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잦은 무력 도발'을 '남북의 잦은 무력 충돌'로 호도하는 교과서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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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교육 교과서(고교 한국사 2013년 8월 검인정 판): <남한과 북한의 대립은 38도선 부근에서의 잦은 무력 충돌로 나타났다. 그러던중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선전 포고도 없이 전면적 남침을 감행하면서(후략)>

문제제기: '무력 충돌'이란 표현이 문제이다. 38도선을 둘러싼 무력 충돌은 북한군의 도발에 대한 한국군의 방어전 성격이었다(아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 그렇다면 '잦은 북한군의 도발'이라고 적어야지 '잦은 무력 충돌'이라고 하여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흐려선 안 된다. 비상교육 교과서는 '그러던중'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여 학생들에게 6.25 남침이 잦은 무력 충돌의 연장선에 있는 자연스러운 사건인 것처럼 그릇된 역사를 가르칠 위험이 있다.
좌편향 교과서는 북한이 불리한 경우엔 '무력 충돌' 식으로 책임 소재를 흐리는 기술을 한다. '북한에 의한 천안함 폭침'이라 하지 않고 '천안함 사건'이니 '천안함 침몰'이라고만 적어 누가 범인인지를 밝히지 않는 것과 비슷한 수법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북한의 38도선 도발과 국군의 대응은?


무력충돌은 1 9 4 9년 3월 중순에 접어들면서부터 격화됐다. 그 대부분

은 경비대간의 소규모 충돌로 발생한 것이었지만, 어떤 경우는 보병대

대 규모로 확대된 적도 있었다. 충돌격화의 원인은 북한이 대규모 병력

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미 1 9 4 7년 7월부터 소련군으로부터

3 8도선 경비임무를 인수해 북한‘3 8경비대’가 경비를 맡아왔고, 1949

년 초부터는 그 규모를 3개 여단으로 증편해 전술상의 요지를 장악한

후 강력한 진지를 구축해놓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진행된 주한미군 철수는 북한의 도발을 부추길 가능성

이 높았다.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해온 한국정부는 주한 미국대사 무초

로부터 한국군의 전력증강을 위한 미국의 군사원조를 약속받고 철군에

동의했다.

그러나 4월 1 8일 뉴욕타임즈 등 외신을 통해 철군예정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자 사회여론은 비등했고, 남침 위기감이 사회전반으로 확산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의 위기의식을 가라앉히기 위해 북한이 남침해오

면 강경하게 대처할 것이라고 단호한 의지를 내보였다. 정부도 국민이

동요하지 않도록 여론을 진정시킴과 동시에 한반도 철군 후 힘의 불균

형을 메워줄 안전보장의 확약이라는 측면에서 미국 행정부에 안보공약

을 요구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남침위기설과 대북 강경대응 입장이 집중적으로 표

명되던 1 9 4 9년 5월 초, 개성, 옹진, 춘천을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 전투

가 발발했다. 특히 개성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는 심각한 위기상황이라고

평가될 만큼 격렬했다. 이 전투는 개성 북서쪽의 2 9 2고지에서 시작됐

다. 발단은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한 국군이 북한군의 진지 앞에 진지를 구

축하자 북한군이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북한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은 국군 제1사단 제1 1연대 예하 제2대대

는 2 9 2고지뿐만 아니라 그 남쪽의 유엔고지, 비둘기고지 마저 빼앗겼

다. 이로 인해 개성이 위협받게 되자 제1 1연대장은 즉시 문산에서 교육

을 받고 있던 중인 제1대대 제3중대와 제4중대를 제2대대에 증원함과

동시에 황해도 연안방면으로 행군훈련을 나간 하사관교육대를 개성으

로 복귀시켜 반격할 태세를 갖췄다.

다음날 특공대로 자원한 용사들이 1 2 : 0 0시 포병의 지원사격 하에 비

둘기고지로 돌진했지만, 북한군의 각 토치카에서 뿜어져 나온 기관총사

격 때문에 목표지점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각 특공대

원들은 오후 1 4 : 0 0시 지정된 북한군의 특화점으로 박격포탄을 들고 돌

입하여 장렬하게 자폭함으로써 마침내 목표물들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

다. 뒤이어 후속 지원된 하사관교육대 병력이 비둘기고지를 탈환했으

며, 이내 2 9 2고지도 무난히 탈환했다.

이를 계기로 개성부근 전투는 북한이 다시 옹진지역을 공격함으로써

크게 확대돼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 벌어졌다. 그러한 상황은 소규모

전투와 포격전을 반복하면서 6·2 5전쟁이 발발하기전까지 이어졌다.

알아봅시다! 6·2 5전쟁사(제1권 배경과 원인)

 

 

 

 

 

 

 

 

[ 2015-11-12, 18:1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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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전무퇴     2015-11-15 오후 5:42
교모함에 혀를 내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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