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의 서울 점령,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을 보다
[만주에서 제주까지의 독특한 피난 생활記 (2)] 詐欺, 苦學, 전쟁… 시작부터 녹록치 않았던 祖國 생활

鄭慶均(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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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은 ‘광복 70주년 現代史 체험수기 현상모집’ 수상자들의 작품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일곱 번째 작품은 鄭慶均 씨의 手記, ‘가슴에 새겨둔 80년 간의 일기장’입니다.

만주를 떠나다

당시 모택동軍이 어디까지 왔다 하는 소문만 나도 장개석軍은 서둘러 도망가버려 우리 마을은 사실상 軍의 공백 지대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民心은 이미 공산주의에 물들고 있었다. “곧 공산군이 올 것이다”, “예수쟁이와 富者(부자)는 모조리 숙청될 것이다”란 소문이 하루 아침에 퍼진 것이다. 

나의 선친은 교회 장로에다가 돈이 좀 있는 이른바 부자였기 때문에 공산군이 들어오면 우리는 ‘숙청 대상 제1호’라고 마을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옆집 친구를 만나러 가도 그 집 어른들이 大門에서 막아버리고 썩 물러가라고 호통을 쳤다. 공산주의란 이처럼 잔인하고 무섭구나 하는 것을 어린 나이에 내 뼛속 깊숙이 새겨졌다.

한국으로 오려고 재물을 정리하는데도 예수쟁이 부자들이 쓰던 물건을 팔아주면 자기들도 숙청된다고 했다. 그 당시 우리 가족이 재산목록 1호라고 했던 재봉틀을 팔려고 내놓았지만 아무도 사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우리가 미리 쪄놓았던 쌀은 제대로 팔 수 있었다.

그 당시 기독교인은 말할 것도 없고, 제 밥 깨나 먹는 정도의 地主(지주)면 모택동軍이 들어오는 즉시 숙청 대상으로 삼았다. 非기독교인, 가난한 자 外에는 모두 숙청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우리는 모택동軍을 피해 만주를 떠나야 했다.

하지만 그 비용을 부담할 財力(재력)이 없는 조선족들은 男負女戴(남부여대·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인다는 뜻. 가난한 사람들이 떠돌아 다니는 것을 일컫는 말) 괴나리봇짐과 어린 것들을 데리고 ‘산해관’이라는 험산준령을 걸어서 북경 또는 천진까지 무려 한 달(또는 한 달 반) 동안 道步(도보)로 도망쳐야 했다. 중국 벌판은 그때 한겨울이어서 오는 도중 엄동설한 들판에서 어린이, 노약자 등 살붙이를 벌판에 묻어야 했던 비참한 가정도 많았다.

집도, 땅도, 재물도 몽땅 그냥 버려두고 쌀 판 돈만 가지고 美 선교부가 주선해준 33인승 쌍발기(화물수송기)를 타고 우리 가족 모두가 한 비행기로 북경으로 피난을 갔다. 그때가 1947년 겨울이었다.


목사에게 피 같은 돈을…

우리는 북경 조선족 교회에서 괴나리봇짐을 풀어 울타리를 만들고 몇십 가정이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북경 만수산, 이화원, 천단 등 중국의 명승지 관광도 하면서 그럭저럭 약 한 달 정도 지내다가 천진의 한 교회로 거처를 옮겼다.

그 교회 목사의 이름은 이○○였는데, 이 교회 목사로 인해 나의 어린 시절의 호된 고생이 싹텄다. 그때 내 나이가 만 14세라 지금도 모든 기억이 또렷하다. 천진의 교회에서 약 6개월 신세를 지는 동안 이○○(이)란 목사는 우리를 매우 잘 대해 주었다. 우리 가족은 그 목사를 하나님 다음 가는 존재로 떠 받들었다.

어느 날 나의 선친이 나더러 천진은행에 가자고 했다. 선친은 가지고 있던 현찰 등을 은행에 맡기고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맡긴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送金(송금)한 것 같기도 하다. 선친은 얼마 뒤 다시 천진은행으로 가 현찰을 찾았다. 인력거 두 대를 불러 정미소에서 쓰는 80kg 정도의 쌀 마대 두 개씩, 모두 네 마대의 현찰을 찾은 것이다. 그러곤 교회로 가 목사에게 갖다 주었다. 그 자리에서 나의 부친은 종이 한 장만 달랑 들고 나왔다.

그 목사는, 서울에서 자기 아우가 큰 무역상을 하는데 돈부자이고 이 證書(증서)를 보여주면 한국 돈으로 줄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부친은 그게 하나님의 음성처럼 굳게 믿고 종이 한 장만 들고 온 것이다. 이 종잇장이 훗날 우리 가족이 조국에 와서 거지 생활을 하라는 명령서인 줄 미처 알지 못했다. 그 엄청난 현찰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면, 오늘날 큰돈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 엄청난 돈을 목사에게 통째로 준 것이다.

그 목사는 후일 귀국해 某 교회 담임목사를 지냈다. 그는 원래 침례교 소속이었는데 어떤 경로로 그 큰 교회의 담임목사까지 되었는지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목사들 세계에도 이런 구린 데가 있는 것 같다.

훗날 서울에 왔을 때 나는 덕수궁 대한문 근처에 사무실을 갖고 있던 한 변호사에게 이 件(건)에 대해 의뢰한 적이 있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기독 학생회장 자격으로 그 목사를 여러 번 찾아가 내 돈을 내놓으라고 고함을 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한 푼도 못 받고 쫓겨나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분하다.

‘천국의 비단 이불’ 같던 월미도

6개월의 천진교회 피난 생활을 끝으로 1924년 나의 조부님께서 만주로 이민 간 이래 24년간의 외국 생활을 마감하고, 1948년 5월 초 우리 정부가 보내준 수송함 LSD(한국명 예천호)를 타고 인천항으로 귀국했다. 배의 운항속도로 봐서는 3~4일이면 올 수 있는 거리를 정부와 조정하면서 우리들의 인천 도착을 최대한 늦춘 것 같았다. 약 일주일 걸려 인천항에 도착한 게 1948년 5월9일이었는데, 다음날 5·10총선거와 건국일을 피하고자 우리는 배 안에서 이틀을 더 지내야 했다.

5월11일 드디어 下船(하선), 조국의 흙을 밟았다. 그곳은 월미도였다. 그 날의 흙냄새는 평생 잊을 수 없다. 내 나라, 내 조국, 내 땅, 그 소중함의 의미는 외국에 살아보지 않고는 느낄 수 없는 감동이었다. 그때 감격을 가지고 오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월미도 백사장에는 수십 개의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배에서 내릴 때 방역팀은 분무기로 LST 분말을 자루 째로 퍼붓는 것 같이 온몸에 흰 가루로 뿌려 주었다. 그 당시엔 그 분말이 그렇게 해로운 줄 몰랐다. 우리는 비실비실 웃으며 조국에 오면 이렇게 위생적으로 해주는구나 하는 고마운 생각만 들었다. 바다가 없는 심양에서 성장한 우리 형제에게 월미도의 흰 모래밭과 잔잔한 물결은 꼭 저 천국에 비단 이불을 깔아 준 것 같았다.

그런 곳에서 5~6월 봄을 즐겼다. 정부에서 보내 준 트럭에 分乘(분승)해 우리 가족과 북경에서 온 일행들은 인천 시내를 거쳐 서울로 왔다. 트럭으로 인천시를 지나면서 우리는 일제히 “아! 여기는 맨 조선 사람뿐이네! 간판도 전부 한글뿐이네”라며 탄성을 질렀다. 조국이 낯선 관광지처럼 비친 것은 사실 슬픈 일이다.

서울에서의 첫 생활

두어 시간 걸려 서울에 입성했다. 우리 가족과 함께 천진에서 귀국했던 일행 몇 명은 서울 숭인동 야산의 언덕에 쳐놓은 천막에 배당되어 조국에서의 첫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우리들의 본적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산 178번지. 우리 일행은 모두 같은 번지를 부여받았다. 조국에 돌아왔지만 우리 고향은 이 산등성이밖에 없다. 가을 추석 명절, 구정 명절에 모두 고향으로 간다지만 우리는 방문할 고향이 없었다. 우리 일행들의 고향이 주로 평안남북도였기 때문이다.

그해 여름 숭인동 산등성이 천막 속에서의 汗蒸(한증) 생활 끝에 만융툰에서 같이 나온 가정들 십여 가구는, 가지고 온 돈을 모아 남대문로 5가의 서울역 근처에 있던 대동여관이라는 3층짜리 건물을 공동 구매해 이사했다. 1948년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우리는 2층의 맨 구석방, 일본식 다다미방에 첫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 단칸방에서 나의 조부님과 부모님, 형제 4남매 등 총 일곱 식구가 함께 살게 된 것이다. 부모님에겐 잠깐 실례가 될 수 있지만, 그 비좁은 방에서 어떻게 ‘비밀 작업’을 하셨는지 1949년 음력 7월7일 칠석날에는 막내가 한 명 더 태어났다(성균관대 교수). 모두 여덟 명의 식구가 단칸방에서 조국생활을 시작했다.

천당은 천당, 학교는 학교

1947년 가을 심양을 떠나 북경, 천진 등을 거쳐 오는 동안 꼬박 1년을 길바닥에서 버렸다. 1949년에야 비로소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 당시는 소위 ‘外還(외환)동포 입학특례법’인가 하는 게 있어서 아무 학교나 가고 싶은 학교에 지원서 한 장 써넣으면 無시험으로 입학하는 특전이 있었다. 그런데 나의 둘째 숙부님(당시 목사)은 예수 잘 믿고 천당 가라고 자기의 스승이었던 백인협 목사가 교장으로 있던 대광중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어린 나로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집안 어른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대광중학교는 서울중학교 바로 맞은편의 산언덕, 지금의 경향신문사 근처에 있었다. 이 학교와 졸업생들에겐 미안하지만 그 학교는 당시 廢家(폐가)와 다름 없었다. 건물도 운동장도 없고, 2층짜리 벽돌집에 나무문 두 개가 덜렁덜렁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도 숙부님 생각에는 그곳이 천당 가는 길로 보였는지 모른다. 한 인간에게 있어서 학교가, 학벌이 이 땅을 살아가는 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죽어서 천당 갈 생각만 하고 계셨던 것 같다. 크면서 생각해보았지만, 숙부님의 학교 선택에는 지금도 동의할 수 없다. 천당은 천당, 학교는 학교 아니겠는가.

상처가 지금의 나를 만들다

당시 우리 집은 糊口之策(호구지책)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長男인 나는 매일 학교가 끝나면 책가방을 낀 채 서울신문사로 달려가 신문 200장을 샀다. 그러곤 남대문시장으로 달려가 “방금 나온 신문 사시오!”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신문을 팔았다. 하지만 신문 200장을 판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집에 와서 보리밥 한 그릇 먹고 또다시 우리 동네 여관 골목으로 뛰어다니면서 “신문 사시오!”를 외쳤다. 집에 돌아오면 늦은 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 자신이 제법 대견스럽다. 몸은 힘들었지만 학업은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날 배운 것과 내일 배울 것을 모두 복습, 예습했다. 그렇게 악착같이 노력한 덕분에 1등 자리를 남에게 빼앗겨 보지 않았다. 신문팔이 역시 여덟 식구의 목줄이 붙어 있었기에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여름방학도 방학이 아니었다. 방학이면 더욱 힘을 써서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기차 시간표라는 게 없고 그저 서울역 광장에 사람들이 꽉 차게 모이면 기차가 한 대 움직이는 형편이었다. 서울역 어디에도 수도꼭지조차 없었다.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목이 타는 것을 알아채고 나와 모친은 중국에서 나올 때 사온 대형 물 주전자에 우리 집 펌프에서 받은 냉수를 들고 서울역 광장을 돌면서 물을 팔았다. 수입이 제법 괜찮았다.

거기에 또 욕심이 생겨 잡지를 사서 길에 나무틀을 놓고 팔기도 했다. 그 잡지의 이름은 《이북통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으로도 금전적 재미를 보았는데, 어느 날 순경이 다가오더니 불법 노점상이라며 곤봉으로 내 왼쪽 어깨를 후려치고 잡지를 몽땅 압수해 갔다. 그날 이후 내 왼쪽 어깨에는 상처가 남아 있다. 요즘도 날씨가 흐릴 때는 가끔 왼쪽 어깨에 통증을 느낀다.

그날의 상처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원동력이다. 긍정적 자극제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가끔 힘들 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참을 수 없이 분한 일을 당할 때 그 아픔을 想起(상기)하면 인내심이 생긴다. 그럴 때면 반드시 성공하고야 말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곤 한다. 이것이 소년의 자기 다짐이고, 자기 채찍이다. 매는 아프다. 그러나 그 매에 의미를 부여하면 人格(인격)이 된다.

전쟁의 序幕


1950년 6월25일은 일요일. 우리가 조국에 온 지 겨우 2년 되는 해. 아침 먹고 큰길에 나가보니 온통 軍用 트럭들이 휴가 나왔던 군인들을 태우고 태극기를 날리면서 부대로 귀대하는 행렬이 분주하게 달리고 있었다.

TV라는 건 없고 라디오조차 돈 좀 있는 집이 아니면 구경할 수 없는 때였다. 귀동냥으로 길거리에서 수군대는 말을 들었다. 들어보니 북한군이 38선을 침범했다는 것이다. 前線(전선)에서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튿날 월요일 아침, 평소처럼 학교에 갔다. 점심시간 후 음악 시간이 시작되어 오선지 읽는 법을 막 배우고 있던 중 大砲(대포) 소리가 점점 더 커지며 학교 건물이 약간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벨소리가 요동을 치더니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수업을 중단하고 모두 귀가하라고 했다.

나는 급히 나와 동대문까지 달렸고, 電車(전차)를 타고 서울역 우리집까지 올 수 있었다. 집에 오니 가족들은 영문을 잘 모르고 그저 막연하게 불안해 하기만 했다. 내가 학교에서 들은 대로 북한군이 의정부까지 치고 내려왔다고 했더니 선친은 ‘일 다 끝났구나’라고 하며 혀를 찼다.

충격과 공포

6월27일 화요일 아침, 큰 길에 나갔더니 벌써 인민군 탱크부대가 굉음을 울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공포스러운 장면을 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 가까운 이웃이었던 청소년들이 태연스럽게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는 것이었다. 기뻐 날뛰며 큰 길에서 인민공화국 깃발을 휘날리며 인민군들을 향해 “만세!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마치 1945년 8월15일, 우리가 중국에서 태극기를 날리면서 외쳤던 만세소리와 유사할 정도였다. 더욱 놀란 것은 교회 어른들까지도 덩달아 만세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광경을 보고 정말 충격을 받았다.

집에 들어와 대성통곡을 하며 ‘어른들까지 어떻게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를 수 있느냐’며 조부님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데, 우리 집 바로 옆에 있던 태양여관 창호문이 열렸다. 이때 몇몇 남자들이 고함을 지르며 우리 집 창문을 열라고 불호령을 했다. 나의 조부님이 문을 여니 그들은 들고 있던 권총으로 나를 지목하며, “이 간나 아새끼, 반동분자를 죽여버리겠어”라고 위협했다.

조부님이 얼른 막아서며 그들에게 설득조로 말했다. “차라리 나를 쏴라. 이 어린 것이 지금까지 배운 게 그것이고, 어린 것들은 배운 대로 하는 것 아니냐. 당신들도 이 어린 것을 쏴 죽일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당신들이 바로 교육을 해서 나라의 人才(인재)로 쓰도록 해야 할 게 아니냐”고 말했다. 그들은 오늘 한 번만 봐주는데 앞으로 두고 볼 터이니 조심하라고 말하고는 창문을 닫아버렸다. 그 당시만 해도 모든 건물과 주택의 창문은 유리가 아니라 창호지로 발라 놓았기 때문에 이웃집에서도 남의 말을 다 들을 수 있었다.

후일 알아본 바로는, 그들은 인민군 공작대원이었다고 한다. 벌써 여러 날 전 손님을 假裝(가장)해 그 여관에 투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동네 가난한 청년 몇몇이 그들과  내통하면서 마을 주민 동향을 일일이 보고했다고 한다. 북한은 오래 전부터 南侵(남침)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 2015-12-23, 15:4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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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령초     2015-12-24 오후 6:44
남의 일 같지않게 잘 보고 있습니다. 제 고향은 정주, 선천, 동림, 차령관 그 다음
南市 입니다. 1950년 12월에 남쪽으로 왔구요. 용건 우선 말씀드릴게요.
鄭慶均씨의 이 글 세번째 소제목 (전국에 비단이불 같던 월미도)안에
DDT를 LST로 잘 못 입력된 것을 알려드립니다.
   해리슨 김     2015-12-23 오후 7:11
빨갱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있나요?
그 때 아주 씨를 말려야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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