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교도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준 라지푸트族
印度 이야기 (15)/ 라지푸트族은 응전(應戰)과 타협을 통해 생존을 영위했다

鄭仁采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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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으로 가는 길

사람들로 북적이던 기숙사는 어느새 썰물이 빠지듯 텅 비었다. 나이니탈(Nainital)을 다녀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델리에서의 연수도 끝이 났다. 나는 책과 노트 대신 큰 여행용 배낭을 어깨에 짊어졌다. 기숙사의 일행들은 마치 무운(武運)을 빌 듯 서로에게 작별을 고한 뒤 각기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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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인도여행 動線(동선)


현관을 나서는 모습이 마치 골인 지점이 다른 마라톤 대회의 참가자들이 시차(時差)를 두고 차례대로 출발선을 떠나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밖으로 나선 나는 멀찍이 앞서나간 무리들을 눈으로 뒤쫓았다. 시장통의 인도인들 사이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이 퍽 인상깊었다. 젊음이란 하루종일 책상머리에 앉아있는 것보다 배낭을 메고 어딘가를 향해 성큼성큼 나서는 게 더 잘 어울릴지 모른다.

목적지는 인도 북서부 라자스탄州의 푸쉬카르(Pushkar)였다. 델리에서 밤 11시 아지메르(Ajmer)行 기차를 타자 다음날 아침 7시를 넘겨 아지메르역(驛)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곧장 버스로 갈아타고 황량한 모랫길을 11킬로미터 남짓 더 달리자 푸쉬카르가 눈에 들어왔다.

라자스탄州에 들어온 것은 지난번 자이푸르(Jaipur)를 방문한 이후 처음이었다. 자이푸르 역시 라자스탄州의 주도(州都)로, 라지푸트 왕국(힌두 소왕국)의 화려한 흔적과 조우한다는 점에서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인상적인 도시였다. 하지만 자이푸르만으로 라자스탄을 경험했다고 하기에 망설여지는 면이 있었다. 그 이유는 ‘사막(沙漠)’이었다. 라자스탄하면 떠오르는 것은 광활한 사막과 그 가운데 오아시스처럼 자리잡은 금(金)빛, 청(靑)빛 도시들의 황홀경일 것이다. 자이푸르는 델리에서 가깝고, 사막으로부터는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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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카르의 사막의 낙타


첫 눈에 푸쉬카르는 평온한 소도시로 보였다. 푸쉬카르湖(Pushkar Lake)를 둘러싸고 키 낮은 건물들과 사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풍경은 무척 한산해 보였는데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아담했다. 한 걸음만 나가면 사막이라고 했는데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고, 대신 구름 한 점 없이 가깝게 내리쬐는 햇살만이 살갗을 뜨겁게 달구며 이곳이 사막의 서막(序幕)임을 암시했다.

웅장한 사막 풍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했기에 실망스러울 수 있었으나 델리를 떠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토록 다른 풍경에 발을 딛는다는 것은 반색할 만한 일이었다. 인도의 혼잡한 도시에 오래 머문다는 것이 정신건강에 그다지 좋지 않았던 셈이다. 푸쉬카르에 다다르자 조금 마음이 놓였다.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은 흥분되는 일이었지만,

사실 이곳까지 오며 마음이 편했던 것은 아니었다. 모두 10여 명이 넘는 인원이 한꺼번에 이곳으로 이동했기 때문인데,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을 하기에는 신경이 쓰였다. 푸쉬카르 이후부터는 뿔뿔이 흩어질 예정이었지만, 대부분 인도 여행은 처음이었으므로 일단 길이 같은 이상 책임감이 느껴졌다. 일찍이 많은 일행을 거느리고 아그라와 나이니탈로 가며 겪었던 일도 있고 해서 꽤나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현지 코디네이터가 필요한 부분을 준비해둔 단체 여행과는 조금 다른 상황이었다. 그러다보니 푸쉬카르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안심이 되고 긴장이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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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카르 사막의 낙타를 돌보는 인도인들



四色 도시의 향연

北인도를 여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라자스탄에 깊은 애착을 가진다. *라자스탄하면 가장 먼저 바다와 같이 광활한 *타르(Thar) 사막과 그 위를 떠다니듯 오가는 낙타가 떠오른다. 사막이란 메마르고 척박하지만 동시에 신비로운 상상을 자극하는 곳이다. 사막을 가만히 바라보면, 하늘과 바다가 길이 아니었던 시절 낙타의 발자욱을 남기며 누군가 하염없이 가로지를 것만 같다. 세월이라는 발자욱은 모래바람에 씻겨 사라지지만, 그 잔상만큼은 오롯이 남는 듯하다. 그러한 사막을 배경으로 훌쩍 낙타를 타고 사파리를 떠나는 것은, 인도에선 라자스탄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호사(豪奢)다.

*인도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주이며, 우리나라의 세 배 크기에 달한다.
*인도 북서부에서 파키스탄 남서부에 이르는 25만 9000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사막이다.

이 곳의 이색(異色)적인 도시들도 도전적으로 느껴질 만큼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깊이 들어갈수록 마치 사막의 新기류에 거듭 현혹되는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푸쉬카르 서쪽으로 향하면 *블루 시티(Blue City)와 언덕 위에 솟은 메흐랑가르城(Mehrangarh Fort)이 보이는 조드푸르(Jodhpur)가 있다. 더 깊은 서쪽으로 들어가 인도의 끄트머리에 이르면 황금빛 사막과 *골드 시티(Gold City)인 자이살메르(Jaisalmer)가 나타난다. 남쪽으로 향하면 *화이트 시티(White City)로 대변되는 중세풍의 도시 우다이푸르(Udaipur)를 만나게 되는데, 자이푸르의 *핑크 시티(Pink City)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사색(四色) 도시의 향연이다.

*브라만의 집성촌이 형성되어 브라만의 색인 파란색으로 건물 외벽을 칠했다.
*황금빛 사막과 자이살메르城 등 정교하고 화려한 건축물로 유명하다.
*호수의 도시(동양의 베니스)로 불릴만큼 인공호를 배경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유명하다.
*1876년 웨일즈 왕세자(훗날 킹 에드워드 7세)가 자이푸르를 방문할 당시 이곳의 마하라자 람 싱은 환영의 의미로 도시를 분홍색으로 단장했다.

라자스탄이 왜 인도에서 가장 다채로운 색채을 발하는 ‘사막의 보석’인지 깨닫게 된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상기해보면, 이곳이 왜 *영화 촬영지로 각광받는다는 사실이 전혀 놀랍지 않다. 특히 라자스탄의 모습을 만끽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영화로 타셈 심 감독의 2006년作 <더 폴(The Fall)>을 들 수 있는데 자이푸르, 조드푸르, 우다이푸르, 아바네리의 찬드 바우리 등 라자스탄 도시들의 환상적인 풍경은 물론, 아그라와 그 밖의 세계적인 유적지들이 배경으로 한꺼번에 등장, 관객들의 눈을 휘어잡는다.

*라자스탄에서 촬영된 영화로는 더 폴(자이푸르, 조드푸르, 우다이푸르, 아바네리), 베트맨 다크 나이츠 라이즈, 김종욱 찾기(조드푸르), 007 옥토퍼시, 다르질링 주식회사,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우다이푸르) 등이 있다.
 
몽환적인 사막 도시들과 함께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이곳의 문화다. 라자스탄은 *라지푸트(Rajput)의 땅으로 알려져 있다. 자이푸르를 여행하면서도 라지푸트족(族)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듯 라지푸트는 라자스탄의 문화와 전통을 대변한다. 라자스탄의 이국적 풍광(風光)과 더불어 전사의 후예로 상징되는 라지푸트族의 강렬한 문화의 흔적은 흡사 사막 속의 결투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며 호기심을 자극한다.

먼저 이곳의 역사를 살펴보면, 라자스탄 지역은 인더스 문명으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유구한 역사를 지녔고, 굽타시대(4~6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역사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8~12세기에는 라지푸트 왕국들이 등장하면서 오늘날 이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와 전통을 갖추게 되었다. 인도의 독립 이후 라지푸트를 중심으로 구획된 곳이 바로 라자스탄州인데 라자스탄이라는 명칭은 바로 *라지푸트라(Rajputra)에서 비롯된 것이다.

*라지푸트의 일부는 구자라트와 마드야프라데시 주에 편입되었다.
*王의 아들을 의미한다.


戰士들의 땅


라지푸트族은 인종적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된 아리안係 정착민과 토속민 등으로 복잡하지만 종교적으로는 대부분 힌두교를 믿어왔다. 라지푸트라는 명칭 자체가 왕의 자손이란 뜻을 가졌지만 그들이 실제로 왕족의 후예였던 것은 아니고, 대신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해온 전사(戰士)의 후예들로서 무척 용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점차 세력을 얻어 여러 힌두 왕국을 세웠다. 라지푸트族은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조하르(Johar·는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의 經典)의 전통에 따라 전사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적진(敵陣)에 돌진했고, 패배에 직면한 부녀자와 아이들은 스스로 불구덩이에 몸을 던졌다. 외교적 수완이나 지혜로움은 몰라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용맹함을 자긍심으로 삼아왔던 것이다. *사티(Sati)의 전통에 따라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따라서 불구덩이에 몸을 던졌다고 하니, 절개와 지조 이전에 일단 전쟁이라는 운명의 주사위가 던져지면 일족의 운명을 걸어야 했던 절박함이 느껴진다.

*사티 여신은 원래 시바神의 첫 아내로 균형, 자기 희생 등을 상징하며 힌두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아내像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이를 왜곡한 사티의 풍습은 남편의 죽음에 따라 미망인의 자살을 종용하는 악습으로 변질되었다. 사티의 풍습은 금지되었으나 최근에도 자발적인 사티를 가장한 사건이 발생하는 등 악습의 폐해가 이어지고 있다. 사티를 행하면 성지(聖地)가 되어 순례자들이 찾으므로 생계에 도움이 된다고도 한다.

어쩐지 이들에게도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이라는 말이 썩 잘 어울리는 것 같다. 1534년 구자라트의 술탄 바하두르 샤(Bahadur Shah)가 치토르가르를 침공했을 때, 1만 3000명에 가까운 라지푸트 여성들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3200명의 라지푸트 戰士들은 마치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부치와 선댄스처럼 전장(戰場)을 향해 돌격했다. 1567년 무갈 제국의 아크바르(Akbar, 1542~1605)가 이곳을 침공했을 때를 포함해 치토르가르에서는 이러한 일이 무려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 정도 지독한 저항이라면 정복이 무의미하다. 인도 전역을 발 아래에 두었던 위대한 아크바르도 끝내 무력(武力)에 의한 정복을 포기하고 *혼인 등 화평책(和平策)을 통해 라지푸트와의 공존을 꾀했다는 것은 매우 인상깊다. 라지푸트를 힘으로만 종속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 인도 전역에 퍼져나갔고, 이는 힌두교도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이 되었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 보면 힘이 분산된 라지푸트 역시 전투에서 견뎌냈을 뿐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슬람 시대와 식민지 시대를 거치는 동안, 그들은 제국의 변두리에서 응전(應戰)과 타협을 통해 생존을 영위했다.

*아크바르는 라지푸트 족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고, 바로 둘 사이에서 왕위를 이어받은 자한기르(Jahangir, 1605~1627년)가 태어났다.

모든 라지푸트들이 격렬한 투쟁의 아이콘인 것만은 아니다. 가즈니(Ghazni) 왕조의 마흐무드(Mahmud, 962~1186)가 수시로 침략과 약탈을 일삼을 당시 수수방관한 것도 라지푸트 왕국들이었고, 힘이 규합하지 못하고 분열되어 끝내 구르(Ghur) 왕조의 *무하마드(Muhammad)의 침입을 막지 못했던 것도 라지푸트 왕국들이다.

*라지푸트 왕국들은 구르 왕조의 최초 침공할 당시 프리티지 라지를 사령관으로 한 연합군을 조직하여 물리쳤으나 再침입 시에는 라지푸트 왕국 사이의 분열로 연합군이 와해되고 고립된 프리티지 라지의 군대는 무하마드의 군대에 패퇴하고 만다. 

이로써 인도는 이슬람의 침입을 막을 기회를 잃었다. 결국 델리 술탄 시대(Delhi Sultanate)가 열리고, 이어 무갈 제국의 시대가 도래하며 인도는 이슬람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무갈 제국은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며 라지푸트 왕국들을 다루었다. 또한 식민지 시대에 이르러서도 영국은 라지푸트 왕국들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 효율적인 식민 통치를 이어나갔다. 신화적인 용맹함과 상반된 타협 또한 라지푸트의 또 다른 모습이다. (계속)

[ 2015-06-05, 15:5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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