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같은 밤에 웅덩이로 떨어지다
농촌진흥청 직원의 벼품종 개량 연구 활동記(1)/컴컴한 車道 옆길을 따라 약 50ⅿ쯤 걸었을까, 순간 나는 몸이 갑자기 공중으로 붕 떴다가 무언가에 부딪히면서 배를 짓누르듯 “으-욱” 하는 의식 무의식중의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어딘가에 처박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金鍾昊(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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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은 ‘광복 70주년 現代史 체험수기 현상모집’ 수상자들의 작품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여섯 번째 작품은 金鍾昊 씨의 手記, ‘농촌진흥청 직원의 필리핀에서의 벼품종 개량 연구 활동記’입니다.
기사본문 이미지
김종호 씨(左)


손마디에 군살이 붙기까지는

가을 햇살이 뜨겁게 내리 쪼이는 1979년 10월 중순경의 작물시험장 벼 품종 育種圃場(육종포장)이다. 1만여 개의 系統(계통:품종으로 命名 이전 육성단계의 잡종)이 성숙단계에 접어들면서 숙기의 早晩(조만)과 키가 크고 작고 벼 알의 大小(대소) 등 다양한 특성을 보이면서 넓은 시험답에 전개되어 있다.

논둑 여기저기 野帳(야장)을 왼쪽 옆구리에 끼거나 손에 들고 바삐 움직이는 동료 직원들의 모습은 벼에 가려 상반신만 보인다. 가울철의 벼 성숙기는 육성중인 계통에 대한 年中의 최종평가 시기로서 작물시험장과 호남작물시험장 및 영남작물시험장의 벼 육종 담당자들에게 한시가 바쁜 심신이 피곤할 때다.

이들은 밥맛과 미질이 미흡한 통일벼를 새로 육성한 양질의 統一型 品種(통일형 품종)으로 대체하고 국가의 쌀 자급시책 추진에 앞장섰다. 그리고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가 선호하는 보다 다수성이고 양질의 품종을 선발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다. 나는 논둑에서 계통의 특성을 조사관찰하면서 특이한 個體(개체)가 눈에 들어오면 물이 질퍽한 논 속으로 바로 들어간다. 보다 우수하고 특출한 개체를 선발하여 품종화하기 위한 욕심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장화는 나에게 계통의 특성조사나 선발시의 필수장비다. 덥지만 장화를 신고 긴소매 셔츠에 작업모를 깊숙이 눌러쓰지만 얼굴은 햇살에 탄 깡마른 농사꾼이다. 언제나 계통의 선발 시에는 오른손의 인지와 모지의 끝마디로 벼 알을 손쉽게 벗겨 쌀알의 투명도 여부를 필히 확인하는 것은 나만의 양질米의 선발 방법이다. 이 때문에 작업속도는 좀 늦다. 통상 쌀알의 투명도 평가는 실내에서 계통별로 벼 종자를 건조 후 인습기로 벼 껍질을 벗긴 후 육안으로 검사 평가한다.

정근식(지금은 故人이 되심) 과장과 이종훈 박사는 간혹 쌀알의 투명도를 즉석 평가하고 선발 여부를 구분하는 내 방법을 흥미있게 지켜보기도 한다. 李 박사는 손마디가 어떻기에 마르지 않은 벼 알을 그렇게 쉽게 벗기냐고 하면서 내 두 손가락 끝에 박힌 군살을 유심히 쳐다본다. 오른손 손가락 마디에 군살이 붙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부터 印度型(인도형) 품종을 이용하여 통일형 품종을 육성하면서부터다.

손마디에 군살이 붙기까지는 까락에 찔린 아픔을 견뎌가며 상당 시일이 지난 후부터다. 남풍벼는 내가 작물시험장에서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선발한 품종중의 하나다. 쌀알이 소립으로 투명하고 밥맛이 우량한 통일형 품종이다. 1971년부터는 통일벼가 보급되었고 1975년부터는 통일벼의 대체 품종으로 밥맛과 쌀 품질이 월등히 개선된 통일형 품종이 농가에 급속히 보급되었다. 쌀 자급 때문이다.

“벼는 휴일 없이 쉬지 않고 자란다”

이들 품종을 육성한 작물시험장 등 3개 시험장의 육종포장에는 365일 내내 無休(무휴)의 날이 오래 전부터 계속 이어졌다. 작물시험장의 육종포장 곳곳에는 최현옥 場長(장장)의 발길이 빈번하다. 그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공휴일과 일요일의 오전 9시경에는 육종포장으로 출근한다. 포장을 둘러본 후 곧바로 챙겨 보는 것은 두 연구관이다.

水稻育種科(수도육종과)는 과장 1명과 2명의 연구관 그리고 7명의 연구사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연구관들이 안보이면 그 넓은 육종포장 사방을 향하여 “李 박사! 李 박사(이종훈)!” 하고 불렀다. 이때 “예” 아니면 “여기 있습니다” 하는 대답이 있을 때까지 큰 목소리로 불렀다. 다음 차례는 김 연구관(김종호)이다. 역시 “예, 여기요” 하고 대답을 들을 때까지 불렀다. 이렇듯 두 연구관을 챙겨보는 것은 육종은 현장에서 승패가 좌우되기 때문에 현장은 사무실이라는 그분의 육종철학 때문일 것이다.

그가 사무실로 돌아간 뒤 나와 李 박사가 만나서 하는 말은 “최 장장님 목소리가 대단하네요, 아직도” 하면서 웃었다. 과장은 챙기지 않았다. 일요일 오전에는 교회를 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1969년에 세워진 세대촉진 온실은 연중 내내 수시 교배작업과 연중 2회의 육성계통의 세대촉진 재배로 육종 담당자들을 더욱 바쁘게 만들었다. 게다가 수시로 급한 업무나 속결 처리해서 보고 해야할 일은 밤낮이 없다. 벼 수확시기부터 다음해 봄철까지는 시험결과의 정리를 위하여 야근은 일상이다.

1970년대 초까지는 계량적인 시험결과의 산출에 수동계산기가 활용되었다. 늦은 밤까지도 계산기의 조작음이 이곳저곳의 시험실에 가득하였다. 이러한 일상 업무가 장기간 반복되면서 며칠 정도의 연중 1회의 휴가마저 없는 것은 물론이다. ‘벼는 휴일 없이 쉬지 않고 자란다’는 선배들의 말이 전해지듯 벼 연구진은 연중무휴의 전통이 깊이 뿌리내려 왔다. 따라서 일요일 공휴일의 無休는 언제부터인지 당연한 것으로 거부감 없이 구성원들의 체질 속으로 깊이 동화되어 왔다.

통일벼나 통일형 품종은 하루 밤만 자고 나면 문제가 나타나고 내일은 또 다른 문제로 벼 육종 및 재배기술 인력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관련 병해충 防除(방제) 인력도 빈발하는 문제로 대책을 찾기 위하여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한편 통일형 품종의 농가 보급지도를 담당하는 일선 市郡(시군) 지도요원들은 신바람 나게 농촌의 마을길과 논둑을 누비기도 하였지만 통일형 품종의 재배상의 어려운 문제로 農家(농가)의 원망을 밥 먹듯이 들어야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低溫(저온)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이들 품종의 저온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나 품종을 직접 육성한 육종 담당자들도 당황하고 마음을 졸였다. 생소한 열대성인 통일형 품종의 재배상의 문제는 다양했다. 열대성으로 재배가 불가능하다는 溫帶(온대)권에서 재배를 가능하게 한 것은 벼 연구팀을 위시한 관련 여러 분야 인력의 각고의 노력과 시련의 산물이다.


“이번에도 金 연구관이 좀 나가 주어야겠네”

나는 호남작물시험장에서 1974년 통일벼의 대체 품종으로 유신을 선발 육성하고 이후 작물시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부터 1981년까지 거의 매년 봄철부터 가을철까지는 작물시험장 벼 육종포장에서 품종선발을, 겨울철에는 필리핀에서 多收性(다수성) 양질품종의 종자 생산 업무를 수행하면서 베틀의 북처럼 온대권과 열대권을 오갔다. 겨울철이 없는 생활 패턴이 반복되면서 때때로 나이가 더해가는 것도 잊었다. 몇 살이냐는 질문에 머뭇거리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집에서는 집안일과 일상용품의 비치장소를 모르는 하숙생처럼 되면서 휴일의 출근 이유와 언제나 늦은 퇴근사유를 묻지도 않았다.

이날도 오후의 선발작업을 한참 하고 있었는데 함영수(지금은 故人이 되심) 농촌진흥청 시험국장의 호출연락을 받았다. 바로 그의 집무실로 갔다. “지난번에도 수고를 많이 했는데 이번에도 김 연구관이 좀 나가 주어야겠네” 하기에 바로 “예 알겠습니다” 했다. 벌써 몇 차례에 걸쳐 쌀 자급을 위하여 필리핀에서 벼 다수성 품종의 종자 생산 업무를 수행하면서 그분의 말씀이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계속 이어져온 필리핀에서의 통일형 품종의 벼 종자 생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필리핀의 마닐라 남방으로 약 60km 지점에 위치한 국제 미작연구소(IRRI)에 도착한 것은 1979년 11월8일이다. 농촌진흥청장이 연구소장 앞으로 벼 우량 종자 생산에 관한 사전 협조요청 공한은 보냈지만 짐을 내려놓고 바삐 찾아간 곳은 연구소의 소장과 부소장 그리고 각 행정부서장 및 육종과장과 농장과장이었다.

연구소 인근에 있는 농가의 논 20ha를 차지해서 통일형 품종 서광벼 등 5개 품종의 종자 생산을 위하여 지체 없이 파종작업 준비를 서둘러야 하기 때문에 연구소의 협조지원 요청이 곧바로 필요했다. 차지해야 할 논 20ha는 농장 과장과 직원들의 신속한 농가와의 접촉 교섭으로 두 곳의 후보지 중에서 내가 원하는 장소인 빅토리아 지역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가 있었다. 도착 시점이 종자 파종 시한까지 10여 일 정도의 여유밖에 없어 종자생산을 위한 논을 확정하고 못자리를 만들고 관련 작업 준비를 급하게 추진하였다.

나와 같이 일할 이영희 연구사는 약 20여일 후 도착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어 홀로 파종 작업을 준비하면서 동분서주하는 바쁜 일정이 계속되었다. 연구소에서 남쪽으로 약 9㎞ 떨어진 빅토리아의 논에서 20ha에 이앙할 못자리 1ha의 조성을 위한 정지작업과 제초와 施肥(시비) 그리고 구획작업 등 때문이다.

이른 아침에 나가 해가 진 뒤에야 숙소로 돌아오는 것이 일과다. 낮일의 피곤에 지쳐 저녁밥 생각도 없었다. 옷을 입은 채 잠시 누워 있다가 스스로 놀라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연구소의 농장과 창고에 있는 종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리나라에서 가져온 서광벼 등 약 300㎏의 벼 종자를 전날 저녁 9시에 휴면타파(수확된 종자를 곧 파종하는 경우 벼 껍질에 함유된 휴민물질로 발아장해가 있어 휴민물질을 掃去하는 처리)를 위하여 질산 용액에 담가 놓았기 때문이다. 휴민물질 소거를 위한 질산용액에 담가두는 시간은 24시간이다. 24시간이 되는 밤 9시까지는 볍씨를 꺼내서 물로 질산용액을 완전히 씻어내고 깨끗한 물로 浸種(침종:씨를 뿌리기 전에 물에 담가 불리는 일)을 해야 하는데 벌써 저녁 7시경이 되었다.


칠흑같은 밤에 웅덩이로 떨어지다

바쁜 일과 중에서도 머릿속에 깊이 새겨 두었지만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피곤함에 깜빡 지나칠 뻔했다. 숙소를 나와 지프니(Jeepney, 필리핀의 영업용 승합차) 한 대를 대절해서 연구소의 농장 사무실로 급히 갔다. 오늘 아침 연구소 농장과 사무실에 들러 농장과장 비서인 엘렌에게 퇴근하면서 종자 침종 창고 열쇠를 내 책상 위에 놓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잊어버리고 퇴근해버린 것이다. 그의 집에 전화가 없기 때문에 집으로 찾아가는 길밖에 없었다.

집 위치도 정확하게 모르고 대강 어느 근처라는 것만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다. 일과시간이 지난 야간이라 연구소까지는 통행차량이 끊겨 사무실에서 한참을 걸어 나와 지프니를 탔다. 마음이 조급했고 일각이 바빴다. 엘렌 집 근처로 보이는 2차선 차도 갓길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왼편으로 차도를 횡단했다. 차를 내린 곳은 도로변에 人家(인가)가 없기 때문에 차도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더욱이 연구소의 인근 마을 주변에는 가로등이 없다.

마음은 급했지만 차도를 걷지 않고 차도 바깥 비포장도로인 희미한 좁은 갓길을 더듬듯 조심조심 걸었다. 컴컴한 차도 옆길을 따라 약 50ⅿ쯤 걸었을까, 순간 나는 몸이 갑자기 공중으로 붕 떴다가 무언가에 부딪히면서 배를 짓누르듯 “으-욱” 하는 의식 무의식중의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어딘가에 처박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를 지났을까, 분명히 내가 처박혀 있음을 알았다.

암흑 같은 어둠 속에서 겁이 났고 무서웠다. 그러나 손발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렸지만 주위가 컴컴해서 사방 분간이 전혀 안 되었다. 억지로 힘을 다해 일어섰다. 발 앞에 장애물이 있는 것 같았다. 손을 위로 올려 보니 내 키보다 깊은 큰 웅덩이에 빠진 것이다. 팔을 힘껏 뻗어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평평한 시멘트 콘크리트 바닥임을 알았다. 양손의 손바닥을 밀착시키고 두 손의 손가락에 온 힘을 주고 양 발 엄지발가락 끝으로 시멘트 콘크리트인 듯한 벽면을 힘껏 밀치고 버티면서 겨우 기어 나왔다.


죽지 않고 뼈가 안 부러진 것만으로도 다행

나와 보니 어둠 속에서도 내가 빠진 곳은 길 옆의 맨홀이었다. 손과 발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허리와 손발이 묵직하고 결렸다. 혼자 힘으로 겨우 올라왔는데 그때까지 어느 누구 하나 지나는 사람도 없었다. 혼자 당한 돌연한 사고를 스스로 수습하고 몸을 털고 곧바로 일어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자를 물로 씻어내는 일 처리가 더 급했다. 더 이상 이리저리 손발을 다시 주물러 볼 겨를도 없이 발걸음을 재촉하여 다행히 엘렌 집을 쉽게 바로 찾았다.

열쇠를 받아 쥐고 연구소 창고까지 급하게 갔다. 다행히 질산용액에서 볍씨를 건져낼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시간에 맞춰 볍씨를 물로 깨끗이 씻어내고 침종작업을 모두 무사히 마쳤다. 그러나 볍씨를 씻으면서 젖은 옷 속의 다리와 손목이 왜 그리 쓰리고 아팠는지는 숙소에 와서 잠자리에 들면서야 알았다. 작업 중 그리 밝지 않는 전등 탓도 있었지만 다섯 품종의 종자가 실수로 混種(혼종)되지 않을까 주의를 집중해야 하는 일로 아픈 곳을 들여다 볼 여유를 못 가졌다.

오른편 얼굴이 살짝 깎였고 왼쪽 발 정강이와 무릎 그리고 오른 손목이 보기 싫게 깎여 있었다. 다시 손과 발뼈와 등뼈를 대충 주물러 봐도 뼈가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홀로 겪었던 일로 누구에게 하소연할 곳도 없었지만 죽지 않고 뼈가 안 부러진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다.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에 깊은 심호흡과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이날 밤은 무척 덥기도 하였지만 온몸이 쓰리고 후끈거리고 아팠다. 홀로 고독감에 젖어 이 생각 저런 생각에 여기 온 것을 후회하기도 하면서 잠을 설쳤다.

지나간 일이지만 여기에 오기 전 함 국장께 이번에는 다른 사람에게 하면서 사양은 고사하고 “예” 하는 모양새가 되었으니 이 사고를 겪으면서도 스스로 할 말이 없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상사의 직무상 명령은 언제나 “예”로 대답하는 것이 일상화되고 생활화된 장기간의 公職(공직) 생활 탓도 있다. 이 사고로 피부가 깎인 팔 때문에 한동안 긴 소매 셔츠를 입어야 했다. 주위 누구에게 이야기할 사람도 없었고, 몇 번이고 아찔했던 그 순간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천만 다행이었다는 말을 몇 번이고 입에 담았다.

다음날 내가 빠졌던 곳을 필히 보고 싶었다. 아무리 바빠도 나를 아찔하게 하고 불행으로 빠트릴 법했던 맨홀 현장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른 아침 곧바로 현장으로 갔다. 차도 바로 바깥쪽에 가로 세로 약 1.2ⅿ의 정사각형 콘크리트 맨홀이었다. 바닥은 얕은 요철상태의 흙바닥으로 몇 포기의 풀이 있었고 말라 있었다. 깊이는 약 1.8ⅿ로 낮에도 위험한 덮개가 없는 깊은 맨홀이다. 아스팔트 밖의 비포장 옆길 폭은 약 50cm로 이 갓길과 옆 도랑이 내가 빠진 맨홀과 맞닿아 있다. 그렇지만 맨홀 덮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맨홀이 일정간격으로 있을 것 같아 다음 맨홀도 덮개가 없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갓길을 따라 약 70m 올라갔더니 똑같은 크기의 맨홀이 있었고 역시 덮개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또 빠졌던 맨홀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똑같은 구조의 맨홀에 목제 각목으로 제작된 맨홀 덮개가 덮여 있었고 각목의 반 정도는 썩어서 밟으면 밑으로 꺼져버릴 것 같았다. 大小(대소) 인명사고로 이어질 위험한 덮개 없는 맨홀은 한두 곳이 아닌 것 같았다. 허술한 이러한 맨홀 관리는 어려운 이곳 살림살이를 전해 듣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사고를 당한 내가 조치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속 터지는 일을 당해도 참고 견디면서 혼자 풀어야 하는 곳이 내 나라 아닌 異國(이국)이다. 빠졌던 맨홀을 다시 멀찍이 바라보면서 불행하게 내가 골절상을 당했다거나 그 이상의 사고가 없었던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다. (계속)

[ 2015-12-18, 10:2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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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덕이     2015-12-17 오후 10:41
칠흙같이 어두운밤중에, 처박히면서 목이 꺽일수도있는 아찔한 사고였습니다.
순전한 애국심으로 근무하셨던 마음가짐이 생생히 드러납니다.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중건     2015-12-17 오후 9:03
잘 읽었습니다.
1974년 경 벌써 북한에서 통일벼를 품종비교시험.
김일성의 지시로-
조선형벼와 필리핀 안남미와 교잡형으로 알고 있었지요.
북한벼 룡성(현재 평양계통)벼와 비교시험결과
북한벼는 북한벼가 좋은 것으로 판정.
하지만 수준을 보면 벼는 남북이 비슷한 수준.
옥수수는 북한이 앞서있다고 판명됨.
통일벼는 도열병에 약하고 숙기가 길어 북한실정에 맞지 않다고 판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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