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 無결근, 無병가… 막장서 일하며 고국에 送金
[월남의 밀림과 독일 광산을 누비다 (끝)] 어떤 날은 오전 일이 끝나고 지상에 잠시 나와 한 시간 쉬고 다시 지하로 내려가는 소위 ‘더블 근무’도 했다. 그러자 한 달에 1200마르크까지 받는 달이 많아졌다.

李範永(체험수기 우수상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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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또 다른 지옥에 왔구나!”

우리 일행은 독일 함보른(Hamborn)에서 지상교육과 독일 생활 적응교육을 받고, 함보른 인근의 있는 딘스라켄 지역의 ‘스테어크라데’ 鑛山(광산)에서 본격적인 일을 시작했다. 여기서도 2주간의 교육을 받고 드디어 지하 작업에 들어갔다. 850m를 내려가니 또 하나의 지하도시가 나타났다. 강원도 도계광업소 탄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시설과 장비에 또 한 번 놀라움과 충격을 받았다.

거기서 다시 복선으로 깔린 철길을 달리는 광차를 타고 1200m를 더 달려가서 또 걸어서 500m를 걸어가니 막장이 나왔다. 몸은 이미 막장에 들어가기도 전인데 벌써 땀으로 푹 젖어 버렸다. 감독관의 지시에 따라 선임 작업자를 따라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막장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부터 후끈거리는 열기가 숨을 꽉꽉 막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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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에서 찍은 사진.

채탄기(採炭機·호벨)가 돌아가자 작업이 시작되는데, 독일인 선임자는 보라는 듯 60kg짜리 스템펠(쇠 받침대)과 30kg짜리 카페(암반이 무너지지 못하게 걸쳐주는 쇠 서까래)를 능숙하게 처리하면서 나보고 그렇게 하라고 손짓을 하며 “슈넬! 슈넬!(빨리 빨리해)”이라고 소리 지른다. ‘호벨’이 한번 지나갈 때마다 마치 육중한 탱크가 지나가듯 굉음을 내면서 단단한 단층을 파고 지나가면, 앞이 안 보일 정도의 먼지와 뜨거운 열기로 온몸은 끈적이는 땀으로 시커멓게 범벅이 된다. ‘호벨’이 지나가면 탄이 깎인 만큼 공간이 생기고 그 자리를 뒤편에서 해체한 ‘스템펠과 카페’를 끌어와 빠르게 세워줘야 한다.

그래야만 낙반을 방지하고 기계가 연속으로 돌아간다. 처음 작업이라 서툴긴 하지만 있는 힘을 다해서 따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힘이 달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아이고. 월남 전쟁터가 지옥인 줄 알았는데, 내가 또 다른 지옥에 왔구나. 이 지옥에서 과연 내가 3년을 버텨낼 수 있을까?”

어쩌다 가난한 나라, 가난한 자식으로 태어나서 지옥 같은 곳만 또 오게 되다니. 이것이 내 운명인가보다 싶었다. 힘든 것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먼지와 熱氣(열기) 때문에 목이 아프고 눈조차 뜨기 어려웠다. 나 같은 동양 사람의 체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일이 주5일 내내 계속됐다. 일주일이 지나면 또 일주일이 닥쳐왔다. 입술에는 물집이 생겨나고 기숙사에 오면 핏빛 소변이 나왔다. 벌써부터 병가지가 나왔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하루하루를 버티고 버텨냈다. 내가 월남 전쟁터에서도 살아왔는데 여기서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죽더라도 돈이라도 끌어안고 죽지, 그냥 죽지는 않겠다고 마음속에서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힘든 고비를 버티며 견디어 갔다.

차츰 일하는 요령도 늘어가고 숙달되어가니 처음보다 조금씩 일하기가 수월해져 갔다. 힘든 고비가 닥칠 때마다 고국에 계신 찌든 가난에 주름진 부모님과 동생들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며 떠올랐다. 그리고 “여러분이 열심히 잘해야 더 많은 후배 광부들이 독일에 갈 수 있다.” 고 신신당부하던 개발공사 담당자의 말이 귓속에서 앵앵거리며 들려오는 듯했다. 이런 생각에 힘들 때마다 더욱 이를 악물었다. 미처 일을 못 따라갈 때면 먼저 일 끝낸 독일인 동료가 도와줘서 작업 페이스(속도)를 맞춰 갔다. 이렇게 힘들게 일하고 첫 월급으로 700마르크 조금 넘게 받았다. 추가로 2천 마르크를 가불해서 고국에서 떠나올 때 빌려 쓴 돈과 부모님 농사자금 쓰시라고 모두 한국으로 송금했다. 빌려 쓴 돈은 4부 이자를 계산해서 고마웠다는 편지와 함께 송금해 드렸다.


막장서 일하며 번 돈 送金하고 눈물 흘리다

은행에서 송금하고 나오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공원 벤치에 한동안 그리운 먼 고국 하늘을 바라보면서 더 울었다. 한편으로는 부모님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 동생들 학비도 보탰다는 생각에 기쁘고 흐뭇했다. 월남 가서도 그랬고 독일 와서도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아주 만족스러웠고 그 이상 바라지도 않았다. 내 젊음과 내 능력만으로 힘은 들지만 이렇게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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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탄 작업 후 동료들과 함께.



내가 처음 독일 간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릴 때, 광부로 간다는 것을 모르신 아버지는 온 동네 다니시며 “우리 막내아들이 돈 벌러 독일 간다고 하네.” 하면서 그렇게 자랑하시던 모습이 생각났다. 아버지가 송금된 돈을 받으시고 기뻐하실 모습을 상상하니 자식으로서 흐뭇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4개월을 버티며 막장일을 하는데 이러다가는 정말 내가 쓰러지겠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그렇게 버티며 일하던 중 마침 회사에서 반 년 치 휴가를 쓰라고 권해서 잘됐다 싶어 휴가를 받아 뮌헨으로 고종 4촌 누이동생을 찾아갔다. 동생은 간호사로 독일에 왔다가 임기를 끝내고 당시 한국에서 온 산업연수원생 교육을 위해서 전자회사인 지멘스社에서 통역을 맡고 있었다. 몇 년 만에 독일 땅에서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라 무척 반갑고 오래간만에 푸짐한 한국 음식을 해줘 잘 먹고 휴식을 취하고 나니 몸도 회복되고 좋아졌다.


기술공으로 보직을 변경하다

2주간의 휴가를 끝내고 다시 광산에 출근하니 감독관이 '당신은 체격이 작아서 막장일에 적합지 않으니 오늘부터는 ‘슐러써(기계공)’로 근무하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폴란드 출신 마이스터(선임기술자) 밑에서 일을 배우라고 하면서 직책을 채탄부에서 기계공으로 바꿔줬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죽으라는 법은 없다더니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을 배워보니 급료가 확 줄어드는 것이 흠이면 흠이었다. 광산에선 힘든 일을 할수록 임금 단가가 높고 비싼지라 많은 일당을 못 받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하는 일은 막장일보다 쉬웠다. 그렇게 ‘엔덴만’ 이라는 마이스터를 따라다니며 고장 난 기계도 수리하고 새 설비도 설치하는 일을 열심히 배워갔다.

그런데 생각 외로 잔업이 많이 생기고 휴일 근무도 매주 있었다. 어떤 날은 오전 일이 끝나고 지상에 잠시 나와 한 시간 쉬고 다시 지하로 내려가는 소위 ‘더블 근무’도 했다. 그러자 한 달에 1200마르크까지 받는 달이 많아졌다. 어떤 달에는 1600마르크까지 받을 때도 있었다. 임금을 많이 받게 되자 일 배우는 것이 재미있었고 힘든 줄 몰랐다. 그러자 동료들이 내 자리를 넘보기도 했지만 ‘엔덴만’은 나를 ‘클리이네리(작은이)’라 부르며 손발이 잘 맞는다고 다른 사람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현장에 도착하면 어떤 일을 할 건지 파악하고 마이스터가 시기키 전에 일을 찾아서 했다. 연장과 기계부품을 미리미리 준비해 그가 찾기 전에 손에 쥐여 주고 눈앞에 대령하니 마이스터가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잔업이 생겨 연장 근무를 하게 되면 나는 끝까지 남아서 해결하고 지상으로 나와 감독과 마이스터에게 보고하고 퇴근했다.  이렇게 2년이 지나고 3년 차에 접어든 지 어느 날, 감독이 “당신도 그동안 기술을 익혔으니 오늘부터 독자적으로 일하라”고 하면서 한국에서 새로 온 후배를 보조원으로 붙여 주었다. 아마도 감독은 한국 사람끼리 일하면 더 잘할 거로 생각했나 보다.

맡은 임무는 새로 만드는 막장에 설비를 넣어주고 연결해 주는 일이었다. 평소 ‘엔덴만’ 과 일하며 배운 대로 무난히 해나갔다. 그런데 문제는 새로 온 한국 후배가 너무나 따라오질 못했다. 어떤 때는 살살 달래가며 일을 가르쳐줘도 뒤처지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은 내 파트에 잔업이 생기면 서로 하겠다고 나서는데 후배는 막무가내로 못한다고 가버렸다.

작업 중 빵 먹는 시간에 후배가 나한테 하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선배님 일하는 거 보면 마치 미친 사람 같아요. 보는 사람도 없는데 좀 쉬엄쉬엄하시면 안돼요? 여기서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서 자기는 어느 일류 고등학교를 나와서 육군사관학교 다니다가 적성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외국에 나가기 위해 여기를 왔다는 것이다. 정말 그의 손가락에는 육사 생도들이 끼는 반지가 끼어 있었다. 나는 반지 착용은 광산 작업규정 위반이니 당장 빼라고 충고를 했다.

그리고 속으로는 “내가 미친 것이 아니고 네 놈이 미친 거야. 내가 너라면 어떻게 해서든 육사를 졸업해 한국 땅에서 잘 살지,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광부로는 절대 안 오겠다. 이 미친놈아”라며 욕을 해댔다. 이런 나태한 사람과 일한다는 것이 능률도 안 오를 뿐만 아니라 무거운 쇳덩어리를 만지는 일이라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이 되어 결국 2주 만에 그를 다른 데로 보내고 감독에게 말해서 ‘터키’ 사람으로 교체해 썼다.


3년간 無결근, 無병가

그는 힘도 좋고 내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잘 이해하고 잘했다. 이렇게 3년 계약 기간 동안 일하면서 나는 단 한 번도 결근이나 병가 없이 3년 만근을 했다. 내 자랑 같지만 아마 단언하건대 전체 파독 광부 중에 3년 동안 무결근 무병가 근무자는 내가 최초요, 나 하나뿐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찌 보면 미련한 기록 보유자가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왜 이토록 미련스럽게까지 근무했을까? 그때 듣기로는 광산 경영자가 노조위원장에게 다른 나라 사람과 비교하면 한국 근로자들의 병가율이 높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마 나만이라도 그런 소리를 안 듣기 위해서 버틴 것 같다. 또 개발공사 담당자가 말했던 대로 “많은 한국 광부들이 독일에 갈 수 있도록 현장에서 성실히 근무해 달라”는 당부를 맘속에 담고 일했기 때문에 더욱 노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 간부의 말은 많은 근로자를 파독시키면 그만큼의 외화가 들어온다는 뜻이다.

내 개인적인 신념도 그랬지만 派獨(파독) 직전 외환은행 국장이 와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외화가 절대 부족하다. 파독되어 임금을 받으면 아끼고 아껴서 많은 돈을 송금하시라. 여러분이 힘들게 일해서 버는 외화는 국내로 들어오면 외국 차관도 갚아가고 아주 긴요하게 쓰인다.” 그분이 얼마나 엄숙하고 진지하게 말하는지 듣고 있던 우리는 한순간 숙연해지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때 우리나라가 얼마나 살림이 절박했으면 광부로 떠나는 우리에게까지 와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을 했을까?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하며 한 푼이라도 더 아끼며 3년을 보냈다. 그러고 보니 파월 됐을 때도 작전 중 蔡命新(채명신) 사령관께서 오셔서 그와 비슷한 말을 하신 적이 있었다. 하여간 그런 마음가짐으로 근무한 것이 3년 無병가 無결근이었다. 처음부터 그러게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3년 계약 기간이 지나보니 그렇게 됐다.

나는 그런 결과에 늘 자부심을 가졌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파월 장병들이 보내온 외화가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종잣돈이 됐다는 말을 듣고 나도 그 일부를 기여했다는 생각에 늘 뿌듯한 자부심을 가지며 지냈다. 한해 두 해 발전해가는 조국의 모습과 뉴스를 신문을 통해 접할 때마다 기쁘고 흐뭇하고 애국심이 절로 생겨났다.


독일에서 만난 배우자

그렇게 3년의 계약이 끝나고 나는 내 앞길을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간 고국에 꽤 많은 돈을 송금했고 부모님은 그 돈으로 작은 밭도 사시고 빛도 청산하고 동생들 학비와 혼수를 장만했다고 하셨다. 하지만 내 手中(수중)에 남은 돈은 내가 자립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제부터 나는 나를 위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긋지긋하고 지옥 같은 광산 일이지만 돈을 더 벌기 위해 광업소 측에 근무 연장 신청을 요청했다. 노조 위원장과 광업소장은 내 3년간 근무성적표를 보더니 깜짝 놀라면서 그 자리에서 허락하고 市 노동청에 추천서를 써주어서 3년간(1년씩 세 번) 취업 연장 승인을 받았다.

우리 광산에서 3년 연장 승인은 내가 처음이었다. 시 노동청에서도 계약 끝난 사람은 귀국시키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내 취업 3년 연장은 매우 이례적인 조치였다고 노조위원장이 말했다. 나한테는 행운이 된 셈이었다. 그렇게 파독 4년 차 근무는 새로 오는 후배 광부를 교육하거나 보조 통역도 하면서 전보다 나은 환경에 근무할 수 있었다. 지하에 들어가는 날보다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그리고 1975년 10월에 동료의 소개로 만난 간호조무사와 결혼을 했다.

대사관 노무관을 주례로 모시고 한국 동료와 독일 동료들의 축하 속에 결혼한 우리 부부는 아기자기한 신혼살림을 차렸다. 정말 꿈같은 이런 날이 나에게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우리 둘은 더욱 열심히 일하고 아끼며 꿈같은 나날을 보냈고 1년 후에는 예쁜 딸까지 얻어서 남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둘이서 일하며 아이 돌보며 파독 6년 차가 되자 살림 밑천이 어느 정도 모여 우리 부부는 과감히 귀국을 결심했다.

살림을 정리해 배편에 이삿짐을 부치고 1977년 2월에 귀국을 했다. 귀국한 지 3개월 후에는 점포가 달린 이층집을 사서 한국에서 제2의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서투른 한국생활이었지만 돈 되는 일이면 뭐든지 하려고 했다. 그러는 사이 아이도 하나 더 생겨 우리는 네 식구가 되었다. 아이들의 앞날을 위해서도 열심히 일하며 돈을 모았다. 조그만 식품점을 시작으로 생맥주 치킨점을 해 목돈을 만들고 부동산 붐이 일어나자 건축업에 뛰어들어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 사업 욕심이 일을 크게 벌이다 큰 손실을 보기도 했지만, 아이들 대학 학자금과 노후 준비는 어느 정도 해 놨다.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이제 살만할 때가 되었나 싶었는데 뜻하지 않게 아내에게 病魔(병마)가 찾아왔다.

대학병원에 가 검진하니 의사 말이 6개월 시한부 췌장암 판정을 받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말 한눈팔지 않고 목숨까지 내놓으며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제 좀 편하게 살 수 있을까 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하늘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일반 의료보험이 없던 때라 병원비가 많이 들어갔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고생한 아내를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아이들 학자금에 모아둔 노후자금까지 탈탈 털어 모두 대가며 최선을 다해봤지만, 아내는 “여보. 미안해….” 그 말을 남기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슬프고 원통해 한동안 어찌할지 방황했다. 그러나 간 사람은 간 사람이고 남은 아이들과 살아갈 내 처지가 막막해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남은 건 겨우 25평 아파트 한 채가 전부였다. 다시 마음을 잡고 친척 집이나 아는 사람 가계나 사업체에서 닥치는 대로 악착같이 일하고 생활비와 아이들 학비를 벌었다. 그 흔한 관광여행 안 가고, 옷 한 벌 안 사 입고 버텼다. 그렇게 눈물 없는 세월을 보내며 빚 없이 아이들 대학을 어렵게 졸업시키고 나도 再婚(재혼)을 했다. 지금도 前妻(전처) 제삿날이면 전 아내와의 지난 세월을 회상하고 감회에 젖곤 한다.


조국 근대화에 젊음을 불태웠다는 자부심

어렵던 그 시절, 가난한 농부의 아들, 딸로 태어나서 제대로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집안 배경도 없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가난했던 부모님이나 못사는 우리나라를 탓하지 않고 그 어렵고 힘들었던 한 시대를 젊음을 불태우며 살아왔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제 서서히 사라지고 잊히는 우리 세대지만 질병과 굶주림, 그리고 6·25 戰亂(전란)의 아픔과 고통의 한 시대를 이겨내고 자라나서 영광스런 조국 근대화의 초석을 다지는데 우리가 젊음을 불태우며 미력이나마 기여했다고 생각하니 자부심과 더불어 여한은 없다. 또한, 사랑하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있었기에 나라에 보은 할 기회가 있었고, 존경하는 우리 부모님이 계셨기에 외국에 나가 돈 벌 수 있는 기회가 우리한테 주어져서 우리는 젊음을 불태우며 그 시대를 살았던 것이 아니었던가!

자! 이제 과거는 고이 간직하고 가자. 다가오는 저 미래의 앞날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가! 조국통일의 위업이, 아들딸 너희 시대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을 가슴 벅차게 받아들여라! 그리고 감사하며 기억하라! 젊음을 불태워 연기처럼 사라진 아버지 어머니의 청춘이 지나간 역사 속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끝)

[ 2015-12-28, 17:4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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