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두 사람 중 한 사람 좀 데려가 주세요”
[6·25 때 부친 拉北 후, 두 집안의 안살림을 일군 女子의 일생 (2)] 고생 끝에 남편의 결핵은 나았지만 시름시름 앓으니까 한약이라도 달여주면 시어머니는 못 마땅해 하셨습니다. 교회에 돈을 바치고 기도하면 나을 텐데 왜 약만 먹이냐는 겁니다.

朴金子(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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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이 된 남편

그즈음 남편은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을 봤습니다. 시험관하고 말다툼을 해서 기대는 안 한다고 했습니다. 하루는 작은 아버님이 오시더니 남편에게, ‘네가 합격을 해서 <강원일보>에 네 이름이 나왔다’고 하셨습니다. 발령이 언제 날지 모르는데, 대구로 발령이 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아무 연고도 없는 대구로 미리 가게 됐습니다.

학생 때부터 화학 선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했기에 그걸 토대로 혼자 떠났습니다. 하숙 생활을 몇 달 하던 중에 대구로 발령이 나서 아이만 데리고 셋방을 가보았더니 방 하나에 부엌도 없고 툇마루에 연탄 아궁이만 있었습니다. 비만 오면 아궁이에 물이 가득 찼습니다. 찬장은 사과 궤짝이 전부였습니다. 막상 출근을 하려는데 옷도 변변치 못해서 약혼반지를 팔아서 겨우 바지만 사서 입고 첫 출근을 했습니다.

1년 정도 다니다가 다시 청주로 전근을 가게 됐는데, 시어머니를 모셔 와서 네 식구가 됐습니다. 셋방을 급히 구하다 보니 기찻길이 방 옆이었습니다. 낮에는 그런대로 참겠는데, 밤이면 너무 무섭고 잠을 설칠 때가 많았습니다. 어느 날 새해 첫날이라서 나는 잘한다고 시어머니께 세배를 드리니까 ‘네가 얼마나 잘 났다고 옷도 안 갈아 입었는데 세배를 하냐’고 역정을 내셨습니다. 나 자신이 부끄럽고 억울했습니다.

청주에서 다시 신탄진으로 전근을 갔는데, 그곳은 황무지와 같은 곳에 큰 공장을 지었기 때문에 셋방 얻기도 힘들었고, 길은 진흙 천지고 병원도 약국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두레박으로 한 조롱 받는데 약 30분 정도 퍼올려야 했습니다. 집도 언덕에 있었고 햇빛은 보지도 못하고 비가 많이 오던 날 부엌이 무너져서 몽땅 땅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둘째딸 낳자 養子 얘기 꺼낸 남편

그런 집에서 둘째를 낳게 되었는데, 주변에 세 사람이 임신을 같이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딸을 낳아도 상관없지만 나는 아들을 낳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들 아들을 낳고 나만 딸을 낳았으니 시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남편은 아예 ‘우리는 養子(양자)를 어디서 데려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어머니한테 물어보았습니다. 참 기가 막혔습니다. 내가 딸을 다섯, 여섯을 낳은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겨우 스물다섯 살이었습니다. 가끔 그 얘기를 남편한테 하면 그런 말 한 적이 없다고 딱 잡아뗍니다.

딸만 낳은 죄로 불 때달라는 말도 못했습니다. 추운 방에서 産後(산후) 조리도 못했습니다. 지금도 다리가 시려서 잘 때는 긴 양말을 신고 자야 합니다. 좀 더 나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방이 두 개라도 시어머니는 꼭 우리와 한 방에서만 주무시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괜찮겠지만, 젊은 부부는 얼마나 불편한지 모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날은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손녀딸 둘씩 데리고 다니기가 창피하시다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여자가 좋아서 결혼하면 딸만 낳는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몇 년 후에 또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딸을 또 낳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마음도 많았습니다. 어떤 날은 남편 친구가 저를 보고 먹으라고 귤을 사니까 남편이 딸만 자꾸 낳는데 뭘 그런 걸 사느냐고 말렸다네요! 자기는 아무것도 사다 준 적이 없으면서 말입니다.

진통이 와도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출근을 하더니 産婆(산파)를 보내 주었습니다. 아들이었는데 이루 말로 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퇴근을 해도 아이를 볼 생각을 안하니까 어머니가 “얘, 아들이야”해도 대꾸도 안하고 나한테는 좋아하는 기색도 없었습니다. 아들 낳았다고 호강 한 번 못 해 보았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외숙모님이 하시는 말이 아들 낳았다고 잘해주면 콧대가 높아진다나. 한 일주일 정도 되니까 남편의 좋아하는 모습이 보였어요.

기사본문 이미지
시어머니와 세 자녀들과 촬영한 사진 (맨 오른쪽이 필자)




엘리베이터 없는 7층 맨 꼭대기 집

아들도 낳고 승진도 하고 집도 사서 서울로 이사를 하고 보니 집 장사가 지은 집이라 몇 년 만에 팔고 다시 셋방살이를 하게 됐습니다. 식구가 많다 보니 깨끗하고 좋은 집은 피해서 허술한 집을 고르게 되었는데, 셋방을 전전하다 보니 불편한 점이 많아서 아파트라도 사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때 남편은 나와 의논 한 마디 없이 친구하고 술자리에서, 그것도 집도 안 가보고 계약을 했다는데 막상 가보니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짜리 맨 꼭대기 층이었습니다. 한심했습니다.

다른 식구들은 하루에 한 번만 오르내리면 되지만, 주부인 나는 항상 물건을 사서 들고 다녀야 하니 보통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여름에는 유난히 더웠고 겨울에는 더 추웠습니다. 냉장고도 없어서 남편은 더위를 타는 사람이라 이웃에서 얼음을 얻어다가 남편만 주곤 했습니다. 밤에 자는데 이불 위로 물이 떨어져서 일어나 보니 천장에서 비가 새는 거였습니다. 옥상에 가 봐도 어디서 비가 새는지 알 수 없어, 그냥 천장에 깡통을 매달고 살았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얼굴이 핼쑥해서 들어오더니 폐결핵이 再發(재발)했다는 겁니다.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고생 끝에 결핵은 나았지만 시름시름 앓으니까 한약이라도 달여주면 시어머니는 못 마땅해 하셨습니다. 교회에 돈을 바치고 기도를 하면 낳을 텐데 왜 약만 먹느냐고 하는 겁니다. 약이 떨어지면 또 지어오고 시어머니는 또 못 마땅해 하시니 저만 곤란한 적이 많았습니다.

큰 딸이 고등학교 다닐 때도 뒷바라지를 못 했습니다. 우유도 하나 못 사주고 밤새 공부를 하고 나와도 먹을 것이 없어서 물만 한 그릇 먹고 또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수술 대신 기도원 가라는 시어머니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좋은 직장을 버리고 사업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사무실이 이웃에 있었는데 점심 비용을 아끼기 위해 직원들 점심을 집에서 해주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라고는 했지만, 매일 장을 봐야 하고 7층을 오르내리다 보면 정말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먼 시장에서 장을 보고 머리에 이고 7층에 올라와서는 그냥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무슨 병인지 모르니까 여러 병원에 가봤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습니다.

어떤 아는 분이 산부인과에 가보자고 해서 갔더니 자궁근종이니 수술을 하라고 해서 수술 날짜를 받고 집에 와서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때는 수술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시어머니는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하면 나을 텐데 무슨 수술이냐고 하셨어요. 우기고 수술을 했더니, 어머니는 의사한테 속아서 그런 짓을 했다고 두고두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누워 있으면 내 말을 안 듣고 수술을 하더니 그런 것 아니냐고 하시니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회복이 빨리 안됐습니다.

어느 날 남편 당숙 아저씨가 아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집에 좀 데리고 있어 달라고 했습니다. 아저씨 아들이 외아들인데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싫으니 네가 야단을 쳐도 좋고, 때려도 좋으니 사람만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한테 맡겨야 안심이 되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엘리베이터 있는 48평 아파트로

우리집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에다가 맨 위층이었고, 18평에 방은 세 개지만 화장실은 하나고 우리 식구만 해도 좁은 집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하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제일 힘든 일은 도시락 싸는 일이었습니다. 친시동생도 아니고 사촌도 아닌 6촌 시동생이라니… 말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반대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큰딸이 학력고사 시험을 잘봤습니다. 워낙 공부를 잘 해서 기대는 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서울대를 쓰라고 하셨지만 남편은 무슨 서울대냐며 장학금 주는 학교로 가라고 우겨서 아버지 말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시동생도 대학을 가고 생활이 나아져서 선망의 대상이던 엘리베이터가 있는 옆 동네의 48평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됐습니다.

좋은 것도 잠시, 아들이 잔병치레로 나를 힘들게 하더니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심한 축농증으로 수술을 했습니다. 30년 전이라 수술을 해도 완치가 안 되고 학력고사 점수도 좋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는 제 탓을 하시며 기도라도 열심히 했으면 좋은 대학을 갈 텐데 하시면서 나를 나무라셨습니다. 집 근처 S교회로 옮기시면서 교회에 대한 盲信(맹신)은 날이 갈수록 더해지셨습니다.


금비녀와 금반지를 교회에 바친 시어머니

회갑 때 금비녀와 금반지를 해달라고 하셔서 해드렸더니 우리한테는 의논 한 마디 없이 파마를 하시곤 교회에 다 갖다 바쳤습니다. 용돈은 드리는 즉시 교회에 몽땅 헌금을 하시고는 친척들이 놀러 오시라고 하면 차비가 없어서 못 간다고 하니 자식들이 보기에 얼마나 창피한 일이었겠습니까? 밤에 잠을 자는데 방문을 세게 열면서 “이놈아 용돈 떨어졌는데 왜 안 주느냐?”고 하시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하루는 남편하고 말다툼을 하길래 말렸더니 나한테 대들면서 욕을 있는 대로 하시는 겁니다. 아이들은 아침밥도 못 먹고 학교에 가고 집이 난장판이 됐습니다. 남편한테는 당신하고는 한 방을 못 쓰겠다고 한 뒤부터 각 방을 쓰게 되었는데 그때가 45세쯤이었습니다.

큰 딸은 큰 상을 받아와도 당연하고 아들은 작은 賞이나마 받아오면 온 식구가 좋아할 텐데 그걸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들을 미워하더니 지금까지도 못 마땅해 합니다. 남편은 공직에 있을 때 朴正熙 대통령으로부터 녹조근정훈장까지 받았기에 승진도 빨리 된다고 믿었는데, 퇴직을 하고 사업을 하다 보니 자금도 달리고 건강도 안 좋아 사업 지탱을 잘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딸한테 중매가 들어왔는데, 서울대 출신에 박사 학위까지 받은 사람이라 남편은 좋아했지만 당사자인 딸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시댁에서도 콧대가 높았습니다. 그래도 결혼을 해서 3남매를 낳았습니다.


둘째 딸 덕에 미국 구경

둘째 딸도 결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몇 년 후에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딸이 미국에 사니까 미국 구경은 잘하고 다녔습니다. 남편은 여행만 가면 괜히 짜증을 부려서 여행이고 뭐고 다 귀찮을 때가 많았습니다. 남편의 건강이 좋지 않아 공기 좋은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건강이 차츰 안 좋아지니 이상하게도 남편의 건강이 돌아왔습니다.

어머니에게 치매가 오면서 변 묻은 기저귀를 문간에 넣지를 않나, 어떨 때는 전자레인지 안에 넣을 때도 있었습니다. 식성은 좋아서 식탁에 있는 음식도 손으로 막 집어 먹고 양주도 병째로 막 마셔도 탈이 안 났습니다. 한 번은 설사를 너무 하셔서 화장실로 데리고 가야 되는데 내가 허리가 아파서 질질 끌다시피 해도 남편은 한 번도 거들어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때는 너무 힘들어서 “하느님! 두 사람 중 한 사람 좀 데려가 달라”고 기도를 했어요.


결혼 석 달 만에 이혼한 아들

1년을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사실 그때 제 가슴은 뻥 뚫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도 하겠지요! 38년 동안을 시집살이를 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어머니 살아 계실 때에는 다정하게 옆에 앉아 본 적도 없고, 따뜻한 말 한 마디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남편이 변할 줄 알았는데 습관이 돼서 그런지 여태까지 무덤덤합니다. 동네 여자들과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나의 경험담을 말했더니 “어떻게 살았냐”면서 오늘부터 반성하며 살아야겠다는 사람이 여럿 있었습니다.

시어머니 시집살이뿐 아니라 남편은 툭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를 않나, 자기 맘에 안 들면 열흘이고 한 달이고 말을 안합니다. 어떤 때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답니다. 자기는 할 말 다 하면서 나보고는 말을 하지 말고 살라고 합니다. 음식도 남편 위주로 하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못 하게 됩니다. 큰딸한테 하소연을 하면 아버지 성격은 못 고치니까 엄마가 참으면서 살라고 합니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 아닌가요! 시어머니 시집살이도 끝냈으니 이제는 편히 살아야지 했지만 남편 시집살이는 끝이 없습니다.

또 한 가지 문제점은 기대했던 아들이 지방대를 나왔고 취직도 잘 안되니까 아버지가 보기에도 못 마땅한 게 많을 겁니다. 늦은 나이에 중매로 결혼을 하더니 3개월 만에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이혼하는 사람은 참 싫어하는 사람인데 아들이 그 지경이니 아버지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친구들 만나기도 창피해 밖에 나가기도 싫다는 겁니다. 나는 중간에서 남편 눈치 보랴 아들 눈치 보랴… 아들은 혼자 객지 생활을 하는데 남편은 아들 안부 한 번 안 묻습니다. 밉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합니다. 혼자 마음을 졸이며 눈물을 흘릴 때가 많습니다.

10년 넘게 전원생활을 하는데 텃밭이 넓어서 힘들 때가 많습니다. 여러 가지 채소도 심고 김장 배추를 대략 80포기 정도는 심어야 합니다. 딸과 같이 김장을 하지만 사돈도 줘야 하고 가까운 이웃도 주고 하려면 많이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남편은 포기 김치는 안 먹어서 조선 배추를 심어야 힌답니다. 알타리 김치까지 포함해 김장을 세 번 하는 셈입니다.


일복(福) 많은 인생

저는 인복(人福)은 없고 일복이 많은 사람인가 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소리를 지르기에 무슨 일인가 하고 물으니 자기가 먹는 김치에 소금을 많이 넣어서 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를 짜게 먹게 해서 빨리 죽게 하려고 김치를 짜게 했다고 말하는 겁니다. 여태까지 병 수발에 음식 수발까지 들며 힘들게 살았는데, 그 말 한 마디에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 같아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딸이 그 말을 듣더니 아버지가 이상하다고 하는 겁니다. 맨정신으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느냐면서요.

멀리 떠나고 싶지만 몸이 불편하니까 마음만 있지 그것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여유 있는 생활이었는데 株式(주식) 투자를 하는 것은 알았는데 하루는 나한테 와서는 엄청난 돈을 잃었다는 겁니다. 자기가 잘못한 게 아니고 運(운)이 나빠서 그랬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큰 돈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돈이 많을 때는 친구들도 잘 만나더니 이제는 외출도 잘 안합니다.

나는 그렇게 큰 돈을 잃었어도 말 한 마디 안 할 겁니다. 지금 사는 집은 텃밭이 큰 집이지만 집도 변변치 않아서 연료비가 적게 드는 연탄을 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편하게 살고는 있지만 마음이 편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들 문제에 대해서는 독불장군인 남편 때문에 항상 긴장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음식에는 항상 신경을 씁니다. 인스턴트 음식은 피하고 아침에는 고기, 저녁에는 생선으로 매일 머리에 식단을 짠답니다. 또 사시사철 죽이 있어야 합니다. 남편은 저의 이런 노력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음악과 배구 관람이 樂

저 나름대로의 돌파구도 있습니다. 음악을 좋아해서 서울 살 때는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전당에도 갔습니다. 지금은 교통도 안 좋고 몸도 안 따라 주니까 CD를 사다가 집에서 듣는 편입니다. 남편은 음악을 좋아하지 않아서 남편이 없을 때만 듣습니다. 좋은 음악을 듣고, 가슴이 찡하다고 하면 남편은 저를 보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음악이 없다면 살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외롭게 살아서 음악에 빠진 것 같습니다.

스포츠도 좋아하는데 특히 배구를 좋아합니다. 직접 배구장에 가서 관람을 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 버립니다. 음악회도 혼자 가고 배구 경기장에도 혼자 갑니다. 제 취미는 다양해서 올드 팝송, 클래식, 자전거, 배드민턴, 탁구 등이 있습니다. 신문도 꼼꼼히 읽는 편이라서 이런 경험도 해 봅니다.

이런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이렇게 억울한 삶을 살았는데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고 이렇게나마 나의 답답한 마음을 털어 놓고 싶어서입니다. 포기하려고 했지만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아 이런 글을 쓰게 됐습니다. 그래야만 恨(한)이 풀릴 것 같습니다. 딸이 수정을 해 주겠다고 했지만 나 혼자의 의지로 써야 될 것 같아서 딸의 도움을 조금도 안 받았습니다. 이런 시련이 언제까지 될지 모르지만 꿋꿋이 살려고 합니다. 두서없는 글이나마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2015-12-30, 16:0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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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령초     2016-01-01 오후 5:11
이 글 朴金子씨의 수기를 보면서 저작자가 교사였다는 것을 유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표현상 글중의 교사품성이 바르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가정안의 갈등요인을
해소할려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마음에 불만이 쌓이다 보니
가정행복을 찾지 못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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