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아이들은 안 된다’는 그 班에서 시범수업
6·25 때 부모 잃고 자수성가해 女교장에 오른 이야기(2)/지나고 보니 교사일 때, 예쁜 핸드백을 들어본 적이 없고, 큰 남자 가방에 칠판 등을 넣고 들고 다녔다. 교직이야말로 사명이 없으면 감내하기 어려운 ‘職(직)’이다.

朴昌鎭 체험수기 우수상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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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에 아이 낳고 2월 개학 때 출근

교육대학과 사범대학은 대학 과정에서 실제 학교에 나가 수업을 참관하고 수업을 하며 교사로서의 경험을 익히는 과정이 있다. 교육대학을 졸업하면 초등학교 교사가 된다. 사범대학은 중등교사로 나가지만 학생의 성장 발달 과정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초등학교에서도 실습을 하게 된다. 나는 교사 생활 22년 동안 실습 학교 근무를 14년간 했다. 교대, 사대 부속학교 교사는 초등이지만 전공과목의 교과 연구 실적이 있어야 한다. 실습생들에게 시범 수업을 항상 공개하기 때문이다. 춘천교대부속 시절엔 학급당 30여 명의 실습생이 1~2개월 계속하고 나면 거의 탈진 상태가 된다. 지도교사의 시범수업은 물론이고, 실습생들의 수업지도와 수업협의 평가 실습錄(록) 등을 보려면 전등을 켜고 하다가 미처 끝내지 못한 과제와 출제 등은 항상 집에 싸들고 와야 했다.

실습학교 지도교사의 사명은 실습을 통해 미래의 교사들에게 교사로서의 사랑과 헌신의 자세를 심어줄 수 있는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실로 책임이 막중하다. 현장실습을 통해 아동에 대한 이해와 철저한 수업준비, 시간 관리이며 협의회를 통해 실습생들이 앞으로 교사로서의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하고 나아갈 수 있도록 지도교사는 롤모델(본보기)이 되어야 한다.

과거 사범학교만 나오고 교사가 된 사람은 적어도 교대생과 학력이 같아야 하기에 방학마다 교대에 부설된 교육대학 과정을 이수하여 정식 졸업을 했다. 1950·60년대엔 여교사는 결혼을 하면 대개 사표를 냈다. 춘천교대부속에는 결혼을 한 여교사는 없었다. 더욱이 출산한 여교사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그곳에서 결혼을 했고 어린 애도 둘을 낳았다. 첫 아이는 1월에 낳고 2월 1일 개학과 더불어 출근해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춘천은 겨울이 몹시 춥다. 産後(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해 몸이 붓고 아팠지만, 방학에 출산하여 학교와 담임하는 반 어린이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은 것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교생실습 두 달이 끝나는 마지막 날, 수업 협의회를 마치고 나니 오후 3시경이었다. 1967년 7월 15일을 토요일로 기억하는 것은 학교에서 집이 가까웠지만 몇 번씩 쉬어가며 겨우 걸어 왔기 때문이다. 저녁내 진통하고 이튿날 일요일 새벽(7월 16일)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닷새 후 7월 21일 방학식하는 날 학교에 나가 통지표를 나누어 주고 1학년이라 물놀이 등 안전 지도를 하고 방학이라 한 달을 쉴 수 있어서 고마웠다. 그 시대는 나뿐 아니라 다 그랬다. 내 친구는 횡성 시골에서 근무할 때, 친구와 함께 퇴근하는데 진통이 와서 모르는 집에 들어가 사정을 얘기할 사이도 없이 어린애를 낳았다. 그때는 産前(산전) 휴가는 생각지도 못하고 우리는 낳기 전날까지 근무했다. 다리가 퉁퉁 부어도 앉아서 수업하지 않았다.

“선생님을 위해 빈자리를 채우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아동문학가이시며 중앙도서관장, 문교부 편수관을 하셨던 춘천교육대학의 최태호 학장님은 실습기간 중 부속국민학교에 자주 나오셔서 지도교사의 시범수업이며 실습생들의 수업을 참관하시고는 수업이 잘 이루어지면 만족해하시고 격려해주신다. 학장님은 방학이면 제자들이 근무하는 산간벽지이고 어디고 찾아가셔서 격려해주시는 참 스승님이시다. 학장님은 남편과 떨어져 있는 나를 안타까이 생각하시어 서울로 보내주셨다.

1969년 12월에 갑자기 발령이 났기 때문에 김칫독을 파서 이사를 했다. 서울 매동학교로 발령이 났다. 매동학교는 서울교대의 代用(대용)부속이었다. 서울교대부속국민학교만으로는 많은 교대생을 다 수용할 수 없어서 서너 개의 공립학교를 선정하여 실습생을 받기로 했다. 교사도 선별해서 배정을 했다. 그러나 일반 공립학교의 교사는 실습학교 지도교사로서의 훈련이 되어있지 않아 처음에는 힘이 들었던 것 같다. 그 당시 매동은 대용부속 지정을 그해에 받았다.

발령장을 들고 교장 선생님께 갔더니 “교대부속에서 오는 선생님을 받기 위해서 9월부터 빈자리를 채우지 않고 기다렸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1969년 겨울이었다. 이듬해 4월, 5월 4주간에 걸쳐 실습생이 나왔다. 나는 당연히 시범수업을 내가 해야 하는 줄 알았기 때문에 강당에서 200여 명의 교생을 모아놓고 4월, 5월 두 차례 수업을 했다. 6월에 셋째 아이를 출산했으니 만삭의 몸이었다.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어떻게 하면 수업을 잘할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수업 협의회에서는 단위 시간의 목표를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달성하기 위해 수업者(자)는 끊임없는 연구를 해야 함을 강의했다. 한 번은 단위 시간의 목표를 16절지 한 장 가득 쓴 것을 잘 된 수업 案(안)이라고 해서 놀랐다. 학습 목표는 그 시간에 꼭 이뤄질 수 있는 것을 한두 개 세워, 지도 방법을 연구해야 함을 실습생들에게 주지시켜 주었다. 
 
1학년 담임의 임무

다음 해는 1학년을 담임했다. 1학년은 길게 공부해야 하는 학교의 시작이다. 1학년 담임은 어린이들이 학교를 재미있는 곳, 아침이면 빨리 학교에 가서 선생님과 친구들이 보고 싶은 곳, 그리고 공부시간, 선생님과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성공적인 1학년 담임이다.

1학년은 우선 한글을 다 알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답답한 것은 경험이 많은 1학년 담임일지라도 ‘받아쓰기’만 잘하면 다 가르쳤다는 것을 볼 때, 그것은 교육 방법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불러주고 받아쓰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서울시 교육위원회에서 ‘어떻게 하면 현장교육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라는 의미에서 연구교사를 선정한다기에 나는 연구계획서를 내기로 했다. 2회째다.

나는 ‘1학년 아동의 語彙(어휘) 확충을 위한 학습지도의 연구’로 계획서가 통과되어 한 학기에 한 번씩 두 번 실제 수업의 검증을 위해 검증단이 나와 평가하고 11월에 연구 보고서를 제출했다. 물론 그 바쁜 중에도 교생지도 수업은 계속했다. 1학년 아이들은 제법 긴 글을 쓸 수 있고, 독서량도 많아졌다. 그 공로로 국어과의 ‘금상’을 받고, 시교육위원회의 추천으로 서울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로 발령받았다.  

예쁜 핸드백 대신 큰 남자 가방을 들고 다니다

나를 발탁해 준 이혜우 교장 선생님은 내 교직 생활에 가장 존경하던 분이다. 교사로서, 교감, 교장 관리직으로 근무하는 동안 어떤 일을 결정할 때에 ‘그분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늘 생각했다. 이혜우 교장님 아래서 사대 부속국민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담임교사는 실습생이 있을 때는 항상 연구수업을 한다. 나는 실습을 철저히 시키는 편이다. 서울사대 교육과를 나온 남편은 ‘실습’ 기간은 평생 교직 생활하는 동안 가장 열심히 하는 시기임을 강조한다.

담임교사는 실습으로 인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하는 동안 실습생들에게 얻는 것도 있다. 한 교생이 한 아동을 ‘사례연구’를 하게 하여 도움을 받기도 한다. 이때 미처 몰랐던 그 아동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기 때문이다. 서울사대생들은 中等(중등)에 나가지만 初等(초등)에서도 열심히 실습에 참여하는 모습이 좋았다. 부속학교는 교생실습뿐 아니라 새교육과정을 개정하고 교과서를 바꿀 때 先手(선수) 학습을 통해 전국적으로 교과별로 공개하고 토론한다.

나는 교육부 ‘국어과 교육 과정 심의위원’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학습량은 적당한가, 소재의 선택은 적절한가, 학년의 수준에 적합한가 등을 심의한다. 부속학교는 공립학교에 비해 업무량이 많은 편인데 모두 열심히 일한다. 교생실습이 끝날 즈음엔 입술이 부르틀 때가 여러 번 있을 만큼 전력투구를 해야 한다. 지나고 보니 교사일 때, 예쁜 핸드백을 들어본 적이 없고, 큰 남자 가방에 칠판 등을 넣고 들고 다녔다. 교직이야말로 사명이 없으면 감내하기 어려운 ‘職(직)’이다.

심청전으로 능력을 인정받다

서울사대부국은 격년으로 한 해는 체육대회, 또 한 해는 학예예술제를 개최한다. 附國(부국)생활 2년 차 1973년 예술제의 총책임을 맡게 되었다. 국어과 담당이기 때문이다. 2년 전, 학교는 ‘백설공주’ 오페렛타를 성공적으로 공연했다고 했다. 나는 무엇을 선택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34세의 내 경험으로는 버거운 짐이었다. 나는 퇴근 후 국립극장에 가서 연극을 보기 시작했다. 어린이에게 적합해야 하고, 교육적인 시사점이 있어야 하고 가장 중요한 ‘감동’을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당시 유명한 극작가이신 신봉승 선생님도 찾아갔다. 교장 선생님은 방송결재를 받으러 들어가면,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맞아 주셨다. ‘해낼 수 있을까’라는 점을 내가 느낄 수 있었다.

부속국민학교에 처음 발령받았을 때, 교장 선생님은 나에게 ‘선생님은 무엇을 잘하는가, 아니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셨다. 나는 ‘학교 방송’과 ‘문예지도’라고 했다. 교장 선생님은 교장실 옆에 ‘방송실’을 만들어 주셨다. 나는 ‘누가 누가 잘하나’ 해설이 있는 음악 이야기 등 활기차고 재미있게 해 나갔다. 나는 교직 생활 중 무엇을 제안이나 지시받았을 때 단 한 번도 ‘못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교장 선생님은 학교가 활기있게 움직이는 모습을 만족스러워 하신 것 같다. 나는 고민하던 중 어린이의 심성에 ‘孝(효)’의 마음을 심어줄 수 있는 ‘심청전’을 하기로 결심했다.  

결재를 받고 직원회에 발표를 했다. 사극이라 무대장치며 힘든 점이 있지만, 나의 의사를 존중해 ‘심청전’을 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여러 책을 읽고 어린이에게 맞는 오페렛타 대본을 써내러 갔다. 대사와 노랫말로 작곡은 서울교육대학의 유덕희 교수님께 부탁했다. 음악 담당 선생님에게 합창 지도를, 무용은 무용 담당 선생님께, 연극은 내 班(반) 아동의 삼촌이 연극하는 분이 있어 도움을 받았다. 어려운 무대 장치는 우리나라 국정교과서 4~6학년 사회과의 삽화를 그리고 있는 강태현 선생님께서 맡아주셨다. 배역에 맞는 아이들을 각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선발하고 연습에 들어갔다. 모든 선생님이 열심히들 협력했다.

발표가 가까웠을 때는 거의 밤 10시까지 일했다. 나는 밤에 盲啞(맹아) 학교도 들려 자문을 구했다. 심청전을 선택한 데 대해 너무도 고마워했다. 나 자신도 처음으로 장애를 가진 이에 대한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공연 날이 다가왔다. 모두들 합심해서 노력한 덕분에 대성황이었다. 강당엔 학부모와 어린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나는 조명이며 연출을 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가을인데도 속옷이 다 젖어 있었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지기 전 노래를 애절하게 부를 때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고, 청이가 황후가 되고, 아버지가 눈을 떴을 때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합창도 멋있고 배꾼도 잘하고 무대도 화려했다. 학부모님들은 그간 어느 때보다 감동적인 연극이었다며 학교의 예술제로는 아깝다고 했다. 교장 선생님께서 “수고했다”는 말씀을 하실 때 눈물이 났다. 모든 선생님들이 내 일처럼 할 마음이 되어 적극적으로 협력해 주신 데 대해 마음 깊이 진심으로 감사했다.

서른아홉에 군자국민학교 교감

1978년 9월 나는 서른아홉의 나이에 군자국민학교의 교감으로 승진 발령받았다. 교장님은 ‘과수원 길’을 작곡하신 김공선 선생님으로 나의 사범학교 선배님이시기도 하다. 젊은 나이어서 교장님도 얼마간은 걱정하셨을 것이다. 주임 선생님 열두 분 중 제일 젊은 한 분이 나와 동갑이고 모두 연배였다. 나는 출근하면 자리에 앉지 않고 서 있었다. 주임 선생님 말고도 연세 높은 분들이 많아 서서 인사를 주고받는 것이 편했다. 학생 수가 삼천 명이 넘는 큰 학교였다.

나는 업무를 하나하나 익혀가며 학교운영계획서를 작성하던 중 연수계획이 있었다. 학년에서 시범 수업자를 선정하는데 문제에 부딪혔다. 어떤 학년에서는 제비를 뽑고, 또 어떤 학년에서는 교대를 갓 졸업한 선생님을 선정했다. 재수 없이 걸리는 것이 연구수업이고, 경력이 적어 주임이 시키는 대로, 싫지만 할 수 없이 하는 것이 시범수업이었다. 나는 이렇게 선정하면 안 된다고 했다. 선생님들의 ‘수업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 하나라도 배울 수 있는 시범수업이 재수 없어 걸리는 수업이어서는 안 된다. 경험이 없는 갓 졸업한 선생님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당시 일본에서는 60대의 교사가 시범수업에 참여한다. 노련한 수업 기술을 젊은 교사들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1학년을 담임한 선생님이 내게 “교감 선생님은 부속국민학교에서 근무하셨으니까, 그곳 아이들은 똑똑하고 발표도 잘하지만, 이곳은 안된다”고 했다. 답답했다. 교감의 말에 할 수 없이 시범 수업자를 경력이 좀 있는 선생님으로 바꾸어 보기로 하고, 모두가 못한다고 해서 난감해 하는 주임도 있었다. 나는 고민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개선해 나갈 것인가.

솔선수범

교장 선생님, 연구 교무주임과 함께 의논했지만, 관례가 그랬기 때문에 할 수 없지 않느냐고 했다. 나는 생각했다. 교감인 나부터 솔선수범한다면 재수 없어 걸리는 것이 연구 수업이라는 인식은 달라지지 않을까. 나는 시범 수업을 하기로 했다. 교생 실습 학교에서, 연구 학교에서는 수업을 공개했지만, 그때는 ‘내 班(반)’이었다. 그러나 수업은 수업자에게 달렸지, 아이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1학년 국어과 수업을 하기 위해 수업案(안)을 작성하고 자료를 만들고, 학급 선택은 ‘이곳의 아이들은 안 된다’고 한 그 반을 선정하고 담임선생님께 좌석표를 붙여달라고 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나는 다른 선생님이 우리 반에 오신다고 말했다. 나는 전교 선생님들과 함께 그 교실에 들어갔다. 나는 이름을 불러가며 발표를 잘했을 때 칭찬을 해주면서 재미있게 수업했다. 아이들은 즐거워하며 공부했다. 되도록 여러 아이들에게 칭찬을 해주었다. 수업이 끝날 때 한 학생이 “선생님 언제 또 와요?” 하고 물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과 내게 많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나는 학습지도안, 발문계획, 학습 자료를 1학년 선생님들에게 넘겨주었다. 선생님들은 모두 돌아가면서 자료와 학습지도안대로 수업을 했더니, 재미있게 잘되더라고 했다. 좋은 수업이란 철저한 준비다.

그간 연구수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있었다. 수업 평을 하기 위한 평이라던가, 연습수업이란 생각들을 한 면도 있었다. 수업은 소박하고 진실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선생님들은 조금은 이해했을 것이다. 그 후 시범 수업자는 그 학년에서 수업을 제일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는 선생님들을 선정했다고 했다. 그 변화가 고마웠다.(계속)

[ 2015-12-07, 08:5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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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령초     2015-12-09 오후 12:52
군더덕없이 송이버섯 향내음 같은 신선미를 느낌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여날 때 부터
누군가에 책임을 수반한다고 했던데, 朴昌鎭 선생이야 말로 참 교육자로 책임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여나신 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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