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랄라의 영광은 이어질 것인가?
印度이야기 (20) / 공산당의 집권에도 성장세를 이어온 깨랄라의 虛와 實

鄭仁采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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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공산당

깨랄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또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할 점은 이 지역의 정치다. 인도에서 공산주의가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온 곳이 바로 깨랄라이기 때문이다. 인도의 경우 지역에 따라 공산당이 득세하고, 종종 선거 등 정치의 캐스팅 보트를 거머쥔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깨랄라는 1957년 처음으로 인도 공산당(The Communist Party of India)이 州정부를 장악한 이래, 2011년 州의회 선거에서 연합민주전선(United Democratic Front)이 좌파민주전선(Left Democratic Front)을 꺾고 정권을 교체하기까지 공산당의 영향권에 있었다. 60년 이상 장기 집권했던 셈이다. 舊소련이 몰락하고 중국이 변화를 도모하는 사이 어떻게 인도 공산당은, 벤자민 버튼의 시간처럼 거꾸로 갔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먼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불거진 엄청난 빈부의 격차였다. 당시 깨랄라 주민들은 대부분 농민이었는데 지주(地主)들이 엄청난 부를 독식하는 데 반해 소작농들의 가난은 극심했다. 깨랄라는 경제 불균형이 극심했고, 이런 상황에서 인도 공산당은 토지 개혁을 비롯해 비교적 균등한 부(富)의 재분배를 약속했던 것이다. 다음은 빈곤층에 대한 교육 장려였다. 깨랄라의 교육에 대한 뒷얘기는 여기서 나온다. 앞서 언급한 깨랄라의 높은 교육 수준은 인도 공산당이 주장하는 평등 교육, 양성 평등의 연장 선상에 있었는데 이러한 교육 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低소득층에 대한 복지와 권리 증진은 곧 농민과 노동자의 정치 참여 및 공산당에 대한 지지로 되돌아왔다. 최고의 식자율(識字率)에는 이러한 이면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종교와 인종 계파 간의 갈등 종식(終熄)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인도의 다른 지역에서는 힌두와 무슬림 간의 충돌 사태가 빈번히 발생했고, 특히 힌두 빈곤층과 무슬림 빈곤층 간의 갈등은 사회 약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의 규합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반면 깨랄라는 빈곤층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反계급적인 정책으로 사회 분열과 갈등 대신 평화 시대를 가져왔던 것이다. 카스트 차별과 결혼 지참금(다우리)으로 인한 살인 등 인도 사회에 만연한 문제들도 깨랄라에서 만큼은 그 사례가 드물었다. 사실 인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사상과 이념 보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 종교·인종·계급 간의 폭력적 갈등의 해소가 더 큰 문제였다.

하지만 독립 이후 최저 임금과 노동자의 권익(權益)에 대한 시위를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했고,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 사상자가 발생하자 좌절감을 느낀 깨랄라人들은 공산당을 동정하고 지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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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랄라의 虛와 實

깨랄라의 성공을 두고 흔히 ‘깨랄라 현상(Kerala Phenomenon)’, ‘깨랄라 모델(Kerala Model)’등으로 표현하는데 다른 지역과는 그 출발점이 다르다고 해야할 것이다. 예전부터 깨랄라가 풍요롭다는 얘기는 많이 들어왔다. 인도의 상당수 지역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잘 사는 것은 사실이지만 깨랄라의 富에 대한 소문은 다소 과장된 부분도 없지는 않다.

흔히 ‘깨랄라 현상’과 같은 표현도 객관적인 수치보다는 토지와 교육 등 성공적인 개혁에 빗댄 표현이다. 깨랄라의 이미지는 좋다. 문맹률이 낮고, 타밀나두, 카르나타카, 안드라프라데시 주와 더불어 인도에서 가장 비옥한 南인도 4개州의 하나라는 점은 이곳을 더욱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또한 인도의 산업 분야 중 농업의 비중이 여전히 높다는 점에서 ‘농업=깨랄라를 포함한 南인도=부유함’이라는 등식도 머릿 속에 쉽게 그려진다. 아직도 인도는 전체 인구의 5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므로 그 얘기가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엄밀히 살펴보면 인도의 산업 형태도 이미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70년대만 해도 인도 전체 GDP의 40% 수준을 차지하던 농업은 이제 그 비중이 14%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제조업이 27%로 완만한 성장세를 이어간 한편, (질적으로 훌륭한 수준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성장을 거듭한 서비스업이 59%를 차지하며 과거 농업의 자리를 꿰찼다. 농업의 쇠퇴가 아닌 새로운 산업의 성장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다. 아직 대다수의 인구가 농업에 종사한다는 점도 농업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이러한 추세는 깨랄라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세부적으로는 他 지역에 비해 기업과 제조업체의 진출이 상대적으로 적은 게 사실이고, 이들의 제조분야도 최첨단은 아니다. 현재 깨랄라의 산업은 人力 수출을 통한 해외 진출 노동자들의 송금과 관광 수익 등 서비스업이 산업의 主를 이룬다. 州정부가 주류(酒類) 공급을 독점하고 상당한 세금을 거둬들인다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영광은 이어질 것인가?

깨랄라는 GDP 기준으로 인도 내 9위이다. 1인당 GDP는 1473 달러(2012년)로 인도 평균수준이다. 명성과는 달리 흡족하지 않은 모습이다. 과거부터 깨랄라는 풍요로운 곳이다. 하지만 성장을 거듭하는 인도에서 깨랄라는 아직 추수(秋收)만 거듭하는 느낌이다. 성장의 기회를 빗겨 지나간다면 과거의 영광을 이어갈 수 있을까? 富의 분배와 복지도 좋지만 미래 산업을 유치하며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꿩도 먹고 알도 먹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점차 자유 시장 정책을 혼용하고, 굳건히 지켜오던 공산당 정권이 교체된 것은 새로운 민의(民意)가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내가 여행하던 시절, 깨랄라는 아직 공산당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였다.

코발람의 바닷바람에 실려 온 보사노바는 무척 감미로웠지만 어쩐지 낯선 기분도 들었다. 만 하루, 해변의 유혹에 또 다시 여행자의 본분을 잊을 뻔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길을 나섰다. 신화에 의하면, 깨랄라는 비슈누의 여섯 번째 화신 파라수라마(Parasurama)의 땅으로 불린다. 파라수라마가 자신의 도끼를 바다에 던지자 도끼를 던진 거리만큼 바닷물이 물러가고 그 땅이 지금의 깨랄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고대(古代)에는 이 땅이 바닷 속에 잠겨 있었던 게 사실이다. 과연 이곳에 걸맞는 전설이 아닌가. 그 미래는 또 어떠할지 궁금한 곳이다.


기록 속의 기억
      
그날 오후, 코발람에서 릭샤로 이동해 트리반드룸 역에서 깐냐꾸마리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트리반드룸에서 코발람 다시 코발람에서 트리반드룸, 꼭 악보의 도돌이표를 따라 머릿속에 보사노바의 리듬이 반복되는 듯 했다. 잠시 역행하듯 밀리던 열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트리반드롬에서 깐냐꾸마리까지의 크라이막스가 시작되고 있었다. 얼마나 고대해왔던 순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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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안을 둘러보았지만 탑승객은 드물었다. 2등석의 일반 좌석칸이었음에도 객기를 부려 슬그머니 의자가 푹신한 침대칸에 앉길 잘했다. 열차는 텅 비어 있었고, 어쩐 일인지 검표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게는 인도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창 밖을 바라보니 착각일지는 몰라도 왕가위 감독의 홍콩 영화 <아비정전(阿飛正傳)>에서 본 듯한 풍경이었다. 영화의 내용은 친모(親母)를 찾아가는 아비의 여정이었다. 이 영화가 홍콩의 중국 반환을 묘사한다는 비평은 숱하게 들어왔다. 지금 이 순간과 기묘한 우연의 일치다. 수첩을 펴고 펜을 굴리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처음부터 두 번째 인도 여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정(旅程)과 경험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것이 보잘 것 없는 인도 여행을 재구성할 수 있는 단서가 되어 주었다. 장소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들과 부끄러워 지금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달달한 글귀와 스케치들이 수첩 속에 깨알 같이 메워져 갔다.

훗날 시간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기록해야 했다. 물론 당시에는 미처 그런 생각까지 하지는 못했다. 다만 인도의 온갖 풍경이 그 누구든 여행자를 자극하고 부추겼다. 마음 한켠으로는 궁극의 목적지에 다가갈수록 허탈함이 느껴졌다. 누군가 이런 질문도 했다. ‘대체 깐냐꾸마리가 너한테 뭐길래?’ 혹시 여자라도 숨겨둔 거 아니냐는 놀림도 받았다. 南인도의 애인이라… 꼭 누군가에게 붉은 빈디(Bindi)라도 찍어놓은 것 같은 소리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은 한국에 잘 계신다. 숨겨둔 애인이 있을리도 만무하다. 그러고보면 이곳에 올 특별하고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언제나 마음 속에 둔 목적지였을 뿐이다. 숫타니파타에서 말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수첩을 덮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차창 위에서 흔들리는 열대의 수목들이 마치 아비가 추던 맘보(Maria Elena)처럼 보였다.


땅콩

창 밖에 한눈을 판 사이 어느새 인도인 한 명이 내 맞은 편에 자리잡았다. 나이는 어려보였지만 마치 분장을 한 것처럼 콧수염을 한껏 길렀고, 까만 얼굴과 작은 체구는 드라비다적인 남부의 분위기가 풍겼다. 찬찬히 그를 관찰하는 사이 그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어색함을 피하고자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소심한 듯 잠시 내 눈치를 살피는 듯 하더니 곧 그도 나처럼 눈인사를 건냈다. 그리고 그 청년은 호기심이 일었는지 내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잠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하지만 곧 할 말은 떨어졌고, 나는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창 속에서 그는 자신이 가져온 서류가방을 소중한 듯 매만지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묵묵히 깐냐꾸마리에 도착하길 기다렸다. 그러다가 먼저 말을 건낸 것은 또다시 그였다. 그는 보라는 손짓으로 날 불러세우더니 급히 자신의 서류가방을 열었다. 난 조금 의아스러웠지만 궁금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까 직업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을 때 그는 그냥 직장에 다닌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묘한 것이 들어있지는 않을까 약간 두렵기도 했다. 가방 안에는 응당 서류 더미가 들어있기를 바랬다.
 
가방 안에는 땅콩이 들어 있었다. 인도에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하지만 정성스럽게 껍질을 벗기고 비닐 봉지로 포장한 것이었다. 땅콩 장수였구나. 경계심이 한 순간 무너져 내렸다. 한번 먹어보라며 손 한가득 땅콩 봉지를 내밀었지만 그의 표정에는 다만 한봉지라도 사주었으면 하는 기대가 서려있었다. 아까 서로 이러저러한 대화를 나눴던 탓에 사양하기도 어렵지만 그는 나를 크게 귀찮게 만들진 않을 모양이었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기차에서 아무나 주는 음식을 덥썩 받아먹으면 안 된다는 철칙만이 떠올랐다. 스스로에게 매정함이 느껴졌다.
  
역(驛) 안으로 곧 깐냐꾸마리 근교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지나갔다. 땅콩을 사양하면서 미안하다고 말하자 그는 아무말 없이 소중한 땅콩을 도로 가방 안에 차곡차곡 넣어두었다. 정말 그가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내 귓가엔 그의 한숨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귓가에 울리던 맘보의 리듬은 사라졌다. 깐냐꾸마리까지 함께 갈 줄 알았던 그는 한 역전(驛前)의 시골 정거장에서 내렸다. 아마도 이 기차에서 땅콩을 팔기에는 글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처음과는 달리 아무말 없이 헤어졌다. 나는 겉으로 냉정했지만 마음은 조금 불편했다. 아마 그는 처음부터 눈 한번 마주칠려고 내 건너편 좌석에 앉았을 것이다. 깐냐꾸마리까지 길동무가 되었던 것이다. 사실 땅콩을 사서 먹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나는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 된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여행을 하며 인정(人情)과 여유라는 것이 부족했다고 반성했다. 만약 우리가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면 그때는 몇 봉지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기차는 깐냐꾸마리에 다다르고 있었다. (계속)

[ 2015-06-24, 11:0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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