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살아 못배운 서러움을 딛고 일어서다!
[東인천 재건학교 이야기 (1)] 1회 졸업식은 눈물바다였다.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졸업식 노래와 교가도 슬프게 불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風雪(풍설)을 이겨낸 야간 중학생들의 발자국 도장 3년은, 눈보라만큼 강파른 세월이었다.

禹必亨·金永辰(체험수기 우수상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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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은 ‘광복 70주년 現代史 체험수기 현상모집’ 수상자들의 작품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열한 번 째 작품은 禹必亨·金永辰 씨가 共著한 手記, ‘재건학교 “아, 동인이여! 동인이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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禹必亨 씨



<우필형 씨의 手記>

어린양을 어이할까?

1966년 삼복철, 인천 東인천경찰서(現 인천 동부경찰서) 보안과 소년계로 전근됐다. 청소년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다. 그때 사십대 초반의 나이였다. 당시에는 도회지나 농촌이나 할 것 없이 보릿고개 넘기가 매우 어려운 때였다. 밥 굶는 사람들이 많았고, 국민 1인당 소득이 100달러가 채 안 되었다. 1960년대 정부의 최우선 정책은 “국민을 굶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중학교 진학률은 과반수에도 한참 못 미쳤다. 도시에서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많았다. 중학교 근방에도 못 가 보거나 중퇴한 관내의 열너댓 살 먹은 애들이 골칫거리였다. 작은 사고를 치고 파출소를 거쳐 ‘소년계’까지 끌려오는 애들도 있었다. 오갈 데 없는 이 아이들은 길거리를 배회하며 패싸움과 음주, 흡연을 일삼았다. 자잘한 청소년 범죄가 증가해 소년계는 직원들 사이에서도 꺼리고 싶은 부서였다. 중학교를 못 다니는 선량한 어린 애들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

이 아이들은 구두닦이나 신문팔이, 껌팔이를 하기도 했다. 편부편모 슬하 가정 빈곤 등으로 학교에도 못 다녔고, 공부하고 싶어 하는 구구절절한 상처받은 어린양의 심정을 알았다. 산꼭대기 무허가 판자촌 동네에 사는 애들이 그러했다. 이런 동네는 전기도 안 들어오고, 수도도 없었다. 물지게를 지고 100여m 떨어진 아랫동네 ‘공동 수돗가’에서 물 두 양동이에 20원씩 주고 사 먹었다.

가난 때문에 공부할 수 없고, 절망 속에서 좌절하는 선량한 소년·소녀들을 선도하고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실을 이수영 경찰서장에게 보고했다. 李 서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뜻밖의 지시를 했다. “야간 중학원을 열어봐요. 수원경찰서장 할 때 재건학교를 해봤더니 참 좋더라고. 경찰서 강당을 사용하면 되잖아.” 그 무렵 ‘배워야 산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열기가 유행처럼 전국에 퍼졌고, 야간 무료 재건학교가 생겼다가 없어지곤 했다.


야간학교 ‘동인자매중학원’ 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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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학교 재학생들

개교 준비 실무자로서 이런저런 잡다한 과정을 거쳤다. 1967년 2월8일 동인천경찰서 강당에서 야간 재건학교가 탄생했다. 학교 이름은 ‘동인자매중학원’이라고 지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한 불우청소년을 위해 좋은 일을 하게 됐다는 기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원장은 동인천경찰서 행정자문위원장 용이식 선생을 추대하였다. ‘원감’은 내가 맡았으나, 무보수로 자원봉사를 해줄 교사진이 문제였다. 적십자사 경기지사 이정겸 사무국장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다. 적십자사 대학생 청년봉사단의 중앙대 김정화 학생을 추천받았다.

김정화 선생에게 교무를 맡겼다. 김정화 선생이 주변에서 많은 대학생을 설득하여 자원교사로 불러 모았다. 자원교사들은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을 하는 아이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학교에 입학하라고 했다. 그리곤 학생으로 남녀 60여 명을 모집했다.

볼품없는 복장과 태도에서 학생의 자세를 갖추지 못한 애들도 많았다. 나이가 고등학교 고학년쯤 되는 청년티, 처녀티 나는 늦깎이도 많았다. 이런 아이들은 얼마 안 돼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나이다 보니 무료로 가르쳐 주는 야학마저 다닐 시간이 없었다.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수업을 했다. 칠판과 분필만 준비됐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대학생 선생이 칠판에 글씨를 쓰면, 대부분 책이 없는 학생들은 열심히 베꼈다. 직장에서 일하고 온 애들은 수업 중에 고단하여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한해가 바뀌어 1968년 3월 신입생이 들어왔다. 강당이 콩나물시루처럼 돼 대책을 세워야 했다. 1, 2학년을 동시에 한 교실에서 가르칠 수 없었다. <인천신문>에서 동인학교에 건물을 지어주기 위해 ‘시멘트 벽돌 모으기 운동’을 몇 달간 하였다. 모금 운동을 통해 50만 원 정도를 마련했다. 당시 시멘트 벽돌 한 장이 15원이었다. 도화동 65번지. ‘국군묘지’ 건너편, 허허벌판 300~400평의 땅을 기증받아 건물을 지었다. 선생님과 학생이 모두 나와서 새 터의 땅을 고르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신이 나서 시끌벅적하게 함께 도왔다.

1968년 따사로운 봄날 새 건물을 지어 이사하였다. 벽돌과 슬레이트로 지은 건물 한 동에 교실 두 칸을 만들고, 미군 부대에서 기증받아 콘센트 건물 한 동을 지었다. 인천의 가장 변두리로, 도로포장도 안 됐고 가로등도 하나 없는 황량한 市外(시외)였다. 전기와 수도, 전화도 안 들어왔고, 버스도 다니지 않았다. ‘동인’ 학생들의 집은 산꼭대기 무허가 판잣집에 방 한 칸에서 살림하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학교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가스등을 켜고 수업을 했고, 카바이드를 등에 넣고 불을 지피면 등불이 되었다. 겨울철 난방은 제재소에서 톱밥을 대줘 톱밥 난로로 해결하였다.

선인고등학교와 박문여고 학생들이 헌 교과서를 모아 보내오기도 했다. 학생들의 복장은 제각각이었다. 정규 중학교에서 중퇴하고 온 애들은 다녔던 학교의 교모에 교복을 입었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구질구질한 복장과 머리였다. 校帽(교모)와 校表(교표), 배지를 만들고 교복을 입히니 단정한 학생이 됐다. 교복과 가방을 준비할 사정이 안 되는 애들은 교복을 장만하지 못하고, “공부해야겠다”는 굳은 마음가짐 하나로 졸업할 때까지 다니는 학생들도 있었다. ‘근면’, ‘자립‘, ‘봉사’라는 교훈을 만들고 교가도 만들었다. 나중에 학교 앞길이 포장되고 15인승 새마을버스가 다녔지만, 학생들은 차비가 없어 학교와 집까지 왕복 40~50리의 길을 눈보라를 맞으며 걸어 다녔다.

한여름 장마철에는 학교 건물이 위태로워질 때도 있었다. 1968년과 1971년 여름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벽돌 교실에 금이 가 기울었다. “선생님! 학교가 무너지려고 해요!”, “기울었어요!”, “이대로 교실이 무너지면 공부 못 해요!” 복장 터질 걱정거리가 생겼다. 건물 기초를 시멘트로 단단히 하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야 하는데, 돈을 절약하기 위해 맨땅에 벽돌을 쌓아 지반이 튼튼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눈물의 졸업식

선생님들은 애들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즐거웠던지, 집에 자주 가지도 않고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교실 맨바닥에서 쪼그려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 1969년 3학년 학생들이 고교 진학자격 검정고시에 응시하였다. 15명이 응시하였는데 12명이 합격해서 학교가 시끌벅적했다.

1970년 2월, 1회 졸업식을 했다. 35명이 3년 과정을 용케도 마쳤다. 그날의 졸업식은 눈물바다를 이뤘다. 졸업생과 재학생, 내빈 등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졸업식 노래와 교가도 슬프게 불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風雪(풍설)을 이긴 나이 어린 야간 중학생의 발자국 도장 3년은 눈보라만큼 강파른 세월이었다. 이후 매년 졸업식 때마다 무슨 전통처럼 울음 바다를 이루는 게 ‘동인학교’의 졸업식 풍경이 됐다.

졸업하지 못한 중퇴자가 훨씬 더 많아 아쉬웠다. 나이가 조금 많은 애들은 제 밥값이라도 벌기 위해 직장 때문에 학교를 끝까지 다니질 못했다. 직장이라고 해봤자 이발소, 양장점, 양복점, 철공소 견습공이었다. 견습공은 아예 월급이 없었다. 오후 5시에 퇴근시켜줘야 6시에 시작하는 수업 시간을 맞추는데, 직장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일로 1969년 2월, <조선일보>와 경찰청에서 주는 제3회 청룡봉사상 ‘信상’을 받았다. 순경에서 1계급 특진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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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봉사상 시상식에서의 우필형 씨(右에서 세 번째). 1969년 촬영



당시 우리 정부는 가난했다. 무료로 가르치는 재건중학원을 열라는 말은 권장사항일 뿐이었다. 1960년대 초 대구의 봉제공장에 박정희 대통령이 시찰을 나갔다. 미싱 앞에 앉아 일하는 곱상한 소녀에게 다가가 “내게 꼭 할 말이 있으면 해봐”라고 했더니 수줍게 멈칫대며 울먹이면서 “공부 좀 하게 해줬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단다. 그 말을 들은 대통령도 눈물이 핑 돌아 울컥했다는 신문기사를 봤다. 朴 대통령이 공장 사장에게 “저녁에 미싱대를 책상 삼아 중학교 과정 공부를 가르쳐 보라”고 한 것에서 야간 재건 중학교가 생기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학교 운영비를 나의 쥐꼬리만 한 경찰 봉급으로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1960년대 경찰 월급이라고 해봐야 쌀 한 가마니 정도였다. 오남매를 키우고 가르치는 데도 무척 힘들었다. 자식들 굶기지 않고, 동인 학교에 돈 보태겠다는 큰 기대를 하고 20년 가까이 한 경찰을 사직하고 월남 가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했다. 1969년 여름, 경찰 봉급의 서너 배를 받기로 하고 월남에 가기로 했다. 그러나 내가 도착하는 날 회사가 망해서 온데간데 없어졌다. 현직 경찰인 내게까지 취업 사기를 친 것이다.

한창 전쟁판인 월남에서 불법체류 외국인 단속반을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됐다. 한국사람 몇 명이 방 한 칸 얻어 밥을 해 먹으면서 일정한 일터 없이 고생을 무척 했다. 나중에 주월 미국 대사관에 속해 있는 건설 기관에 전기 기술자로 취직했다. 집과 동인학교에 돈을 송금했다. 월남 패망 직전이라 景氣(경기)도 죽어있었고, 여기저기서 사람이 죽어가고 날씨는 한국보다 습하고 매우 뜨거웠다. 5년 만인 1974년 10월 빈털터리로 귀국했다.

집안 살림은 엉망이었다. 동인학교도 사정이 좋지 않아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었다. 학교 터가 애초부터 남의 땅이라 地主(지주)가 비워달라고 졸라댔다. “학교가 정말로 없어져요?”, “저희 학교 못 다니는 거예요?” 울어대는 여학생들 때문에 그 자리를 빨리 피하고만 싶을 만큼 내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1975년 봄, 동인학교에 남아 있는 학생들을 某 중학교에 전학해주는 것을 주선했다. 전학시킨 뒤 집으로 돌아오며 나이 쉰에 직장조차 없는 내 무능을 탓하면서 가슴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처절하게 자신이 불쌍한 순간의 이야기는 내 가슴속에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다. 이런 사실은 아직도 아무도 모른다. “아. 동인이여! 동인이여!” 기가 막혀 학교 앞에 앉아 학교를 우두커니 바라보며 밤늦은 시간에 혼자 앉아 울었다. (계속)

[ 2016-01-01, 20:2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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