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숙원, 쌀 自給 성공은 김인환 청장의 공로
농촌진흥청 직원의 벼품종 개량 연구 활동記(3)만약 그가 농촌진흥청장으로 부임하지 않았다면 통일벼는 얼굴도 내밀지 못하고 작물시험장의 보이지도 않은 구석에서 소리 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金 鍾 昊 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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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自給을 위해 필리핀을 선택

벼 종자의 건조작업 중 예상 이외의 폭우로 악전을 치른 이곳은 서광벼 10ha, 청청벼 4ha, 태백벼 4ha, 한강찰벼 1.5ha, 백운찰벼 0.5ha 등 20ha의 통일형 품종의 종자 생산 현장이다. 필리핀 라구나省 빅토리아 지역의 마사팡 마을이다.

열대지역에 위치한 필리핀은 더운 날씨 때문에 1년에 두 번의 벼농사를 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온도의 제약으로 단 한 번의 벼농사를 한다. 쌀 부족 해소를 위하여 새 품종이 만들어지면 바로 농가에 보급하여 왔다. 그렇지만 보급 초년도는 제한된 종자量 때문에 농가에 보급하지 못하고 종자의 생산용으로 활용한다.

우리나라는 벼농사 1년 1作 체제로 아무리 빨리 서둘러도 당해에 만들어진 품종은 다음해에 종자를 생산하고 그 다음해인 2년차에 농가에 종자 보급이 가능하다. 그러나 필리핀의 벼농사 체제하에서는 다음해에 곧바로 농가에 종자를 보급할 수 있다. 한시가 급한 쌀 자급을 위하여 1974년 이래 농촌진흥청 산하 벼 품종육성 기관인 작물시험장 등 3개 시험장은 우리 논 아닌 필리핀의 異域(이역) 논에서 벼 종자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우리나라에 수송하여 農家(농가)에 곧바로 보급하여 왔다.

6·25 남침으로 벼 품종개량 사업 10여년 이상 뒷걸음

우리 국민 거의 모두는 1970년대와 1960년대 그리고 그 이전에도 쌀 부족으로 어렵게 살아왔다. 1900년 초경 이전은 정부의 농작물 개량사업이란 아예 없었다. 벼 품종의 쌀 수량도 10a당 100kg을 훨씬 하회하는 낮은 수량의 재래종(예부터 품종 개량 없이 전래되어 온 품종) 재배와 하늘만 쳐다보면서 짓는 것이 벼농사의 전부다. 낙후된 원시형태의 영농기법과 재배환경 하에서 벼농사는 농가 스스로 알아서 지어왔으니 수량의 多寡(다과)를 따져볼 여유마저 없었을 것이다.

일본의 침략과 함께 1906년에 일본에 의하여 수원에 권업모범장(후에 농사시험장, 작물시험장, 현 국립식량과학원)이 설립되면서 근대화 벼 품종개량의 초석이 놓아졌다. 일본으로부터 다수 도입된 개량종과 1930년에 설립된 농사시험장 남선지장(후에 호남작물시험장, 현 국립식량과학원으로 2015년 통합)에서 육성된 품종의 보급으로 획기적인 쌀의 생산증가를 이루었다.

日帝의 기록에 의하면 1910년부터 1914년까지의 우리의 쌀 생산기록은 170만 2000톤으로, 24년 후인 1935년부터 1937년까지의 평균 생산량은 307만 6000톤으로 181%가 증가 하였다. 그렇지만 증가해야 할 1인당 쌀 소비량은 1910년대에 약 78kg이던 것이 1930년대에는 68kg으로 오히려 감소하였다. 이러한 증가 없는 감소의 주요인은 1945년까지 지속적인 일본의 쌀 수탈 때문이다. 먹거리가 풍족하지 못한 쌀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 사람들의 1인당 연평균 쌀 소비량을 180리터로 보면 약 60~70kg 이상의 부족량은 스스로 감내하면서 자구책을 강구하고 살아야 했다.

일본이 설립한 농사시험장은 1945년 2차대전 패전으로 퇴거할 때까지 일본인 전문가에 의하여 일본을 위한 벼 품종개량사업을 수행하여 왔다. 쌀은 수탈해 가면서도 우리의 벼 育種(육종) 전문가나 중견인력은 단 한 사람도 양성하지 않았다. 보조 인력으로 활용했을 뿐이다. 1945년 8월 이들의 퇴거에 따라 혼란과 건국의 격동기 속에서 우리나라는 건국 이후 처음으로 인력 불모지의 벼 육종 기반을 조성 중이었다.

그러나 1950년 북한 김일성의 6·25 남침은 벼 품종개량 사업의 초창기의 기반을 다시 황무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는 우리나라 벼 품종개량 사업을 10여 년 이상 뒷걸음을 치도록 발목을 잡았다. 1950년대 후반인 1955년부터 1959년까지의 농가의 10a당 평균 쌀 수확량은 265kg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1950년대 말경까지 품종 육성 기반을 재정비 조성하고 1960년대 초경부터 새 품종 육성보급을 본격화하였다.

벼 育種(육종) 전문가들의 고뇌

농광, 진흥, 재건, 신풍, 호광, 풍광, 관옥, 팔금, 농백, 만경 등의 우량 품종을 육성 보급하는 한편 농림29호, 김마제, 구사부에, 사도미노리 등 생산력이 높은 일본 도입 품종을 다수 선발 보급하면서 쌀 증산에 진력하였다. 1960년대의 10a당 농가의 평균 쌀 생산량은 1950년대 후반의 생산량과 비교하면 약 15% 증가한 304kg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후 점차적인 수량의 증가를 기대했다. 그러나 1960년대 10년 동안의 쌀 수량은 증가 없는 정체가 지속되었다. 마치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한 자동차가 서버린 상황에 비유되는 수량 증가의 정지 현상을 보인 것이다.

1960년부터 1964년까지의 평균 10a당 농가의 평균 수량은 302kg으로 1965년부터 1969년까지의 평균 수량 306kg과 비교하면 전혀 수량 증가라고 볼 수 없는 수량 정체의 늪에 빠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농가 재배환경에 적합한 벼 품종의 생산구조상의 개선이 미흡하였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현재 재배되고 있는 벼 품종의 생산구조 개선의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면 이 무렵의 비교적 키가 큰 일반 벼(학문적으로는 일본형 품종으로 분류) 품종의 稻體(도체)구조 하에서는 생산력 증가를 기대할 수 없는 한계점에 달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벼 육종 전문가들의 고뇌였다.

3톤 적재량의 트럭에 그 이상의 짐을 실으려면 4~5톤의 트럭으로 바꾸어야 하듯이 4~5톤의 생산구조를 갖는 품종의 개발로 전환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생산성을 저해하는 稻體의 생산구조상의 가장 큰 취약점은 長稈(장간:길쭉한 벼)에 의한 倒伏(도복) 피해다. 따라서 도복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短稈(단간) 草型(초형)에 이삭 길이가 길고 입수가 많으며 입중이 큰 우수한 생산구조를 구비한 초형개발에 도전하는 길이 유일한 대안으로 보았다. 통일벼 유형의 단간 다수성 초형구조로 전환하고 그 위에 도체조직의 유연성과 쌀 품질이 우수한 것이면 이상적인 초형 모델이 될 것이다.

한편 재배품종 중 생산력이 우수한 일반 벼 품종을 단간화하고 長穗化(장수화)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러나 단간화하면 단수화(短穗化)되는 경우를 수없이 목격하고 체험하였다. 육종적으로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었다. 일반 품종 중에서 단간품종으로 재배되어온 일본 도입품종인 천본욱이나 김마제와 작물시험장에서 육성한 삼남벼가 있다. 그러나 이삭 길이는 모두 짧았다. 1950년대 말경 일본에서 육성된 단간품종 구사부에와 시라누이 등은 우수한 초형 구조로 개선되었으나 多收性(다수성) 품종으로는 보완의 여지를 보였다.

이러한 여러 여건 위에 급격히 증가한 400여만 명의 해외동포 유입과 6·25 전쟁 시의 다수의 월남민, 그리고 전쟁으로 영농을 포기한 일부 황폐화된 농지 등으로 식량부족은 점차 심화되어 갔다.

예산과 인력만 낭비한 사례들

부잣집 이외의 대부분은 잡곡이나 분식은 물론 저녁은 쑥 버무림이나 시래기 밥과 죽이 끼니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죽은 주로 활동시간대가 아닌 저녁끼니로 돌렸다. 살림살이가 좀 나아 보이는 사람들도 여유 없는 밥 때문에 자기 몫의 밥을 먹고도 흡족한 표정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식구들의 일상이다. 길거리에서는 굶주림으로 얼굴이 부어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먹고 살기 어려운 대부분 가정주부들은 저녁 이전의 새때에 이웃집에서 빌려온 쌀보리나 잡곡 등을 치마폭에 담아가는 모습은 일상적인 일이다.

오래 전부터 식량이 부족한 시기를 살아온 사람들로부터 전해 온 보릿고개와 草根木皮(초근목피)라는 말은 식량 부족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온 사람들의 恨(한)이 가득 서린 말이다. 이 말은 아마도 지금의 70~90대의 연령층과 이보다 더 고령층 어르신들의 추억 속의 이야기이면서도 어려웠던 그때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큰 아픔이었다. 지금도 그 아픔은 가슴 속 깊이 살아있을 것이다.

1963년부터는 쌀 부족 대책으로 11만 9000톤의 쌀 수입을 시작으로 이후 1984년까지 총 837만 6000톤이 수입되었다. 농가에서 農酒(농주)로 애용되던 쌀 막걸리의 임의 제조를 엄격히 통제하고 잡곡과의 혼식과 분식을 강력히 권장하면서 쌀 소비를 최대한 억제하였다. 전국 어느 곳이든 연중 쌀 증산 플래카드가 걸려있어 쌀 부족의 심각성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1966년에는 정부 모기관이 이집트로부터 나하다, 기자 159호를, 베트남에서 카라디40을, 터키로부터는 코리나를, 이탈리아에서는 바리나 등의 5품종을 도입하였다.

외국에서 다수성이면 우리나라에서도 다수성이라고 확신한 것 같았다. 작물시험장 등 3개 시험장과 남부지역 농촌진흥원의 검정 결과 그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갔다. 倒伏(도복)과 바이러스, 미성숙 등의 피해로 수량이 낮아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재배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1969년에도 일본의 장려품종인 미네히카리, 야마비고, 계곤, 아키바레 등의 종자 1.27톤을 급하게 도입하여 3개 작물시험장에서 평가하도록 하였지만 역시 우리 품종 대비 생산력이 낮은 것으로 나타나 예산과 인력만 낭비하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도입된 품종 중 아키바레와 미네히카리는 1968년 이전에 농가의 손에 의하여 도입되었고 시험 기관에 입수되어 평가검정을 거친 품종이다. 이러한 일련의 실패사례는 농촌진흥청도 쌀 부족책 타결을 위한 뚜렷한 대책과 해결책 제시나 방향 없이 우왕좌왕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통일벼 탄생 과정

그러나 벼 육종을 전담하고 있는 담당자 모두는 벼 수량의 정체의 원인이야 어디에 있든 쌀 부족을 타개해야 할 무거운 책무는 벼 육종을 전담한 자신들에게 있음을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쌀 부족 해소를 위한 다수성 품종 개발에 강한 의욕과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틈만 나면 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는 주먹만한 쌀알을 갖는 다수성 품종을 기필코 개발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나도 이들과 같은 생각을 갖는 구성원중의 한 사람으로서 농촌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도맡아 걱정을 했다. 또 잊지 않고 나라 걱정을 하면서 다수성 양질 품종육성을 위한 투철한 사명감이 은연중 몸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1966년 작물시험장의 故(고) 정근식 박사가 국제미작연구소에서 연수 후 귀국하면서 1965년 이곳에서 개발한 IR8의 종자와 IR262 등 200여 인도형 단간 다수성 계통을 가져왔다. 시험포장에서 검정 결과 IR8은 극 만생종으로 미숙상태였으나 IR262 등은 생육상태가 좋았다. 역시 같은 해 초에 군산 주둔 미 공군으로부터 IR8과 유사한 단간 다수성인 IR5의 종자 500g을 호남작물시험장에 보내왔다. 나는 이 품종을 적기에 파종하고 조사 검정에 임했다. 포장검정 과정 중 왕성한 초세를 보여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IR8처럼 미숙이었다. 두 품종 모두 우리나라에서 극 만생으로 출수는 못했지만 벼 단간화의 조류는 빠르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 무렵 서울 농대의 허문회 박사(지금은 故人이 되심)는 IR8을 母本(모본)으로 일본의 조생 내냉성 품종인 Yukara와 대만의 TN1을 교배하고 잡종 1세대를 양성 후 잡종 2세대를 파종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국제미작연구소 육종과장인 비첼(지금은 고인이 되심)씨가 잡종2세대의 집단개체를 양성하고 개체를 선발하여 1967년 초에 잡종 3세대가 될 IR667의 1000여 개체의 종자를 작물시험장으로 보내왔다. 벼 품종 육성을 전담하고 있는 작물시험장의 벼 육종 팀은 잡종 3세대 계통육성을 시작으로 육종방향을 인도형 단간 다수성 품종 육성으로 급히 전환하였다.

이후 여름철에는 육종포장에서 겨울철에는 세대촉진 온실에서 세대를 촉진하면서 단간의 우량 계통을 선발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1970년 생산력이 우수한 수원 213-1호를 최종 선발하고 1971년 통일로 명명함과 동시에 장려 품종으로 결정하였다. 통일로 명명되기 이전 6개의 계통을 압축 선발하고 다시 3개의 계통 중에서 최종적으로 1계통을 선발하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았다.

작물시험장과 호남 및 영남작물시험장의 전 육종 인력과 전국 9개道의 벼 연구 담당인력 및 농가의 집단재배와 전시포 재배 관여 인력이 총동원 되는 사상 초유의 평가 검정사례가 되었다. 평가검정 결과 1971년 수행된 550개소의 대단위 집단재배단지의 10a당 쌀 수량은 501kg으로 비교품종 398kg에 비하면 103kg의 큰 증가로 나타났다. 그러나 재배과정 중 냉해에 약한 취약점을 보인데다 수확 후 쌀을 본 농가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기대 이외의 시장성이 없는 밥맛과 품질로 농가는 크게 실망하였고 외면함으로써 통일벼는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는 궁지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농가의 외면은 통일벼의 재배 기피로 이어졌다. 그러나 농촌진흥청은 국가적으로 쌀 부족 해소를 위해서는 시장성이나 질적인 문제에 앞서 양적인 생산을 우선시 하였다.

그리고 1974년까지 18만여 ha를 농가에 급속히 보급시켰다. 통일벼는 보급 품종으로서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선호도를 외면하고 성급하게 보급시킴으로써 농가의 결정적인 원성의 사유가 되었다. 이렇듯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가 외면한 사정이라면 통일벼의 농가 보급은 잠정적으로 과감히 중단해야 했다.

통일벼의 단점 개선을 위한 품종육성 사업

한편 김인환 농촌진흥청장(지금은 故人이 되심)도 양적 생산 우선임을 강조하면서도 통일벼의 생산자나 소비자의 부정적인 반응을 간과할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1971년부터는 농촌진흥청 산하의 벼 품종 육성기관인 작물시험장, 호남작물시험장 및 영남작물시험장의 벼 육종 연구진을 주축으로 벼 재배생리분야 연구진, 농업기술연구소, 9개道 농촌진흥원의 관련분야 인력이 총 투입되는 농촌진흥청 사상 최우선 순위 대형 핵심과제로 통일벼의 단점 개선을 위한 품종육성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렇다면 후속 품종이 육성되기를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이후 1973년까지 3년차를 보내면서 가시적인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4년차가 되는 1974년 가을, 통일벼의 단점개선 연구의 성과 1번으로 호남작물시험장에서 維新(유신)을 선발하였다. 유신은 다수성으로 밥맛과 쌀 품질이 통일벼에 비하여 월등하였고 쌀알도 일반 벼처럼 소립형이다. 또 늦게 移秧(이앙)해도 상대적으로 출수지연이 없는 만식성이 큰 장점을 가졌다.

유신 육성을 가장 반겼던 사람은 故 김 청장이다. 통일벼의 확대 재배를 고집스럽게 추진하면서 직면한 수많은 난제로 고심했던 그에게 유신은 통일벼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가 되면서 큰 용기와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통일벼의 대체가 한시가 급한 때이기에 유신의 대량 확대 보급을 위하여 우리나라 동절기에 벼 재배가 가능한 필리핀에서 1035톤의 종자를 생산 증식하여 1975년부터 농가에 보급하였다.

지금도 나는 간혹 故 김인환 청장이 유신을 선발한 시험답 앞에서 내 설명을 들으며 유신을 보고 흡족하고 만족하게 여기는 그의 즐거워하는 표정을 떠올려 본다. 만약 통일벼의 취약점 개선을 위한 통일벼의 단점개선 사업이 4년차가 되는 1974년이 될 때까지 유신이 선발되지 않았다면, 또 그 위에 1~2년이 무위로 지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농가의 원성은 물론 관련 정부부처의 질책과 비난은 밀물처럼 밀어닥쳤을 것이다. 통일벼 보급을 전면 중단하라는 또는 재고나 재검토 조치가 있었을 수도 있다. 고 김 청장도 할 말을 잊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국면을 타개하게 만든 것이 바로 유신이다.

한 마디로 그동안 우울했던 농촌진흥청의 숨통을 확 터놓은 것이다. 그리고 활기를 불어 넣었다. 이러한 상황을 뒤돌아보면 유신의 선발 육성은 통일벼에 의한 농가의 불만을 잠재우고 각계의 입막음은 물론 통일벼의 대체를 위한 유신의 기여도는 막중한 것이었음을 새삼 되새겨 보게 한다.

故 김인환 농촌진흥청장의 공로

故 김인환 청장은 통일벼나 통일형 품종의 최고 책임자로서 이들 품종의 보급과정에서 빈번하게 나타난 농가의 허다한 문제점에 봉착하면서도 그때그때 잘 선처해 나갔다. 그리고 품종의 보급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나갔다. 그가 농촌진흥청장을 퇴임한 후 국제미작연구소에 약 3개월 체재하는 동안 나는 자주 그를 만났다.

이들 품종 보급 시에는 한 밤중에 자다가 비오는 소리만 들어도, 찬 기운만 살며시 느껴도,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 하늘을 쳐다보며 잠을 설치며 마음을 조였다는 쌓였던 고애를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쌀 자급이라는 큰 일을 추진했던 10여 년의 긴 과정 속에서 발생한 허다한 문제로 그도 어느덧 심신 모두가 지친 듯하였다. 만약 그가 농촌진흥청장으로 부임하지 않았다면 통일벼는 얼굴도 내밀지 못하고 작물시험장 수도 육종 포장의 보이지도 않은 구석에서 소리 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쌀의 자급성취란 말은 한갖 공염불이 되었을 것이다.

故 이태현 청장(고 김인환 청장의 전임)은 통일벼 관련이야기는 자기 앞에서는 꺼내지도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통일벼의 육성중인 계통마저도 작물시험장 육종포장에는 일체 들여 놓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작물시험장 벼 육종연구진은 통일벼 계통을 故 이 청장의 눈에 띄지 않는 육종포장의 구석진 곳에 배치하고 1967년부터 1968년까지 대외비로 관리하면서 외부 노출을 억제하여 왔다.

배고픈 세상을 배부른 세상으로

유신의 육성 보급을 계기로 1970년대 중반경까지 통일벼, 유신, 밀양21호, 밀양23호, 조생통일, 밀양22호, 영남조생, 통일찰, 금강벼, 황금벼, 만석벼 등을 육성하고 이들을 주력품종으로 보급하여 1977년 우리들의 오랜 숙원인 쌀 자급을 성취하였다. 이때 보급된 통일형 품종의 보급면적은 약 66만ha로 전국 논 면적의 54.6%에 달했다. 통일형 품종의 10a당 농가의 평균 쌀 수량은 553kg으로 나타났다.

기존의 일반 벼 품종의 수량 423kg에 비하여 통일형 품종은 131% 증가로 130kg이 더 많았다. 통일형 품종의 확대재배로 전국의 10a당 쌀 평균 생산량은 494kg으로 증가함에 따라 전국 쌀 총생산량은 596만 5000톤으로 우리 農政(농정) 사상 초유의 최다 생산 기록이 되었다. 이 생산량을 통일형 품종 보급 이전인 1965년의 생산량 346만 4000톤과 1970년의 390만 7000톤과 대비하면 172%와 153%의 획기적인 증가다.

이후 1978년까지 통일벼를 밥맛과 쌀 품질이 개선된 통일형 품종으로 완전 대체하고 1980년대 초반까지 한강찰벼, 서광벼, 남풍벼, 백양벼, 풍산벼, 밀양30호, 삼강벼등 총 40개 품종을 육성 보급하여 완벽한 쌀의 자급기반을 구축하였다.

약 3000여년의 긴 우리나라 벼 栽培史(재배사)를 통하여 단 한 번도 재배한 바 없었던 인도형인 통일형 품종의 성공적인 재배 기록도 남겼다. 통일형 품종은 밥맛이나 쌀 품질이 우수하다고 알려진 몇 개의 일반 품종에 비하면 미흡한 것으로 평가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벼 품종의 보급 이후의 파급효과는 긍정적으로 여러 분야에 걸쳐 지대한 플러스 효과를 남겼다. 일시에 귀한 쌀을 흔한 쌀로 바꾸어 놓았다. 또 배고픈 세상을 배부른 세상으로 탈바꿈 시켰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은 많은 서러움 중에서도 가장 큰 서러움은 배고픈 서러움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배고품의 서러움에서 탈피하고 쌀 걱정을 시원하게 날려버리는 쌀 걱정이 없는 세상을 만든 일대 쾌거를 안겨준 것이다. 그리고 쌀 자급은 우리 산업 발전의 큰 원동력이 되었다. 더 나아가 쌀의 양적 충족을 도약대로 하여 질적으로 우수한 품종의 육성과 쌀의 안정적인 생산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저온에 약한 통일형 품종의 재배를 통하여 개발된 저온회피 재배기술은 밭작물 및 채소 원예작물 재배와 과수재배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農政의 일대 도약을 가져오다

저온에 약한 인도형 통일형 벼 품종의 저온회피를 위한 비닐피복재배 기술은 밭작물의 가뭄해소를 통하여 발아와 생육촉진의 견인차가 되면서 전천후화 재배의 시발이 되었다. 생산력향상과 품질향상은 물론 적기 파종과 잡초방제에 결정적인 큰 기여를 하였다. 채소 원예작물의 백색혁명을 유도하여 周年生産(주년생산:한 해에 몇번이고 심어서 생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면서 대형 비닐하우스 재배로 발전하였다. 

이에 따라 생산량 증가와 품질향상을 기하면서 수확 및 출하시기의 탄력적인 조절로 농가 소득 증대의 큰 기반이 되었다. 한편 비닐피복 재배는 과일의 품질향상과 출하시기 조절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쌀이 남아도는 벼 단작체제는 다각적인 영농형태로 발전하였다. 또 농한기가 없는 바쁜 경쟁체제로의 대전환과 함께 농가의 소득 구조를 크게 변화시켰다.

이와 더불어 국제미작연구소와의 활발한 협력연구는 통일벼의 육성이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통일형 품종의 육성과 종자생산 등으로 확대되면서 쌀 자급으로 이어지는 실질적인 협력연구로 발전하였다. 한국에서 이룩한 벼 육종의 성과는 동남아에 위치한 국제 쌀 연구기관으로서 국제미작연구소의 존재 의의를 크게 부각시키는 계기도 되었다. 더 나아가 통일벼와 통일형 품종의 육성 성과는 국제미작연구소의 성과가 되는 긴밀한 협력연구로 상호 Win-Win하는 생산적인 국제 공동연구의 모델이 되었다.

육성된 다수의 통일형 품종은 국제미작연구소를 통하여 필리핀, 중국, 부탄,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등의 동남아 미작국가에서 새 품종 육성을 위한 중간 모본으로 기여하거나 그 나라의 품종 명으로 명명되어 활용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 밀양 46호는 중국에서 1대 잡종의 임성회복친으로 선발되어 크게 활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통일벼와 통일형 품종육성을 위한 국제 협력 연구의 활성화와 성공적인 사례는 관련 분야는 물론 타 식량 및 원예작물, 과수와 축산 수의 분야에 대한 국제협력연구의 촉진과 활성화를 위한 촉매제가 되었다.

벼 育種史(육종사)의 새로운 이정표

또 하나의 파급효과로서 통일벼는 適地(적지)에 재배되면 용이라도 뛰어 나올 듯한 역동적인 다수성 초형으로 벼 육종가를 위한 큰 선물이 되었다. 이러한 매력적인 초형에 압도되지 않는 벼 육종가는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통일벼의 초형은 선발 대상 1호의 초형이다. 나는 통일벼의 생산구성 요소를 종합해 보면서 다수성 품종의 기본적인 표준 초형 모델에 거의 근접했다고 보았다.

물론 통일벼는 우리나라 재배여건이나 생산자와 소비자를 만족시킬 정도의 종합적인 다수성 품종으로는 크게 미흡했다. 통일벼의 다수성 표준 초형모델은 향후 벼 육종가에게 다수성 품종 육성의 지표로서, 다수성 新품종 육성을 위한 도약대로 활용이 기대된다. 그 위에 통일벼는 초 다수성 품종 육성을 위한 동인과 동력을 제공함으로서 초다수성 품종 육성의 지름길을 터 놓았다.

한편 통일형 품종은 쌀 자급 이후 쌀 품질의 미흡에 따른 쌀 수요의 감소로 1987년부터 개발이 중단되었고 1990년 장려품종에서 삭제되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벼 育種史(육종사)에 벼 품종의 초형전환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와 함께 통일벼와 통일형 품종 육성보급을 위하여 불철주야 심혈을 기울인 참여 인력 모두가 흘린 고귀한 땀방울은 우리 땅을 적시고 이 땅을 넘어 필리핀의 국제미작연구소의 들과 시험답 그리고 이역 땅의 논과 논둑마저도 흠뻑 적셔 놓았다.

이들 인력이 흘린 땀 못지않게 우리 농촌의 마을길과 논둑이 닳도록 때로는 신바람 나게, 때로는 농가의 원망 속에서도 희생적으로 품종 보급에 열성적으로 헌신하신 인력 및 재배단지의 관련 인력과 재배농가 여러분이 흘리신 뜨거운 땀은 오늘의 풍요로움을 안겨준 우리 쌀 자급과 농업기술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끝)

[ 2015-12-21, 11:1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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