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피해 必死의 ‘서울 탈출’
[어린 나이에 전쟁 겪고, 派獨 간호사 생활을 한 여성의 手記 (1)] 엄마는 고생 끝에 기차역에 도착했는데, 도와줄 남편도, 동생도 없어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나를 기차 창문으로 먼저 밀어 넣고 놓칠까 봐 죽을 힘을 다해 기차를 탔다고 한다. 몸 하나 꼼짝달싹할 수도 없고 여기저기서 끼여 죽는다고 아우성이 들렸다.

高永淑(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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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은 ‘광복 70주년 現代史 체험수기 현상모집’ 수상자들의 작품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열세 번 째 작품은 高永淑 씨의 手記, ‘어린 나이에 6·25를 겪고 派獨 간호사 생활을 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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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永淑 씨




행복했던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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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결혼사진

1945년 6월 부모님은 인왕산이 뒤로 보이는 서울 종로구 고풍스러운 동네에서 친인척과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지금은 모두 돌아가셨지만 부모님은 이웃해 살며 늦은 나이에 인사동 큰 절에서 新式(신식) 결혼식을 올리셨다.

신부는 하얀 한복 저고리 치마에 가슴에 난초꽃을 한 아름 안으셨고, 너울(면사포)을 발아래까지 드리우신 모습의 사진은 지금 보아도 어색함 없이 멋져 보였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머리 모양으로 까까머리에 동그란 안경에 연미복을 입고 가족사진을 찍으셨다. 결혼식 날에도 하늘에는 쌕쌕이(B-29)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머리 위를 요란스럽게 날아다녀 하객들도 엎드려 있다가 다시 일어나 사진 촬영을 했다고 한다.

여름날 들마루(평상의 경상도 방언)에서 들려주셨던 이야기는 신부가 미용실에서 화장하고 나오니 새 신랑이 계산했다고 해 “유행을 따르는 신식 사람들”이라고들 했단다. 그 시절 어머니는 흰 저고리 발목까지 올라오는 검정 치마에 납작 구두를 신고 친구들과 화신백화점으로, 봄날엔 남산으로, 여름엔 뚝섬으로 놀러 다니셨다고 했다. 일본 사람들과 섞여 함께 살다 보니 의식주 생활에도 변화가 많았을 것이다.

부모님 忌日(기일) 날 비행기로 기차로 각지에서 모인 우리 육남매는 옛날 살던 집 앞에서 더 늙기 전에 흰 머리카락을 날리며 추억 사진 한 장을 찍어 나눠 가졌다. 광복 후 일본인들이 쫓겨가고 고즈넉한 마을에도 아들, 딸 낳고 어른 봉양하며 평화롭게 살아들 가는 잔잔하고 소박한 일상이었다. ‘당크(일본식 바지)’ 바지에 목이 긴 가죽 구두 장식 소리는 멀리서도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심을 알렸다고 한다.


완장 찬 지방 빨갱이가 아버지를 돕다

행복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즈음 6·25전쟁이 터져 서울 시민들은 피난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라디오에 귀 기울이며 술렁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체면을 중시하고 우물물을 함께 먹으며 오순도순 살던 이웃이 돌변하여 피도 눈물도 없이 팔에 완장을 두르고 악마 같은 모습으로 돌아다녔다. 어머니 말씀은 어느 사람이 흰 까마귀이고 검은 까마귀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아녀자들은 아이들을 안고 캄캄한 방공호에서 불안에 떨며 지냈고, 이유도 모른 채 사람들을 끌고 나갈 때는 새파랗게 질려 무서웠다고 했다. 아이들 울음소리가 굴속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아버지는 용두동에서 목재소(재제소)를 운영하셨는데, 마을 사람들이 내려오면 남녀노소 누구나 국밥도 함께 먹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랑방이었다고 하셨다.

다정한 아버지는 늦게 태어난 나를 데리고 紫霞門(자하문) 밖 능금을 자루에 가득 담아 내 손을 잡고 내려올 때였다. 빨리들 학교 마당에 모이라고 닦달을 해 그곳에 가니 많은 남자가 감시를 받으며 줄을 서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배고프다고 집에 가자고 보챘고, 국밥을 함께 먹었던 동네 아우가 지방 빨갱이가 되어 완장을 두르고 있었다. 빨갱이들은 절대로 예외가 없는데, “형님, 이 남자들 전쟁터에 의용군으로 끌려갑니다” 하면서 증명서 한 장을 만들어 줬고 “동무, 아이를 집에 두고 오라”고 명령하면서 이곳을 빠져나가면 멀리 도망가라고 일러줬다. 아버지는 그 길로 숨어 도망다녔다.

훗날 紫門 밖 능금 자루와 맏딸 때문에 살았다고 자하문 고갯마루 쌀가게 친구와 이야기를 하셨다. 하나밖에 없는 삼촌은 휴가를 보내고 계셨다. 군인들은 방송을 듣는 즉시 부대로 귀대하라는 명령을 받고는 혼담이 오가던 처자와 형님 가족을 남겨두고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떠난 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삼촌이 휴가 오시면 23년 만에 태어난 조카를 무척 귀여워했다. 강냉이를 다른 사람들이 먹을까 봐 감춰두고 조금씩 주셨다고 한다. 마당 넓은 안채로 들어오면 사시사철 피는 꽃들과 담벼락에는 봄에 피는 개나리가 있었고, 여름밤 평상에 둘러앉아 봉숭아 물을 들이고 사대문 안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모든 것이 정들고 익숙한 수채화 그림 같은 마을을 두고 피란을 떠나야 할 일이 더 시급했다.

피난길에 어린 조카를 버린 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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派獨 간호사 시절 자전거를 타며 망중한을 즐기던 필자

어른들은 《정감록》이란 책의 秘訣(비결)을 믿고 전쟁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많은 사람이 끌려가고 잡혀가고 사라졌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방공호 속에 숨어, 먹지도 씻지도 못한 사람들은 불안하고 숨이 막혔다고 한다.

중공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피란길에 올랐다. 친인척 중 한 팀은 충북 보은 쪽으로, 다른 팀은 경북 김천으로 길을 잡고 떠나기로 약속했다. 한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강철교는 폭파되어 끊겼고, 한꺼번에 밀려온 피란 인파와 자동차, 우마차가 뒤엉켜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었다.

울면서 본 영화 ‘국제시장’의 비참한 흥남철수와 같은 ‘서울 탈출’이었을 것이다.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는 사람들과 조급한 마음에 드럼통을 타고 강을 건너다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눈뜨고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서울 여자 이모는 일본 징용에 끌려가 고생하다 살아 돌아온 잘 생긴 부산 남자한테 시집을 갔는데, 평소 생활은 선비인데, 술을 마시면 울면서 가족을 괴롭혀 아들을 두고 혼자 서울 친정에 왔었다. 전쟁이 터지니 급한 마음에 언니는 가족을 남겨둔 채 男裝(남장)을 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훗날 아버지는 처제를 “저승길 가다가 만나도 안 반갑다”고 하시면서 언니와 어린 조카를 두고 혼자 살겠다고 부산으로 먼저 갔느냐고 두고두고 곱씹어 말씀하셔 우리에게도 傳受(전수)됐다.

엄마는 고생 끝에 기차역에 도착했는데, 도와줄 남편도, 동생도 없어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나를 기차 창문으로 먼저 밀어 넣고 놓칠까 봐 죽을 힘을 다해 기차를 탔다고 한다. 몸 하나 꼼짝달싹할 수도 없고 여기저기서 끼여 죽는다고 아우성이 들렸다. 젖은 기저귀는 허리에 걸어 말려 다시 사용하니 엉덩이 발진은 말할 것도 없고, 감기가 들어 열이 나도 살면 살고 죽으면 죽고 함께 있는 것만이라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기차 꼭대기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 엄마 손을 놓쳐 울부짖는 아이들, 철도가에 버려진 아이들, ‘천태만상’의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고 한다. 넋을 잃고 쳐다볼 수밖에 없고 기차는 계속 달렸다고 한다.

힘들었지만 부모님과 함께 해서 행복

우리 세 모녀는 목적지 부산까지 못 가고 먼 친척이 살고 있다는 경상도 어느 마을에 내렸다. ‘살아있는 입에 거미줄 치겠냐. 집도 절도 없는 곳에 내려 살았는데, 난 어려서 전혀 기억에도 없지만 어떻게 살았는지 상상할 수가 없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쫓기고 숨어다니면서 품 속에 가족사진과 시민증을 꼭 챙기셨다고 한다. 우리 육남매는 작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릴 적 추억을 USB에 담아 나눠 가졌다. 아버지는 배고픔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 生死(생사)가 걱정이었지만 서로들 살아서 만나기만을 바랐다고 한다. 꽁꽁 얼어버린 한강을 건널 땐 미끄러지지 않게 신발에 새끼줄을 묶어 건넜고 흑석동에 도착하니 피란을 떠나 동네가 텅 비었다고 했다.

먹을 것을 찾아다녔고 두꺼운 겨울옷을 뒤져 끼어 입고 새우잠을 자며 발이 불어터지도록 걸어서 南으로 南으로 내려와 가족과 극적으로 합류했다. 철없는 우리는 행복했지만, 부모님은 하루하루 삶의 무게가 얼마나 혹독했을까! 정든 이웃도 손때 묻은 세간도 논도 밭도 없는 농촌생활을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살 길을 열심히 찾으셨다.

누가 나보고 다시 태어나라고 한다면 손사래 치면서 인생살이 한 번으로 족하다고 단호히 말하고 싶다. 아버지가 불린 메주콩을 맷돌에 갈아 콩물을 종이 위에 문질러 콩기름을 먹이면 노란 장판색이 나왔다. 부모님이 함께 계셔 나는 행복했다. 동생이 태어나면 엄마의 몸조리는 아버지와 맏딸인 내가 도왔다. 아버지는 미역국도 잘 끓이고 몸이 약한 어머니를 위해 집안일을 많이 도와줬다. 남자가 포대기에 아기를 업는다고 흉을 보기도 했다.

전쟁이 멈추고 의사도 약도 귀한 시절 엄마는 빈혈이 심했다. 싱싱한 소 간을 참기름에 소금을 뿌려 입을 막아가며 삼키셨다. 소고기는 귀하기도 하고 비싸서 자주 먹을 수 없고 대신 토끼고기를 먹었는데, 닭고기처럼 담백하고 맛있다. 그 맛을 잊지는 못하지만, 지금은 먹을 일이 없다. 엄마가 ‘토사곽란’이라도 일어나면 한밤중에 병원으로 달려가 의사 선생님을 모셔 오기도 했다. 그땐 의사 선생님들이 왕진을 다니셨다.


삼촌의 戰死

우리집에도 삼촌이 戰死(전사)했다는 비보가 날아왔다. 아버지의 통곡 소리는 가슴이 찢어졌고 숨이 막혔다. 삼촌의 죽음은 가족의 슬픔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6사단 보병인 삼촌은 北進(북진)을 성공적으로 했는데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하면서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38선 어디쯤 산골짜기에서 굶어 돌아가셨다고 同苦同樂(동고동락)했던 전우가 멀리 피란지까지 찾아와서 말해 주었다.

아버지는 꺼억꺼억 또 우셨다. 어린 우리도 함께 울었다. 삼촌은 실종자가 아닌 전사자로 확인돼 국군묘지 지하 位牌室(위패실)에 계신다. 내 나이 70이 되어도 삼촌이 그립고 자랑스럽다. 6·6일 현충일 위패실엔 꽃다발이 발목까지 올라와 지려 밟고 가야 한다. 우리집과 같은 사연을 가진 가족들이 많은가 보다. 부모님 살아생전에는 현충일 날 밥을 수북이 떠 놓으시고 눈물을 흘리신다.

어린 시절 早失父母(조실부모)하고 형제가 서로 의지하며 살다가 전쟁터에서 굶어 죽어 가면서 얼마나 형을 보고 싶어 했을까! 두 번 다시 있어서도 안 되는 ‘민족상잔’의 비극이고 아픔이다. 6월이 되면 가요무대에서 들려주던 ‘비목’, ‘전선야곡’, ‘전선편지’를 들으면 애잔함이 밀려온다. (계속)

[ 2016-01-07, 18:0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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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건     2016-01-07 오후 11:57
이런 비극을 만든 김일성 부자세습을 빨리 종식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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