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반도의 고려인, 중국서 만난 脫北 여인
海士 나온 선장이 손자·손녀에게 들려주는 한국 현대사 (끝)] 오랜 해상 생활을 통해 수많은 외국 문화를 접하면서 대체로 선진국일수록 엄숙하고 恨스러운 분위기보다는 명랑하며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李東權(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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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은 ‘광복 70주년 現代史 체험수기 현상모집’ 수상자들의 작품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열두 번 째 작품은 李東權 씨의 手記, ‘손자·손녀를 위해 쓴 育兒일기’입니다.

베링해의 한치 두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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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날네스 해협을 통과하며-

그 얼마 후 우리 배가 곡물을 滿載(만재)하고 귀국 항해 중 베링해(알래스카 캄차카)를 지나던 중 기관이 고장나 표류(Drifting)하면서 기관부 전원이 수리할 때다. 당시 겨울 파도가 심해 배가 좌우로 20~30도씩 흔들리고 있었다. 선원들이 황천 바다를 쳐다보며 불안해하고 있는데, 마침 큰 파도가 현측 난간(Bulkhead)을 넘어 대량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배가 반대로 기울 때 보니 팔뚝만한 크기의 한치 두 마리가 난간에 걸려 못 나가고 있었다.

얼른 붙잡아와 회를 만들어 먹고 기관실에도 보냈다. 농담이지만 통신장이 “배 수리 천천히 하고 한치를 계속 잡아먹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 “야! 네가 간부 선원으로 말이 되는 소리를 하느냐”고 호통을 쳤더니 슬그머니 내려가 버렸다.

우리는 항로에서 바다와 싸우는 것 외에도 ‘시차적응 문제’와 싸워야 했다. 통상 미주에서 화물적재 기간은 2~3일 정도이고 한국과 미주의 시차는 8~9시간인데, 낮과 밤이 뒤바뀌어서 조금 적응하려고 하면 출항해서 반대 시차에 적응해야 했다. 이외에도 곡물선은 각종 안전검사가 선장을 괴롭혔다.

특히 미국과 캐나다는 ‘갑’으로서 매우 엄격한 船艙(선창) 검사를 하는데, 선창 내 벌레, 쥐똥, 前항차 곡물 잔류물, 구석 철판에 녹슨 곳 등에 대해 고도의 등산 장비를 갖추고 구석구석 올라가 검사한다. 오물 한 점이라도 발견되면 불합격된다. 그 외에도 선내 위생상태, 油類(유류) 오염처리, 폐기물처리 조난 및 화재 대책 등 수많은 안전규칙을 일일이 까다롭게 검사하고 있다.

우리는 이에 대비해 약 보름간 편도 항해 중 웬만한 황천 중이라도 10m 이상의 줄사다리를 타고 흔들리면서 선창 정비 작업에 임해야 한다. 만약 이러한 검사에 불합격하면 재검사를 위해 2~3일이 지체되는데, 당시 배의 하루 운항 비용이 3000~5000만 원이었다. 주로 기름값이 차지하는데, 큰 배는 하루 30톤 이상을 소비한다.


“술 먹고 저녁 늦게 後갑판에 나가지 말라”

단 한 사람의 조그만 실수나 나태함으로도 배 전체는 물론 全 선원이 목숨을 잃을 수 있다. 나는 선원에게 뱃사람의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세심해야 한다”는 것을 수없이 강조했다. 만약 그렇게 할 자신이 없는 사람은 배에서 내려 다른 길로 가라고 설파하였다. 흔히들 사회 통념상 인생살이 최후의 보루로는 ‘뱃사람, 광부, 막노동꾼’ 등을 말하는데, 배 생활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뱃사람의 억압된 환경과 생활 때문에 선원들은 그 울분을 풀려고 상륙하면 술을 마시고 때로는 무절제하게 놀지만, 이런 사람일수록 배에서는 그냥 순박한 어린 양일 뿐이다. 특히 이런 사람일수록 오랜 배 생활로 인해 대부분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사연도 많아 혼자 끙끙 앓다가 가족과 사회로부터의 소외감 등을 느껴 술로 회포를 푸는 경우가 많다.

뱃사람에게는 하나의 불문율이 있다. “술 먹고 저녁 늦게 후갑판에 나가지 말라”는 것이다. 船尾(선미) 燈(등) 아래 프로펠러(추진기)에서 내뿜는 연두색 아이스크림 같은 물줄기를 쳐다보고 있노라면 어떤 恨(한)이 회오리치며 나도 모르게 빨려들면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배에서 행방불명이 되는 경우가 가끔 발생한다.
 

악몽

흔히들 수평선에 지는 바다의 일몰을 보며 詩興(시흥)을 느끼는 바다라 표현하고, 선원들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관광하고 낭만적인 생활로 보이지만, 그 험한 파도와 끊임없이 싸우고, 계속되는 고독과 시차적응, 운항 능률을 위한 고심 등을 어찌 필설로 다하겠는가. 특히 북태평양 항로는 荒天(황천)시 대피할 곳이 없기 때문에 최대한 속력을 낮춰 견뎌야 한다.

나는 이 항로를 7~8년 정기 운항했지만, 나중에는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이번에 귀국하면 “배를 그만둬야지. 차라리 시골에 들어가서 농사나 짓는 게 낫겠지!”하고 몇 번이나 다짐하곤 했으나 막상 귀국하여 할머니·엄마·외삼촌을 쳐다보면 그냥 또 말없이 돌아섰다. 나는 이렇게 “피할 수 없다”고 투덜거리며 술 한 잔 하고는 배로 향했다.

나는 64세 때 배를 마감했는데, 배를 내린 후 1~2년 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가끔씩 자다가 몽유병처럼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고, 할머니가 자다가 놀라서 내 가슴을 눌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동기생끼리 1~2박 정도의 원정 등산을 자주 했는데 그때도 내가 가끔씩 자다가 고함을 지르고 해 동기생들의 잠을 설치게 했다. 다들 나를 걱정해줬다. 아마 오랜 배 생활에서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가 갑자기 풀려서 오는 ‘생활 변화’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31년 無事故

나는 어떠한 사연으로 1983년 초에 해군을 떠나 외항선을 탔다. 나는 주로 대형잡화선(Bulk Carrier·2만~9만 톤)를 탔다. 이 화물선은 화물을 따라 다니게 되나, 高유가 때문에 화물을 하역하면, 가능한 가까운 항구에서 다음 화물을 수배하여 싣게 된다. 나의 외항선 생활 22년 중 全 세계의 나라는 가지 않는 곳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운항 특성 때문에 어떨 땐 지구를 한 방향으로 계속 이동하는데, 통상 지구를 두 바퀴 반 정도 돌면 대략 10개월이 지나며 휴가를 맞게 된다. 이럴 때 大沆(대항) 항해를 하게 되면 태풍 등 수많은 황천 속을 헤쳐 나가야 한다.

배의 堪航性(감항성·Seaworthiness)과 社益(사익), 화물 손상, 선원들의 士氣(사기) 등을 고려해 황천 항해를 최소로 단축해야 하기 때문에 그 결심에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회사의 어느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선장의 고유 권한으로 바로 그 선장의 ‘리더십’의 발로이다. 당시 범양상선(PAN OCEAN) 100여 명의 선장 중 海士 출신은 오직 나 혼자였고, 주로 노후선을 많이 탔기 때문에 더욱 어려움이 많았다. 나는 해군 함정을 포함해 31년의 뱃생활을 했으나 ‘無事故(무사고)’의 기록을 세웠다. 이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자부심’이다.

‘우크라이나’가 1991년 자유화된 2년 후에 동양 배로는 처음으로 이곳에 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는 이 나라의 두 항구에서 철제품을 滿載(만재)하여 사우디·중국 등에 운송했다. 우크라이나는 흑해 북방에 있는데, 면적이 한반도의 세 배에 달했지만 인구는 당시 약 4850만 명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체르노빌 피해자

첫 항구는 이 나라 중앙을 흐르는 드네프트강 중간쯤에 있는 드네프트 페트롭스크 港(항)으로, 인구 110만 명의 최대 공업단지였다. 소련 때는 흑해함대의 母기지였다. 당시도 대형 전함들이 지난 위용을 자랑하듯 괴물 모양으로 군데군데 정박해 있었다. 특히 6·25전쟁 때 우리가 압록강까지 진군했을 때, 바로 이곳에서 소련 비행기가 출격하여 폭격을 가하기도 했다.

입항했을 당시, 입항 수속하는 관리는 대부분 여자였는데 남자는 대부분 국방 및 건설 분야에 차출되고 후방 업무는 대체로 여자들의 몫인 것 같았다. 이 같은 현상은 舊 공산권 국가에서 노동 인력의 극대화를 위한 정책으로 대부분 비슷한 현상이었다. 동구권 여성들은 생활력이 강하고 활발해 보였으며 동양권에 비해 ‘남녀평등’도 훨씬 확립된 것 같았다.

그때 항만청에서 여자 컴퓨터 팀장이 당시 신형인 우리 배의 컴퓨터(5대)를 견학하고 싶다기에 소개했는데, 자기 항만청에는 전부 11대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튿날 팀장이 보드카 한 병을 들고 와서는 사례를 하면서 6~7세 된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비쩍 말랐고 계속 기침을 하면서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혹시나 좋은 약이라도 있으면 얻고 싶어 했으나 별다른 약이 없어서 기침약 정도를 주었다.

그 후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1986년에 발생한 그 유명한 ‘체르노빌 원전 누출 사고’의 피해자가 6700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시 태어난 아이들이 위와 비슷한 증상을 보였고, 원전 누출이 벌어진 체르노빌도 이곳에서 불과 얼마 안 되는 거리임을 알게 됐다.


크림반도에서 고려인을 만나다

다음 항구는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 港(항)이었다. 이곳에서 야채와 과일을 시장에서 구입하다가 고려인 부인을 만났다, 우리말을 할 줄 알아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한 핏줄이라는 동족 의식이 친밀감을 주었다. 그런데 출항 며칠 전에 부인의 딸이 결혼한다기에 축하하러 갔었는데,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고, 집 마당에서 하는 초라한 결혼식이었다. 우리 옛 조상들이 하는 혼례와 많이 닮았는데, 닭·과일 등을 상 위에 올려놓고 신랑·신부가 마주 보며 맞절을 한 후 소련말로 혼인 선언을 하는 것 같았다. 신랑은 외관상 고려인 같았으나 터키와 고려인 2세라 하였고 식장에는 고려인이 몇 사람 보였으나 초라해보였다.

우리는 이들 고려인들을 보면서 감회에 휩싸였다. 나는 이들을 보며 ‘國力(국력)과 안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뼛속 깊이 스며들었다. 우리는 언제인가 정부 차원에서 이들에게도 조국이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어루만져주는 정책을 폈으면 한다. 특히 우리로서는 조국이 발전하면 이들에게도 자긍심을 심어줄 것이고, 그들 사회에서도 조국의 발전에 힘입어 위상이 더욱 높아지며 더욱 분발할 것이다.

당시 우리 배는 그리스 회사에서 傭船(용선·CHARTER)을 받았는데, 이 회사의 社主가 바로 오나시스였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오스왈드에게 저격당한 후 그 영부인 재클린 여사가 오나시스와 재혼하여 세기의 화제를 모았던 그 사람이다.


“캡틴 리를 다시 보내달라”

우리는 이곳에서 철제품을 만재(약 3만5000톤)하고 출항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일등항해사의 보고에 따르면, 화주 측에서 보낸 화물량을 실어보니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약 400톤 정도가 초과돼 부득이 우리는 나머지 분에 대하여 적재를 거부했다. 그러나 貨主(화주) 측에서는 이 화물이 설비 화물로써 세트 전부를 일괄 실어 보내야 할 처지였다. 그러자 화주 측 부회장이란 분이 즉각 전세 비행기로 도착한 후 잔여 화물을 실어주도록 나와 일등항해사를 계속 설득했다. 그러나 우리는 로드라인(LoadLine·국제만재흘수선) 초과 문제를 고려하여 계속 거부했다. 그러자 대리점을 통해 타협(봉투)을 제의해 왔다.

이때 일등항해사는 자신의 책임 때문인지 타협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다음 항구인 사우디까지 기름·청수·여분의 평형수(ballast) 등을 조정하면 나머지 400톤 정도는 수용 가능하나 단지 출항 시 ‘흘수’ 요건 상의 문제였다. 그러나 나로서는 국가 대 국가, 특히 과거 공산권 종주국과이 자존심과 명예 문제였다. 나는 저녁 내내 고민하다가 결국 어려운 결심을 하였다. “우리는 명예를 지키자”면서 조건 없이 잔류 화물을 전부 실었다. 특히 우리 배가 또 이 회사에 용선될 가능성이 많으므로 이를 고려해야 된다면서 오히려 일등항해사를 설득시켰다.

한번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때였다. 그리스 용선주 측 대리점에서 승선하여 두툼한 봉투를 주면서 “이 돈은 캡틴(선장)이 알아서 써라. 수신 사인도 회사에 보고할 필요가 없다”면서 그냥 놓고는 도망가듯 가버렸다. 나는 개봉도 않고 일등항해사와 기관장을 불러 처리하게 했다. 그런데 나는 이 항차가 끝나고 집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데,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그리고 용선주 측에서 “캡틴 리를 다시 그 배로 보내달라”면서 “그래야 용선계약을 다시 하겠다”는 것이다.

내가 내린 후 젊은 선장이 인수받았는데, 용선주 측과 다툼이 많았고 특히 배의 운항과 관련해 선장이 약간만 융통성을 발휘해 주면 용선주 측에 상당한 영업 이익을 줄 수 있는데도 양보하지 않아서 상당히 불편한 관계였다고 한다. 나는 가끔 선원들에게 용선주에 대한 우리의 자세로 “용선주에 잘해야 또 우리 배를 빌려줘서 회사 영업 이익을 올릴 수 있고, 우리도 그만큼 이익이 돌아온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나는 휴가를 마치고 다시 이 배를 탔고 다시 그리스 회사에 용선되었다. 돌이켜보면 이때가 나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


수에즈 운하 지날 때면 식욕도 잃어

나는 中東을 수없이 방문했고, 중동 대부분의 나라를 가보았다. 중동에 가려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데, 그전에는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지나 동서양의 해상교역이 이뤄졌다. 수에즈 운하 덕분에 시간과 비용 등에서 획기적인 효과를 보았고 세계의 역사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수에즈 운하는 길이가 약 160km이나 이를 통과하는 데는 18~20시간이 소요된다. 이를 통과하려면 나는 며칠 전부터 식욕을 잃게 된다. 導船士(도선사) 등 관리들이 수십 명이 드나들며 안전 검사 등을 핑계로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특히 도선사(Pilot)의 경우 4~5명이 교대로 배를 導船(도선) 하는데, 원래 세계도선법상 ‘도선사’란 그 항구의 지리적 특성을 잘 아는 자로서 설령 실수로 배가 사고가 나더라도 그 책임은 ‘선장의 감독 不철저’로 규정돼 있다.

따라서 선장은 도선사에게 배가 안전 운항하도록 접대, 편의 등의 매우 신경을 쓰며 최대한 협조해야 한다. 이러한 선장의 약점을 이곳 도선사들은 잘 알기 때문에 선장을 괴롭혀서 최대한의 접대와 편의를 받으려고 한다.


8년 만에 다시 만난 북한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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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안에서 선원들과 망중한을 즐기는 필자

뱃생활 중 선원들이 가장 선호하는 식품이 미국산 소고기이다. 특히 LA갈비를 좋아한다. 나는 미국에 입항하면 5~6개월분씩 사들여 비축하곤 했다. 나는 미국과 캐나다를 수없이 다녔지만, 그곳 농장의 그 광활한 초원 위에서 아무 스트레스 없이 평화롭게 풀을 뜯는 소들을 보았다. 이런 소들은 대체로 기름기가 적고 육질은 다소 질기겠지만, 영양 면이나 건강 면에서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미국산 소고기는 촛불 시위 이전에도 우리 식탁에서 대유행이었고, 누구나 미국에 가면 미국산 소고기를 거리낌 없이 먹어왔다.

우리 배는 1990년대 중반 중국 남부 黃浦(황푸)에 들어갔다. 이곳은 홍콩과 마카오 사이를 강을 따라 3~4시간 들어가는데, 그 옆에는 중국 남부의 최대 도시인 廣州(광저우)와 深圳(심천)이 있었다. 이때가 김일성이 사망한 지 수개월 후인데, 여기서 우리는 부식 구입 및 관광 안내를 맡은 두 여인을 만났다. 이들은 북한 외화벌이 꾼이었다. 한 여인은 30대 후반으로 여기 나온 지 5~6년 됐다고 하고, 젊은 여인은 갓 서른 정도로 1년 정도 됐다는데, 나이 많은 여인이 젊은 여인에게 이곳 생활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하루는 이 여인들의 안내로 시내 관광을 하는데, 우리 젊은 士官(사관)들과 김일성·김정일 그리고 이북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그러자 처음에는 두둔하는 척하다가 자기들 위에는 감시조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므로 내가 그런 문제는 서로에게 실례라며 중단시켰다. 그런데 젊은 여인이 바로 한 달 전에 이북을 다녀왔다는데, 당시 북한은 홍수·기근 등으로 민생이 극도로 악화하여 사상자가 수십만 명이 발생하던 ‘고난의 행군’ 때이다. 가면서 쌀과 생필품을 많이 가져갔으나 이웃에 대부분 나눠주고는 자기 부모님에게는 미국 달러 몇 푼만 쥐어주고 왔다면서 이북의 비참한 실상을 말하며 눈물을 글썽이며 우리 선원들의 모습을 부러워했다.

8년 후 또 이곳을 갔는데, 그 나이 많았던 여인이 또 우리 배를 찾아왔었다. 아마 40대 중반일 텐데, 60대의 할머니처럼 나이 들어 보였다. 젊은 여인의 안부를 물었더니 이북에서 호출돼 들어갔다고 하며 그때야 자신은 ‘탈북자’로 여기에 남았다고 밝혔다. 자세한 사연은 알 수 없으나 그동안 많은 변화와 고생을 한 흔적이 얼굴에서 보였고, 정말 동족으로서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불가리아 교민회장의 개인史

한번은 소련이 붕괴한 직후인데, 소련 극동함대의 軍事 기지인 ‘나호드카’에 갔을 때다. 당시 생필품이 부족해 계란을 사기 위해 수백 미터나 줄을 서던 때였다. 입항 후 여자 식품 검역관이 우리 식품 창고를 보더니 너무 호화로운 식품이라며 아주 부러워했다. 특히 커피를 보더니 그 앞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두 봉지를 주었더니 돌아서 속옷 안에다 넣고는 얼굴이 빨개졌다. 내가 웃으며 어깨를 토닥여줬다.

이곳에는 이북이 러시아와 합작으로 ‘대동강’이란 큰 음식점을 운영했는데, 러시아는 건물만 제공하고 운영은 이북에서 재료를 直送(직송)한다고 했다. 女종업원도 10여 명 보였다. 총지배인은 김일성대학 출신이라며 풍채가 아주 좋았고, 가격이 저렴해 당시 3~4명이 30~40불을 내면 고급 요리와 술을 실컷 먹을 수 있었고, 저녁에는 안내자를 배에 보내기도 하였다.

1990년대 초반 흑해 서편에 있는 불가리아에서의 일이다. 우리는 이 나라 최대 항구인 볼가스에 입항했다. 이때 수화주 측 대리점으로 한국 사람이 왔었는데, 김○○이라는 탈북자였다. 당시 불가리아의 교민은 약 80명이었는데 교민회장인 이 탈북자는 김일성대학을 다니다 불가리아로 유학을 왔었고, 유학 중 불가리아 여학생과 연애를 했는데, 여자가 임신했다. 그러자 그 사실이 북한에 알려져 북한으로 압송되던 중 탈출하여 다시 불가리아로 돌아왔다고 한다. 당시 장인이 유력 인사여서 은밀히 숨어서 은둔 생활로 보냈다고 한다.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이 분도 자유를 얻어 교민회장까지 맡고 있었다.


大望을 가져라!

1965년부터 약 10년간 연인원 32만 명이 월남에 파병됐다. 나도 최초 파병 때 LST(Landing Ship Tank·상륙 작전용 함정) 갑판사관으로 1년간 파병된 바 있다. 월남 파병은 우리 경제에 60억 달러의 기여 효과가 있었다고 분석되고 있다. 선원들의 해외 진출도 활발했다. 1960년대부터 해외로 나간 우리 선원들이 1988년 엔 4만2000명 정도로 불어났다. 이들이 송금한 돈이 4억7000만 달러에 달했다. 중동 근로자 역시 연인원 250만 명에 달한다. 월남엔 군인 외에 근로자들도 많이 나갔고 戰後(전후) 그들이 세계로 퍼져나가 ‘글로벌 코리언’이 되었다.

나는 오랜 해상 생활을 통해 수많은 외국 문화를 접하면서 대체로 선진국일수록 엄숙하고 恨스러운 분위기보다는 명랑하며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1983년 초 이탈리아에 처음 가서 유적·유물을 보면서 그 수준과 규모에 너무나 놀라 나의 감성체계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오늘날 이들 후손은 조상 덕분에 관광수입 등으로 ‘恨(한)’을 모르고 밝고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들은 선조들에 대하여 절대적인 신뢰와 긍지를 가지면서 보수적인 경향이 많았다. 우리 대리점주 중에는 자기 할아버지가 쓰던 줄 달린 주머니 시계를 찬 사람도 있었다. 1940년대에 만든 차를 자랑스럽게 몰고 다녔다.

역사는 영원한 强者(강자)도 弱者(약자)도 없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우리 후손들아 大望(대망)을 가져라. 이젠 너희가 세계의 주역으로 나설 때가 됐다! (끝)

[ 2016-01-06, 17:4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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