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소년 인민군이 천사처럼 보였다!
[만주에서 제주까지의 독특한 피난 생활記 (3)] 목숨을 건 인민군 탈영과 蔡 君의 비참한 죽음

鄭慶均(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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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은 ‘광복 70주년 現代史 체험수기 현상모집’ 수상자들의 작품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일곱 번째 작품은 鄭慶均 씨의 手記, ‘가슴에 새겨둔 80년 간의 일기장’입니다.
 
 <그때가 점심 때. 정자각 마당에 우리가 모두 함께 먹을 음식을 펴놓고 목사님이 기도를 하셨다. 꽤나 긴 기도로 기억하는데, 내용은 “어서 속히 이 악마의 무리가 물러가고…”란 내용이었다. 일동이 “아멘!”하고 눈을 뜨니, 세상에! 정자각 옆에 따발총을 멘 두 명의 인민군 병사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닌가!>

공산군의 陰謀

집에 있는데 학교에서 ‘사발통문’이라는 게 왔다. “학생들은 전원 학교로 등교하라. 학생들이 안오면 선생들이 잡혀간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때는 전화도 없고 電報(전보)도 전달이 안되고 통신 수단도 전혀 없었다. 그게 어떤 경로로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는지 자금도 의문이다.

우리는 선생님들이 잡혀간다는 게 겁이 나서 모두 지정된 날짜에 학교로 갔다. 거의 전원 출석이었다. 校庭(교정)에는 트럭 여러 대가 줄을 맞춰 대기하고 있었다. ‘학교 운동장을 부대 주차장으로 쓰는구나’라고 가볍게 생각하며 우리는 각자 자기 교실로 올라갔다. 조금 있으니 학생 전원 다 운동장으로 집합하라고 해 운동장에 모였다. 이어 큰 확성기가 울렸다.

“오늘 학생 동무에게 유명한 영화 한 편을 보여줄 계획이니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모두 트럭에 타라”는 것이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도망치려고 출입문 쪽을 보니 인민군들이 지키고 있었다. 트럭을 타고 간 곳은 당시 명동에 있던 국립극장 ‘시공관’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영화는 상영할 기색조차 없었다. 곧 학생 대표라는 자가 단상에 나타났다. 그러자 사방에서 “의장! 의장! 긴급동의가 있습니다. 지금 한창 조국 해방의 성스러운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 학생들은 후방에서 이렇게 영화나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를 성스러운 조국 해방 전선에 戰士(전사)로 참여시켜 줄 것을 긴급 동의합니다”라고 하니 사방에서 “옳소!, 옳소!” 소리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내가 중국에 있을 때 공산군 의용군이라는 자들에게서 경험했던 전형적인 공산당 수법이 아닌가. 나는 해방 직후, 우리 마을에 잠시 진주했던 모택동軍 소속 조선의용군 조선소년단이라는 조직을 통해 공산당의 實體(실체)를 경험할 수 있었다. 이게 바로 그들의 수법과 같았다. 중국에서 나와 같이 나온 세 친구는, “야! 이거 큰일 났다. 도망치자”며 출입문 쪽으로 나오니 이미 철문은 내려져 있었다. 꼼짝없이 붙잡힌 것이다.

저들의 안내에 따라 극장 밖으로 나오니 우리가 타고 온 트럭들이 그대로 모두 서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명령대로 우리는 모두 그 트럭에 탔다. 트럭들이 줄을 지어 차례대로 움직였다. 한참 우리를 싣고 간 곳은 삼청동 꼭대기에 있는 삼청국민학교였다.


인민군 탈영병이 되다

다행히도 나와 절친한 최영근, 황원기 등 중국에서 같이 나온 친구들이 한 교실에 배치되었다. 군사훈련이라고 해봤자 무기는 아무것도 없고 막대기도 없었다. 戰時(전시)이기 때문에 인민군에는 軍用(군용) 학용품조차 없었고 아침, 저녁 점호도 없었다. 훈련도 ‘앞으로 가! 뒤로 돌아가!’ 정도였다. 주로 思想(사상)교육과 북한 국가를 비롯한 軍歌(군가) 교육이 고작이었다. 그때 배운 북한 국가와 군가를 후일 내가 유엔 고문으로 활약할 때, 북한 대표들에게 유용하게 써 먹을 수 있었다. 도둑질 외엔 아무거나 다 배워두는 게 신상에 좋은 것 같긴 하다.

중국서 같이 나온 우리 셋은 불침번을 짜고 두 명이 자도 한 명은 깨어 있어서 인민군이 조는 틈에 도망가자고 했다. 셋째 날 새벽녘, 黃 군이 우리 둘을 흔들어 깨우면서 “지금이다. 도망가자”고 수군거려 눈곱도 안 비빈 채로 거의 본능적으로 뛰어나왔다. 그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무서울 게 없고 못할 것도 없었다.

飛虎(비호)같이 날아 우리는 그 학교 울타리를 가뿐히 뛰어넘고 무작정 뛰었다. 삼청동 골짜기는 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한참 뛰다 보면 풍선을 탄 것처럼 붕붕 떠서 내려오는 듯했다. 그렇게 내려오다 나뭇가지에 걸려 찢어지기도 하면서 간신히 도로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 그 순간부터 나의 신분은 인민군 탈영병! 내 생애 유일한 前科(전과)다. 훗날 이 신분을 써먹은 기회가 적지 않았다. 참 웃기는 얘기다.

집에 도착하니 한밤 중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부둥켜안고 엉엉 우셨다. 사흘 전 학교 간다고 나간 아들이 감감무소식이니 틀림없이 인민군에 붙들려 갔을 것이고, 어쩌면 이 세상에서는 다시 못 볼 것 같다며 비관하셨다고 한다. 그런 내가 살아서 나타나니 어머니의 심정이 오죽 기뻤겠는가.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부친이 보이질 않았다. 영문을 물으니 식구들이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그때 어머니가 큰 소리로 “내려오세요. 경균이가 돌아왔어요”하니까 천장 한쪽이 열리더니 어머니가 사다리를 갖다 놓았다. 

부친이 천장에 숨어있던 이유는 딴 게 아니었다. 밤만 되면 북한 공작대원들이 들이닥쳐 청·장년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다가 젊은 사람들은 軍에 보내고 나이 든 사람들은 노역으로 부려먹기 위해 戰線(전선)으로 끌고 갔다고 한다. 그때 나와 인민군에 붙잡혔다 나온 친구의 형은 인민군에 끌려간 뒤 평생 소식을 모른 채 지내오고 있다.

부친의 친구인 김운학 장로라는 분은 인민군에 붙잡혀 여러 날을 끌려 다니다가 유엔군 비행기가 공습하는 순간 날쌔게 피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붙들려가던 많은 사람 중 몸에 이상이 있어서 걷지 못하면, 인민군이 그 자리서 총살 처분해 길 옆에 버리고 가기도 하고, 도망치다 붙잡혀서 총살당하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들, 그들은 사람의 목숨하고 파리의 목숨을 구별할 줄 모르는 야만인들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대추 팔러 덕소에서 남대문까지

나의 만융툰 소학교 선생님이셨던 분 중 김경균 집사란 사람이 있었다. 그가 동구릉 능지기와 아는 사이라 그의 교섭으로 우리와 함께 대동여관에 살고 있던 가정 중 약 열 가정이 현릉(조선 효종 임금의 무덤)으로 기억되는 능의 정자각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평소 신문을 팔아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살던 우리 집에 모아 놓은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우리 가족이 능자락 산속에 숨고 보니 먹을 게 없었다. 그때가 한창 대추가 나오는 철이라 나와 동갑내기 최영근은 해뜨기 전 쌀 마대 큰 것 하나를 들고 덕소까지 가 거기서 대추를 샀다. 그런 정보를 어떻게 구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동구릉에서 언덕길을 넘어 ‘떡소’(덕소를 우리는 이렇게 불렀다)까지는 약 두어 시간 이상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군가 따놓은 대추를 구입하면 비싸게 받지만, 우리가 나무에서 직접 따면 싸게 주곤 했다.

처음에 다섯 말을 사서 지게에 지고 남대문 시장까지 가서 팔았다. 덕소에서 남대문 시장까지 가는 旅程(여정)은 참 힘들었다. 우리가 망우리 고개에 도달하면 12시경이 됐다. 그땐 시계가 없던 시절이라 배꼽시계로 대충 점심시간을 짐작했다. 새벽에 죽 한 그릇 먹고 나섰으니 더는 걸을 힘이 없었다.

망우리 언덕 나무 그늘엔 언제나 그 근처에서 참외 심는 사람들이 들고 와서 파는 참외가 있었다. 우리는 그 참외를 싸게 사 먹을 수 있었다. 큰 놈으로 두어 개 사서 점심으로 먹고 있노라면 어김없이 美軍 전투기가 機銃掃射(기총소사)를 했다.

그때 우리는 그 비행기를 ‘쌕쌕이’라 불렀다. 쌕쌕이가 공습하는 시간은 우리의 배꼽시계와 거의 비슷했다. 美軍의 공습 시간이 대충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쌕쌕이가 공습을 끝내면 우리는 대추를 짊어지고 다시 남대문 방향으로 걸었다. 가는 도중 참호를 파고 숨어있던 인민군들이 우리를 세워 오른손 검지를 검사했다. 총을 쏘던 국군 출신이 아닌가를 확인했던 것이다.

우리는 보다 가까운 동대문 시장이나 청량리 시장에서 대추를 팔 수도 있었으나, 최영근의 부모님을 비롯한 몇몇 어르신들은 서울의 집을 지키고 계셨다. 그래서 부득이 남대문 시장까지 가야했다. 우리가 남대문 시장에서 대추를 팔고나면, 그 돈으로 약간의 보리 등 식량을 사서 그 분들께 드리고 오곤 했다.

오늘의 독자들이 이 글을 읽으면 새빨간 거짓말로 들릴 것이다. 어떻게 해뜨기 전 동구릉에서 道步(도보)로 덕소까지 가서 생대추를 여섯 말이나 사서 참외 두 개로 점심을 때우고 남대문 시장까지 가서 팔고 어두운 길을 손전등 하나 없이 온종일 걸을 수 있단 말인가! 지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거짓말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지만 그건 모두 사실이다. 이 글엔 눈물이 없다. 그러나 그 당시 나나 우리 가족, 아니 공산군에 짓밟힌 우리 국민 모두가 눈물 젖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기도 중 들이닥친 인민군

동구릉에 숨어 살던 우리는 모두 중국에서 나온 일행들이 만든 염천교회 교인들이었다.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고 서울 어디에 숨어 지나시던 염천교회 김석찬 목사가 하얀 모시옷에 흰 고무신을 신고 동구릉에 오셨다.

그때가 점심 때. 정자각 마당에 우리가 모두 함께 먹을 음식을 펴놓고 목사님이 기도를 하셨다. 꽤나 긴 기도로 기억하는데, 내용은 “어서 속히 이 악마의 무리가 물러가고…”란 내용이었다. 일동이 “아멘!”하고 눈을 뜨니, 세상에! 정자각 옆에 따발총을 멘 두 명의 인민군 병사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닌가!

내 고모는 눈치를 못 채고 “목사님, 식사하시지요”라는 말까지 했다. 그 말을 두 인민군 병사가 들었다. 우리는 그 순간 다 같이 천당에 갈 것으로 생각했다. 모두의 입과 얼굴, 손발은 다 식어 있었고 피까지 굳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그 두 병사가 손으로 나와 최영근 두 명을 가리키면서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그들은 우리 둘을 데리고 능 뒤의 골짜기로 한참 올라갔다. 밑에서는 그 병사들의 총소리만을 기다리면서 우리 시신을 가지고 내려올 들것을 마련하고 있었다. 깊숙한 골짜기에 도달하니 그 두 명의 병사가 존댓말로 “우리 여기 잠깐 앉읍시다”라며 비교적 정중히 말했다.

우리는 멎어 있던 숨을 다시 쉴 수는 있었지만, 상황 파악은 제대로 안됐다. 그 둘 중 한 명이 입을 열고 “동무들 지금 몇 살이요?” 하고 물었다. 열 일곱 살이라 하니까 자기들도 우리와 동갑이라면서 “실은 우리 둘 다 장로의 아들로 요리조리 피해 다니다가 할 수 없이 평양에서 인민군에 붙들려 나왔다”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만화에서나, 교회 설교에서나 듣던 천사들의 얼굴을 보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와 영근이는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의 손을 붙잡듯 있는 힘을 다해 그들의 손을 꽉 잡았다. 그 순간 굳어 있던 피가 다시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노점상을 통해 배운 敎訓

1950년 9월28일 오후, 우리가 숨어 있던 동구릉 앞길에서는 유엔군과 국군이 덕소 방향으로 당당하게 진격하는 것을 목격했다. 태극기를 들고 나가 “국군 만세! 대한민국 만세”를 외쳐댔다. 동구릉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 부대가 모두 철수하면서 그들이 잡아먹으려고 몰수해 키우던 십여 마리의 소들도 모두 버려둔 채 퇴각했다.

우리는 그중에서 제일 맛 좋아 보이는 소 한 마리를 잡아다 도살을 했다. 십여 가구가 골고루 나누었다. 능 한쪽에 나란히 걸어 놓은 큰 솥에 소를 넣고 장조림을 했다. 동구릉 전체에 소고기 냄새가 진동했다.

이튿날인 9월29일, 가지고 있던 식량으로 점심을 때우고 우리 각 가정은 하나둘씩 어제 밤새 고운 소고기 장조림 덩어리와 괴나리봇짐을 꾸려서 우리가 살고 있던 남대문 쪽으로 왔다. 우리가 살던 집은 砲火(포화)에 全燒(전소)됐다. 다음 날 남대문 시장에 가서 천막들을 사다 임시 거처를 마련해야 했다.

무턱대고 집을 나서 거리를 다니다가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건너편 쪽, 충무로 부근에 사람들이 제법 많이 왕래하는 게 눈에 띄었다. 나는 대추를 팔아 벌었던 현찰을 들고 목공소로 갔다. 그 자리에서 사방 1m 정도의 좌판을 만들어 行人(행인)이 비교적 많은 방향에 놓았다.

나는 美軍 부대서 흘러나온 군수품들, 군화, 양말, 잠바, 메리야스 등 ‘메이드인’을 사서 좌판에 놓고 팔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는 美製(미제) 물건을 메이드인이라고 불렀다. 이 웬 떡이냐! 사 놓은 미제 물건이 좌판에 놓는 족족 팔리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집에 가 번 돈을 세어 보니 몇 가마니 값이었다. 우리 식구들은 혼이 나간 것처럼 어리둥절했다.

다음 날부터는 부친도 함께 그 자리에 나가서 장사를 시작했다. 점점 장사에 익숙해지고 물건을 가져오는 사람도, 사가는 사람도 늘어나 자리가 잡혀갔다. 한두 달 남짓 매일같이 하루 쌀 여덟 마대에 해당하는 현찰을 벌었다. 그런데 같이 천막생활을 하던 염천교회 교인들은 나를 엄청 부러워만 할 뿐 자기들은 나설 생각을 안했다.

발버둥 치면 굶지 않고, 더 노력하면 노력하는 만큼 잘 살 수 있다는 법을 몸으로 체험한 셈이다. 나는 그 어린 나이에 지금의 빌 게이츠 만큼이나 富者(부자)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때 말로 뻐기고 사는 재미도 맛보았다. 그때 내 나이가 조금만 더 많았더라면, 나를 사위 삼고 싶은 사람도 제법 있었을 것 같다.


부산으로의 피난

그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중공군이 人海戰術(인해전술)로 내려오는 바람에 우리는 다시 피난을 가야 했다. 마침 메이드인 장사를 해서 현찰이 넉넉할 때라 우리는 가장 큰 리어카 한 대를 구입해 그 위에 이불 보따리와 옷가지를 싣을 수 있었다. 그 짐 위에는 갓난아이 막내도 태웠다. 부친이 앞에서 끌고 나는 뒤에서 밀었다. 우리 가족은 한강 가설교를 건너 노량진역까지 족히 한 시간 이상 낑낑대고 갔다. 1월4일 한겨울이었지만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우리는 둥근 기름 탱크 수송칸 밑으로 이불을 두껍게 펴고, 그 속에 여덟 식구가 쪼그리고 구부려 낀 채로 시간표도 없는 화물차에 몸을 맡긴 채 며칠을 걸려 부산역에 도착했다. 아마 1월10일 전후인 것 같다.

부산에 아는 사람, 아는 곳이 있을 리 없었다. 우리 가족은 부산역 앞 동네 모퉁이에 바람이 잘 막히는 남의 집 굴뚝 옆에서 이불을 덮은 채 며칠을 지냈다. 나와 부친은 부둣가로 나가 군수품에서 흘린 판자 조각들과 박스 같은 것을 잔뜩 주워 모았다. 못을 사다 수정동 큰 길가에 한 세 평 될까 말까 한 無허가 판잣집을 짓고 정착했다.

부엌이 있을 리 없고 화장실이 있을 리 없다. 아무 곳이나 앉으면 화장실이고, 쇠통에 장작을 넣고 밥을 지으면 그 길바닥이 우리 주방이었다. 극한 상황에서는 인간의 생존 본능이 몇 배나 더 맹렬해지는 것을 체험했다. 여기서 얼마나 살아야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붙어있는 목숨만이라도 이어가야 했다.

1·4 후퇴 직전까지 충무로와 퇴계로 부근에서 번 돈을 장사 밑천 삼아 부친과 나는 국제시장에서 제대로 된 장사를 해보기로 했다. 역시 목공소에 가서 가로 약 1.5m, 길이가 약 2m 정도 되는 賣臺(매대)를 만들어 국제시장 적당한 곳에 마구잡이로 눌러앉았다. 누가 귀찮게 하지도 않고 저녁에 집에 갈 때 그 좌판을 그대로 놓고 가도 아무도 치우지 않았다. 그곳이 우리 가게가 된 셈이다.

우리가 선택한 업종은 메리야스 장사였다. 국제시장 안에서 메리야스 도매상을 찾아 아침이면 나와 부친이 메고 올 수 있는 분량만큼 사다가 좌판에 깔아 놓았다. 이것이 적중해 장사가 무척 잘됐다. 집에 갈 때 길 건너 자갈치 시장에 가서 조부님이 그렇게도 좋아하시는 생선과 젓갈도 사다 드릴 수 있었다. 조부님이 성장한 고향 평안북도 정주군은 바다와 맞닿아 있어 생선이 풍부한 곳이었다. 중국에 가서부터는 자신의 입맛도 포기한 채 한 평생을 사셨다고 한다. 비록 부엌도 없는 판잣집이었지만, 밤이면 길바닥에서 생선 굽는 냄새도 피울 수 있었고 오랜만에 효도도 할 수 있었다.


제주로 또 다시 피난

1951년 늦가을로 기억한다. 천진에서 배를 타고 온 것처럼 우리 가족은 제주행 피난 배를 타야 했다. 우리 가족만큼 피난에 날쌘 사람들도 당시엔 드물었을 것이다. 우리를 태운 배는 성산포에 정박하고,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타고 간 곳이 표선면 세화리란 곳이다.

해변에서 산속으로 두어 시간 산길을 걸어가야 도달하는 산간 마을이었다. 우리가 배정된 집은 강 씨 집. 그 집의 방 한 칸을 얻어 여덟 식구가 쪼그리고 살았다. 그래도 부산 길바닥의 하꼬방(판자집)에 비하면 매우 훌륭한 보금자리였다. 

강 씨 집에는 나보다 한 살 밑인 처녀와 그 애보다 두어 살 아래인 여자 동생, 남자애도 하나 있었다. 그 처녀들은 한창 물이 오른 海女(해녀)였다. 어느 날, 그 여자애 중 한 명이 물 뜨러 가자고 하면서 자기 입에 손가락을 대며 ‘쉿’ 하는 것이었다. 자기들 부모의 눈치를 피해 가면서 나에게만 비밀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했다. 무슨 뜻일까? 그 날은 산에서 공비가 내려오는 날이라고 했다. 뒤에 알고 보니 제주 그들은 공비가 습격 오는 지역과 날짜를 미리 다 내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은 우리가 깊이 자고 있을 때, 조부님이 급하게 우리를 깨웠다. ‘모두 일어나 숨자’면서 밖으로 나갔더니 주인집 사람들은 이미 한 명도 없었다. ‘큰일났다’면서 우리는 눈곱이 낀 채로 허겁지겁 주변 밭에 숨었다. 현지인들은 미리 공비의 습격 사실을 알고 집 앞에 공비가 가져갈 쌀과 생선들을 들고 갈 수 있도록 포대에 넣어 놓고 숨어 있었다. 피난민에게는 절대로 알리면 안 되는 게 그들만의 불문율이었다.

그들은 우리 피난민들을 ‘뭍의 놈들’이라고 불렀다. 육지 놈들이란 뜻이다. 가끔 마을을 지나다 보면 어른들이 아이들을 모아 놓고 가운데에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의 얼굴이 있는 지폐를 놓고는 ‘이놈을 죽여야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며 思想교육을 하는 장면을 자주 목격했다. 우리가 접근하면 한참 떠들던 그 어른들은 만담하는 척하고 말꼬리를 돌리곤 했다.


蔡 君의 처참한 죽음

고등학교 1학년은 하루도 다녀보지 못하고 그때 戰時法(전시법)에 의해 1학년 면제를 받아 나는 고등학교 2학년으로 진학했다. 학교 이름도 모른 채 가 보았더니 오현고등학교 分校(분교)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 학교를 ‘피난민 학교’라 불렀다. 학생수는 약 1000여 명. 교사진은 피난 온 분들 중 우수한 분들이었다. 영어, 독일어 등 외국어 교사들은 대학 교수님들이었고,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등 소위 名門 학교 소속 교사들도 많이 있었다.

그때 학생들의 자리 배치는 키순이었다. 나는 뒷자리에 배정받았다. 동급생보다 두 살 정도 위였기 때문에 큰 편에 속했던 거지, 큰 키는 아니었다. 그 덕분에 나는 오현분교 총학생회장으로 뽑혔다. 校內(교내) 행사는 물론 3·1절 행사, 8·15 행사 등 市內 퍼레이드 행사 때는 흰 장갑에 호루라기를 달고 맨 선두에 서 “군가 시작!” 등 구령도 외치는 등 꽤 으스댔다.

그 높은 자리 때문에 못 볼 것을 다른 학생들보다 많이 보았다. 하루는 학교에 갔더니 제주 경찰서에서 학생 대표들에게 출석하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署(서)에 가보니 다른 학교 대표들도 다 와있었다. 아침에 발생한 경찰 희생에 대한 브리핑이었다.

제주시에서 가까운 조천면 파출소에서 폭도가 대거 출몰해 다 죽게 됐으니 긴급 지원병을 파송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경찰 50~60명이 제주시 성곽을 나서는 순간 그 앞에 매복하고 있던 폭도들의 집중 사격으로 전원 몰살되었다는 悲報(비보)도 전했다. 이런 브리핑을 학교 대표하면서 꽤 여러 번 들어 보았다.

하루는 제주시 북쪽 외곽에 있던 KBS 사옥으로 긴급 출동하라는 통보를 받고, 2학년 학생 전원을 인솔하고 현장에 갔다. 경찰들은 우리를 데리고 한라산을 따라 내려오는 큰 계곡에 우리를 배치한 뒤 그곳을 샅샅이 뒤지라고 명령했다. 그 전날 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KBS 야간 당직을 섰던 우리 학교 蔡 군이 폭도들에게 납치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피난민이 아니고 제주 원주민이었다.

얼마 뒤 ‘여기다! 여기다!’하는 소리가 들려 달려가 보았다. 蔡 군이었다. 그의 모습은 처참했다. 폭도들은 그의 全身(전신)을 바윗돌로 찍어 蔡 군의 사지는 다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그는 필시 제주도 방언으로 폭도들에게 살려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폭도들은 그의 간청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잔인하게 죽인 듯했다. (계속)

[ 2015-12-24, 15:2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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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호     2015-12-25 오전 4:49
너무 사실적인 경험을 쓰시니 감동이 절로 일어 납니다. 현대사에서 우리민족에게 절체 절명의 시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읽을수 있어 감사합니다. 계속 연재 바랍니다.
   이중건     2015-12-25 오전 12:02
피와 땀의 인생경험을
잘 읽고 감동감화
감사합니다.
   그령초     2015-12-24 오후 7:03
별 허식없이 산문조로 6.25 전후의 시대상을 잘 풀어 놓았습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이
이 글을 곰곰이 새겨 읽는다면 지금 이 풍요가 그냥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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