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소녀를 덮친 전쟁
[6·25 때 부친 拉北 후, 두 집안의 안살림을 일군 女子의 일생 (1)] 인민군 세 명이 총을 겨누며 아버지를 꿇어 앉히며 “당신 뭐 하던 사람이냐?”고 하기에 아버지는 “나는 농사꾼이오” 했습니다. 인민군이 권총으로 손을 탁치며 “이게 농사꾼 손이야!”하며 잠깐 어디 좀 가자고 하면서 아버지를 데리고 갔습니다.

朴金子(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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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은 ‘광복 70주년 現代史 체험수기 현상모집’ 수상자들의 작품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아홉 번째 작품은 朴金子 씨의 手記, ‘38년 간 시집살이를 겪은 한 평범한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기사본문 이미지
朴金子 씨




6월25일, 1차 비극이 시작되다

저는 전쟁을 겪은 한 사람으로서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자 이 글을 씁니다. 저는 강원도 춘천에서 자란 76세의 할머니입니다. 전쟁이 나기 전 열 살까지는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公職(공직)에 계시면서 쌀가게를 하셨기에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언니와 오빠, 아래로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고 오빠는 귀한 운동화도 신었습니다. 살림살이로는 재봉틀, 유성기, 부엌에는 일제 그릇이 쌓여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하셔서 가끔 유성기를 틀어 주시며 행복해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지금도 음악을 좋아합니다.

춘천에서는 기와집 동네라고 하면 잘사는 동네로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유난히 사랑하셨고, 특히 저를 사랑하셔서 아직도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어머니는 동네 아주머니들 사이에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아버지는 모범 청년이라고들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머니는 전쟁이 나면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950년 6월25일 일요일, 밖으로 나가 어른들의 말을 들으니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동산 너머에 지성 병원이 있었는데, 그곳에 포탄이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무서웠습니다. 행복했던 저에게 1차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잠시만 피하면 되니까 이불하고 쌀 조금, 고추장과 멸치를 가져가 며칠만 피하자고 하시더니 갑자기 재봉틀 생각이 나셨는지 귀한 재봉틀을 살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락에 큰 항아리를 갖다 놓으시고는 재봉틀을 항아리에 숨기고 목화를 잔뜩 넣고 목화 몇 개를 바닥에 흘려 놓았습니다. 누가 와서 항아리를 뒤져본 것 같이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항아리를 뒤져보니 재봉틀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재봉틀이 우리 다섯 식구의 생명줄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5남매와 부모님은 짐을 싸들고 홍천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남동생은 아버지를 잠시도 떠나지를 않고 항상 아버지 곁에만 있었고, 잠도 항상 아버지 곁에서만 잤습니다.


한밤중 인민군에 끌려간 아버지

피난을 가다가 빈집에서 잠을 자는데 칠흑 같은 밤중에 사람 비명이 들리니 아버지가 식구들을 깨워서 정처 없이 가다 보니 날이 밝았습니다. “아버지가 안되겠다”고 하시며 집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낮에는 숨어 지내시고 밤에만 집으로 몰래 오시는 일을 반복하셨습니다. 아버지 혼자 떠나시려고 했지만, 가족을 두고 가실 수만은 없다고 하시며 묘안을 생각해내셨어요. 뒷마당에 방공호를 파기 시작하셨는데, 방공호만 파면 안 되니까 통발을 세워서 방공호가 무너지지 않게 해야 안심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밤만 자면 내일은 떠나야겠다고 하시며 잠이 들었는데, 요란한 소리에 놀라 방문을 열고 나가 보니 벌써 인민군 세 명이 총을 겨누며 아버지를 꿇어 앉히며 “당신 뭐 하던 사람이냐?”고 하기에 아버지는 “나는 농사꾼이오”라고 했습니다. 인민군이 권총으로 손을 탁치며 “이게 농사꾼 손이야!”하며 잠깐 어디 좀 가자고 하면서 아버지를 데리고 갔습니다. 식구들에게는 “나는 아무 죄가 없으니까 빨리 보내줄 거야!”라고 하시면서 가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버지가 아무 죄도 없으면서 왜 끌려가셨는지 알고 보니 우리 쌀가게를 맡아서 하던 아저씨 형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아버지에게 보증을 서달라고 하는 걸 거절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거기에 앙심을 품고 있다가 전쟁이 나니까 지방 빨갱이가 돼 나쁜 짓을 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집 변소에서 신호탄이 올라갔다고 합니다.

직장 생활만 하던 아버지가 신호탄이 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머니는 미친 듯이 밖으로 뛰어다니며 인민군만 보면 “우리 애들 아버지는 어디 있느냐”고 물어봤고, 이들은 무표정하게 “저기 잘 있다”고만 했습니다. 어느 날엔 인민군들이 소를 잡아와서는 삶아 달라고 해서 어머니는 애들 아버지만 찾아주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그놈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궁이 앞에 조그만 남자 아이가 불을 쬐며 눈물을 흘리더니, “나는 아랫동네에 사는데, 인민군한테 잡혀가니까 나중에 자기 부모님 만나면 말 좀 잘 해달라”고 했습니다. 옆집에 老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죽기 전에 고기 좀 먹었으면 좋겠다”고 인민군한테 말을 하니 인민군은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고기를 노부부에게 드렸더니, 잡수시고 며칠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열 살 소녀의 눈에 비친 전쟁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는데 어머니가 식구들을 깨우며 “얘들아 큰일 났다. 빨리 방공호로 가자”고 하시길래 밖을 보니 보름달 같은 게 여러 개가 하늘에 떠 있었습니다. 그게 떨어지면 불바다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조명탄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민군들은 낮에는 숨어 지내다가 밤이면 활동을 했습니다. 인민군들은 민간인 행세를 하느라고 흰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하루는 비행기 소리가 요란해서 밖을 내다보니 조그만 비행기가 우리집을 빙빙 돌더니 따발총으로 막 쏘았습니다. 놀라서 방공호로 뛰어가다 보니까 비행기 조종사 얼굴이 보일 정도로 낮게 비행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이니까 인민군인 줄 알았나 봅니다. 그래서 낮에는 절대 길에 다니지를 못하게 하고 맷돌질도 못 하게 했습니다. 맷돌 소리가 비행기 소리 같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피난을 다 가고 우리만 있으니 인민군들이 지나다가 우리집에 들어와서 놀다가 갈 때도 있었습니다.

인민군 장교가 지나가다가 우리 집에 왔습니다. 장교복에 빨간 견장을 달고 탄광 바지에 빨간 줄이 있었는데 어린 나이인 제가 봐도 멋있게 보였습니다. 하루는 심각한 얼굴로 자기가 안익태 동생인데 항상 자기를 감시한다고 말했습니다. 후퇴를 하면 자신을 먼저 후퇴시킨다고도 말했습니다. 정말인지는 모르지만 그 장교가 안 보이더니 며칠 있다가 후퇴를 했습니다.

하루는 동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중공군이 올 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중공군이 사람 잡아 먹는 동물인 줄 알았습니다. 막상 보니 두꺼운 솜바지 저고리에 꼭 짐승 같아보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는데 먹을 것만 보면 무조건 빼앗아 갔습니다. 먹을 것이 귀할 때라 먹을 것이 생명과도 같았습니다.

인민군이 후퇴를 하고 며칠 있으니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태극기를 들고 우리 국군을 환영하러 나갔습니다. 나도 동생을 업고 달려 가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면서 아버지 生死(생사)도 모르는 판에 뭐가 좋아서 이렇게 달려가나 하고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왔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와 함께 삯바느질과 돼지 키워

동네 사람들은 전쟁이 끝났다고 한 집 두 집 모여 들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서로 안부도 묻고 무사히 돌아온 걸 환영하며 반가워들 했습니다. 우리만 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차라리 돌아가셨으면 모든 걸 포기할 텐데 생이별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헤어진 지 60년이 넘었어도 왜 이렇게 아버지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아버지 생각을 안 하는데 왜 나만 이렇게 아버지가 그리운지! 지금도 아버지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납니다.

휴전 협정으로 일단은 전쟁이 멈춘 상태여서, 어머니는 정신을 차리고 5남매와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으셨습니다. 전쟁통에도 재봉틀이 살아남아서 삯바느질을 시작하셨는데, 하루는 일곱 살짜리 남동생이 어머니가 울고 있나 하고 살펴보니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답니다. 이를 보고 동생이 아버지를 부르며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러니 어머니 마음은 어떠셨겠습니다. 지금 이 대목을 쓰면서 눈물이 복받쳐서 잠시 쉬려고 합니다.

유난히 아버지를 따르던 동생이 있었는데 우연히 병이 나더니 몇 달 안가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고생스러운 생활이었기에 슬퍼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전쟁 후라서 땔감이 부족한 때였는데, 마침 동네에서 좀 떨어진 곳에 제재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톱밥을 얻어다가 대문 밖 길에다 바짝 말려서 풍구로 돌려서 밥을 해먹었습니다.

어느날 한꺼번에 많이 가져올 욕심에 톱밥을 큰 자루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집으로 오는데, 교회에서 만난 친구 오빠와 딱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성장기에 무거운 걸 많이 이고 다녀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보다 목이 짧은 것 같습니다. 목이 긴 사람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듭니다.

땔감이 진화되면서 연탄을 때서 편해졌는데, 그렇다고 방이 따뜻해지지는 않았습니다. 무슨 돈으로 연탄을 펑펑 때겠습니다. 얼마나 아끼면서 살았는지 밤에 잘 때는 다락에서 이불을 꺼내서 덮으면 사람이 이불을 의지하는 게 아니라 이불이 사람 덕을 보려고 했습니다. 한참을 덜덜 떨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오죽하면 방에서 물이 얼 정도였습니다. 물도 귀해서 500미터나 되는 곳에서 물지게로 길어와 먹었습니다. 저는 물지게도 잘 진답니다.

삯바느질로는 생활이 안 되니까 돼지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사료로 키우지만 옛날에는 음식 찌꺼기로 키웠습니다. 집집에 빈 그릇을 갖다 놓고 매일 어머니와 함께 음식물을 걷어다가 돼지를 키우고 팔고, 새끼를 사다가 또 팔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름에는 괜찮은데, 겨울에는 돼지가 먹을 것들이 얼어서 연탄불에 이걸 녹여야 해서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섯 식구가 온건히 살았습니다.


어머니의 發病… 중학교 중퇴하고 어머니 도와

그러던 중에 어머니가 병이 나셔서 死境(사경)을 헤매고 계셨습니다. 그때 저는 중학교 3학년에 진학해야 하는데, 어머니가 많이 아프시니, 학교를 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언니가 저보다 일곱 살이 많았는데, 어머니보다 언니가 적극적으로 저를 학교에 못 가게 했습니다. 가정 형편이 그러니까 저도 굳이 가겠다는 말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獨學(독학)을 시작했습니다. 영어와 한문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신문 읽기를 좋아해서 옆집에서 빌려다 보기도 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데 라디오는 없었습니다. 옆집에서 음악 소리가 나면 담장에 붙어서 들었습니다. 그때의 한문 공부 덕에 지금도 한문은 자신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어머니 곁에서 내가 제일 많이 도와드렸습니다. 제가 십자수를 잘 놓았는데, 이웃 아주머니가 보시더니 자기네 집에 걸어둘 ‘횃대보’에 십자수를 놓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횃대보란, 옛날에는 전쟁 중이라 가구가 없으니까 벽에다 못을 박은 다음 옷을 걸고 큰 광목에다 수를 놓고 먼지가 앉지 못하게 걸어 두는 것을 말하는데, 한때 유행이었습니다. 십자수로 큰 공작새를 수놓으면 정말 멋있었습니다. 손 뜨개질도 잘해서 옷을 뜨개질해서 입고 다녔는데, 사람들이 부탁하면 옷을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돈을 조금씩 모아서 결혼할 때 어머니의 힘을 덜어드렸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언니가 결혼 생활 4년 만에 이혼을 하고 친정에 와 있었는데, 집안일은 하나도 안하면서 사사건건 잔소리에 욕설에 매일 같이 괴롭히는데 정말 살기 싫었습니다. “가만히 있는 동생을 왜 괴롭히느냐!”고 어머니가 말하시면 그때는 어머니와 싸우기도 했습니다. 언니가 척추 결핵을 앓았는데, 약도 변변치 않으니까 제가 척추에 뜸도 많이 떠주고 주사도 놔주고 했습니다. 빨리 결혼이라도 해서 이런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오빠 친구와 결혼

두 살 많은 오빠가 있었는데, 오빠 친구가 항상 붙어 다녔습니다. 대학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우리집에 매일 오다시피 했습니다. 어느 날 오빠 친구가 군대를 간다고 하기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얼마 있다가 어머니께서 편지 좀 하라고 말하시며 “형제도 없고 얼마나 외롭겠냐”고 하셨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편지를 보냈는데, 나중에야 그때 위문 편지가 너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없이 편지를 보냈는데, 제대를 하고도 여전히 우리집에 자주 오고 밥도 같이 먹고 스스럼없이 친오빠와 같았습니다. 눈 다래끼도 짜주고 등목을 해줘도 누구 하나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가 하는 말이 “너, 내 친구 어떻게 생각하니? 너만 좋다면 수일 내에 결혼을 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서 “어떻게 친오빠 같은 사람하고 결혼을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오빠 같은 사람하고 결혼 못할 게 뭐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집에서는 언니한테 시달리고 몇 년 동안 우리집을 오가는 동안 情(정)이 들었는지 싫다는 말이 안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반대를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계셨으면 그런 데로 시집을 안 보낼 거라면서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빠 친구는 좋은 조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시어머니가 계셨고, 남편감은 27세에 몸도 약하고 아직 학생이었으며, 가진 거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오빠가 친구를 매부로 삼고 싶어서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제겐 오빠 친구가 똑똑하고 인간성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대학 4년 동안 장학생이었고,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하다 보니 우리와 비슷하게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1962년 12월24일로 결혼 날을 잡았는데, 드레스는 시누이한테 빌리고 신부 화장은 동네 아주머니가 해주셨습니다. 혼수는 말할 것도 없고, 예단도 없이 이불 한 채와 옷 몇 벌에 심지어는 장롱도 없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남편 친구들이 돈을 모아서 캐비닛을 사주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알게 됐는데, 남편 親家(친가)는 평범한 집이었지만, 시외가쪽은 엄청난 부자였고, 외숙모님은 저명한 인사였습니다. 온 식구가 대학 안 나온 사람이 하나도 없고, 나 같은 사람이 남편과 결혼을 했으니 무시당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특히 시누이들의 시샘도 있었습니다.


고된 시집살이의 시작

어렵게 살아도 시외할아버지는 한 푼도 보태주지 않았습니다. 신혼여행도 못가고 신혼 생활 3개월쯤 남편이 하는 말이 “어머니 혼자 주무시는 게 안됐다”면서 “없는 살림에 두 방에 연탄을 때느니 한 방에 살면서 연탄을 아끼자”고 했습니다. 저는 그러자고 했지만 살다보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시어머니와 한 방에 살다보니 남편하고는 대화할 시간이 없고, 일요일이면 학교도 안 가고, 어머니는 교회를 가시니까 둘이 오붓한 시간을 갖겠구나! 하면 어머니는 나를 꼭 교회에 데리고 가시려고 했습니다. 둘의 시간은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집은 춘천시에서 좀 떨어진 곳이라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뒷동산에는 假墓(가묘)가 있기 때문에 밤에는 무서워서 못나갔습니다. 어느 날 밤에 어머니가 배가 아프시다고 해 남편이 그 무서운 밤에 나보고 약을 사오라고 했습니다. 무서워서 못 간다고 하니까 남편이 느닷없이 뺨을 때리는 거였습니다. 시어머니와 한 방에서 자야 효자고, 어머니 앞에서 뺨을 때려야 효잡니까?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결혼한 지 3개월이 됐을까, 시어머니가 절 보시더니 왜 아이가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친정 동네에 가서 인공수정을 알아보라고 하시는 거였습니다. 아들 내외하고 한 방에서 살면서 무슨 손자를 바라시는지 두고두고 생각해 보면 시어머니보다 남편이 더 원망스러웠습니다. 그 고통은 당해보지 않는 사람은 모를 겁니다. 시댁 친척이 많아서 오는 손님마다 방에서 같이 자고 며칠씩 묵어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특히 시외할아버지는 상주하다시피 하셨습니다. 그때는 다 못 살던 시대니까 그렇지만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 분은 富者(부자)였음에도 생활에 보탬을 안주셨습니다. 하루는 남편에게 왜 나하고 결혼했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은, 내가 언니의 구박도 잘 참아내고 마음씨도 좋고 해서 우리 집에 시집오면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괴팍한 어머니와 외아들의 고집을 잘 이겨낼 거라 믿고 나와 결혼했다고 말했습니다.


맹물로 끓여준 미역국에 젖도 잘 안 나와

시어머니는 나를 처음부터 탐탁치 않게 여기셨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아가씨가 며느리가 됐으면 했는데, 남편이 우기고 저랑 결혼하니까 항상 트집을 잡으셨어요. 그러던 중에 임신을 했는데, 먹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말도 못했습니다. 밭에서 오이를 따먹고, 무도 뽑아 먹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임신 사실도 기뻐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첫 아이가 딸인 걸 아시고 더 못마땅해 하는 눈치였습니다. 미역국도 맹물에 끓여주셨습니다. 가뜩이나 입맛도 없는데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고, 젖도 잘 안 나왔습니다.

하루는 미역국을 갖다 주시며 옆집에는 아들을 낳아도 미역국을 못 먹었다고 하시니 제가 무슨 낯으로 미역국이 넘어가겠습니까. 아기도 밤낮으로 울면서 生後(생후) 한 달이 되어도 크지를 못하고 그대로였습니다. 産母(산모)가 제대로 먹지를 못하니 젖이 안 나와서 그런 걸 몰랐었습니다. 친정에 갔는데, 어머니는 금방 알아보시고 없는 살림에 우유와 젖병을 사다가 먹이니까 일주일 만에 살이 올랐습니다. 지금도 미역국을 자주 먹는데 이렇게 맛있게 끓여줬으면 젖도 잘 나왔을 텐데 하며 옛날을 회상해 봅니다. (계속)

[ 2015-12-29, 17:2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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