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에서 44년 만에 만난 친구, 자유를 맛보다!
[AP통신 출신 元老 기자의 現代史 증언 (끝)] 공산주의에 빠질 뻔했던 날 구해준 두 가지

황경춘(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조갑제닷컴은 ‘광복 70주년 現代史 체험수기 현상모집’ 수상자들의 작품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다섯 번째 작품은 황경춘 씨의 手記, ‘해방 직후 美軍 통역으로 근무한 AP통신 기자의 이야기’입니다.

은밀히 떠돌던 노래

시곗바늘을 돌려 일본 주오(中央)대학에 진학하여, 외사촌 형과 함께 일본에서 자취생활을 하던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유치원에 다니는 집 주인의 어린 딸이 재미있는 노래를 가르쳐 주겠다며 우리 방에 왔습니다. 놀랍게도 이 아이가 노래한 게 앞에서 말한 ‘기원 2600년’ 축가의 패러디(parody) 노래였습니다. 이건 보통 패러디가 아니라, 厭戰(염전) 무드가 풍기는 패러디였습니다.

‘건국 2600년’ 축하의 해에 戰費(전비)조달의 압박을 받은 일본 정부는 담뱃값을 인상하여 국민들의 불만을 샀습니다. 당시 일본의 가장 대중적인 담배 이름이었던 ‘골든뱃(Golden Bat)’에서 ‘긴시’로 바꾸고, 그 ‘긴시’와 다른 담배 이름 몇 개가 이 노랫말 속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도쿄에서는 본래의 축가보다도 이 패러디가 은밀히 더 유행했다고 합니다.

‘金鵄(긴시)는 올라서 15전, 영광의 히카리(光)는 30전, 아사히(朝日)도 올라서 45전, 기원 2600년, 아! 1억 국민의 속은 탄다.’ 꼬마 아가씨가 가리켜 준 노래는 이렇게 첫 소절이 끝났는데, 지금 일본의 인터넷 위키피디아(Wikipedia) 사전을 열어보니, 끝마디가 ‘아! 1억 국민의 마음은 운다’ 또는 ‘아! 1억 국민의 돈은 줄어 간다’등 다르게 끝나는 패러디도 있었습니다. 이 ‘긴시’, ‘히카리’, ‘아사히’가 다 그 당시 담배 이름이었습니다.

戰時(전시)의 그 긴박한 분위기 속에 이런 패러디를 만들어 부를 여유가 있었던가 하고 놀랐지만, 무엇보다도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이런 노래가 침투해 있다는 사실에 戰慄(전율)을 느꼈습니다.


軍國주의 교육의 비참한 결과

우리 학년에 5명의 일본인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중 시라스(白須)라는 친구는 학교 교원을 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습니다. 그는 교토(京都)대학에 진학했다가 학도병으로 軍에 입대하였습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전한 날, 그는 전쟁터도 아닌 對馬島(대마도)에서 천황께 죄송하다며 권총 자살을 했습니다. 고향 히로시마(廣島)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어머니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비극이 패전 후의 일본 도처에서 일어난 이유는 일본 군국주의 교육 때문입니다. 개인의 행복보다 천황과 나라를 위해 희생하라는 壓政(압정)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迷夢

지식인들이 한 번쯤 갖게 된다는 공산주의 사상이 젊은 시절 저를 괴롭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유혹의 올가미에서 절 구해낸 것은 가족과 일제시대 때 받은 反共(반공)교육 덕분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군에서 제대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저는 좌익운동을 하던 절친한 친구로부터 공산주의 입문 팜플릿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 역시 젊은이들이 흔히 갖는 小영웅주의적 정의감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공산주의에 빠질 뻔했던 저를 설득한 사람은 선친이었습니다. 선친의 교육과 가르침 덕분에 꿈에서 깨어나듯, 공산주의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美 군정청 생활을 한 덕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포츠나 정치에서 약자를 응원하는 마음은 어디나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일본에도 약한 사람을 돕는다는 의미의 ‘한간 비이키(判官贔屓)’라는 말이 있어, 사회적 약자를 돕는 전통 비슷한 게 있습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저는, 응원하는 팀도 이러한 심정으로 결정할 때가 많았습니다. 일본 프로야구의 가장 인기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讀賣 Giants)’는 많은 돈으로 선수를 스카우트하기 때문에, 맞수인 ‘한신 타이거스(阪神 Tigers)’를 어릴 때부터 응원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延高戰(연고전) 때 상대적으로 서민풍의 고려대를 응원하고, 일본의 소케이(早慶·일본 명문 사립 와세다大와 게이오大의 연합체) 대항전에서도 서민풍이 많은 와세다(早稻田) 편을 들었습니다.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편 가르기가 스포츠팀 응원에서도 작용한 것입니다.

정치판에서는 항상 야당 편이어서 인물의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모든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만 찍었습니다. 이 버릇이 끝난 것은 19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여당 후보인 金泳三(김영삼) 씨를 찍은 뒤부터 입니다. 야당 시절부터 고생한 그를 오래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충격적인 反共전시회

사회적으로 약자를 돕고, 민주화 운동을 언론인으로서 지지하면서도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한 번도 버리지 않은 것은 일제 때 받은 反共교육으로 알게된 소련의 ‘피의 숙청’ 때문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소련 赤軍(적군)의 영웅 투하체프스키(Mikhail Nikolaevich Tukhachevskii)’ 원수를 비롯한 약 68만 명이 처형당한 1937~1938년경의 大숙청 관련 反共전시회를 보았습니다. 그날 밤 악몽을 꿀 정도로 제겐 큰 충격이었습니다.

林和(임화), 金起林(김기림), 薛貞植(설정식) 등 좌익계열 文人들의 詩나 글을 즐겨 읽었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과 공포는 제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 체제가 경계하는 소위 ‘쁘띠 부르주아’ 또는 인텔리 계층에 제가 알게 모르게 속해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제 초등학교 친구 중에는 남로당 경남 道黨(도당) 간부로 있다가 월북, 얼마 뒤에 체포되어 귀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월북 경험을 가진 중학교 동기생 중 한 명은 경찰관을 거쳐 대학 교수가 되기도 했습니니다. AP통신 동료 기자 중에는 일본군으로 戰後 시베리아에 3년 가까이 억류되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기자로서 판문점의 停戰(정전)회담 취재도 많이 하였습니다.

이처럼 제 주위에는 공산주의의 실상을 증언해 준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밖에 공산주의 관련 서적과 기사도 많이 읽었습니다. 그 덕분에 <조선일보> 기자 출신에 대학 교수까지 지낸 李 모 씨가 북한과 공산주의를 맹목적으로 찬양하고, 박정희 前 대통령을 무조건 반대하는 언동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체제의 변화, 친구의 변화

한국과 러시아가 國交(국교)를 맺을 즈음인 1989년, 저는 모스크바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자본주의에 눈 뜨기 시작한 공산주의 종주국의 실상을 눈으로 보고 자유의 귀중함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중학교 졸업 후 44년 만에 만난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고르바초프 대통령 정부 國策(국책) 연구기관 IMEMO의 유능한 연구원이었습니다. 그를 호텔방에서 만났지만 자유롭게 이야기하지를 못했습니다. 자유가 없던 탓이었을까요. 그에게 여유를 찾아보기란 매우 힘들었습니다.

40여 년 간 공산 치하에서 살면, 이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나 하고 속으로 탄식했습니다. 명랑하고 활달했던 그의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햇빛조차 희미한 모스크바의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만주 하얼빈에 있던 일본인 대학에서 러시아語를 전공하다 일본군에 징집, 시베리아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소련으로 귀화했습니다. 그후 盧泰愚(노태우) 대통령과 金泳三(김영삼) 씨의 모스크바 방문 때 통역을 하고, 韓露(한러) 수교 당시 러시아 측에서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1990년대 후반 영구 귀국, 한국 국적을 회복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학창시절 밝았던 모습으로 점차 변모해갔습니다. 모스크바에서 결혼한 러시아 부인과 헤어져 단신으로 한국에 온 친구는, 서울에서 러시아 대사관 직원과 재혼했습니다. 자유의 땅에서 옛 우정을 오래오래 함께하자고 그와 약속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2004년 심장병으로 작고했습니다. 그가 그리워했던 故國에서 자유를 더 오래 누리지 못한 게 한 없이 가슴이 아픕니다.
 
광복 70년을 맞는 오늘날, 진보의 탈을 쓴 공산주의 세력이 아직도 국가와 국민을 괴롭히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이 手記(수기)를 마칩니다. (끝)

[ 2015-12-15, 17:1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이중건     2015-12-16 오후 8:50
마을에서 면장감은 우리아버지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똑똑.
1946년 북 중앙당 파견 팔로군출신 공작원에 포섭, 월북.
평생을 겪어본 공산주의에 대한 아버지의 결론.
정치는 최대의 협잡이다.
그리고 자살같은 죽음을 택.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