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영토 ‘고아’를 되찾고자 벌인 血鬪
印度 이야기 (17) / ‘잃어버린 고아(孤兒)’를 되찾은 결정적인 ‘고아 탈환작전(비자이 작전)’

鄭仁采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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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우 해전

1509년 2월, 아라비아해를 마주한 디우(Diu) 앞바다에서는 인도의 명운(命運)을 건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함대는 겨우 *18척, 이에 맞선 反포르투갈 연합군 함대는 250척에 달했다. 인도 항로를 발견한 이후 東아프리카와 인도에서 세(勢)를 넓혀가던 포르투갈은, 일대의 해상 무역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당시 지리적으로 교역의 중요 거점을 차지하며 중개자 역할을 했던 구자라트의 술탄국을 압박했다.

*이중 12척만이 전투 함선이었다. 포르투갈 병사 1,500명, 코친에서 지원한 400명의 병사가 있었다.

이에 구자라트의 술탄 마흐무드 베가다는 캘리컷의 자모린 및 교역 상대국이었던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과 손을 잡고 포르투갈에 대항했다. 인도-아랍의 연합 전선(戰線)이 형성된 것이다. 3일간의 치열한 해전(海戰)이 펼쳐졌다. 물량 면에서는 포르투갈이 열세(劣勢)였지만 포르투갈은 훗날 무적 함대를 결성할 해상국이었고, 전투의 승패를 가른 것은 양보다는 질이었다. 결국 숫적 열세를 극복한 포르투칼이 승리를 쟁취했다.

연합군은 해전에 능숙치 않았다. 숙련된 선원(船員)들과 대포로 무장한 포르투갈의 함대는 활이 主무기인 연합군을 압도하며 기술상의 우위를 점했다. 또한 이 전투에는 개인적 복수도 얽혀 있었다.

기사본문 이미지
유럽의 각 국가들이 식민지로 삼았던 인도의 지역들. 左측 중앙 부근에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고아와 디우가
보인다.



이보다 1년 전, *차울 해전(Battle of Chaul)에서 아들을 잃었던 포르투갈의 총독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Francisco de Almeida, 1450~1510년)는 본국에서 자신을 대신해 파견한 후임 총독마저 감금한 채 출정하는 강수를 두었다. 그는 디우 해전을 복수의 기회로 삼았다. 뻔뻔하게 남의 땅을 넘보면서 복수라니 적반하장(賊反荷杖)인 면도 있지만 복수심에 불타며 비장하게 달려드는 적만큼 위협적인 상대도 없었다. 연합군은 기세에서도 눌렸던 것이다.

*연합군이 디우 해안에 결집하자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는 정찰을 목적으로 자신의 아들 로렌초를 보냈으나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로렌초는 사망하고 만다.

피의 복수는 피로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디우 해전이 있은 이듬해, 총독직(職)을 내려놓고 본국으로 귀환하던 알메이다는 희망봉에서 아프리카의 부족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디우 해전의 승리를 통해 승장(勝將)의 영광과 복수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던 그였지만, 자신의 목숨이 그 댓가였던 셈이다. 알메이다의 최후는 스스로 개척한 인도 땅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한 바스코 다 가마의 운명과도 묘하게 닮았다. 그러나 그들의 허무한 최후도 유럽인의 입장에서는 지불할 만한 댓가였다.

디우 해전이 있을 당시, 아직 인도 내륙은 바베르(Baber 또는 Babur, 1483~1530년)가 무갈 제국를 세우기 이전이었다. 카불의 족장(族長)이었던 바베르는 육지에서 정복의 서사시를 써내려 가며 제국 건설의 기반을 닦아나가고 있었다. 그는 이보다 뒤인 1526년 *파니파트(Panipat) 전투에서 승리하며 자신의 꿈에 다가갈 것이었다.

*북인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언급되는 세 차례의 전투다. 1526년 전투는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바베르가 델리의 술탄 이브라힘 로디를 격파하는데 성공했고, 이는 무갈 제국의 건립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556년의 두 번째 전투는 후마윤 시대에 이르러 한때 아프가니스탄에 의해 점령(1540년)되었던 지역을 무갈 제국이 수복하는데 성공했다. 1761년의 마지막 전투는 무갈 제국을 이은 마라타 동맹이 아프가니스탄과 벌인 전투로 마라타 동맹이 패배하며 무갈 제국이 사실상 종말을 고했으며 영국 식민지 지배의 길을 열어주었다. 여기서는 첫 번째 1526년의 전투를 일컫는다.   

하지만 과거 인도의 정복자들처럼 바베르 역시 인도의 드넓은 대륙만 응시했을 뿐 미처 해상(海上)의 가치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는 포르투갈의 존재조차 몰랐다. 바베르에 이어 훗날 무갈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아크바르도 마찬가지였는데, 아크바르는 유럽인들을 접하며 종교에 대한 호기심을 보였을뿐 도래하는 해양 시대와 그들의 엄청난 힘을 간파하지 못했다.

특히 유럽 국가들의 인도 진출과 더불어 이어진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 시대를 되새겨 보면 허를 찔린 느낌마저 든다. 열심히 물을 모았는데 둑이 터진 것 같은 느낌말이다. 흔히 무갈 제국 시대를 연 파니파트 전투가 北인도 역사에 큰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후추 무역계의 큰 손 ‘바스코 다 가마’

하지만 디우 해전은 향후 인도의 운명을 결정해 버렸고, 아시아로 통하는 門의 빗장이 풀리는 계기가 되었다. 디우 해전이 역사적 상징성을 가지게 되는 이유다. 해상 무역에 대한 이권(利權)을 두고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 간의 충돌이 유럽과 中東을 너머 인도 앞바다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모든 일은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1524년)의 인도 항로 발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인도 서해안의 캘리컷(現 코지코드)에 정박(1498년)한 것을 계기로 포르투갈은 의욕적으로 거점(據點) 확보에 나섰다. 당시 캘리컷은 후추 무역으로 번영하고 있었다. 이미 아랍과의 무역이 성행하고 있었던 만큼 처음 바스코 다 가마와 접촉했을 때만 해도 캘리콧은 그를 호의적으로 맞이했다. 바스코 다 가마의 목적은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였다.

*후추나무 종자(種子)를 얻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현지의 몬순 기후까지 가져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독점적인 무역 창구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당시 무역을 선점하고 있던 아랍 상인과 갈등을 빚게된 것은 당연했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이미 오래 전부터 기독교와 무슬림의 반목(反目)은 지속되어왔고, 결코 그 관계가 원만할 수 없었다.

*실제 바스코 다 가마는 당시 캘리컷의 지배자였던 자모린에게 후추나무를 불하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에 대한 답으로 자모린은 후추나무는 몰라도 ‘비’까지 가져갈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한편, 캘리컷의 입장에서는 기존 거래처이자 막대한 富를 바탕으로 海上 무역을 주도하던 아랍 상인을 보호하는 것이 당연했다(반면, 포르투갈에서 보내온 물품들은 보잘 것 없었다).

이에 바스코 다 가마는 캘리컷과 경쟁 관계였던 코친(Cochin) 왕국을 이용해 캘리컷을 압박, 아랍 상인들을 밀어내며 후추 무역의 주도권을 거머쥐는데 성공했다. 후추를 싣고 리스본으로 귀환한 바스코 다 가마는 엄청난 이익을 남기게 되고, 포르투갈의 리스본은 유럽 內 후추 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탐험 비용의 60배에 달했다.

이후 디우 해전에서 反포르투갈 연합군을 패퇴시킨 포르투갈은, 영국이 주도권을 빼앗기 전까지 인도의 서해안을 완전히 장악했다. 고아(1510년)를 거점으로 하여 디우(Diu, 1535년)와 다만(Daman, 1558년) 등 핵심 지역들을 차례로 확보해 나갔다. 물론 꽃으로 날아든 벌은 포르투갈만이 아니었다. 포르투갈의 잭팟을 목격한 유럽 국가들은 너도나도 바스코 다 가마의 길을 따르기 시작했다. 탐욕의 어두운 그림자가 덮친 것이다.

아라비아海와 인도양 그리고 벵갈만으로 열린 드넓은 해안선을 따라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에서 온 범선들이 차례로 닻을 내렸다. 16~18세기에 걸쳐 경쟁적으로 진출한 그들은 앞다투어 거점을 확보하는데 열을 올렸다. 바야흐로 식민지 시대가 열린 것이다. 포르투갈의 무적함대를 꺽은 것은 영국이었고, 역사가 말해주듯 ‘최후의 여왕벌’은 영국이었다.



비자이 작전

영국에 의해 밀려난 포르투갈이었지만,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 당시 포르투갈은 여전히 5개 지역(고아, 다만, 디우, 다드라, 나가르 하벨리)을 점령하고 있었다. 고아는 이중에서도 가장 면적이 크고 상징적인 곳이었다. 포르투갈은 자신들이 정당하게 취득한 땅이라며 반환을 거부했고, 오히려 병력을 증파(增派)해 1만 2000명을 주둔시켰다. 1961년, 해묵은 한(恨)을 청산하기 위한 전운(戰雲)이 고아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인도軍은 고아를 향해 육해공 세 방향으로 동시에 진격했다. *비자이 작전(Vijay Operation)이 개시된 것이다. 비자이(Vijay)는 힌디어로 승리를 뜻한다.

*고아 해방작전(Liberation of Goa), 고아 침공(Invasion of Goa)로도 불린다. 1999년 잠무 앤 카슈미르에서 일어난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무력 충돌에도 같은 작전명이 사용되었다.

36시간의 걸친 작전 끝에 451년 간 지속되었던 포르투갈 점령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번에 독(毒)을 품은 쪽은 인도였고, 현대戰에서 디우 해전과 같은 결말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작전 개시와 함께 인도군은 삐라를 뿌려 고아 內 인도인들의 지지와 협력을 얻어냈다. 고국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미 수차례에 걸쳐 봉기해왔던 고아인들이었다. 포르투갈軍의 사망자는 30명, 인도 측은 22명이 희생되었다. 다만과 *디우에서도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이로써 인도는 잃어버린 땅을 모두 되찾았다.

*다드라, 나가르 하벨리는 이에 앞선 1954년에 무력으로 수복되었다.

인도의 역사를 보면 승전보는 드문데, 이 경우는 인도가 자존심을 회복한 순간이었다. 식민지 시대의 망령(亡靈)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잃어버린 고아(孤兒)를 되찾은 것과 진배없었다. 인도인들에게 고아의 반환이란 (홍콩인들의 불안을 야기한) 홍콩의 중국 반환과는 또 달랐다. 힘으로 빼앗긴 것을 힘으로 되찾은 것이다. (계속)

[ 2015-06-09, 14:2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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