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상록수 희생정신’
[東인천 재건학교 이야기 (끝)] 사재를 털어 학교 운영비로 쓰신 용이식 선생님, 봉사정신을 발휘한 김정화·소채규·김주남 선생님, 동인학교에 푹 빠져 대학을 10년 만에 졸업한 윤덕기 선생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을 연상케 하는 고마운 은사님들

禹必亨·金永辰(체험수기 우수상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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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은 ‘광복 70주년 現代史 체험수기 현상모집’ 수상자들의 작품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열한 번 째 작품은 禹必亨·金永辰 씨가 共著한 手記, ‘재건학교 “아, 동인이여! 동인이여!”’입니다.

<김영진 씨의 手記>

구두닦이 친구 종호

야간학교 동인의 동기동창 전종호는 학교에 다닐 때 나의 단짝 동무였다. 학교 다니면서, “다른 애들하고는 말발도 안서고, 말도 섞기 싫다”며 나하고만 어울렸다. 고향이 강화도 교동섬이다. 제때 돈을 못 내 교동중학교 1학년을 중퇴한 사연이 있다. 나와 함께 야간 중학교에 다녔다.

인천 동구 화평동 단칸방에서 형과 형수, 조카 둘과 살았다. 단칸방의 다락방이 제 방이었다. 마음새가 건들대지 않고 쟁반 같이 고았고, 머리도 좋은 친구다. 종호는 구두닦이였다. 길거리 다방 같은 데를 떠돌며 “신다으~! 신 닦아요! 구두 닦아요!” 떠돌이 구두닦이들이 1960~1970년대 우리 학교에 많았다.

구두통 메고 다니다 보면 자기 구역이라며 텃세 부리는 깡패 같은 애들한테 억울하게 두들겨 얻어맞기도 했다. 학교에서 은행이나 구청처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기관에 부탁해서, 자리 잡고 앉아서 안정적으로 구두닦이를 할 수 있게 주선해 주었다. 그중의 한 명인 종호는 東인천경찰서 구내에서 직원과 민원인을 상대로 구두를 닦았다. 나이가 다른 동급생보다 네댓 살 많은 중3 때, 만 스무 살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종호와 10년 동안 소식이 끊어졌다. 1980년 어느 날, 종호가 나의 직장으로 “동창 상헌이한테 네 전화번호 알았어. 中東에 가게 됐어”라고 전화가 왔다. 서울 사당동에서 과천 넘어가는 돌산 아래 ‘현대건설 중기부’ 수위실에서 면회를 가서 만났다. “중동에 가려고 연수받는 중이여” 몇 마디 말만 하고는 금방 헤어졌다. 현대건설 중장비 기술자로 ‘중동’에 가기 위해서는 꼭 거치는 곳이란다. “최종학교 학력을 동인중학교 졸업했다고, 이력서에 써서 잘 합격했어”라고 했다.


그곳에서는 야간학교 다니지 말자

그후 25년간 아예 소식이 깜깜히 끊어졌다. 전화 통화 한 번 한 적 없이 속절없이 총알 같은 빠른 세월이 흘렸다. 모교가 없어지면서 학적부마저 잃어버려 종호의 본적지 주소조차 몰라 찾을 수 없었다. 동창과 선생님을 1년 동안 연줄로 어느 정도 찾아 눈물 나는 첫 사은회를 했다. 30여 년 만에 1회부터 막내 7회까지 전체 동창과 선생님이 한자리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가슴 미어지는 감격스러운 모임을 하고 난 직후 꿈에 종호가 생생히 나타났다. 경찰 제복을 입고 “휴전선 DMZ에 훈련받으러 간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꿈이라지만 이상스럽게 생각했다. 아무도 종호의 행적은 물론이고 生死조차 아는 이가 없었다. 종호네 집으로 갔는데, 강화도가 고향인 1949년생 중장비 기사로, 동명이인이었다. 허사였다.

그 후에도 몇 번 꿈속에 나타나 걸쩍지근했다. 종호의 고향이 강화도 교동도라는 것만 알고, 어느 일요일 동기동창 넷이서 교동도에 종호를 찾으러 갔다. 교동도에 도착하니 가슴이 조마조마 불안했다. 꿈대로라면 살아있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이 발길을 재촉했다. 종호의 생가 자리를 찾았으나 집은 흔적조차 없었다. 생가터 이웃집에 일가가 된다는 어른을 찾았다.

“종호 죽은 지 한 삼십 년 가까이 돼요. 그때쯤 추석 때, 종호네 형 종목이가 성묘 와서 말했어요. 중동에 중장비 기술자로 가자마자 몇 달 만에, 폭격 맞아 그곳에서 죽었대요. 거기 가기 전에, 동거하던 여자가 있었다는데, 서울인가? 어딘가에서 살았다는데, 아이는 없고. 중동에 가서, 돈 벌어와 결혼식 올리겠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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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필형 선생님(뒷줄 맨 오른쪽)을 모시고. 꽃다발을 든 남자가 김영진 씨



가난한 세월에 태어나 갖은 풍파 겪으며 고생만 하다 친구는 죽었다. 31살 젊디젊은 나이에 좋은 옷 한번 못 입어보고, 밥 한번 배불리 실컷 못 먹어보고 이역만리까지 가서 죽었다. 졸업한 지 삼십 년 지나 사은회·동창회 하겠다고, 다른 동창들 다 찾는데 너를 왜 안 찾느냐고, 꿈에 자꾸 나타났구나! 자신의 죽음을 ‘단짝’에게 확인시키고자 어리중천을 넘지 못한 것 같다.

“친구야! 선생님, 동창들에게, 네 소식 말해줄게. 종호야! 그곳에서는 야간학교 다니지 말자. 맘 놓고, 공부하자. 때가 되면 우린 만날 수 있을 거야. 진실한 친구의 우정은 죽어서도 이어진단다. 惡은 죽은 뒤에도 남으나 善은 뼈와 함께 묻힌단다.” 그의 생가에 다녀온 후 종호는 꿈에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당시 몇몇 학교는 제때 등록금 내지 못하면 인정사정없이 퇴학시켰다. 육성회비나 기타 雜費(잡비)를 못 내면 선생님이 학생을 벌주기도 했다. 집에 가서 돈을 가져오라고 수업시간에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졸업을 한두 달 남겨놓고 졸업비를 미납하면 졸업예정증명서조차 발급해 주지 않았다. 졸업했어도 졸업장을 안 줬다. 세상에서 제일 인심 사납고, 야박한 곳이 학교였다. 1960~1970년대 어느 학교에서나 자주 있었던 아픈 추억이다.


상록수

동인학교가 다른 정규학교와 다른 것은 첫째 수업료는 물론 일체의 돈을 안내는 학교다. 입학하고 싶으면 어느 때나 받아주고, 환영하는 학교였다. 둘째는 대학생 선생님이 학생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동인학교와 정규 학교는 달라도 하늘과 땅만큼 달랐다. 동인학교를 설립하고, 폐교 몇 년 전까지 원장을 하신 용이식 선생님은 깨진 독에 물 붓기로 학교에 많은 돈을 쓰셨다. 그 당시 학교 운영비가 나올 곳이라고는, 용 선생님 주머니밖에 없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갓 스물 넘은 대학생이었지만, 원장 선생님은 연세가 많으셨고, 사업을 하셨다. 말년에 중풍으로 병석에 있을 때 병문안 한번 간 제자가 없다. 제자들로부터 한평생 카네이션 꽃 한 송이 받아 본 적이 없다. 가르쳐 줘서 고맙다고 막걸리 대접 한번 받아본 적 없다. 돌아가신 것도 첫 사은회를 하기 위해 찾던 중 처음으로 알았다.

‘열매 맺지 않을 나무는 심어서는 안 된다’며 병석에서 얼마나 의리 없는 제자들이라 원망하시며 눈 감았을까! 학교를 졸업하고 뿔뿔이 헤어졌다가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선생님과 동창들이 한자리에 모이기 3년 전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셨다. 몇 년 만 더 사셨더라면 제자들 잘되는 것을 보셨을 텐데…. 원장 선생님이 없었더라면 ‘동인’ 자체가 생기지도 존재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1967년부터 1975년까지 학교를 유지하는 동안 자원봉사한 대학생 선생님이 어림잡아 70여 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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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학교를 소개한 신문기사 스크랩



3년 이상 雪寒風(설한풍)을 인내하며 봉사한 선생님도 많다. 배움을 갈망하는 제자에게 희망의 등불을 밝혀 줬지만, 학교에서는 단 몇 푼의 버스비조차 선생님께 준 적이 없다. 자신이 좋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나와 학생들을 헌신적으로 가르쳤다. 은혜를 베풀어 사은 보시받겠다는 생각은 할 줄도 몰랐다. 청순한 총각·처녀 선생으로 학생들과 눈보라 길을 같이했다.

김정화 선생은 개교하는 날부터 국어 선생으로 원감으로 동인에서 제자를 위해 거룩한 봉사 정신을 발휘했다. ‘동인’의 산 역사다. 별명이 ‘찐빵 선생’인 김정화 선생 친구 인하공대생 이기홍 선생은 개교 때부터 金 선생과 무슨 운명이라도 같이하는 것처럼 수학선생으로, 원감으로 학생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의정부에서 고등학교 선생을 하고 정년퇴직하였다. 두 분 다 3년 동안 軍 복무를 한 뒤 다시 학교에 복귀하여 학생을 가르쳤다. 다른 선생님들도 軍 복무 마치고 또다시 선생님으로 돌아온 분이 여럿이다.


東仁학교에 청춘을 바친 은사님들-

김정화, 이기홍 선생님과 함께 1~3회 졸업생을 가르친 중앙대 행정학과 학생 윤석만 선생은 公民(공민)을 가르쳤다. 포스코 사장을 거쳐 포스코건설 회장을 한 이 나라의 손꼽히는 전문경영인으로 성공하였다. 수학을 가르쳤던 인하공대생 기인종 선생은 맨주먹으로 기업을 일으켰다. 2008년 ‘1억 불 수출탑’을 수상한 가멸찬 사업가다. 인하공대생인 수학 선생 이정호 선생은 수학 선생답지 않게 항상 웃음이 많고 은근히 웃겼다. 대학교에 자주 결석하면서 콧노래 부르며 학생들을 신바람 나게 가르쳐 줬다. 가난살이 어려운 시절에 힘겹게 대학을 다녔고, 자수성가로 사장이 되었다.

국어와 영어를 가르친 윤덕기 선생은 서울대 사범대를 다녔다. 빨리 졸업하여 정규학교의 선생이 되었더라면 봉급도 받고, 승진도 빨랐을 텐데, 무엇이 그렇게 동인학교가 즐거웠던지 동인학교에 발목 잡혀 휴학을 거듭하였다. 대학을 10년 만에 졸업했다. 1회 담임 선생님으로 1회 졸업식 때 졸업생을 붙들고 가장 많이 울었다. 스승은 죽어도 고지식해야 한다는 옛말처럼 참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서울에서 고등학교 선생을 정년까지 했지만, 전화 한 통, 찾아오는 제자 새끼 하나가 없다!”며 동인학교 제자들의 자식 결혼식까지 꼭꼭 찾아다닌다.

소채규, 김주남 선생도 학생들과 오랫동안 애환을 함께 하였다. 사서 하는 눈보라 눈물길을 걸었다. 젊은 청춘, 피곤 한 줄도 모르고 봉사하였다. 입대 영장이 나오면 학생들 가르치는 일이 더 급하다며, 입대 연기까지 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그들 선생님은 통행금지 시간에 걸려 집에 못 가고, 학교에서 숙맥처럼 부엉이 잠을 자는 일이 다반사였다.

여선생 중에서 오정진, 심순옥, 이경숙 선생의 가슴 뜨락도 잊을 수 없다. 형제간에 나온 김정화, 김종철 형제. 이기홍, 이기헌 형제 선생도 있다. 그때의 선생들은 ‘신들린 상록수’였다 눈서리 칼바람에도 흔들림 없는 사계절 푸르디푸른 沈薰(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선생을 연상하는 일이 동인학교에서 곱게 일어났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일하면서 배우자’의 열정이 불꽃 되어 ‘꽃불’로 빛났다. 가정교사라도 하면 용돈도 벌 수 있는데, 그들은 무슨 큰 사명감이라도 있는 듯 20대 초반 청춘을 학교에서 불태웠다.

그러한 선생님의 이름 석 자를 일일이 거론하려면 지면이 한이 없다. 송태은 선생은 유일하게 박문여고 현직 교사로 있으면서 1회 졸업생을 잠깐 가르쳤다. 김영자, 이덕용, 송인찬, 정영황, 고영남, 박영욱, 윤석우, 한기흥, 이인규, 김병록, 김일영 등 학교를 거쳐 간 선생님들의 순수와 열정 불타는 청춘을 기억한다. 중학교에 못 가고 방황하던 청소년들에게 절벽 같은 절망의 환경을 극복할 수 있게 한 것은 위대한 상록수 희생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총동창회 이름으로 드린 ‘孝婦賞’

1960~1970년대 정규 중학교에서는 졸업식이 있기 며칠 전에 책상 위에 하얀 백지를 깔아놓고, 떡, 과자 막걸리를 놓고 조촐한 사은회를 했다. 가난한 ‘동인’에서는 7회 졸업생까지 배출했지만 단 한 번도 사은회를 못하고 졸업했다. 그것이 恨이 되어 매년 5월15일 스승의 날에 12년째 눈물 달빛 같은 사은회 행사를 한다. 지금은 동기 동창회와 총동창회가 조직되어 활발히 움직인다. 동창들, 선생님들 자식 결혼식에 우르르 몰려다니며, 40~50년 전 과거사 꾸부렁이 길을 얘기하며 웃음꽃을 피운다.

학교생활 중 사춘기를 맞은 남학생은 일찍이 세파에 물든 아이답지 않게 별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 하지만 여학생들은 좀 예민했다. 어느 총각 선생님과 여학생이 어쩌고저쩌고 자기들끼리 말을 지어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꽃나이 소녀라지만 사춘기 매화 바람 때문에 갓 스물 넘은 풋 총각 선생님들의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달꽃 별꽃 같은 풋내기 짝사랑 이야기가 40년 세월이 지나고 보니 알알이 청산처럼 느껴진다.

2013년 5월11일 제10차 사은회 행사는 특별한 사연이 있는 날이다. 마당과 담장이 아예 없는 신흥동 산꼭대기 32평 단층 舊屋(구옥)의 우필형 원감 선생님의 집에서 열렸다. 그곳에서 禹 원감 선생님의 큰 며느리가 20년 가까이 홀시아버지를 지극히 부양했다. 며느리 ‘남옥현 여사’에게 감사하다며 사은회 자리에서 총동창회 이름으로 ‘孝婦賞(효부상)’을 줬다.

뚱딴지같이 그런 생각을 한 제자들의 알토란 심지를 고마워했다. 그런데 어찌하랴! 효부상 받은 지 석 달 후인 8월8일 화장실에 세수 하러 간 어머니가 영 안 나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손녀딸이 문을 열어봤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엄마가 쓰러졌어요!” 다급한 비명을 냈다. 효부는 심장마비로 손쓸 새 없이 말 한마디 못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다. 55년의 짧은 인생을 뒤로한 채 하늘나라로 간 것이다.


<우필형 씨가 제자들에게 보내는 글>

장하다 제자들아!

재건학교 ‘동인’ 같은 작은 이야기가 모아 위대한 이 나라 조국 근대화 역사의 신화를 이루었다. 피와 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역사 속에 묻혀 버려서는 안 될 유산이다. ‘동인’은 문만 닫았을 뿐 우리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다. 이 나라가 부강하게 된 것은 ‘뜨거운 교육열’이 원동력이 되었다. 올해 나의 나이 90세다. 1925년생이다. 귀만 절벽일 뿐 신문도 읽는다. 정신도 생생하다. 다만 이런 긴 글을 쓰기에는 기력도 부족하고, 글 쓰는 재주도 없다. 동인 때 가르쳤던 제자가 있어, 제자의 첨삭지도를 받으며 제자와 함께 共著(공저)로 이 글을 맺는다.

스승과 제자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제자한테 배우는 입장이 되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1960~1970년대 깜깜 절벽 같은 아리랑 고개 넘던, 가난살이 시절 ‘밥 굶는 설움보다 더한 설움은 없다’, ‘가난과 시련은 미래의 위대한 사람을 만드는 하나의 필수과정이다.’ 1950년대에 태어난 가장 불우한 세대 제자들에게 “하면 된다”고 야학을 열었던 결과가 지금에 빛을 발하게 되었다. ‘행복에는 항상 아픔이 동반된다. 행복의 절반은 눈물이다.’ ‘가장 슬픈 것이 가장 아름다웠다.’ 출세한 제자도 있고, 부자가 된 제자도 있다. 자랑스럽다. 내 사랑하는 민들레꽃 같은 ‘동인’의 제자들아! ●

[ 2016-01-04, 19:0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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