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수당을 지급하겠다. 인부 100여 명을 비상 동원하라”
농촌진흥청 직원의 벼품종 개량 연구 활동記(2)지프니가 논 입구에 도착 후 차에서 내린 나는 “아이고 이게” 하는 외마디 소리를 내고 얼이 나가 버렸다. 이때 눈앞에 보인 것은 온 천지가 회백색의 물바다였다. 10여 일 후면 우리나라에서 播種(파종)해야 할 벼 종자 약 60톤이 물 속에 잠겨 버린 것이다.

金鍾昊 체험수기 가작 당선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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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은 ‘광복 70주년 現代史 체험수기 현상모집’ 수상자들의 작품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여섯 번째 작품은 김종호 씨의 手記, ‘농촌진흥청 직원의 필리핀에서의 벼품종 개량 연구 활동記’입니다.

種子 생산에서 한국으로의 移送 과정

매년 3월 말경부터 4월 초경은 필리핀 마닐라 지역의 乾季(건계) 벼 수확 시기다. 11월 중순경부터 다음해 4월 중순까지는 건계로 비가 거의 내리지 않고 비록 비가 온다 해도 지나가는 비로 보는 시기다. 인근 기상관측소의 기록에도 비가 거의 없는 시기가 이 무렵으로 되어있다. 물론 건계에도 비가 전혀 안 내린 것은 아니고 소나기가 세차게 내리다가 곧 그친다. 비가 그치면 언제 비가 내렸는가 할 정도로 맑은 날씨가 되면서 빗물은 흔적 없이 말라 버린다.

이러한 降雨(강우) 여건상 이 무렵에 수확한 벼는 거의 논에서 햇볕에 건조하는 것이 이곳 벼 농가에서 일반화되어 있다. 해가 지기 전에 건조 중인 벼는 멍석 중심부에 모아 밤이슬에 젖지 않도록 멍석으로 덮어둔다. 대체로 3일 정도만 건조하면 수분함량은 15% 이하가 된다. 이렇듯 수확 후의 생산물은 강우 없는 이 시기에 쉽게 처리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종자를 생산하여 우리나라로 보내는 경우는 처리과정이 단순하지 않다. 종자의 純度(순도) 유지와 혼종방지를 위하여 전 생산과정을 통하여 철저한 조치가 필요하다. 자생적으로 자라서 나타난 이형품종이나 雜穗(잡수:잡종 이삭)는 보는 즉시 논 안으로 들어가 제거한다. 이 작업은 수확할 때까지 반복적으로 계속한다. 그리고 수확 후 종자의 건조와 精選(정선)을 마치고 국제규약상의 소정의 병해충 방제 약제를 벼 알에 고루 처리하여 麻袋(마대)당 45kg을 포장한다. 이어서 필리핀 당국의 수출허가와 종자검역 증서를 발급받고 화물 수송기의 도착 2~3일 전에 운송업체의 창고에 대기 보관한다.

이상의 과정 중 가장 촉박한 기간은 종자 수확 후 소정의 작업과정을 거쳐 운송업체의 마닐라 창고에 대기 보관하기까지다. 이 기간은 약 15일이다. 운송과 창고 대기보관 일수를 제외하면 12일 정도다. 20ha의 수확과 정선 작업에 약 6일, 건조 및 포장 작업에 5~6일이 소요되기 때문에 마치 기계처럼 작업을 추진해야 한다. 20ha가 되는 이번 종자의 처리도 현장인 논에서 종자를 陽乾(양건:볕에 쪼여 말리다)한 후 이어서 약제를 처리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러나 100톤 정도의 방대한 종자 양으로 무방비 상태의 논에서 예상 외의 강우에 노출되는 우려를 전혀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시기적으로는 乾季로서 이곳의 여건과 종자 수송 일정상의 제약으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되었다.

乾季(건계)의 돌발성 폭우

1980년 3월 말경의 이날 오후 수확작업 종료 4시경의 남쪽 하늘은 용두운의 뭉게구름이 치솟아 오르면서 비가 올 듯 검은 구름으로 덮여갔다. 논에는 서광벼 6ha를 탈곡한 후 비료포대 40개를 연결해서 만든 약 7m×8m의 크기의 벼 건조용 비닐 포대 멍석 30여 개 위에 약 37톤의 탈곡된 종자가 햇볕에 건조 중이었다.

그 외 4ha의 논에는 탈곡을 위하여 전날 베어 눕혀놓은 서광벼가 깔려 있었다. 먹구름의 날씨는 걱정스러웠지만 논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는 인부들 모두는 건계의 지나가는 소나기성 비로 여겼다. 이곳에서 나서 벼농사를 생계수단으로 오랜 기간 살아온 이들이 異口同聲(이구동성)으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1970년과 1971년의 두 차례에 걸쳐 나와 동료들이 국제미작연구소에서 이 시기에 수행한 통일벼의 종자 수확시에도, 필리핀 농가 논에서 1975년 유신과 1977년 만석벼 등의 대량 종자수확시에도 비가 없었다. 그렇지만 혹시나 많은 비가 아닐지 하는 불안은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오후 5시만 되면 어둠으로 덮이는 곳이기에 필요한 조치를 하고 싶어도 방대한 작업량에 손을 쓸 수도 없었다.

논일을 종료하고 걱정을 안고 숙소로 돌아왔으나 날이 어두워지면서 더욱 불안했다. 걱정한 대로 저녁을 먹는 중에 빗방울 소리가 세차게 들렸다. 그리고 점차 거센 暴雨(폭우)로 변했다. 이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다. 예상 외의 돌발성 폭우였다. 이 밤중에 해결방안이 있을 수도 없었다. 간혹 세찬 비바람에 주택의 함석지붕 위에 야자수의 코코넛이 떨어지는 “쿵” 하는 소리도 귓가에 들리는 듯 마는 듯, 그러나 논에 널려 있는 방대한 양의 건조중인 종자와 베어 눕혀놓은 벼 걱정에 가슴속이 탔다. 밖의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일어섰다 누웠다 뜬 눈으로 새벽이 되기를 기다렸다.

장대비는 아니지만 아직도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는 어슴푸레한 이른 새벽녘, 픽업트럭 기사가 출근하기 몇 시간 전이어서 차 없이는 걸어가기 힘든 곳이기에 서둘러 지프니 한 대를 잡았다. 논에 건조중인 탈곡된 종자는 아주 못 쓰게 되는 것 아닌지, 베어 눕혀 놓은 볏단은 어떻게 되었을까, 멍석 위의 종자는 엉망진창으로 되어 있을 텐데, 멍석 위로는 물이 얼마나 차올라 있을까, 초조하고 조급함에 현장 상황을 한시 급히 보고 싶었다.

온 천지가 회백색의 물바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한 가닥 별 일 없기를 빌었다. 큰 도로에서 논 입구까지 약 2.8km의 小路(소로)는 빗물로 곳곳이 잠겨 있었지만 양 옆으로 물을 가르며 차를 달렸다. 차가 논 입구에 도착 후 차에서 내린 나는 “아이고 이게” 하는 외마디 소리를 내고 얼이 나가 버렸다. 이때 눈앞에 보인 것은 온 천지가 회백색의 물바다였다. 회백색의 흙탕물 이외는 저 멀리 산 밑 야자수만이 군데군데 보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10여 일 후면 우리나라에서 파종해야 할 벼 종자 약 60톤이 물 속에 잠겨 버린 것이다. 종자를 생산한 논 20ha와 인근의 논 수십 ha도 비 내리는 물 속에 말없이 잠겨있었다. 이 참담한 광경에 나는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미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미칠 것 같은 그 이상의 형언할 수도, 종잡을 수도 없는 절망적인 깊은 수렁 속에 심신이 빠져버린 듯싶었다.

눈을 감았다 다시 떠 보았다. 역시 눈앞에는 온 천지가 흙탕물로 가득하였다. 내 옆에 누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나를 실성한 사람으로 보았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가슴은 새가슴처럼 뛰었다. 얼마 동안 비를 맞으며 무릎을 세우고 앉았지만 뛰는 가슴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일어서서 논을 다시 살펴보았다. 20ha의 논 안을 갈라놓은 구불구불한 논둑과 150여 개의 논다랑은 분간할 수도, 보이지도 않는 마치 거대한 흙탕물의 평원이 되어 있었다. 홀로 탄식만 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주위에 사태수습을 상의할 사람도 없었다.

“인부 100여 명을 긴급히 비상 동원하라”

그러나 순간 나를 이 지경으로 어렵게 만든 무심한 폭우에 반감과 傲氣(오기)가 생겼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사태를 수습해야겠다는 용기가 치솟았다.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선 일처리의 완급을 머릿속에 그렸다. 조속히 사태를 수습해야겠다는 동력이 생기면서 자신감과 활력이 되살아났다. 마침 農監(농감)인 파시오(Pasio)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일찍 나와 말없이 내 옆에 섰다. 파시오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필요도 없었고 인부 동원 지시부터 했다.

“통상 인건비에 특별 수당을 지급하겠다. 인부 100여 명을 긴급히 비상 동원하라”

얼마 후 평상시의 작업시간보다 1시간여 빨리 나온 60여 명의 인부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벼가 널려 있는 논으로 다가갔다. 흙탕물이어서 논둑인지 논바닥인지조차 전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발을 옮기며 논 안으로 들어갔다. 비에 젖어 물에 빠진 생쥐가 다 되어버렸다.

흙탕물이 수심 50여cm로 무릎 위까지 닿았다. 어디에 벼가 널려 있는지 전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작업은 전혀 불가능했다. 온몸은 비에 젖어 반소매 셔츠 차림에 寒氣(한기)가 찾아들기 시작했다. 이후 약 3시간 정도 지나서야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물이 빠지면서 물 속에 비닐 멍석이 널려있는 벼와 논둑이 희미하게 보였다. 다행히 멍석 위에 건조중인 종자는 그대로 있고 탈곡 후 精選(정선)하면서 날려버린 벼 쭉정이는 물에 뜬 채 두서너 군데에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바로 옆 10ha의 논에서 며칠 전 건조 후 약제처리까지 마친 早生種(조생종)인 태백벼 등 네 품종의 52.7톤은 마닐라 창고로 수송이 완료된 상태였다. 물 속에 잠긴 종자와 베어 눕혀놓은 것은 모두 10ha의 서광벼다. 생산될 종자는 약 60여 톤의 서광벼 한 품종의 종자로 다른 품종의 종자와 混種(혼종)의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고온으로 물에 잠긴 종자의 發芽(발아)나 부패가 큰 걱정이었다.

10여 명이 한 조가 되어 종자가 물 속에서 유실되지 않도록 멍석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일제히 물 위로 들어올린 상태로 물 반 종자 반을 마대에 담았다. 종자가 담긴 마대는 마대 입을 묶어 물 속에 담가놓고 들어 올린 멍석 위의 종자는 또 다른 마대에 담았다. 종자가 담겨진 마대를 길 쪽으로 옮겨 가기 위하여 마대를 들어 올리면 마대자루에 담겨진 물이 빠지면서 “쏘-악” 하는 소리만 여기저기서 들렸다.

손전등 비치며 볏단을 들어 옮기다

사태의 심각성 때문이었는지 누구 하나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종자가 담긴 마대는 국제미작연구소의 화력 건조장으로 쉴 틈 없이 운반하였다. 비가 계속 내리기도 하였지만 카메라를 등에 메고도 사진을 찍을 잠시의 여유마저 못 가졌다. 박천서 박사와 이영희 연구사는 국제미작연구소의 화력건조기 6機(기)를 전량 가동하면서 종자 도착 즉시 건조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었다.

종자는 철야작업으로 건져 올리면서 건조기도 쉬지 않고 돌아갔다. 처음 연구소의 큰 트럭을 이용했으나 그 후 두 대의 소형 픽업트럭을 이용한 운반 작업은 다음날까지 철야 이어갔다. 이렇게 급한 작업은 우선 끝냈다. 그러나 3.5ha 논바닥에 베어 눕혀놓은, 서광벼  볏단은 일손이 돌아가지 못해 하루 종일 물 속에 잠겨 있었다.

물이 빠지면서 다음날 볏단이 햇볕에 드러났다. 낮은 지대의 약 0.5ha에 널려있는 볏단은 30cm 안팎의 물 위에 반쯤 떠있는 상태로 계속 물에 잠겨 있었다. 철야작업을 해서라도 물 속의 0.5ha의 볏단을 경사진 논둑에 펼쳐놓는 일이 시급했다. 벌써 오후 5시가 좀 지나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물 속에 잠겨 있는 볏단을 한 아름씩 안고 경사진 넓은 논둑으로 옮기는 작업이 시작되었지만 작업 속도는 극히 느렸다.

논바닥의 깊은 흙 속으로 빠진 발을 빼기가 쉽지 않았다. 물과 반죽이 된 차진 논흙의 특성상 주저앉아서 이리저리 발을 비틀어야 발을 뺄 수가 있었다. 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비추면서 인부들과 함께 온몸이 물에 흠뻑 젖은 흙투성이가 되어 작업을 독려 강행하면서 볏단을 가슴에 안고 옮겼다. 물에 젖은 볏단을 안고 약 70m의 물 속을 점벙점벙 지나 경사진 언덕으로 옮긴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惡戰苦鬪(악전고투)였다.

흙탕물 속에서 “30분간 휴식”

30여 명의 인부들과 함께 볏단을 옮기는 작업진도는 말이 아니었다. 얼마나 작업을 했을까. 새벽녘이 가까워온 듯 몸에 한기가 돌고 지칠 대로 지친 몸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지쳐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얼마 후 인부들도 춥다면서  작업을 중단하고 하나 둘씩 물 속으로 벌렁 누워 버린다. 지쳐버린 것이다. 나도 물 속에 주저앉아 버렸다. 물은 배꼽 위까지 닿았다.

물 속에 주저앉아 버리니 한기도 가시고 훈훈한 물 溫氣(온기)가 돌았다. 전신에 온기가 느껴지면서 잠시 피곤이 가신 것 같았다. 오히려 물 속에 잠긴 탈곡된 벼 종자를 끌어올리는 작업은 볏단을 옮기는 작업보다는 훨씬 쉬웠다. 2일차의 철야작업으로 나는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이 고생을 안하고 물 속에 잠겨 있는 0.5ha의 베어 눕혀놓은 볏단은 모두 포기해 버릴까도 했다. 내 벼농사라면 생각 없이 포기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김포공항 화물 터미널에 8개 道(도)의 농촌진흥원 간부 요원들이 20여 대의 트럭과 함께 종자 인수차 대기하고 있을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 알의 종자라도 더 건져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고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다.

물 속에서 벌떡 일어섰다. 인부들에게 30분간 휴식을 하도록 했다. 모두들 머리만 들고 흙탕물 속으로 온몸을 눕혀 버린다. 만약 낮에 이 작업을 했다면 아무리 피곤해도 흙탕물 속으로 눕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이 흙탕물이지 밤새 운반 작업으로 반죽이 된 이곳 특유의 화산회토의 흙탕물은 일보 전의 팥죽상태임을 손전등으로 알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평생 처음 철야작업을 해 본다고들 했다.

104톤의 種子를 전세화물기 세 편에 실어보내다

걱정거리가 생겼다. 휴식 후에는 지친 이들이 뿔뿔이 흩어져 하나둘 집으로 가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휴식 후에는 ‘산타크루즈’에 가서 원하는 통닭 튀김과 빵을 먹고 싶은 대로 사주겠다고 했다. 휴식시간 후 약속대로 픽업 한 대에 30여 명을 태우고 10여 km 떨어진 ‘산타크루즈’의 철야 영업 중인 곳에 가서 더 이상 못 먹겠다고 손사래를 칠 때까지 흡족하게 먹였다. 그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아까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들은 이날 아침 교대조가 나올 때까지 강행군의 볏단 옮기는 작업을 계속 하였다. 농촌진흥청에서 누가 현장에 나와 이 일을 목격하였다면 제발 포기하라고 했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당시의 몸서리칠 정도의 어려움을 극복한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면서도 몇 번씩이나 쓰던 글을 멈추고 그때의 어려움을 되새겨 보았다.

물에 잠긴 볏단과 종자를 건져 올리기 위해 2일간 철야작업을 했다. 연속 3일간에 걸쳐 약 150명의 인부 투입으로 소기의 작업은 거의 완료하였지만 기온이 높아 늦게 건져 올린 벼 이삭에서 싹이 나오는 穗發芽(수발아)는 불가항력이었다. 비온 후의 날씨는 불볕 같아서 경사진 곳에 펴놓은 볏단은  건조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이 악몽 같은 3일 동안 나는 하루 빵 몇 개로 끼니를 이었다. 그러면서도 배고픔을 잊은 채 인부들과 함께 작업에 뛰어들어 땅 속에 묻어버릴 종자를 무사히 건져 살려 냈다. 그리고 예정된 계획에 따라 화물전세기 세 편으로 우리나라에 104톤의 종자를 보내 예정된 농가의 4월 파종작업에 차질이 없도록 모든 힘을 다했다. (계속)

[ 2015-12-18, 20:4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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