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神’은 부정적인 사람에게 결코 행복한 末路(말로)를 주지 않는단다
[海士 나온 선장이 손자·손녀에게 들려주는 한국 현대사 (1)] 휴가 때 외삼촌과 대화해보니 “6·25는 南侵이 아니고 北侵이다”라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내가 이 고생하며 배를 타고 있는데, 겨우 공산주의 신봉자를 키우는가?”라며 그때의 懷疑와 허탈감은 너무나 컸었다.

李東權(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조갑제닷컴은 ‘광복 70주년 現代史 체험수기 현상모집’ 수상자들의 작품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열두 번 째 작품은 李東權 씨의 手記, ‘손자·손녀를 위해 쓴 育兒일기’입니다.
기사본문 이미지
李東權 씨




손녀를 위한 日記

‘나의 뱃생활’ 이야기는 2009년부터 쓰기 시작한 외손녀 ‘육아일기’에서 일부 발췌해 정리했다. 내가 세계를 순방하면서 보고 느꼈던 바를 현재 우리의 남북문제, 우리 사회의 문제점 등에 대해서도 일기 내용을 일부 보완해 후손들에게 남기기 위한 목적으로 쓴다.

육아일기를 쓰게 된 동기는 아래와 같다. 할아버지는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兩家(양가) 조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당시는 해방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너무나 어려운 시기여서 먹고 사는 일에 급급했다. 특히 우리집에는 두 삼촌네 식구들과 함께 살면서 가족이 17~18명에 달해 ‘育兒(육아)’란 개념 자체가 없었고, 자기 운명대로 자랐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의 재능이나 희망 같은 건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흔히들 그 시대의 생활상을 말해주듯, ‘발을 신발에 맞추며’ 살아왔었다. 그래서 너와 네 외사촌 오빠들을 생각하면서 너희들에게 뿌리를 알리는 한편 각자의 재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오랜 경륜을 쌓은 우리가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아이들은 자라면서 문화의 혜택을 많이 받아서인지 총명하고 早熟(조숙)하기는 하나, 자기중심적이다. 가족 및 공동체 의식과 자립심, 우리 민족에 대한 역사 인식 등에서 우려되는 점이 많다. 이런 문제는 결국 가정에서의 ‘人性(인성)교육’이 부족해 일어난다고 생각돼 네 육아 일기를 쓰려고 마음먹었다.


운동권에 빠진 엄마와 외삼촌

오늘은 외삼촌과 엄마 세대들의 대학 시절 학생운동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외삼촌은 서울대 공대 88학번인데, 당시는 군사정권에서 민주화 시대로 넘어오는 거의 막바지 단계로, 웬만한 대학생들은 학생운동을 할 때였다. 그때 나는 외항선을 타면서 이탈리아 ‘사모나’ 港(항)을 母港(모항)으로, 유럽·중동·리비아 등을 오갔다.

그런데 할머니가 전하기를 “외삼촌이 대학 입학 후 수시로 MT에 강제 차출돼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고 이념 교육을 받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학창 시절에 얌전히 공부만 하기보다 한 번쯤은 학생운동을 경험해 보는 것도 먼 인생을 살아가는 데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해방 직후 지식층 간 左右(좌우)대립 때의 유명한 교훈을 이야기해주었다. “20대 때 좌익운동 한번 못해보면 사나이로서 바보요, 그런데 30~40대 이후까지 이를 계속하면 더욱 바보다”

특히 이 학생운동은 자기 자신에게는 물론 국가와 민족에 대하여 폭력적‧파괴적으로 흘러서는 안 되고, 생산적·타협적이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붙였으며, 나는 아들을 믿는다고 하였다.


“6·25는 南侵이 아니고 北侵(?)”

그런데 내가 휴가 때 외삼촌과 대화해보니 “6·25는 南侵(남침)이 아니고 北侵(북침)이다”라는 것이다. 당시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고 황당하여 “이놈아 나는 열 살 때 6·25를 직접 겪은 사람이다. 동족끼리 아무 선전포고도 없이 갑자기 남침했다. 북침했다면 어떻게 며칠 만에 빨갱이들이 낙동강까지 점령했겠느냐?”고 6·25 전쟁의 실상을 이야기해주었으나 별로 먹히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내가 이 고생하며 배를 타고 있는데, 겨우 공산주의 신봉자를 키우는가?”라며 그때의 회의와 허탈감은 너무나 컸었다.

그 후 나는 공산주의에 관한 책을 구하여 공부하기도 했다. 나는 “일부 진보세력이 군사정권에 항거하여 민주화하려는 사회개혁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라고 확신했다. 이 상황에서 네 엄마가 다시 90학번으로 서울대 산업디자인학과에 들어갔고, 외삼촌은 공대 3학년이었다.

당시 학생운동은 NL과 PD로 양분돼 있었는데, 외삼촌은 서울대 PD의 대표였다. 네 엄마도 오빠를 따라 자연스럽게 PD 계열이 됐고, 나중에는 학과 회장도 하였다. 그때 외삼촌은 ‘박종철 사건’으로 치안국(경찰청) 앞에서 데모하다 며칠간 구류를 살고 나왔고, 할머니가 울면서 두부를 먹이기도 했다.


“코리아는 멀지 않아 일어서고, 소련은 얼마 못 갈 것”

나는 1980년대 중반 ‘해우프론티어’란 新造船(신조선)을 거제도 조선소에서 인수하여 이탈리아 西北(서북)의 小항구 ‘사보나’ 항에 인도한 바 있다. 이 배는 당시 320톤을 인양할 수 있는 최신 중장비선인데, 대우가 리비아 ‘벵가지 市’ 건설의 약 30억 달러 공사를 거의 끝내고 난 뒤, 공사에 투입된 장비 약 6000대를 중동 등지로 철수시키는 임무를 갖고 있었다.

기사본문 이미지
해우 프론티어號 전경


나는 이 배의 인수 선장으로서 많은 애착을 가졌다. 인수 초기에 정비 유지를 잘해야 배의 수명을 오래 유지할 수 있기에 신경을 많이 썼었다. 배는 통상 수명이 30년 정도인데 정비 노력에 따라 10년 이상은 더 운용할 수 있다. 배는 항구에서 언제나 화물 작업이 진행되고, 항해 중에는 계속되는 흔들림과 파도 때문에 정비 작업이 쉽지가 않다.

그래서 母港(모항)인 ‘사모나’에서 인부들이 작업 중 점심·저녁마다 각 두 시간을 이용해 정비 작업을 하도록 선원들과 합의했고, 이에 따른 특별 보너스도 지급했다. 그런데 이 소문이 항구 주변에 널리 퍼졌고 ‘한국 사람은 일벌레’라든가 “캡틴 리(Lee)가 선원들을 너무 혹사시킨다”는 등의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 당시 사보나 항은 港費(항비)가 저렴하여 소련 등 동유럽 배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가족을 대동하고 시내 구경이나 쇼핑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배를 효율적으로 정비하거나 운항 능률 향상 등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때 항구 부근의 이탈이아 사람들은 우리 선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매우 감동한 것 같았고, 자연히 동구권 배들과 비교가 됐다. 그러자 “코리아는 멀지 않아 일어설 것이고, 소련 등 동구권들은 얼마 못 갈 것이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 후 불과 몇 년도 안 돼 동구권이 붕괴됐다. 역시 여론은 현실을 잘 반영하는 것 같다.


海士 들어갔으나 한때 방황

기사본문 이미지
베링해에서의 필자

나는 집안 형편상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처음에는 軍 생활에 적응이 잘되지 않아 젊은 시절 한동안 방황한 바 있다. 결국 숙명은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흔히 그 시대 상황을 말해주듯 나도 ‘발을 신발에 맞추자’며 마음을 가다듬고 앞으로의 내 인생을 설계해 보면서 오랜 고심 끝에 스스로 지켜야 할 ‘생활신조’를 정하였다. ‘건전하게 살자, 최선을 다 하자, 인내하자’

이 생활신조는 나의 젊은 시절 하나의 길잡이가 되었고, 모든 행동은 나도 모르게 이에 부합되도록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평가할 때는 내 생활신조에 맞게 평가함을 많이 들었다.

이러한 생활신조를 정함에는 먼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한다. ‘자신’은 자신만이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의 성격상 장단점, 생활환경, 꿈과 희망 등이 고려돼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터무니없는 생활신조나 인생 목표를 설정하고는 나중에 運(운)을 탓하거나 세상을 비난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세상을 살다 보면 때로는 좌절이 따르고 그러면 인생 목표도 부득이 조정이 되겠지만, 생활신조는 그동안 살면서 나의 피와 살이 되었기 때문에 변할 수가 없다. 끝으로 내가 평소 가장 강조하고 싶은 말을 남기고자 한다.


천국과 지옥을 구분하려면 긍정적 시각 가져야

세상을 살아가는 데 긍정적인 시각으로 살아가느냐, 아니면 부정적인 시각으로 살아가느냐는 그 사람을 평가하는 가치 기준에서 매우 중요하다. 긍정적인 시각은 건전한 사고를 가져야만 가질 수 있고, 어떠한 사안에 대하여 ‘균형 있는 판단’이나 ‘正道(정도)’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점은 긍정적인 사람일수록 신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남들이 쉽게 접근 가능하나, 부정적이거나 매사에 삐딱한 사람은 나의 善意(선의)가 곡해 받을까봐 접근을 꺼리게 만들어서 결국 소외되거나 외로움을 자초하게 된다.

내가 75년을 살아오면서 느낀 바 매사 삐딱한 시각이 체질화된 사람은 어떤 계기로 한순간 화려함을 경험할지 모르지만, 결국 운명의 神은 이들에게 행복한 末路(말로)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주위에서 수없이 보아왔다.

이소야! 할아버지가 전 세계를 돌아보면서 느낀 결론은, 이 아름다운 세상을 네가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그야말로 천국이 될 것이고, 반면 종북좌파나 극렬 시위자처럼 부정적으로 삐딱하게 보게 되면 그야말로 지옥이 될 것이다. ‘긍정적인 시각’은 일반적으로 자라면서 가정에서의 人性 교육과 주위 환경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 자신의 수련에 의해 형성된다.

할아버지는 아빠·엄마·외삼촌에 대한 이념 논쟁 때문에 이렇게 쓰는 게 아니란다. 어른들의 성장 과정을 교훈적으로 쓰며, 앞으로 너희들에게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보기에는 아빠·엄마·외삼촌이 학창 시절에 젊은이로서 그 시대 상황에 걸맞는 이념적 방황과 깊은 고뇌를 한때 겪었으면서도, 결국 긍정적인 시각으로 자신의 길을 훌륭하게 걸어가고 있으므로 할아버지는 지금 기쁜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오늘은 내가 외항선을 타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일을 들려주마. 1990년대 중반에 인도 동부 벵골만 연안에 자리잡은 방글라데시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나라는 세계 문명의 한 발상지이며 인도의 어머니로 불리는 ‘갠지스 강’의 하구 삼각지에 자리잡은 나라이다. 면적은 한반도의 3분의 2 정도이나 인구는 1억9000만 명이다.


最貧國 방글라데시에서 겪은 일

이 나라는 해마다 벵골만을 덮치는 사이클론(Cyclone·인도양의 태풍) 때문에 때로는 수만에서 수십만의 인명피해를 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굶주림에 흉흉해 하던 시기였다. 세계에서 구호품을 보내는 때였는데, 당시 우리 배는 독일에서 제공하는 ‘구호 밀’을 네덜란드 ‘앤트워프’에서 싣고 이 나라 최대 항구인 ‘치타공’에 하역했다.

배는 화물倉(창)이 다섯 개로, 각 창에 인부 50여 명이 들어가 포대를 만들어 부두에 하역하는데, 인부들은 작업에는 별 관심이 없고 이상한 주머니를 미리 만들어 와서 밀을 훔쳐 넣고는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나가 知人(지인)에게 인계하는 게 주관심사였다.

이때 내가 선장실에서 내려다보니 일부 감독이 작업 부실한 인부들에게 무자비하게 후려치며 감독하기에 이를 제지시키곤 하였다. 그런데 배에서 부두로 하역 도중에 밀 일부가 흐르게 되고, 흙 속에 뒤섞여 있었다. 이를 여자들과 아이들이 다투어가며 바가지로 쓸어 모아 가는데, 반 이상이 흙이었다.

그중에 한 滿朔(만삭)인 젊은 여인이 두세 살 된 아기를 업고 4~5세 된 아이를 옆에 세워두고 이 흙이 섞인 밀을 쓰레받기로 열심히 쓸어 담는 것을 보고는, 나는 어떤 분노가 솟아올랐다. “이 나라 위정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굶주리게 하는가?” 마침 점심때라서 그 여인과 아이들을 데려다 밥을 먹이게 했다.

그 며칠 뒤에 비가 왔는데, 나는 계약상 화물을 젖게 할 수 없어서 작업을 중단시켰다. 그랬더니 그 지역 사령관이란 사람이 참모들과 와서는 비가 와도 상관없으니 계속 하역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화물을 깨끗한 상태로 인계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으므로 거부했더니, 사령관이 권총을 뽑아 나를 겨누며 “저기 밖에서 비를 맞으며 배급받으려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느냐? 지금 폭동이 일어날 지경이다”는 것이다. 나는 일등 항해사(화물담당)를 불러 “화물이 雨天(우천)으로 손상됐더라도 본선 측 책임이 없다”는 확인서를 받고는 작업을 계속시켰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에 보니 밤새 船首(선수) 繫留索(계류삭·hawser) 몇 가닥을 끊어 갔었다. 다행히 새벽 순찰자가 발견하여 조치했으나 자칫 强潮流(강조류)에 배가 떠밀릴 뻔했었다.

그 다음 航次(항차), 두 번째 치타공에 갔을 때이다. 우리는 강 한가운데에 정박하고 작업하였다. 우리는 前航(전항)에서 겪은 계류삭 절단 사건을 고려해 船首尾(선수미)에 도난 당직을 강화했는데, 저녁 늦게 船尾(선미) 아래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다. 보트로 확인해보니 도둑들은 이미 도망갔으나 배의 추진기 날개(Propeller)를 잘라가려 했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었다.

이 추진기는 銅(동)합성물로 날개 한 개가 사람 키 정도인데 이를 잘라가려 했던 것이다. 바로 신고했더니 지역사령부에서 방문하여 정중히 사과하였다. 그런데 얼마 전에도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 배추진기를 작동하도록 지시하여 그 도둑들을 죽였다고 한다. 도저히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 이 현대사회에 벌어지고 있었다.


태평양에서 만난 荒天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7~8년간 한국과 北美(북미) 간의 곡물을 수입하는 곡물선을 탈 때의 이야기다. 이 美洲(미주) 항로는 비행기와 마찬가지로 지구 표면을 최단 거리로 가는 ‘大圈航法(대권항법)’을 이용하는 관계상 주로 북태평양 항로를 이용하는데, 이 항로는 전 세계에서 거칠기로 소문이 나 있어 선원들이 가장 기피하는 항로이다.

우리는 통상 35~40일 간격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강 주변의 포틀랜드와 캐나다 밴쿠버 등 북미를 왕래하는데, 그때만 해도 기상관측 수단이 그렇게 발달되지 않아서 봄과 가을이면 매 항차에 태풍 등 荒天(황천·기상이 나빠 바다가 거칠어져 있는 상태)을 서너 개나 만나고, 특히 가을과 봄에는 시베리아에서 발달한 고기압의 영향으로 강력한 황천을 만난다. 그 위력이 태풍 이상일 때도 있다.

다만 늦봄 얼마간은 조용한 편이나 이때도 짙은 濃霧(농무)로 인해 아주 위험하다. 年中(연중) 조용한 날이 거의 없다. 강력한 황천을 만나면 대양 한가운데서 波浪(파랑) 때문에 속력을 올려 피하기도 어렵고, 특히 荒天 이동과 우리 배가 같은 방향으로 이동할 때는 우리 배를 덮칠 위험이 있으므로 더욱 위험하다.

한번은 거의 3일을 뜬 눈으로 보낸 일이 있다. 우리 뒤를 하루 정도 떨어져 따라오던 콘테이너선이 황천에 침몰했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는 흔들림 때문에 취사는 불가하고 빵과 건빵 등 비상식량으로 해결했다.

원래 콘테이너선은 주로 고가품을 싣고 다니면서 항구별 계획된 일정에 맞추려고 부득이 고속 이동하게 되고, 황천시 위험 부담이 크지만 영업 목적상 무리한 항해를 하게 된다. 이럴 경우 황천 操船(조선)은 선장이 직접 해야 한다. 때로는 대형 파도가 20m를 넘기기도 하는데, 약 200m 되는 선체를 때리면 그 파랑이 船橋(선교·대형선의 경우 20~30m 높이)를 뒤덮기도 하고 그 충격에 선체는 船首-중앙-船尾가 제각각 요동하며 진동한다.

기사본문 이미지
선내 휴게실에서 회식을 즐기며- (우측이 저자)


배가 금방이라도 절단될 것 같아 보인다. 이때 선원들은 불안에 떨며 선장 얼굴만 쳐다보게 되는데, 이럴 때 선장은 의연하고 침착한 모습으로 리더십을 발휘하여 황천 操船을 하여야 한다.

이 항로에서 수많은 배가 조난당한 바 있고, 우리 회사 배도 사고를 많이 당했다. 한번은 전임 선장이 캘리포니아 강 입구에서 도선사를 태우려고 선원 두 명이 舷側(현측)에 사다리를 설치하다가 큰 파도가 갑판을 덮쳐 실종된 사고가 있었다. 그때 배가 목포에 귀항했는데, 전임자는 도착하자마자 내려버렸고, 내가 후임자로 승선했다가 유족들에게 멱살 잡혀 살려내라며 큰 고역을 당한 바 있다. 이 사건으로 미국에서 황천 때는 導船士(도선사)가 헬리콥터로 승선하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金泳三과 金大中, 기독교와 불교 논쟁

이 문제는 종교·정치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배는 옛날 콜럼버스 시대부터 적도와 일보변경선(경도 180도)을 지날 때 용왕님께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적도祭(제)’를 지내는 오랜 전통이 있다. 그 취지는 옛날 미지의 태풍·암초 등에 대한 불안 때문에 선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화합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船橋(선교)에 돼지머리·떡·과일 등을 차려놓고 선장이 祭文(제문)을 읽으며 안전한 항해를 기원한다. 이러한 형식적인 절차가 끝나면 윷놀이·팔씨름·단체 줄다리기 등을 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기독교 신자인 통신장이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여 “절은 안 해도 좋으니 그냥 뒤에 서 있기만 하라”고 했으나 끝내 참석지 않았다. 불교 신자인 기관장이 “그냥 두십시오” 해서 통신장만 제외하고 계획된 행사를 하였다. 그런데 그 며칠 전 기관장과 통신장 간에 종교 문제로 한바탕 토론이 있었는데, 내가 “종교인은 中東(중동) 문제에서 보듯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주는 것이 세계 평화에 중요하다”면서 중재하였다.

그 후 불교 신자들은 그동안 주말 예배를 하지 않았는데, 기관장이 예배 신청을 해 와서 정식으로 허가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기독교 신자들만 매 주말에 선원 라운지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를 보았다. 그 이후 매 주말은 기독교 신자의 찬송가와 불교 신자의 법문 소리가 온 船內(선내)를 진동하였다. 그런데 마침 그때가 김영삼·김대중 씨의 大選 때여서 선호하는 후보에 대한 정치적 갈등이 심하던 때였다.

나는 선장으로서 船內에서 종교·정치적으로 너무 분파적인 갈등을 보이 것은 선내 화합에 좋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선내생활수칙’을 정해 공포하였다.

첫째: 정치·지역 이야기를 하지 말자
둘째: 종교 이야기를 하지 말자
셋째: 동료의 사생활 이야기를 하지 말자.

이 수칙은 상당한 효과를 보았고 특히 주말 예배 시는 예배 소리가 문 밖에까지 크게 들리지 않게 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 원칙은 지금 내가 관여하고 있는 몇 군데 모임에서도 주장하고 있는데,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 이런 문제는 정치·종교를 떠나서라도 지성인이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상식이라 할 수 있다. (계속)

[ 2016-01-05, 15:3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