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열세 번째, 73세의 災難科學 박사가 되다
5·16 革命軍 출신의 검정고시 및 박사학위 취득記(4)아들 녀석 대학동창인 여자 친구가 영어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어, 대학원 영어 교재를 택배로 보내면 이를 한글로 번역해주었다. 도서관에서 중고등학교 학생들과 어울려 번역교재가 때에 찌들어 번들거릴 정도로 공부했다. 웬만큼 자신감을 가지고 다시 영어반에 등록하면 영어교재가 다른 교재로 바뀌는 것이었다. 다시 바뀐 교재를 아들 녀석 여자 친구에게 번역을 받아 공부를 지속했다. 또 다시 영어반에 등록해 보니 교재가 또 바뀌었다. 이렇게 3년여에 걸쳐서 공부한 나의 영어 실력은 점차 늘기 시작했다.

吳尙煥(체험수기 우수상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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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도서관에서 하루 10시간씩 공부

갑자기 불어 닥친 IMF 사태로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게 되었다. 자살하는 사람, 노숙자로 거리로 나가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로 많았다. 퇴직하면서 받은 약간의 퇴직금으로 당분간 먹고사는 것은 해결해 가리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무작정 시립도서관으로 출근을 했다. 30여 년 동안의 기계 설비분야에서 근무한 경력으로 감리회사의 취업문을 두드리니 공조냉동 기계기사자격증을 요구하는 회사가 있어 약 10개월여 열심히 공부해 취득에 성공했으나 취업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1996년도에 취득한 소방 기계설비 기사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어, 이를 바탕으로 소방 설비기술사를 취득하면 再起(재기)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이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때가 1999년 초이니 우리 나이로 쉰아홉이 되는 때였다.

소방 설비기술사국가기술자격시험의 등용문은 무척 좁고 험난하다. 합격률이 2~3%대로매 시험의 1차 필기시험 합격자가 2~10명 안팎의 어려운 관문이었다. 응시자격은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소지자 또는 국가기술자격 1급 기사자격 취득 후 해당 분야에서 4년 이상 실무를 경험하여야 된다. 나는 중졸 학력이었지만 열관리기사를 취득하고 4년 이상(18)의 실무경력자이어서 응시자격은 충족되었다.

최신 핵심소방기술이라는 950여 페이지에 달하는 시험서를 준비하고 소방기술사 학원에도 나가 강의를 열심히 들었지만 강의를 들어도 소화해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 학원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도서관에서 최신 핵심소방기술과 씨름을 계속했다. 1년여를 공부한 후에 다시 기술사학원에 나가니 강의를 들으면 이해가 되고 가끔은 난해한 질문도 해서 강사 선생님을 난처하게 해드리기도 하였다. 한글과 한자 혼용의 서브노트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이를 5회에 걸쳐 수정작업을 진행했다. 서브노트를 읽고, 쓰기를 반복하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른 아침 시립도서관 문을 개방하기 전에 맨 먼저 도착해서 1번으로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입장을 하는데 이는 매일 창가의 고정된 좌석을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휴식시간을 제외하고 책상에서 공부하는 시간을 110시간 목표로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46개월 동안(공조냉동 기계기사 준비시간 포함), 공휴일은 물론 설날에도, 추석날에도, 나의 환갑날에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명절날에는 시립도서관이 개방을 하지 않아 안양 과학대학교 도서관으로 나갔다.

국가기술 자격시험은 매년 2회에 걸쳐 시행이 되었다. 나는 공부를 하면서도 이런저런 갈등으로 고뇌했다. 나의 머리 반쪽은 이렇듯 어려운 관문을 기라성 같은 젊은 후배들과 경쟁에서 고령과 중졸 학력 게다가 196525세 때의 장질부사질환으로 인한 2회에 걸친 () 수술, 다시 1990년도(50)에 담석증으로 쓸개를 제거하는 수술 등 세 번에 걸친 전신마취수술을 경험한 건강상태 등의 핸디캡을 극복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나머지 머리 반쪽으로는 나는 중학교 시절 전교에서 수학공부를 제일 잘하는 학생이었는데하며 열심히 노력하면 극복해낼 수 있으리라는 의지로 버텨냈다.

최신 핵심소방기술이라는 950여 페이지의 내용을 거의 숙지한 후에 漢字混用(한자혼용)으로 작성한 서브노트를 20여 회 쓰기를 반복하는 노력, 그동안 사용한 볼펜을 모아두었는데 약 10여만 원어치에 해당하는 물량이었다. 시험에 응시하는 날에는 하루 종일 논문식 시험지와 씨름하다 보면 기진맥진한다. 나는 한자混用(혼용)으로 된 서브노트 쓰기 공부가 몸에 배어 시험서 작성에서도 한자를 많이 사용하였다. 학원 강사선생님께서 한자를 많이 사용하면 요즈음 채점위원들이 한자를 잘 몰라 채점에서 불이익을 받는다고 조언했지만 습관이 되어 시정하지 못했다. 1개월 후의 필기시험 발표를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계속해서 공부했다. 낙방하면 실망 속에 하루를 쉬고 다시 기운을 차려 도서관으로 나갔다.

2000년 봄 허리 인대 늘어나 한 달간 공부 중단

어느 정도 목표지점의 9부 능선쯤에 와있던 2000년 봄쯤인 어느 일요일 아침에 도서관에 나가기 위해 기상하는 시간에 갑자기 허리 통증이 심해서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구급차에 실리어 한방병원 응급실로 입원해 MRI를 촬영해보니 장시간 공부하는 과정에서 책상자세가 불량한 탓으로 허리 인대가 늘어나는 손상을 입은 것이었다. 침술 치료 등의 입원치료를 받는 등 1개월여의 기간 동안 공부를 중단하게 되어 시험응시도 결시하게 되었다.

학원 선생님께서는 거의 합격수준에 도달했다고 격려도 해 주시었고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결시한 시험에는 총 14명이 합격했던 바 이 역시나 결시한 나의 不運(불운)이었다. 허리통증이 회복되고 다시 공부를 지속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드디어 2001년 가을에 총 4명이 합격하는 합격률 2.8%의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제2차 시험인 면접에서 苦杯(고배)를 마시게 되었다.

면접시험에서 나는 수십여 년 간의 실무경험과 탁월한 이론으로 달변(達辯)의 답변을 했으나, 면접관 두 명 중 한분의 교수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시고 능숙한 답변이 대단하시다고 침이 마르듯 칭찬을 하시는 반면 다른 한분의 면접관은 나의 답변에 불만족스런 태도였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은 그는 中卒 학력으로는 소방기술사가 될 수 없다는 나름대로의 偏見(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면접관 두 분 모두 만장일치로 합격점수를 주어야 통과되는 규정에 의해 중졸 학력은 여기에서도 작용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면접에서 드디어 합격

필기시험에 합격이 되면 2년간 유효해서 6개월을 대기하면서 시립도서관에 나가 다른 종목인 건축기계설비기술사공부를 하였다. 이 종목은 내가 30여 년간 실무를 경험한 탓으로 쉽게 생각이 되어 처음 시험에 응시하고 합격되리라는 자신감으로 필기시험발표 날을 기다렸다. 공교롭게도 평소에는 30여 명씩 합격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합격자가 단 4명에 불과했고 나는 落榜(낙방)했다. 그러나 소방 설비기술사 면접에서 당당히 합격이 되었다.

두 분의 면접관께서는 나의 수십여 년의 실무경력과 이론을 겸비한 실력에 만족스러워하시었다. 이렇게 해서 산전수전 끝에 2002527일자로 소방 설비기술사국가기술 자격증을 취득했다. 매일경제신문, 한국경제 신문, 동아일보 등 주요일간지에 기술사합격자 발표가 되고 나는 전국의 전 종목 기술사합격자 중에서 최고령 합격자로 신문기사에 실리게 되었다. 이공계 분야에서는 취득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시험에 고령과 중졸 학력의 핸디캡을 딛고 우뚝 일어서게 되면서 화재·소방분야에서 立志傳的(입지전적)인 사람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환갑 넘기고 다시 취업전선으로

소방 설비기술사자격을 취득한 이틀 후 G종합건축사사무소에서 입사면접을 치르고 다음날인 200261일부로 출근하게 되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46개월간 동안을 불굴의 용기와 투지로 萬難(만난)을 극복하여 전화위복의 再起에 성공한 것이었다. 직급은 理事(이사)에 불과했지만 연봉은 부사장과 동급이었다. 이곳에서도 텃세가 심했다. 더욱이 중졸학력인 자가 연봉은 부사장과 맞먹으니 질투와 시새움의 눈초리들이 번뜩임을 느끼면서 눈칫밥 먹는 회사생활을 지탱해 나아갔다.

63세에 高卒 검정고시에 도전

평생을 중졸 학력으로 살아오면서 진절머리 나도록 당하는 수모로부터 벗어나 이를 극복해서 내가 죽는 날 미소를 지으면서 을 마감하겠노라는 決心을 하게 되었다. 63세의 나이에 안양시에 위치한 검정고시학원에 등록하고 열심히 공부한 결과 3개월여 만에 경기도에서 시행하는 고졸학력검정고시를 통과하였다. 다음해인 20043월에 서울산업대학교(현재의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에 04학번으로 야간반에 입학을 했다. 안양시의 평촌 신도시에서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학교까지는 먼 거리이어서 안양 평촌 신도시의 아파트를 매각하고 서울 동작구 사당동으로 전세를 얻어 이사했다.

獨學士 학위를 받다

엔지니어로서 최고의 자격인 기술사를 소지하고서도 중졸 학력으로 인한 멸시와 수모를 곳곳에서 감내하면서 나는 몇 차례에 걸쳐서 회사를 옮겨 다녔다. 대학과정 1학기를 종료한 여름방학 중에 교육부 산하의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시행하는 학점은행제도에 의한 獨學士(독학사) 과정을 알아보니 학사졸업에 필요한 학점은 140학점이었다. 나는 여러 가지의 국가기술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어 그것으로 학점을 계산해보니 200학점, 그리고 1학기 중 취득한 학점 21점을 포함하면 合計 220점 정도가 되었다. 학점은행제에 의해 학사학위를 취득하려면 기본적으로 사이버대학에서 교양과목 18학점을 이수하여야 했다. 그리하여 지도교수님과 의논하여 독학사 과정을 밟기 위해 서울산업대학교를 자퇴하기로 했다.

이후 사이버대학의 인터넷 교육으로 윤리도덕과목 18학점을 이수하고 한국교육개발원에서2005. 2. 17일에 건축설비공학 獨學士 학위를 받게 되었다.

67세에 방재공학(防災工學) 석사

65세가 되어 독학사 학위를 받고 나는 다시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과학대학원 방재공학과 석사과정(야간반)에 입학했다. 동기생 중 고위직 소방간부가 왕 형님이라 부르면서 나는 대학원에서 왕 형님이란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나는 충북 청주시에 위치한 40층 아파트에 소방감리원으로 근무하면서 저녁이면 승용차로 청주에서 중부고속도로를 달려 서울 청량리의 시립대학교로 등교하는 苦行(고행)26개월 동안 지속했다. 단 하루도 결석하지 않았다. 졸업에 필수시험과목인 외국어시험은 영어실력이 부족해 일본어를 택했다. 시험과 졸업논문도 통과되어 67세가 되는 2007822일에 석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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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과정 대학원을 졸업하고 보니 무언가 허전해서 퇴근시간에 청주시내의 일본어 학원 회화반에 등록을 했다. 나의 출생지는 일본이며, 剋日(극일)을 하려면 일본어도 알아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원의 지도교수님과 몇 분이 함께 저녁식사하는 자리에서 뜻밖에도 교수님께서 재난과학 박사과정의 입학원서를 내라고 권유하시는 것이었다.

동시에 졸업논문 제목을 소방방재 분야의 규제개혁에 관한 연구로 정해주시면서 이러한 제목의 논문을 다른 사람은 쓸 수 없다고 하시었다. 교수님의 권고에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한편으로는 한평생을 살면서 중졸 학력의 설움과 수모를 겪어 온 과거를 돌아보며 마침내 원서를 제출하겠노라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석사학위를 받고 1년이 경과된 200932일 나는 69세의 나이에 대망의 서울시립대학교 일반대학원 재난과학 박사과정에 제3기로 입학했다.

현재까지 이공계에는 공학박사는 많이 배출이 되었으나 생소한 災難科學(재난과학) 박사라는 명칭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였다. 이때까지 국내에는 단 한 명도 재난과학박사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인천광역시의 송도글로벌대학캠퍼스 신축공사 현장과 청주시 복대동에 위치한 두산위브지웰시티 45층 아파트 신축공사장 등을 오가며 소방감리원으로 근무하면서도 장거리 대학원 통학을 멈추지 않고 공부를 지속하였다. 건축물 신축현장에서 일하면서 장거리 교통편 등 26개월간의 통학 끝에 드디어 2011620일에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그러나 졸업을 하기까지는 높은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다.

3년 공부로 英語의 벽을 넘다

나의 영어실력은 밑바닥이다. 50여 년 전 중학교 시절 3년 동안에 배운 콩글리시 영어 실력이 전부였다. 토익 시험 750점 이상이거나 대학원 영어강습반에 등록하여 2~3개월의 과정을 마치고 영어시험에 응시해 80점 이상을 취득해야 합격하는 엄격한 대학원 학칙으로 나는 고뇌의 늪에 빠지게 된다.

대학원 영어반에 등록을 하고 열심히 등교해서 강의를 들었으나 나는 눈 뜬 장님처럼, 난청환자처럼 무슨 내용인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막연함의 블랙 홀 속으로 함몰되어 갔다. 마침 아들 녀석 대학동창인 여자 친구가 미국에 유학해서 5~6년 동안 체류하면서 대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영어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어, 영어 교재를 택배로 보내주어 이를 한글로 번역해주면 번역교재로 다시 영어공부를 진행하였다.

공휴일에 다시 도서관에 나가 중고등학교 학생들과 어울려 번역서가 때에 찌들어 번들거릴 정도로 공부했다. 웬만큼 자신감을 가지고 다시 영어반에 등록하면 영어교재(英語敎材)가 다른 교재로 바뀌는 것이었다. 다시 바뀐 교재를 아들 녀석 여자 친구에게 번역을 받아 공부를 지속했다. 또 다시 영어반에 등록해 보니 교재가 또 바뀌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2회에 걸쳐 진행되는 영어시험에 80점 이상을 받아야 한다. 바뀐 교재였지만 약 3년여에 걸쳐서 공부한 나의 영어기초실력이 구축되었는지 나름대로 시험을 잘 마치었다.

영어교수님께서 강의 종료 후 잠깐 남으라 하시었다. 영어교수님께서는 나의 영어실력을 잘 알고 계셨다. 밝은 미소를 지으시면서 오 선생님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존경스럽습니다. 이번에 응시한 시험에 합격이 되시었으니 이제 학위논문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영어공부에 전념한 지 만 3년이 경과되어서이다. 영어시험에 합격했다는 소문이 퍼지니 지인들로부터 전화가 쇄도했다.

형님 영어시험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과연 형님답습니다. 형님은 후배들의 멘토이십니다.” 지도교수님께서도 매우 기뻐하시었다. 지도교수님께서 박사과정 지원을 독려한 마당에 수료를 하고도 졸업을 시키지 못하니 스스로도 많은 부담감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소방 설비기술사로서 왕성한 사회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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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내의 화재, 소방분야에서 현업에 활동하는 最高齡(최고령) 엔지니어였다. 나이 많은 것은 오히려 장점이었다. 화재, 소방 관련학회(한국 화재소방학회, 한국화재감식학회, 한국화재정책학회, 한국소방 기술사회, 한국방재안전학회) 등에서 감사 또는 기술이사, 고문 등의 중책을 맡아 학회 내 비정상 행위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바른 말하는 어른으로서의 입지를 확고부동하게 지켜 나갔다.

한편으로는 소방방재청의 소방정책 및 제도나 운영상에서도 이런저런 助言(조언)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때로는 소방방재청장님이나 각 시도 소방재난본부장님, 소방방재청의 국, 과장님, 관할 소방서장님을 비롯해서 관련 분야의 국회의원님께도 직접 면담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현대 한국 소방인물사 편찬위원회로부터 대한민국 소방을 빛낸 현대 한국 소방 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災難科學(재난과학) 박사학위를 받다

논문심사 규정에는 학회지 등에 1편 이상의 논문게재 실적이 있어야 했다. ‘한국 화재소방학회·관간의 갈등 해소를 위한 소방제도 개선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투고를 하였으나 소방제도 관련 논문심사위원은 학회편집이사인 고위직 소방간부가 심사하는 바, 논문내용에서 소방방재청의 아킬레스건을 과도하게 건드린 결과로 그만 탈락이 되었다.

나는 2002527일 소방 설비기술사를 취득한 이래 10여 년간 줄기차게 소방방재 분야의 규제개혁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지만 관계당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화재소방 관련제도 및 규제들은 곳곳에 개선되어야 할 요소들이 많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규제개혁을 외치지만 오히려 국민이나 기업에 불편한 규제들은 더욱 양산되었다. 고심 끝에 나는 충북대학교 내의 한국위기관리학회소방 설비분야의 책임감리 범위에 관한 비교연구라는 논문을 투고하여 몇 차례에 걸쳐 수정과정을 거친 끝에 통과가 되었다.

당초 지도교수님께서 박사과정 대학원에 입학을 권유할 당시에는 논문 제목이 소방방재 분야의 규제개혁에 의한 제도개선이었다. 2년여 동안 이와 관련한 2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을 작성했으나, 심사위원회의 예비심사 과정에서 많은 지적을 받았다. 학위논문이라기보다는 저널지 등에 게재할 수 있는 자기 주장이라는 지적이었다. 지도교수님의 지도를 받아 10여 년간의 소방공사감리 현장 경험을 토대로 논문 제목을 소방공사의 감리제도 개선에 관한 연구로 수정했다. 선행 관련논문 사례들과도 비교분석하라는 지침을 받고 학위논문작성에 있어서의 여러 기법들을 재정립하여 224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을 완성하였다.

최종심사에서 심사위원님들로부터 훌륭한 논문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되었다는 칭찬을 받았다. 나는 40여 년간의 磨斧作針(마부작침: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의 노력으로 晩學(만학)의 끝자락에서 재난과학 박사학위를 수여받게 되었다. 20014221일 졸업식에서 학위를 받고 가족들과 기념사진도 찍었다. 함께 학위를 받은 재난과학박사는 모두 다섯 명이었다. 나는 서울시립대학교 일반대학원 재난과학박사과정 제3기로 입학하여 국내에서는 열세 번째로 만 73세의 재난과학박사로 탄생한 것이다.

행복한 노후

나의 가족은 아내와 아들, 딸 그리고 친손자 준휘(7) 찬휘(4)과 외손녀 현영(11) 등 모두가 안양 평촌 신도시에 거주하고, 나는 충북 청주의 45층 아파트 신축현장 인근에 월세로 원룸에서 거주하며 주말에 집을 오가는 주말부부 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이런저런 건축물 현장의 업무를 비롯한 여러 관련학회에서 사회활동을 하고 있어 바쁜 일상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주말이 가까워오면 귀여운 손자 녀석들이 무척 보고 싶다. 지난해 여름휴가와 추석 연휴에는 아내와 딸내미, 외손녀딸(현영)과 함께 베트남 다낭과 사이판여행을 다녀왔다. 여섯 살 때부터 원어민 영어유치원을 다닌 현영은 해외여행에서 영어소통이 원활한 것을 보니 언어교육은 어릴 때부터 하는 것이 최선이다. 아들 녀석은 10여 년 전에 조그만 회사를 창업을 해서 최근에는 어느 정도 정착되는 듯하고, 딸내미는 수년 전에 동업자와 함께 무선전력 관련 벤처기업을 창업했으나 아직도 정착하지 못하고 고전을 면치 못하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나의 老後(노후)는 행복하다고 自評(자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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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두산위브 지웰시티 45층 아파트 신축현장에서

80세까지 現業에서 활동할 계획

나는 생활 중에도, 사회생활에서도 제반 법규와 위계질서를 지키며 모범시민으로 살아왔노라고 자부(自負)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속담처럼 나는 젊은 시절의 고생이 약이 되어 轉禍爲福(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고 위기가 올 때마다 이를 기회로 역전시키는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올해 우리 나이로 75세이다. 80세까지는 現業(현업)에서 활동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내가 매월 수령하는 국민연금은 561810원이다. 그리고 월남참전수당 18만 원을 합해서 741810원이다. 나는 人生黃昏의 들녘에서 남은 여생동안, 죽는 날까지 건강을 유지하여 현업에서 일하면서 노후의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하면서 계속해서 무딘 바늘을 갈고 닦을 것이다.

나는 30여 차례에 걸쳐 직장을 옮겨 다니느라 우리 아들 녀석은 초등학교를 다섯 곳을 옮겨 다녔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위장전입을 하지 않았고, 더욱이 석·박사과정의 표절논문 시비에도 걸릴 일이 없다. 평생 월급쟁이였으니 탈세할 일도 없었고 돈이 없으니 투기할 능력도 없었다. 밑바닥 인생이니 그 누가 뇌물도 주는 일 없으니 청렴결벽할 수밖에 없다.()

 

[ 2015-12-04, 14:2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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