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가 만든 피 묻은 家族史
“좌익들은 兄의 두 눈을 꼬챙이로 뺀 채 개처럼 끌고 와 산 채로 매장했다”

金亨佐(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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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은 ‘광복 70주년 現代史 체험수기 현상모집’ 수상자들의 작품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열 번째 작품은 金亨佐 씨의 手記, ‘공산주의가 만든 비극적 가족史’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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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炯佐 씨




1934년生인 저는 전북 김제군 봉남면 대송리 출신입니다.

4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나 기독교적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유아 세례를 받고 주일학교 초등반과 고등반까지 충실하게 다녀 주일학교 교사가 되어 어린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주일예배는 물론 새벽기도회나 수요예배에 빠짐없이 교회에 출석하는 등 철저한 보수 신앙교육을 받았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저는 대송리 교회(現 김제 대송교회)에서 둘째 형 김형배(당시 집사)와 함께 교회일을 돌보았습니다.


공산주의가 만연하다

1945년 해방이 되니까 세상은 左右로 양분되었습니다. 저는 형배 형의 심부름으로 이런저런 일을 많이 했는데, 그중 하나가 ‘신탁통치 반대’라고 쓰인 간판을 동네 여기저기에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형배 형은 대동청년단 간부(부단장으로 기억)로 일했습니다. 저와 형은 面民(면민)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간판을 붙이고, 그 곳에서 신탁통치 반대 집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신탁통치 반대파와 지지자들 간에 난동이 벌어졌습니다. 처음엔 신탁통치 반대를 외치던 주민들이 갑자기 신탁통치 지지로 돌변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제가 살던 부락에서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로 갈라서 ‘너는 어느 편이야’라고 물으면, 좌익들은 ‘나는 共(공)이야’라고, 민주주의를 믿는 사람은 ‘나는 民(민)이야’라고 답했습니다. 당시에 80% 이상은 좌익이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좌익들은 밤마다 모여 工作(공작)하고 공산주의 노래를 배우는 등 공산주의가 만연한 분위기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눈치로만 말하고, 모여서 이야기도 못할 정도로 삼엄했습니다. 학교 선생들 대부분도 좌익이었습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은 ‘민중의 旗(기) 붉은旗는 천사의 시체와 싸운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이란 혁명가를 부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청년면려회’가 ‘공산당滅死會(멸사회)’로 둔갑

그러던 중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직후, 제가 출석했던 대송리 교회에서 김응규 담임목사님과 저까지 총 네 명이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공산군이 쳐들어오면 순교하자고 했던 주일학교 교사들은 모두 도망치고 없었습니다.

인민군은 대송리 교회까지 쳐들어왔습니다. 교회는 인민군 소년단 집회소로 전락했고, 담임목사님 사택은 소년단 사무실로 활용되었습니다. 인민군과 좌익들은 聖經(성경) 등 목사님이 보시던 책을 불태워버렸습니다. 벌벌 떨며 쭈그려 앉아계시던 목사님 내외 분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몸서리쳐질 정도로 마음이 괴롭습니다. 인민군들이 기독교인들을 색출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어느 교인 중 한 명은, 밤에 몰래 찾아와 세례교인 명부에서 자신의 이름을 삭제해 달라고 애원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교회 안에는 여러 단체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靑年勉勵會(청년면려회)’란 단체인데, 좌익으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사진사와 공모해 ‘청년면려회’란 명칭을 ‘공산당滅死會(멸사회)’로 이름을 몰래 고쳤습니다. 그 때문에 교회 업무를 담당하던 제가 잡혀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인 강 선생이란 사람은, ‘공산당滅死會’가 맞다’고 거짓증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탈출

제가 끌려간 곳이 보안서 옆의 창고였는데 우익 성향의 주민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그 사람들 중 대부분이 얼굴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인민군이 총개머리판으로 구타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맞을까봐 바닥에 흐른 피를 얼굴에 바르는 등 일부러 얻어맞은 행세를 했습니다.

얼마 안 있다가 낯익은 사람이 보안서 창고로 끌려오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바로 김응규 목사님이었습니다. 인민군과 좌익들은 창고 앞에 큰 드럼통에 물을 끓인 후 金 목사님을 그 물에 넣어 처형하려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체념한 듯 제 손을 붙잡고 ‘하늘나라에서 만나자’며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깥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金 목사님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을 부르던 사람은 다름 아닌 목사님 아들이었습니다. 목사님 아들이 좌익으로 넘어가 제 아버지를 구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당시는 여름이라 창고 안에 모기떼가 많았습니다. 모기를 피하려고 창고의 쌀겨 속에 파고 들어가 밀대모자로 덮고 자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자고 일어났는데 갇혀 있던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너무 이상해 ‘혹시 내가 천국에 왔나’ 하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뛰어 달아났습니다. 연못으로 뛰어 들어가 몸도 씻고, 배가 고파 연못 속의 잉어도 잡아 먹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저랑 같이 갇혀 있던 사람들이 인민군들에 의해 다 학살됐다고 들었습니다.


‘형좌라도 희생시켜야 한다’

집에 가보니 아버지께선 친척들도 다 좌익으로 넘어갔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돈 얼마 있으니 소의 정강이 하나 사다가 교회 쌀로 쌀밥 한 끼 먹고 다 함께 순교하자고 하셨습니다. 참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습니다. 소 정강이를 사서 집에서 삶고 있는데 보안서에서 아버지를 잡으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한 시간 정도 엄청나게 매를 맞았습니다. 이마가 빠개질 정도로 얻어 맞아 피가 솟구쳤습니다. 그걸 보고 있자니 가슴에서 피가 솟구쳐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도 끌려가 매를 맞았는데, 어머니는 손이 부러진 상태로 오셨습니다. 누나 두 명도 전기고문을 당했는지 들것에 실려 왔습니다.

그러던 중 큰아버지께서 저희 집을 찾아 오셨습니다. 당시 큰아버지와 사촌들은 좌익이었습니다. 큰아버지가 아버지께 ‘동생, 동네 인민위원회에서 자네 식구를 나보고 다 죽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큰아버지는 ‘형배가 대동청년단 간부로 있는데, 형배가 안 잡히니 형좌라도 하나 희생시켜야 할 것 같네. 온 집안이 다 죽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라고 했습니다.


각서

대동청년단 간부였던 형은, 6·25가 터진 후 인민군을 피해 부산으로 도망간 상태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형님, 세상이 뒤집어졌다고 해서 어떻게 조카를 죽인다는 것입니까’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이때 제가 ‘큰아버지 좋습니다. 내 몸 하나 죽어 온 식구가 산다면 제가 죽겠습니다. 갑시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습니까’라고 자청해 인민재판소로 끌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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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재판소에는 약 100명 정도가 모여 있었습니다. 교회 교인도 더러 보였습니다. 내가 죽을 이유가 없는데 이왕에 죽을 바에야 내가 무슨 죄로 죽는 것인지 묻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재판 도중 ‘큰아버지 말에 의하면 형님이 안 잡혔으니까 代理(대리)로 죽는다고 하는데 인민공화국에선 代理로 죽는 법도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변에서 ‘저 놈은 저러니까 죽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마치 예수님의 심판과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잠깐 심리전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민재판위원장은 친구 유○○의 아버지셨습니다. 제가 가끔 가서 어깨와 등을 주물러 드리고, 식량이 없으면 쌀도 퍼주고 했습니다. 그랬던 분이라 말을 잘하면 구해줄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10여 일만 참아주세요. 내가 수습해서 형님 계시는 곳을 알려드린다’고 했더니, 위원장이 ‘그러면 각서를 쓰라’고 해서 각서를 쓰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두 눈이 뽑힌 兄

그러던 중 형(김형배)이 김제로 끌려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형님께서 친구들과 부산으로 가는 길에 차에 펑크가 나, 전주 고모집에 숨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에 있다 그만둔 교인이 형이 있는 곳을 인민군에 密告(밀고)했다고 합니다. 형은 좌익들에 의해 두 눈이 꼬챙이로 뽑히고, 낭심이 터진 상태로 끌려왔습니다. 좌익 성향의 제 사촌들은 형을 산채로 모래사장에 파묻었습니다. 6·25 후에 사촌형 한 명은 자살하고, 큰아버지는 급사하고, 그 손자는 산에서 일하다가 돌에 치여 죽었습니다. 큰아버지 자손 중 좋게 사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당시 빨치산으로 있던 제 이종사촌은 저보다 한 살 위인데 밤이면 1시경에 支署(지서)를 습격하는 등 저와 교전까지 벌인 적이 있습니다. 먼저 교전을 하게 된 경위부터 적어보려 합니다. 저는 인민재판소에서 풀려난 뒤 조○○이란 사람과 특공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를 대장으로 하여 30여 명으로 조직해 인민군들이 점령하고 있던 지서를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좌익 주민들과 인민군들은 지서 주변에 토담을 약 4m 정도 쌓아놓고 사방에 초소를 만들어 놓았는데, 초소를 지키는 빨치산들 전부가 다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제 이종사촌이었던 것입니다.

이름은 윤○○인데 교전 시에 ‘○○이형, 자수하시오’라고 하면 그 형은, ‘형좌야 우리에게 넘어오너라. 큰 대우를 해줄게’라며 회유한 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 빨치산 추모식에서 축사까지 했다는 말을 들어,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정말 환영사를 했더군요. 그를 집안 손자 결혼식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우리 형배 형을 살릴 수 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죽였는가. 빨치산 추모식에서 환영사를 하고 이게 무슨 짓이냐’라고 따졌습니다. 윤○○은 ‘시대가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더군요. 얼마 전 그도 담낭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참한 살육

저희 형과 비슷하게 최후를 맞이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치호, 김성두란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저희 형이 생매장되었던 모래사장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얼굴은 다 망가져 있는 상태라 옷을 보고 겨우 두 사람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형이 육군 대령이었던 권태술이란 사람도 좌익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좌익 성향의 주민들과 인민군들은 ‘실탄과 무기를 내놓으라’며 권태술 씨를 개처럼 끌고 갔습니다. 김일천이란 사람은 反共주의자로, 빨갱이들을 잡아다 고문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피란을 가지 못한 채 저들에게 잡혀 권태술 씨와 함께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김일천 씨의 시신은, 전깃줄 비슷한 것으로 공처럼 동그랗게 묶여 생매장된 것 같았습니다.

대송리 교회 정기봉 장로란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의 부인은 집사님이었습니다. 두 분 다 교회 섬기는 일에 헌신하는 羊(양) 같은 분이셨습니다. 인민군들은 보안서 담 안에서 정기봉 장로님을 몽둥이로 마구 때렸고, 결국 정 장로님은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부인은 남편이 맞는 소리를 보안서 담 너머로 다 들었고, 도중에 혼절하고 말았습니다.

고순동 씨란 분은 봉남면 유지였습니다. 高 씨를 포함한 가족들이 모두 우익 성향으로, 반공정신이 강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面 발전을 위해 지원금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좌익들의 미움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좌익들은 고순동 씨 며느리에게 高 씨의 목에 밧줄을 걸도록 시킨 뒤, 자녀들이 꽹과리를 치며 묶여진 高 씨와 함께 동네를 돌도록 시켰습니다. 후에 고순동 씨를 김제경찰서로 압송한다고 데려갔는데, 나중에 봉남면 도장리 고개 산 중턱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발견되었을 당시 그의 시신은 머리가 깨져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 좌익과 싸워왔기에 죽을 때까지 순교·순국정신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저는 애국단체 사무총장으로 15년 간 활동하고 있습니다. 국민통합운동본부 본부장으로 매주 수요일 오후 2시부터 4시30분까지 서울 종로5가 기독교연합회관 13층에서 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참석자는 30~50명에 불과하지만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깊은 생각없이 몇 자 써서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2016-01-01, 08:4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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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신     2016-01-02 오전 2:18
그렇죠?
공산당 나쁘죠?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철수 재인 원순과 그 졸개들은 머야?
나는 ㄱㅅㄷ이 좋아? 인간들!!! 정말 싫어!
지구를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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