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高普(고보)의 우등생, 일본 영화에 심취하다!
[AP통신 출신 元老 기자의 現代史 증언 (4)] 일본 탄광회사에서 근무하던 先親이 내린 勇斷(용단)

황경춘(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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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은 ‘광복 70주년 現代史 체험수기 현상모집’ 수상자들의 작품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다섯 번째 작품은 황경춘 씨의 手記, ‘해방 직후 美軍 통역으로 근무한 AP통신 기자의 이야기’입니다.

통역에서 교사로

美軍 대장 등 교양 있는 사람들은 제게, 한국과 일본에 관한 많은 호기심을 보이고 그들과 토론도 자주 했습니다. 한 번은 토론 도중 제가 중학교 수학시간에 배운 ‘피타고라스’ 定理(정리)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일본인이 그런 것까지 가르쳐 주었느냐며 놀라기도 했습니다. 부대 내에 있는 여러 신문과 소설책 등도 영어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통역 일로 청춘의 한 때를 허송한다고 걱정하였으나, 영어 실력이 늘고 차츰 사회 물정도 알게 되어 지금은 귀중한 경험을 쌓았다고 自評(자평)합니다.

이 영어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부산에 있는 경상남도 도청 學務課(학무과) 담당 미국인 고문을 분견대 대장이 잘 안다고 소개장을 써 주었습니다. 7월에 부산으로 가 소령인 미국인 고문을 찾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저 자신도 놀랄 정도입니다. 일종의 만용에 가까웠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고향 초등학교나 面사무소에 취직하라는 어머님의 성화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한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소개 받은 美軍 소령을 만나 간단한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후 고향에서 기다리던 저에게 중등학교 영어교사 면허증과 부산공립공업중학교로 부임하라는 사령장이 8월 중순께 우송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저의 1년 동안의 짧은 敎員(교원)생활도 했습니다.


가정史

이제 저의 출생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의 출생지는 일본 후쿠오카(福岡)현의 시골 炭鑛(탄광) 마을이었습니다. 선친은 四男一女(사남일녀) 가정의 3남으로, 바로 위의 형(내게는 伯父)과 함께, 오사카(大阪) 등 각지에서 장사를 하다가, 당시 일본 재벌이었던 미쓰비시(三菱)가 경영하는 탄광회사의 촉탁사원으로 취직되어 노무과에 근무했습니다.

미쓰비시 탄광은 시설과 대우가 비교적 좋은 편이어서, 다른 탄광처럼 인명사고나 도주 등 불상사가 비교적 적었습니다. 학교, 상점가, 공중목욕탕, 병원 등이 가까운 곳에 있어 일상생활에 큰 불편은 없었습니다.

약 200평이 넘는 대지에, 100평 정도의 정원과 광부 합숙소가 붙어있는 사택에서 부모와 二男一女(이남일녀)가 살았습니다. 제가 장남이고 一女는 저보다 다섯 살 위의 누님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건설 현장에서 ‘함바식당’을 운영하셨습니다.

누님과 저는 근처에 있는 일본인 소학교(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좀 조숙한 누님 밑에서 공부하는 저도 약간 조숙한 편이어서, 지금도 그 당시 배운 일본 유행가와 영화배우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누님이 읽는 잡지를 뜻도 잘 이해 못하면서 같이 읽고 누님 친구들과의 대화에 끼어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학교 공부도 잘하게 되어 1학년 3학기에는 부급장(지금의 부반장)도 하고 학예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선친의 깊은 뜻

2학년을 마친 1932년 3월, 선친은 제 외가가 있는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면 평현리로 저를 혼자 데리고 와 남해공립보통학교 1학년에 입학시켰습니다. 외조부, 외조모와 외삼촌 부부가 가난하게 사는 곳에 저 혼자 남기고, 아버지는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저 혼자 데리고 온 선친의 勇斷(용단)도 그렇지만, 홀로 떨어져 살기에 동의한 어린 제 자신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기특한 어린애’라고 칭찬해주었습니다. 선친이 저를 어떤 甘言(감언)으로 설득하였는지는 사실 기억이 없습니다.

우리말을 배워야 한다는 말씀 외에 자세한 전학 이유는 끝내 선친으로부터 듣지 못하였습니다. 선친이 작고하신 후, 저의 전학 이유가 일본인의 차별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고 누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2년 뒤 학업을 계속하는 누님을 뺀 온 가족이 귀국하여, 우리 가족은 다시 한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1학년부터 다시 시작하니까 성적은 졸업할 때까지 우수한 편이었습니다. 한학자인 외조부가 천자문 등 漢文 공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일본 학교에 2년 간 있는 동안 성적이 좋았음에도 한 번도 반장에 뽑히지 않아, 선친의 심기가 불편하였던 모양입니다. 남해에 와서는 1학년에서 6학년 졸업 때까지 줄곧 급장이었고 성적도 수석이었습니다. 선친은 아마 이런 점에서, 어린 아이가 일본인으로부터 받는 민족차별의 서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학교를 옮기는 결정을 내린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친은 일본인 회사에서 조선인 탄광 노동자 관계 일에 종사하면서 민족차별의 슬픔을 수없이 겪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일본 패망 10여 년 전에 이미 일본에 있던 家産(가산)을 정리하여 광복도 되지 않은 고향으로 歸鄕(귀향)했겠습니까.


진주高普로 진학

중국 대륙에서 일본은 침략 전쟁을 대규모로 진행하고 있던 때라, 일본인들의 중국인에 대한 감정은 나빴습니다. ‘시나진(支那人)’이라 하는 일반 명칭보다 ‘챤코로(チャンコロ)’는 경멸하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이 말은 일본이 청일전쟁 승리 후부터 쓰기 시작한 속어로 현재까지도 일부 극우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군국주의 교육이 그때부터 학교에 침투하기 시작해 소학교 1학년 때 ‘나는 군인을 제일 좋아해/얼마 안가 어른이 되면/훈장 차고 칼 차고/말을 타고 당당히…’라는 노래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중국 주요 도시를 점령할 때마다, 축하 행렬이 있어, ‘爆彈三勇士(폭탄삼용사)’같은 군가를 부으며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아이들의 줄넘기놀이 때 부르는 노래에도 중국을 경멸하거나 임진왜란을 뜻하는 ‘朝鮮征伐(조선정벌)’노래가 있었습니다. 이런 노래의 뜻은 나중에 커서 역사를 배우고 난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1938년 3월 남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同年 4월6일 진주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3월에 입학시험을 치를 때 분명히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였는데, 그 사이 일본과 조선의 교육제도를 통일한다고 학교 이름이 바꾼 것입니다. ‘보통학교’는 ‘소학교’로, ‘고등보통학교’는 ‘중학교’로 바뀌었습니다(소학교는 3년 뒤 다시 ‘국민학교’로 바뀜).

‘고등보통학교’는 짧게 ‘高普(고보)’로 불리어 지방에서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시골에서는 한 학교에서 두세 명이 진학할 정도로 희소가치가 있었습니다. 진주에서도 ‘고보생’은 시민으로부터 한결 다른 눈빛의 존경과 어른대접을 받았습니다. 이름이 바뀐 뒤에도 한동안 시민들은 이 ‘고보생’이란 애칭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서울에는 경기 제1고보(지금의 경기고), 제2고보(지금의 경복고) 등 역사 있는 명문 고보와, 보성, 휘문 같은 사립 고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각 道에 몇 개 없을 정도로 귀했습니다. 제가 살던 경상남도에는 동래와 진주에 있을 뿐이었습니다.

경상북도 대구에 官立 사범학교가 있어, 일반 공립학교보다 먼저 입학시험을 가졌습니다. 각 보통학교에서 우수한 학생을 추천받아 시험을 보게 하는데, 저는 예비 신체검사에서  ‘色弱(색약)’ 판정을 받아, 本시험 자격을 얻지 못했습니다. 학비가 무료인 그 학교로 갔더라면, 얼마 동안 박정희 前 대통령과 같은 학교에서 공부할 뻔 했습니다.

진주는 항일운동의 한 중심지로서, 3·1운동 당시 많은 희생자를 냈습니다. 진주고보는 언제나 그 운동의 중심이었으며, 항일운동을 공산계열 단체와 같이한 연유로 공산당원으로 이름을 날린 선배도 많았습니다. 진주농고 출신인 李炳注(이병주) 씨의 대하소설 《지리산》에 나오는 南道富(남도보)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거의 진주고보 출신이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남로당 거물 간첩이었던 朴 모도 진주 출신이었습니다. 

제가 재학하는 중에도, 일본 군국주의에 반항하는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3년 선배들이 조회 때 낭송하는 ‘황국신민서사’ 내용을 개작하여, ‘황국’을 ‘망국’으로 외치는 소동으로 11명이 처벌당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중에는, 광복 후 육군대령으로 제주도 진압사령관으로 갔다가 부하 총에 순직한 사람도 끼어있었습니다. 그 한 학년 아래 선배들은 졸업식 때 받은 일본 황실 始祖(시조)의 위패가 든 소위 ‘가미다나(神棚)’를 두드리며 ‘쾌지나 칭칭 노세…’ 노래를 부르며 집단으로 진주 거리를 행진한 사건으로 체포되어, 주모자 한 사람이 징역까지 산 적도 있었습니다.


일본 영화에 심취

진주에서는 입학 얼마 후부터 戰時色(전시색)이 학교 분위기를 좌우했습니다. 입학 시 배급된 ‘사지’라 불리는 양복 재료로 만들어진 夏季(하게)와 冬季(동계) 교복은 입을 수 있는 한 입게 했지만, 새로 맞출 때엔 국방색 제복으로 바꿔야 했습니다. 모자도 곧 국방색 전투모로 바뀌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체결한 강대국의 軍縮(군축)협정에 따른 기간장교 보충의 한 방편으로 1925년에 공포되었다는 ‘學校敎鍊法(학교교련법)’에 따라, 일본 각급 학교의 군사훈련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만, 우리 조선학교의 교련제도는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필자가 중학에 입학했을 때 교련 과목은 이미 학교 시간표에 들어 있었으며, 현역 배속장교 육군소위가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약 20명 되는 교직원에 조선인 교사는 조선어와 漢文을 가르치던 朴重九(박중구) 씨 한 분 뿐이었으나, 졸업할 때에는 세 사람이 더 늘었습니다. 우리 입학과 더불어 校名(교명)이 바뀔 뿐 아니라 조선어 과목도 없어졌습니다.

2학년에 올라가서는 일본 영화에 심취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유행가뿐 아니라 영화 감상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당시 진주에는 영화관이 두 곳 밖에 없었지만, 학생 출입을 금지하기 위하여 각 학교 훈육 교사가 교대로 감시에 나섰습니다. 우리는 변장을 하여 그들의 감시를 피했지만, 적발되어 처벌을 받는 학생도 많았습니다.

친구 한 명의 집이 마침 영화관 바로 앞에 있어, 그 집에서 같이 숙제를 하다가 시간이 되면 영화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수법을 많이 썼습니다. 영화관 안내원 한 사람이, 이 친구와 안면이 있어 학교 훈육 교사가 나타나면 피신하는 곳을 마련해 주기도 했습니다. 영화관 출입을 그렇게 많이 하면서도 한 번도 적발되지 않은 것도 다행이었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수입금지되기 전의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어 영화팬으로서 매우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격화되는 전쟁

저는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선친 책장에서 당시 서울의 永昌書館(영창서관)에서 발행한 책에서 ‘3·1 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야기를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만세운동은 어릴 때 들은 기억은 있지만, 기록으로 읽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고, 더욱이 임시정부 이야기는 청천벽력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그 책 제목은 기억에 나지 않지만, 요즘의 年鑑(연감) 비슷한 내용으로 조선반도를 중심으로 여러 정보와 지식을 담은 책이었습니다. 당시의 행정구역과 인구, 간단한 역사 등이  실린 책이었습니다. 나중에 진주 하숙집 주인으로부터도 임시정부와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항일운동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939년 11월에는 조선인의 ‘創氏改名(창씨개명)’령까지 내려, 징병령과 더불어 형식상의 ‘內鮮一體(내선일체)’ 체제를 강화하였습니다. 이듬 해인 1940년은 일본 건국 2600년이라 하여, 건국기념일인 그해 2월11일 전국적으로 기념행사가 거행되었습니다. 이미 10년이 넘도록 끌어온 중국 대륙에서의 기약 없는 전쟁에 지친 국민의 士氣(사기)를 진작시킨다는 뜻에서, 기념축가를 공모하여 전국에서 1만8000여 건의 응모가 있었고, 당선작은 각 레코드社에서 기념음반을 제작하여 화려하게 발매했습니다. 당일에는 학교에 紅白(홍백) 축하 떡이 배급되고, 브라스밴드를 앞세운 전교생의 시내 행진도 있었습니다.

‘金鵄(금치·일본 건국의 신화적 새) 반짝이는 일본의 영광 있는 빛을 온몸에 받고…’로 시작되는 행진곡조의 이 노래는 전국을 휩쓸며 국민을 들뜨게 했습니다. 결국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1941년 12월7일, 美軍 하와이 기지를 기습해 연합국을 상대로 하는 태평양 전쟁에 돌입하였습니다. 初戰(초전)의 승리에 일본 국민은 열광했습니다. (계속)

[ 2015-12-13, 23:4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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