실 사람이 탔다기보다는 실었다는 표현이 맞았다.

운전석 옆의 조수석이 있지만 뒷좌석에는 가운데 공간을 두고 마치 軍用 트럭처럼 좌우로 의자가 마주보고 있었다. 일행을 모두 앉히자 남는 공간은 의자가 없는 가운데 공간 뿐이었다. 나는 그 공간에 쭈그리고 앉았다. 모두 9명이었다. 우타란찰州의 나이니딸은 네팔에 근접한 곳이었다. 차로 7시간 가까이 가야하는데 실제로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자세가 다소 불편하기는 했지만 좌석에 앉는다고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인도産 지프란 원래 그렇다. 달리는 내내 차량의 틈새로 바람이 들어왔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고 지면의 충격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느꼈다.

앞좌석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일행 중 가장 연장자인 선배였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연장자에 대한 우대는 아니었다. 그는 눈 뜨고 보기 어려운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해야했다. 델리에서 벗어나 얼마 지나지 않자 1차선의 국도로 접어들었다. 여기서 1차선이라고 하면 중앙선이 보이지 않는 외길을 의미한다. 새벽이라 그런지 길은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로 뒤덮어 있었다. 가시거리가 불과 몇 미터가 지나지 않았지만 지프의 운전사는 거리낌없이 속도를 높였고, 눈 앞으로 돌진하는 차가 보이면 급히 핸들을 트는 행위를 반복했다. 아슬아슬했다.

선배는 차마 눈뜨고 못보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며 찡긋 웃어보였다. 나 또한 보다못해 몸을 숙이고 눈을 감아버렸다. 무섭다고 몸은 그대로 내놓고 머리만 숨기는 게 닭이라고 하지만 이런 광경은 차라리 외면하는 것이 나았다.


顚覆된 버스

첫 번째 인도여행에서 우연히 알게된 사람이 있었다. 혼자 여행하는 여성이었는데 매우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때가 자신의 두 번째 인도 여행이라고 했는데 원래 델리에서 바라나시로 기차를 타고 이동해 다시 북쪽의 네팔로 넘어간 뒤 버스를 타고 북쪽의 고지대를 넘어갈 예정이었다. 이후 우연히 다시 소식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끝내 목적지까지 닿지 못했다고 했다. 버스를 타고 고개를 넘어가던 중 버스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당황한 그녀는 어둠 속에서 낯선 땅을 헤매야 했다. 재밌는 점은 버스가 전복(顚覆)이 되었는데 현지 사람들은 아랑곳 없이 뿔뿔이 흩어지더라는 것이다. 하마터면 큰일을 당할 뻔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던 모양이다. 극적으로 위기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이제 그런 여행이라면 치를 떠는 것 같았다. 다시 인도로 돌아온 그녀는 생각보다 일찍 여행을 마감했다.   

그런 일에 비하면 안개 속을 돌진하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아마 두려움이 무엇인지 아는 나이였다면 모르겠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잠에 드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한참동안 잠을 청했다. 점차 나이니탈로 근접해가며 다시 눈을 떴는데 일행들은 어떻게 차 바닥에서 그렇게 잠을 청할 수 있냐고 물었다. 나도 모자람없이 자라 온 사람이다. 다만 인도는 나를 어떤 환경도 개의치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차량은 산을 오르기 시작하고 고산(高山) 지대로 접어들자 조금씩 두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해발 2084 미터 높이의 나이니탈은 쿠마온(Kumaon) 산지에 위치한 인도인들의 여름 별장이자 피서지다. 무더운 여름철에도 최고 27도 밖에 되지 않아 실제로 우타르프라데시 등 여러개 주의 여름 수도(Summer Capital)로도 활용되어 왔다. 사실 이곳은 향수병에 걸린 영국인들에 의해 조성된 곳인데 지금도 살인적인 여름에 지친 외국인들이 이곳과 같은 북부의 휴양지로 *피신하거나 아예 인도 밖으로 벗어난다. 19세기 후반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해 150명이 매몰되기도 했다지만 눈 앞의 나이니탈은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피서철은 대개 5~6월 또는 9~10월 사이다.

늦은 오후 나이니탈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산에 둘러쌓인 채 모습을 드러낸 나이니 호수(Naini Lake)의 환상적인 자태였다. 에메랄드 빛을 발하는 이 호수는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어 더욱 돋보이는데 호수 위에는 보트를 띄워 한가롭게 뱃놀이를 할 수도 있었다. 산과 호수 사이에 형성된 호반 도시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도시에는 많은 호텔과 레스토랑이 자리잡고 있어 더위를 피해 도시를 떠나온 사람들이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이곳은 히말라야를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호반 뒤편으로 케이블카를 이용하거나 걸어올라가면 해발 2270미터 높이의 스노우 피크(Snow Peak)가 있는데 맑은 날에는 히말라야의 산세를 훤히 내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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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 피크에서 바라본 히말라야의 모습



가야할 길을 가야하는 運命

피서지에 온 우리는 한껏 기분이 부풀어 올랐다. 에메랄드 호수에서 뱃놀이를 한 우리는 숙소로 향했다. 나와 선배는 고산 지대의 멍한 기분에도 여흥을 이어가기 위해 럼주를 한병 구해놨다. 인도의 경우, 종교 성지(聖地) 등 일부 도시에서는 술을 구하기가 어렵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주류만 따로 판매하는 상점에서 술을 구할 수 있다. 독주(毒酒)는 좀처럼 마시지 못하지만 나는 흥에 겨웠다. 당시 나누어 마신 *100루피짜리 박카디는 델리에서 나이니탈까지 300킬로미터의 길을 취한 듯 거슬러 온 숭어들의 축배였다. 밤이 되자 하늘에서는 말 그대로 별이 쏟아져 내렸다.

*당시 환율은 1루피에 韓貨로 30원이었고 지금은 1루피에 17원 정도로 루피의 가치가 반토막이 났지만 루피 시세만으로는 물가가 약 10배 정도 올랐다.

과연 고향이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후배는 자신의 고향이 떠오른다며 새삼 감격스러워했다. 일찍이 인도의 大도시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호사였다. 비수기이기도 했고 당시만 해도 교통비 700루피, 100루피짜리 술 한병, 세계의 지붕과 맞닿은 140루피 짜리 호텔, 그리고 80루피짜리 저녁 식사만으로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인도 여행자들이 누릴 수 있는 저렴한 특권(特權)이었던 셈이다.

마음껏 취한 밤을 보낸 다음날, 간밤에 나눠 마신 럼주 때문인지, 고산병 때문인지 현기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나이니탈의 클라이막스를 만끽해야할 시간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나는 케이블카를 타고 스노우 피크로 올라갔다. 날씨는 화창했고, 전망대에서는 기대했던 히말라야의 능선이 보였다. 그 장대한 모습은 마치 손에 닿을 듯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물론 실제로 이곳에서 히말라야까지는 아직도 꽤나 먼 거리였다. 하지만 히말라야를 실제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또한 여태껏 내가 가보았던 중 가장 북단에 위치한 곳이었다. 나이니탈은 어제 하루 고된 여정(旅程)의 보상으로 충분했다.

이제 델리에 돌아가면 연수도 곧 끝날 것이고 본격적으로 인도의 남쪽으로 향할 것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연수생들은 가야할 길이 서로 다를 것이었다. 특히 처음 인도에 온 경우 북부의 풍부한 유적지는 놓치기 아쉽다. 인도와의 재회(再會)란 기약하기 어려운데 가령, 바라나시(Varanasi)와 같은 도시를 방문하지 않는다면 큰 손해다. 때문에 여행 루트를 두고 서로 약간의 갈등도 생기게 마련이다. 삶이 그러하듯 섭섭하더라도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결국 각자의 길을 떠나야 한다. 나는 영화나 드라마의 2탄에는 큰 흥미가 없다. 여행 또한 마찬가지다. 되도록 새로운 길을 가보고 싶고, 그것은 델리나 아그라를 다시 보며 굳혀진 생각이기도 했다.

새롭게 경험한 나이니탈은 무척 흥미로웠다. 히말라야를 보며 조금 망설여졌다. 언제 다시 여기까지 와볼 것인가? 그렇다면 이보다 더 북쪽으로 가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혹시 예전에 마주쳤던 누군가처럼 버스를 타야하는 걸까? 하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일에는 순서가 있다. 그토록 숙원했던 길이고, 나는 일단 남쪽에 묻어둔 한(恨)부터 풀어야 했다. 끝내 마드라스에서 돌아섰던 내가 아닌가? ‘남자’는 가야할 길을 가야했다.

델리에서 올라와 히말라야를 보는 지금은 활을 쏘기 전 힘껏 활시위를 당기는 과정일 뿐이었다. 전망대에서 내려온 나는 현기증으로 몇 시간 잠을 청했다가 다시 차에 올랐다. 그리고 온 길만큼 거슬러 내려가 델리로 되돌아갔다. 이후 두통으로 꼬박 이틀을 고생했다. (계속)

[ 2015-06-01, 14:1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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