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꼬마 나무꾼’의 눈물을 닦아준 ‘동인학교’
[東인천 재건학교 이야기 (2)] “입학금이 없어 입학을 못 합니다. 하지만 서울에 가서 苦學(고학)하여 훌륭한 사람이 꼭 되겠습니다.”

禹必亨·金永辰(체험수기 우수상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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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은 ‘광복 70주년 現代史 체험수기 현상모집’ 수상자들의 작품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열번 째 작품은 禹必亨·金永辰 씨가 共著한 手記, ‘재건학교 “아, 동인이여! 동인이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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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永辰 씨





<김영진 씨의 手記>

숨어서 지켜본 국민학교 동창들

1965년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던, 매섭고 추웠던 절망의 눈물을 흘린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서천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등록금 몇천 원이 없어 입학을 못했다. 우리 동네에서 서천中에 합격한 사람은 내가 최초였고 그 기록을 아무도 깨지 못하였다. 그만큼 가기 힘든 학교였다.

나무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는 ‘꼬마 나무꾼’이 됐다. 하루는 읍내 넘어가는 신작로 옆에서 나무를 하는데, 비인중학교에 입학한 비남국민학교 동기 동창 애들이 학교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남학생은 금빛 찬란한 校帽(교모)의 校表(교표)와 금단추의 교복, 여학생은 단정한 단발머리에 하얀 운동화와 하얀 카라의 곤색 교복을 입고 쫑알대며 지나가는 것이었다. 근사한 교복을 나도 한 번만이라도 입어보고 싶었다. 무슨 큰 죄라도 진 사람처럼 나무 밑에 숨어 그들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3월 중순쯤 서천중학교 교장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추가 등록을 받아줄 터이니 등록하라는 것이었다. 편지 온 것을 부모님에게는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교장 선생님 앞으로 편지를 썼다. “입학금이 없어 입학을 못 합니다. 하지만 서울에 가서 苦學(고학)하여 훌륭한 사람이 꼭 되겠습니다.” 억장이 무너지는 눈물이 왜 그리 많이 나고, 슬프던지 많이도 울며 쓴 편지였다. 나무 지게를 내려놓고 곧장 상경 길에 올랐다. 어머니가 내 옷 보자기를 머리에 이고 솔밭 고부랑길을 울며불며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해줬다.

경기도 연천 전곡으로 올라와 아이스케키 장사, 전곡극장 처마 밑에서 뽑기 장사를 했다. 사격장을 다니며 고물도 줍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밤에는 야간학교에 다녔다. 중학교라는 이름을 차마 못 부치고 중학원이라고 불렸다. 가방도 교모도 교복도 없이 아무 옷이나 입고 다녔다.

교회 마룻바닥에서 하는 ‘연천 직업 소년 중학원’ 전곡 支署(지서) 뒷마당에 천막을 치고, 통나무 의자에 앉아 ‘강의록’으로 수업하는 공짜 학교 ‘상록중학원’이다. 조그만 간판조차 없는 학교다. 연천경찰서 보안과 김태봉 순경이 하는 학교였다. 내가 일해 벌면서 방세를 내고, 학용품과 옷을 사 입고, 밥을 해먹다 보니 헌책조차 장만하지 못한 채 학교에 다녔다. 밥을 굶어 본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연탄이 없어 추운 겨울에 냉방에서 잔적이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다섯 번째 야간 중학교 ‘동인’

아무래도 공부를 계속하려면 큰 도회지로 가야겠다고 생각해 인천으로 객지 행보를 옮겼다. 동인천경찰서(現 인천 동부경찰서) 안에 있는 ‘동인 자매 중학원’에 편입했다. 야간 재건중학교를 네 학교를 거쳐 다섯 번째 입학한 학교다. 차비도 없고, 바빠서 명절 때 3년간 고향집에 내려가지 못했다. 그러면서 학생회장을 두 학교에서 두 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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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학교 학생들


야간 고등학교 때는 대학에 가겠다고 잠과의 싸움하며 야광충처럼 날밤 새우며 공부하였다. 낮에는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부족한 야간 학생은 잠과의 싸움이 먼저다. 잠 안 오게 하는 약인 속칭 ‘아나뽕’을 먹으며 잠을 쫓아냈다. 그러다가 영양실조에 걸려 체중이 40kg도 안 돼 죽을 뻔한 깔딱 고개를 넘겼다.

일 년 가까이 휴학하면서 부모님 찾아 고향집에 내려와 절망의 세월을 보냈다. 1972년 당시 김규동 시인이 경영하는 한일 출판사와 월간 <성공>이라는 잡지에서 手記 공모가 있었다. 苦學(고학) 수기를 투고하였다. 잡지에 크게 실렸다. 전국에서 격려편지가 쏟아져 왔다. 고학하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쓴 일기를 金 시인이 “학생! 학생이 쓴 일기장 내게 보여 줄 수 있겠어?”라고 했다. 일기장을 통째로 넘겨줬더니 한참 후 뜻밖에 ‘시집’을 내어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詩로 쓴 일기가 군데군데 있는데 그중 37편을 추려 내 호화로운 시집을 내어주었다. 내 인생에 반전의 천운을 맞은 것이다.

내용은 “춥다. 배고프다. 바쁘다. 가족이 보고 싶다.” 등의 고학생의 어두운 애환이 주류를 이루는 시편이었다. 序文(서문)은 시인이며 영화감독인 예총 회장 이봉래 선생님이 써주었다. 사주팔자에 타고 난 시인이라면서, 시집 이름을 《운명》이라고 지어 주었다. 신문에 나오도록 소개하여 신문에도 나왔다. 그때가 1973년 나이 23살 때의 일이다.


고생이 문학의 밑거름

나이 마흔이 넘어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에 입학하였다. 입학하고 화곡동 집에 오는 좌석버스에 앉아 차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난 곤궁한 세월이 영화처럼 아물아물 차창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시 수풀 길을 헤매던 뜨거운 눈물이 집에 다 오도록 한없이 솟구쳤다.

 대학원 입학하고
 돌아오는 차창가에 비치는
 너의 눈보라 눈물을 나는 보았단다.
 장하다 너는 해 내고야 말았구나
 눈물 금놀진 아침
 사물놀이패 앞장세워
 에미무덤 찾아와다오
 하는숲 청산에 날라리 운다 _ 자작詩 ‘샛별의 노래’ 중 일부

“엄니! 엄니한테 말 다 안 해서 그렇지. 절망스러울 때가 너무 많았어유. 집사람은 고단해서 곯아떨어져 잠들었어요. 나 혼자 막걸리 마셔유” 홀로 중얼중얼 대며 술 먹다가 고향 작은 어머니한테 전화를 했다. “작은 엄니! 저, 지금 대학원 입학하고 와서 혼자 술 먹고 있어유” 작은 엄니는 시골 할머니답지 않게 금방 말을 알아들었다. “잘했다! 잘했어 영진아! 너의 엄니가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아 허겄냐! 어려서 객지 나가 공부하는 너 때문에 엄니가 얼마나 울었는지 아느냐? 돌아가신 엄니, 아버지가 널 돕는구나 말을 들으니 눈물이 줄줄 여름철 장맛비처럼 쏟아졌다. 밤새도록 저승부모 생각하며 술 한 잔에 눈물 한 종장으로 홀로 자축하였다. 대학원 全 과정을 만점으로 졸업하였다.

재학 중 문둥이 시인으로 유명한 한하운을 연구하여 <天刑(천형)의 靈歌(영가): 한하운論>을 써서 문학평론가가 되었다. 15살에 객지에 나와 중학교부터 대학원까지 13년간 야간으로 눈물고개를 많이도 울고 넘으면서 학업을 마쳤다. 고생한 이야기 자체가 결코 자랑은 못되지만, 이것이 나의 문학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50년 전에, 돈이 있어서 서천중학교에 정상적으로 입학했더라면 오늘의 시인이, 문학평론가가 못 되었을 것이다. ‘돈은 날아다니는 나비와 같다.’ 돈이 없었기에 작은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 저 높은 정상을 향하여 남은 인생 열심히 공부하여 시인다운 시인이 되어야겠다. 먹고살 만하다고 해 자만에 빠져서는 안 되겠다. (계속)

[ 2016-01-02, 23:0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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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느하람     2016-01-05 오후 12:53
법과도덕님, 시인은 시만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이 투잡입니다. 소설가는 전업도 가능하긴 한데, 소설가도 상당수가 투잡이고요.
예를 들면, 전원책 변호사도 시인이지요.
   법과 도덕     2016-01-03 오후 12:44
공부해서 나라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겨우 시인 문학인이 되었습니까 ? 저는 시인 소설가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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