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간 누님… 내 가슴에 恨이 되다
[만주에서 제주까지의 독특한 피난 생활記 (끝)] 누님이 끌려간 곳을 검색하니, 호랑이도 출몰하는 해발 1362m의 두메산골이었다.

鄭慶均(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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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은 ‘광복 70주년 現代史 체험수기 현상모집’ 수상자들의 작품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일곱 번째 작품은 鄭慶均 씨의 手記, ‘가슴에 새겨둔 80년 간의 일기장’입니다.
 

휴지조각이 된 현찰

나의 母校(모교) 대광고등학교가 부산으로 왔다는 소식을 부산에 있던 친구를 통해 편지로 듣게 되었다. 그의 편지에 의하면 대광고의 학업 진도가 우리 제주 오현分校(분교)보다 상당히 앞서 있었다. 나는 쇼크를 받았다. 그래서 충무로 입구와 부산 국제시장에서 벌어 놓았던 돈에서 상당한 현찰을 어머니로부터 받아 고등학교 2학년 2학기가 되는 가을, 제주에서 부산으로 나왔다.

神이 나를 단련시키려고 그랬는가! 며칠 후 ‘화폐개혁령’이 내렸다. 주민등록이 없던 나로서는 새 화폐로 바꿀 길이 없었다. 하루 아침에 빈털털이가 됐다. 그 현찰이 전부 휴지조각이 된 것이다. 나는 한 푼도 없는 알거지에 거처할 곳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학교가 끝나면 부산 5부두로 나가 군수품 하역을 하는 야간작업에 뛰어들었다. 하루 세 끼는 국제시장 길바닥에서 파는 수제비로 연명했다. 그러다 너무 힘들어 美軍 부대 하우스보이 노릇도 한 보름 해보고, 국제시장에서 이불을 사서 서면시장에 갔다 팔아도 보았다.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역경은 거의 다 맛본 기분이었다.

하는 수 없이 도로 제주로 돌아가 고등학교 3학년에 진학했다. 교무회의에서는 규정상 진급이 안 된다는 반대도 있었으나, 담임 선생님이 이 애만은 진급시켜도 능히 따라갈 수 있다고 주장해 고등학교 3학년을 제주에서 보낼 수 있었다. 그러다 1953년 7월27일 휴전이 되어 그해 10월에 서울로 올라왔다. 대광고등학교로 전학이 되어 3학년 2학기 꼬리 부분을 대광고에서 보충하고 1954년 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과외로 집안을 부양

따지고 보면 나는 중학교 3학년은 1학기에 6·25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교 1학년은 다녀보지도 못했다. 고교 2학년 2학기 때에는 부산에서 죽을 고생, 남은 2학기는 제주에서 한 달, 서울로 와서 대광고에서 두 달을 보낸 게 거의 전부다. 이런데도 서울대에 들어섰으니 지금 사람들이 보면 천재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은 다 그랬으니까 별로 자랑할 것도 못 된다. 대학에 들어갔으나 남은 눈물은 대학 시절에 다 짜내야만 했다.

1953년 10월 말 상경한 나의 부친은 서울 충무로와 부산 국제시장에서 벌어 놓은 현찰 대부분을 피난 생활 3년 간 거의 다 쓰고 남은 돈으로 서울 동대문 시장 입구 쪽에 두어 평 될까 말까 한 가게를 하나 내 메리야스 장사를 시작했다.

그 무렵 나의 부모는 한 신흥 종교에 몰입되어 가게보다 교회에 더 빠져 있었다. 1954년 크리스마스 전날 나의 부친이 교회에서 밤새우고 있을 때 동대문 시장은 역사에도 기록된 大화재가 발생해 가게는 물론 상품까지 몽땅 재가 되고 말았다. 그 충격이었던가? 나의 부친은 우리 식구 일곱 명을 하나님에게 다 맡기고 개척교회 선교를 위해 집을 떠나셨다.

家長의 멍에가 내 어깨로 내려앉았다. 그때 내 나이 20살 바로 밑의 동생이 열네 살, 가운데 여동생이 열한 살, 그 밑의 셋째가 여덟 살, 막내가 다섯 살이었다. 조금 지나자 이들이 중학교에 진학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바로 밑의 동생은 형이 다닌 대광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동네에서 초등학교 학생들을 틈틈이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기도 했다. 셋째는 등록금도 못 내면서 어렵게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경기고등학교에 시험을 치른단다. 내심으로 떨어졌으면 했다. 합격하면 입학금을 내야할 판인데 그 당시 내 여력으론 너무 벅찼다. 그 아이의 합격 소식을 기분 좋은 낯으로 들어 주지 못한 게 지금도 미안하다.

막내도 초등학교 졸업 후 경복중학교 시험을 치렀다고 했다. 막내까지 합격해 나는 막막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막내는 학년에서 1등을 해 등록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셋째는 고교에 진학하자마자 재벌 집에 들어가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스스로 등록금을 벌었다.

나는 대학 1~2학년 때는 숭인동 산꼭대기 내 집에서 동대문까지 걸어가서 전차를 타고 다니면서 종로 3가의 숙명여고 학생의 과외공부를 지도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학교 등록금은 다행히 장학금으로 해결되고 그 돈은 고스란히 내 식구들의 糊口之策(호구지책)으로 쓰였다.


“文物과 졸병이 무수히 몰려드는구먼!”

대학 3~4학년 때는 서울 가회동의 부잣집 둘째 아들 과외(중학생)을 맡아 그 집에서 살면서 가정교사를 했다. 그 집은 그 당시 한국의 鑛山(광산) 부자였다. 1·4 후퇴 때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적인 부탁으로 私財(사재)를 털어 인천에서 LSD를 대절, 피난민을 부산까지 수송할 정도였다. 그 당시 자가용이 두 대, 식모가 7명, 그 중엔 찬모, 말하자면 요리사가 따로 있었다.

나는 그 식모에게 의도적으로 가깝게 접근했다. 숭인동 산꼭대기에서 굶고 있는 식구들을 위해서였다. 그 식모에게 “내가 젊은 놈이 도시락 한 통에 밥과 반찬을 넣어 주는 것으로는 배가 고프니까 밥 한 그릇, 반찬 한 그릇을 따로따로 도시락 두 개를 싸 달라”고 했다. 난 그걸 먹지도 못한 채 숭인동 산꼭대기까지 가지고 가 몽땅 어머니에게 드렸다. 점심은 당연히 거를 수밖에 없었다. 그 나이에 점심을 거르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일요일 아침 그 학생의 어머니가 ‘선생님 이상하게 생각지 마시고 사주 관상을 보자’는 것이다. 영문을 몰랐는데 며칠 전부터 백○○이라고 당대에 제일로 평가받던 관상가를 집으로 모시고 와 머물게 하고 있었다. 그게 다 靈感(영감)을 집중시키기 위해 집에 모셔둔 것이란다.

대학 시절 나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에 미쳐 있을 때라 관상은 미신이고 우상이었다. 그러나 하도 진지하고 간절한 부탁이라 거절할 수 없었다. 손금, 발바닥, 심지어 내 속옷 밑으로 손을 넣고 나의 항문과 性器(성기)까지 몽땅 더듬는 것이다.

한 30~40분 되었을까. 백○○ 씨는 그 부모들을 다 들어오라고 했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하늘을 한참 쳐다본다. 그 부모들은 무슨 재판 선고라도 기다리는 듯 심각한 표정들이다. 나는 내심 웃고 있었다. 미신의 말일 테니까. 백○○ 도사가 자기 무릎을 탁 치면서 입을 연다. “허허, 날이 갈수록 文物과 졸병이 무수히 몰려드는구먼!”하면서 정좌를 하더니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내가 지금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거렁뱅이 신세라 그런 말씀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버럭 화를 내면서 자기는 누구누구 죽을 날을 본인 앞에서 말해주고 그들이 말한 날에 모두 죽었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젊은 사람이 건방지구먼 하고 나무라는 것이다.


恩人

그날 저녁부터 내 밥상의 반찬 가지 수가 늘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의 누나가 나보다 세 살 밑으로 그 아이가 이화여고에 다닐 때 자가용으로 학교에 다녔다. 며칠 후 사장의 여동생이 나를 따로 부르더니 그 누나를 맡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나는 집도 절도 없고 일곱 식구의 家長인데 이렇게 호화롭게 큰 사람을 어떻게 감당하라는 것인가 하고 차갑게 거절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내 밥상의 반찬 수는 줄지 않았고 철따라 구두와 양복도 그 어머니가 계속 사주었다.

졸업 후 보사부 공무원 생활을 할 때도 와서 코트까지 사주셨다. 정말 고마운 분이었다. 그때 내가 재물을 탐했으면 이게 웬 떡이냐고 덥석 받아먹었을 것이다. 그 시절 내 마음은 예수님이 홀로 독차지 하고 있어서 어떤 인간을 받아드릴 공간이 없었다.

하여간 그렇게 해서 대학 4년을 거르지 않고 졸업했다. 이렇게 마지막 5% 남았던 눈물을 대학 시절에 모두 흘려서 졸업과 동시에 내 몸에는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게 되었다. 이제는 웃으며 살 일만 남은 것이다.


재앙

사실 내 위로 나이 차이가 많은 누나가 한 명 있었다. 우리는 셋째가 심양 기차역에서 출생하는 바람에 해방 직후 북한으로 가지 못했지만, 나의 누님 시댁 盧 씨 집안은 그들의 고향인 신의주로 그해 기차 편으로 제일 먼저 귀향했다. 내 매형의 동생이 일제 때 서울에 가서 보성전문대학에 유학하는 동안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던 적이 있어 고향에 가자마자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韓中 수교가 이루어진 다음 해인 1993년에 서둘러 내가 성장한 중국 만융툰을 찾았다. 그곳에 갔더니 내 매형의 사촌 동생이라는 자가 있었다. 아주 반가워서 당시 중국인들의 한 달 평균 임금에 해당하는 중국 돈 500원(당시 우리 돈 약 5만 원)을 주었다.

이것이 엄청난 재앙이 된 것이다. 그때 그에게서 들은 얘기인즉 내 매형은 신의주 보위부 꼭대기 자리라고 했다. 우리로 말하면 경찰서장쯤 되는 자리였고, 그 아우는 그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어서 둘째 형수는 1년에 한 번쯤 중국 친정에 와서 쌀과 옷가지를 사 가곤 한다는 것이다. 뭐가 됐던 나로서는 좋은 소식이었다.

그런데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내가 중국 다녀온 지 두어 달 후 그 사촌이라는 자에게서 수신자 부담으로 나에게 전화가 왔다. 그가 하는 말인즉 내가 다녀간 후 십여 차례 신의주로 편지를 띄웠는데 아무 회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 전화를 받는 순간 내 눈에는 번갯불이 번쩍하며 그 미련한 놈이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급해 학교에 休講(휴강) 조치를 하고 다음 날 당장 만융툰으로 갔다.


“누가 그런 짓을 하라고 그랬나?”

뭐라고 편지를 했냐니까 내가 그에게 준 명함을 넣어서 동생(注: 필자)이 서울에서 잘 사니까 시간 맞춰서 형수가 그곳에 올 수 있는 날을 알려 주면 동생이 항시 와서 상면도 하고 도움도 받을 수 있으니 꼭 한번 중국으로 오라고 썼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의 뺨을 후려쳤다. “야 이 미친놈아! 누가 그런 짓을 하라고 그랬나?”

그로부터 1년 여가 지난 후 다시 그를 만나 소식이 있느냐니까 아무 회신이 없고 형수(注: 필자의 누나)도 안 온다는 것이다. 일이 난 것이 틀림없었다. 북한에 자선사업을 많이 해서 북한 당국이 인정하는 在美 女선교사에게 부탁해서 수소문을 했더니, 누님댁이 자강도 화평군 양계리 인민 4반으로 쫓겨났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이 주소를 검색했더니 가끔 호랑이도 출몰하는 해발 1362m의 두메산골로 나왔다.

이후에도 이들에게는 재앙이 또 겹쳤다. 울산에서 시무하시는 나의 숙부(목사)님이 중국 순회 선교 다니면서 백방으로 내 누나의 안부를 묻고 다녔다는 것이다. 또다시 심양으로 가서 숙부님에게 용돈을 드리며 제발 누나네 일 발설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건만 목사들의 옹고집은 꺾을 수가 없었다.

숙부님은, 그 女선교사에게 부탁해 수소문한 결과 누님네 가족이 어느 정치범 수용소로 갔는데, 그에 대해선 묻지 않는 게 신상에 좋다는 경고를 받았다고 하셨다. 서울에 동생이 있다는 것 때문에 신의주 경찰서장에서 숙청되어 호랑이 나오는 산골로 쫓겨났다가 목사 삼촌이 찾고 다닌다는 정보에 정치범 수용소로 모두 갇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내 누나의 가족은 나로 인해서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다. 지금쯤 분명히 내 누나와 매형은 저승으로 갔을 텐데, 눈을 감을 때 나를 얼마나 원망하고 저주를 했을까. 지금 조카들이 살아있다면 얼굴도 모르는 외숙부가 얼마나 원망스러우랴.●

[ 2015-12-25, 22:1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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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호     2015-12-27 오전 4:33
천신만고,우여곡절,새옹지마 등등의 말이 스칩니다. 정말 진솔한 삶의 기록 이군요
   그령초     2015-12-26 오후 6:52
한 시대의 민족사적 고통을 격의(隔意)없는 속 마음으로 잘 풀어 주셨습니다.
오뚜기 같이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난세를 이겨낸 용기에 감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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