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청년들을 납치, 輪姦(윤간)한 소련 女軍들
[만주에서 제주까지의 독특한 피난 생활記 (1)] ‘모택동軍은 장개석軍의 무기로 싸웠다(?)’

鄭慶均(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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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은 ‘광복 70주년 現代史 체험수기 현상모집’ 수상자들의 작품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일곱 번째 작품은 鄭慶均 씨의 手記, ‘가슴에 새겨둔 80년 간의 일기장’입니다.

鄭慶均(1934~)

기사본문 이미지

1934년 중국 요녕성에서 출생, 1948년 귀국해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에 입학해 1958년 졸업했다. 1969년 美 시카고 대학원 사회학 석사, 1982년 일본 동경대학 보건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6년부터 1981년까지 WHO본부(GENEVE) 특수연구사업 고문, EAST-WEST CENTER(HAWAII) 자문위원, HEU(HEALTH EDUCATION UNION) 극동지역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1997년 국민훈장모란장을 추서받았으며, 1999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에 임명되었다.



만주에서 태어나다


나는 이 세상에 나올 때 내 나라, 내 땅에서 태어나지 못했다. 남의 나라 중국 벌판에서 태어났다. 그 허허벌판에서 탯줄을 이빨로 끊으면서 태어난 한 생명이 목숨을 건져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1924년 선친이 17세 되는 해에 나의 조부님은 평북 정주군 남서면의 고향을 등지고 만주 땅으로 무작정 이민을 갔다. 누가 오라는 사람도 없었고 허허벌판에 등짐을 풀고 정착한 곳이 요녕省 무순市에서도 한참 떨어진 ‘만달옥’이라는 시골이었다.

나는 1934년 4월20일 그 시골에서 태어났고, 무순市의 아사히(朝日) 국민학교라는 일본 소학교에 입학했다. 무순 소학교까지는 1시간 40분.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대열을 지어서 다시 학교까지 약 30분을 구보로 달려가야만 겨우 시간에 맞춰 등교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기차의 맨 앞 칸은 일본 학생들, 우리는 둘째 칸, 중국 학생들은 셋째 칸과 그 뒤 칸에 앉아 등하교했다.

그러다 일본 학생들과 감정싸움이 발생하면 기차에서 서로 뒤엉겨 피를 보는 집단 난투극이 벌어지곤 했다. 일본 학생들과 패싸움이 벌어지면 사정없이 때려눕혀 약 10여 분 간 후다닥 일본 놈들을 제압하노라면 일본 헌병들이 나타나서 말눈깔 사탕을 주면서 싸움을 말렸다.

그 당시 일본 헌병들은 민족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사탕으로 수습했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 놓고 일본 학생들을 두들겨 팰 수 있었다. 일제시대 때 그곳이 중국 땅이었는데도 중국 학생들은 워낙 기가 죽어 있어서 그들과는 한 번도 싸운 기억이 없고 마을 안에서도 항상 사이좋게 지냈다.

1945년 7월 중순 어느 날 여름방학을 하고 집에 오는 차에서 일본 학생들과 또 한판 피 터지게 싸웠다. 저학년은 뒤편에 서고 4, 5학년 상급생이 맨 앞에서 전투해야 한다. 그해에 나는 5학년이라 맨 앞에 서서 일본 학생들과 싸웠다. 그 순간이면 우리는 평소 일본 사람에 대한 분을 풀고, 조선말을 하다 들켜서 벌을 서고 다음 날 동전으로 벌금 내곤 했던 한풀이를 실컷 하는 것이었다. 그 날이 일본 학생들과의 마지막 전투일 줄은 몰랐다. 그것이 마지막 전투일 거라는 걸 알았더라면 좀 더 실컷 패줄 걸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남는다.


갑작스런 태극기 물결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 날은 소위 해방되는 날이다. 그전날까지도 일본 순사들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는데, 웬 태극기가 그리도 많이 각 가정에서 쏟아져 나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날 점심쯤으로 기억되는데 나의 조부님이 뒤뜰의 장독대에 가시더니 태극기를 몇 장 가지고 나와 나에게도 주셨다. 마을로 나가 미친 듯이 뛰어다니면서 무조건 “만세”, “만세”를 목이 터지라 외쳐댔다. 그 날 조국에서는 어떻게 광분했는지, 또 東京에서는 어떤 광경이었을까 궁금한데 이날 내가 겪은 경험으로는 두 가지가 지금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첫째, 그 많은 태극기가 중국 벌판의 조선족 가정에서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쏟아져 나온 배경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 하나, 우리 조선족들은 그토록 미친 듯이 날뛰면서 만세를 불러대는데 중국인들은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보면서 남의 일인 듯 구경만 하는 것이었다. 자기들도 무슨 깃발이든 꺼내 들고 만세를 외쳤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 조선족들은 어른들이 일본에 대한 反感(반감) 교육을 은근히 의도적으로 하였고, 독립의 의지가 無言 중 우리 피에서 흘렀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그런 감정적, 민족적 교육의 노력이 거의 없었던 게 아닌가 짐작될 뿐이다.

나의 선친은 3남 2녀, 5남매의 장남으로, 조부모님까지 모시고 살 정도로 대가족이었다. 두 분 숙부님들은 모두 학생들에게 조선 역사와 한글을 가르친 죄로 옥살이하다가 죽음 직전에 반송장 상태에서 풀려나 집에서 간신히 되살아나는 것을 나는 어린 나이에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일본이 우리의 원수라는 걸 눈으로 배우면서 자랐다.

일본 선생한테는 조선말을 하다가 들켜 내가 앉은 그 나무 의자를 무릎 꿇고 앉아서 들고 있다가 팔 힘이 못 견뎌 내려놓는 순간 일본 선생에게 뺨을 얻어맞고, 때로는 나쁜 선생은 구둣발로 걷어차기도 했다. 그 다음날은 어김없이 구멍 뚫린 동전, 아마 그때 5전짜리를 벌금으로 갖다 바치곤 했다. 그때부터 抗日(항일)에 대한 뼈아픈 산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후일 내가 어쩌다 東京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동안 일본 친구들에게 그 당시의 억울한 얘기를 들려주곤 해서 그들로부터 소위 罰酒(벌주)라는 걸 엄청나게 얻어먹었다. 일본인의 기질은 이런 얘기 하면 기분 나빠서 나를 멀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 조상의 잘못을 대신 사죄하려는 성향이 있는 것을 내가 항상 느끼고 있어, 나는 일본 친구를 사귈 때는 이런 에피소드를 ‘전략적 무기’로 써먹곤 했다.


無정부 상태의 實體를 보다

일본이 갑자기 망하면서 그 질서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니까 중국 천지는 해방 다음날부터 無法(무법)천지가 전개되었다. 이때 無정부 상태가 어떤 것인지 몸으로 배울 수 있었다. 정부가 없으니 사회는 자연히 무법천지, 온갖 범죄가 날뛰었다. 법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분출하는지를 그때 체험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게 중국 특유의 馬賊團(마적단)이었다. 마치 중국인 전체가 마적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해만 지면 마적떼가 마을로 습격해 부녀자를 겁탈하고 재물 약탈을 일삼았다. 마적단이 떴다 하면 우리 온 식구들은 인근 중국인의 옥수수밭에 숨죽이고 있다가 그들이 재물을 갖고 돌아가면 집에 오곤 했다.

그때 내 나이 겨우 만 11세. 어린 나이지만 우리는 청소년단을 만들어 활과 창, 그리고 우산대로 총열을 만들어 ‘퉁포’라는 총을 만들어 마적단이 나타나면 우리는 퉁포라는 長銃(장총)을 쏘면서 저항도 해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해 가을 우리 집은 재산을 정리해서 道步(도보)로 두어 시간 거리에 있는 조선족 마을인 滿融屯(만융툰)으로 이사를 했다. 여기는 100% 조선족만 사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근 200세대에 교회도 있고 학교도 있어서 나는 그 만융소학교를 제1회로 졸업했다.

1993년 韓中수교 직후 모교를 방문했더니 그 당시의 졸업 사진과 학적부도 남아 있는데 내가 일등으로 졸업한 기록이 있어 교장 선생 이하 母校(모교) 스승들이 뒤늦게 졸업과 일등 축하파티라는 걸 열어 주어서 오랜만에 60도 가까운 배갈을 마시며 실컷 울기도 했다.

해방 후 無정부 상태가 한동안 지속되다가 소련군이 진주해 오면서 이번에는 또 다른 형태의 겁탈과 약탈이 벌어졌다. 따발총을 멘 소련 軍人이 마을에 나타나면 그들은 동양인의 나이를 모르는지 할머니들까지 겁탈해서 모두 볏나까리 속으로 피했고, 남자들은 손목에 찬 시계를 모두 강탈당했다. 그 소련 군인들은 팔뚝에 시계를 몇 개씩 차고 다니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시계를 빼앗을 때 그들의 말로 “따와이”라고 하는데 “내놔” 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끼리도 남의 물건이 탐나면 “따와이, 따와이” 하면서 놀았다.

그러다가 모택동의 八路軍(팔로군)이 진주했는 데, 그 속에는 조선족으로 구성된 의용군들이 있어서 이들이 중국 마적단을 소탕해 학교 운동장에 잔뜩 잡아다 곤장을 치고 소련군의 준동을 막아주어 치안이 겨우 회복되었다.


구세주’ 셋째 동생

無정부 상태 때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는 그해 늦가을 우리 고향 평북 정주로 歸鄕(귀향)하기로 하고 우선 부모님과 나, 바로 밑의 동생 등 4명이 먼저 그때까지도 운행하고 있었던 기차로 가려고 중국 審陽(심양) 시내에 있던 우리 집으로 괴나리봇짐을 꾸려놨다.

정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던 중 나의 셋째 동생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갓난아기를 데리고 그 겨울에 기차 꼭대기에 탄다는 것은 불가능해 조국行을 포기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나는 나의 셋째 동생(한국과학기술원 교수 역임)을 우리 집안의 구세주라고 부른다. 그 애가 아니었던들 우리는 그 해 영락없이 북한으로 가서 그 비참한 인생을 살았을 테니 말이다.

조국行을 포기하고 당분간 심양에 있을 때 우리가 겪은 일화다. 하루는 밤중에 복면한 조선족 청년 두 명의 강도가 우리 집을 습격, 조국으로 가져가려던 현금과 온갖 패물을 몽땅 털어갔다. 바로 그 당시 우리 주변에는 조선족 강도와 일본인 강도단이 날뛰고 있었다.

조선족 강도들은 우리가 당한 것처럼 同族(동족)의 재물을 강탈하는 데 비해 일본인 강도들은 청년들로 강도단을 구성해서 미처 일본으로 피하지 못한 일본인들을 위해 밤이면 조선족 집과 중국인 집, 점포들을 돌면서 주로 식료품 위주로 강탈한 뒤 일본인 집 마당에 떨어뜨려주고 아침이면 사라졌다. 일종의 애국청년들이었던 것이다.


야만적으로 받았던 性교육

그 당시 나는 어리고 순진한 11세 소년이었지만 어른들이 수군대는 얘기를 훔쳐 들으면서 조기 性교육을 체험하기도 했다. 심양의 우리 집 바로 옆 높은 담에 둘러싸인 건물은 일본군의 군수품 창고였는데, 해방 후 소련 女軍 막사로 쓰이고 있었다. 이 소련 여군들은 마을 청년들을 이곳으로 납치해 輪姦(윤간)을 벌였다.

거기 끌려갔다 나온 청년들의 경험담인즉, 호화판 음식에 매일 밤 무슨 주사를 놓은 뒤 윤간을 벌이고 풀려 나오면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 있다가 그만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들을 어린 나이에 수없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 받은 性교육치고는 야만적인 성교육이었던 셈이다.

그때 이런 말도 가끔 들렸다. 어떤 바람둥이는 죽을 때 죽더라도 실컷 재미 좀 봤으면 좋겠다고 해 자진해서 그 일을 당했다는 것이다. 풀려 나오면 영락없이 황천길로 직행했다고 한다. 그런저런 험한 일들을 당하고는 조국行을 완전히 포기하고 만융툰에 생활 터전을 잡아나갔다.


규율이 엉망이었던 장개석軍


역시 어린 나이에 들은 얘기지만 해가 우리 땅에서 떠서 우리 땅에서 진다고 말할 정도로 광대한 農土(농토)를 확보하고 농사를 지었고, 개인 정미소도 운영할 수 있었다. 정미소 운영이란 남의 쌀을 쪄서 돈을 버는 수익보다 우리가 지은 벼를 남들보다 먼저 쪄서 햇곡식으로 팔기 때문에 같은 농사를 지어도 수익은 매우 짭짤했다.

그런 덕분에 나의 어린 시절은 10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꽁꽁 어는 渾河(혼하·중국 요녕성의 江 중 하나)의 긴긴 강에서 스케이트를 종일 타고, 비싼 축구화도 매년 새 것으로 지어주어 축구도 하고, 테니스도 하는 등 제법 호화롭게 몇 년을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호강은 길지 않았다. 1947년부터는 연안에서 출몰한 모택동 공산군에 밀려서 장개석軍이 패전을 거듭했고 우리는 1947년 가을, 심양을 떠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해 내 나이는 만 13세. 요즈음 13세라면 어린이에 속하지만, 그 시절엔 13세라면 성년으로 취급됐던 것 같다. 연안에서 모택동軍이 진주해 온다는 소문이 돌고 있을 때 장개석의 중앙군은 전쟁에 대비한다며 동네 남자들을 가구당 한 명씩 매일 차출해서 산의 나무를 잘라 끈으로 어깨에 메고 내려와서 車道(차도)를 막는 노역을 시켰다. 열세 살이었던 나도 동원되어 전쟁이 무엇인지 직접 겪어보기도 했다.

해방 직후 우리 마을에 진주했던 모택동軍은 對民(대민) 宣撫(선무)공작으로 마적단 숙청 등 치안 유지는 물론, 매일 아침 마을 길 청소를 하는 등 對民 宣撫 공작을 빈틈없이 했기 때문에 모택동軍에 대한 인상은 매우 좋았다. 아마도 모택동은 그때부터 중국 정복을 꿈꾸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에 반해 장개석의 중앙군은 우선 그 어린 내 눈에도 기강이 흐트러져 거의 매일 도망병이 생겼다. 도망병이 變服隊(변복대)에 적발되면 길거리든 어디든 즉석에서 권총이나 그 군인이 소지하고 있었던 長銃(장총)을 빼앗아 총살을 집행했다. 나는 이 장면을 심심치 않게 목격했다. 비슷한 시기 모택동軍은 파죽지세로 거의 전투도 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중국 전체를 정복해나갔다.


모택동軍은 장개석軍의 무기로 싸웠다(?)’

우리 집은 비교적 컸기 때문에 장개석軍 군인들이 집에 여러 날 묵으면서 친하게 지낼 때도 있었다. 그 당시 우리들은 우산대를 총열로 퉁포’를 만들어서 들토끼 등 짐승 사냥도 하고 인근 중국인들이 우리 농산물을 훔치러 오면 그 총으로 쫓아 버리기도 했다. 그때 우리는 장개석軍이 나눠주는 화약을 공짜로 얻어 쓰기도 했다.

그러다가 모택동軍이 가까이 왔다 하는 정보가 들리면 장개석軍은 정보 확인도 않고 싸울 생각도 안 하고 다 도망쳤다. 심지어 지장이 되는 총알과 소총까지도 마을 웅덩이에 던지고 줄행랑을 쳤다. 우리는 잽싸게 그들이 버리고 간 총알을 잔뜩 주워 거기서 화약을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었다. 일설에는 모택동軍은 장개석軍의 무기로 싸웠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내가 목격한 바로는 모택동軍이 전쟁으로 중국을 석권한 게 아니라 장개석軍이 도망간 공간을 그냥 주운 것이라고 해야 맞다. 따라서 모택동의 중국 점령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無血 전쟁이었다고 평해야 옳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 중국 벌판에서 산 죄로 그 어린 나이에 남녀 소련군에 의한 강간이라는 性교육을 받아야 했고, 장개석軍의 변복대가 군인들을 총살하는 현장도 보아야 했다. 장개석軍과 모택동軍의 전쟁이라는 현장에서 그릇된 전쟁관도 가지게 된 것이다. 전쟁놀이 비슷한 전쟁 장면이 머리에 들어와 앉은 나로서는 후일 한국전쟁 때 전쟁에 대한 관념을 再교육받아야 했다. (계속)

[ 2015-12-22, 16: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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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신     2015-12-23 오전 2:54
러시아와 중국은 야만의 나라
그들과 친구하자는 근혜와 병신은 머하는 종자들?
조선이 망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얼핏보다가     2015-12-22 오후 11:55
중국/장개석 국민군대나 , 베트남/월남군대가...열악했던 공산군대에 맥없이 무너진 것은 부패가 결정적 원인이며, 가까이는 무기가 월등한 이라크 정규군대가 맥을 못추는 경우와도 일치한다. 군대/군인들의 부패란 , 국가의 존망을 좌우할 이적행위임을 역사가 증명하는 것.

아직도 군대의 부정부패/수뢰로 , 그나마 대표선수(?)라는 군수뇌부의 비리가 어제도/오늘도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것은...다름아닌 국민들의 수준이 크게 한몫한 것이라고 본다. 예를들면, 입으로는 핵공갈/김씨왕조척결을 부르짖으면서도,.. 대한민국 최대 방산비리라는 율곡비리의 전두환/노태우를 .., 경제성장율 기여 운운하면서( 안보는 나몰라라 하면서 ), '국가 영도자' 반열로 찬양하는, 보수를 사칭한 논객(?)이 있고 , 이런글에 열광(?)하는 떼거리가 있는 한... 대한민국은 여전히 백척간두의 위치.

( 대통령이 방산비리든 말든, 어느정도 돈을 쳐 받더라도, 후진국 시절 경제성장율이 10%넘으면 용인할겨? 박근혜대통령이 경제성장율 10%만들고 방산비리 수천억챙기면 영도자인겨? 아닌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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