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롭고 풍요로웠지만 검소했던 독일 생활
[어린 나이에 전쟁 겪고, 派獨 간호사 생활을 한 여성의 手記 (끝)] 40년 前 독일에서 살다가 한국 올 때 수영장과 문화센터를 갖고 오고 싶었는데 이젠 독일이 부럽지 않다. 역동하는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국가에 감사한다.

高永淑(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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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은 ‘광복 70주년 現代史 체험수기 현상모집’ 수상자들의 작품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열세 번 째 작품은 高永淑 씨의 手記, ‘어린 나이에 6·25를 겪고 派獨 간호사 생활을 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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派獨 간호사 시절의 필자

대구로 공부하러 가다

겨울밤 공부하려고 하면 찾아오는 불청객인 피난 후유증인 발의 凍傷(동상) 때문에 발가락이 붓고 가려워 고생했다. 민간요법으로 마늘대를 삶아 발을 담그고 산배(돌배)를 삶아 찜질도 했다. 어느 날 깨끗이 나았다. 기나긴 겨울밤에는 군불 땐 온돌방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입담 좋은 서울 양반 아버지가 옛날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으셨다. 가을에 잡아서 말려둔 메뚜기 볶음도 나오고 얼음 동동 동치미 국물도 마시며 정담도 나눴다.

1967년쯤 나는 종교단체의 도움을 받아 대구로 공부하러 내려왔다. 학비 걱정, 숙식 걱정 없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맏이로서 내가 집을 떠나면 동생들이 안 될 것 같은 책임이 나에게 항상 있었다.

 부모님도 타향살이 18년 만에 살던 곳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아침 새벽, 시 외곽 과수원에서 사과를 팔기 위해 시장으로 들어오는 아스팔트 길 위 소달구지 발굽 소리가 탈카닥 들리면 시계가 귀한 시절 새벽 시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참 옛날이다. 공부는 마음 놓고 했지만, 친구들과 여유롭게 지낼 시간은 없었다. 방학 때도 일을 했다.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병원 모퉁이에는 피(혈액)를 사는 곳이 있었다. 잘 먹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 몸 속 피를 팔기 위해 아침 일찍 줄을 서 기다렸다. 나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민망하고 불쌍한 마음에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농촌에는 보따리상들이 긴 머리카락도 사들이러 다녔다.

나는 졸업과 동시에 자격시험을 봤고, 서울 집에 돌아왔다. 부모님은 年老(연로)하셨고 동생들은 한창 공부를 했다. 등록금 버스표까지 챙겨야 할 시기였다. 서울엔 인구가 많아 대구와 달리 출근 시간에 만원 버스 속으로 손님을 밀어 넣는 ‘푸시맨(Push Man)’이란 직업도 있었다. 빽빽한 버스를 타고 서서 출근들을 했다. 중구에서 동작구 집까지 한강 다리를 걸어가 건너며 퇴근할 때도 있었다. 처음 직장에서 인사할 때 서울 출생이라고 했는데, 경상도 말씨에 결혼도 안 한 미혼인 내가 멋도 안 부리고 생필품을 사는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들 여겼다고 한다. 독일로 떠나기 전 동료들에게 식사 대접을 우리 집에서 했는데 그제야 이해들을 했다. 동생들이 잘생겼다고 덕담도 했다.


독일 온 지 6개월 만에 피부병 사라져

1963년부터 1970년대는 독일로 일하러 갈 광부, 간호사를 모집했다. 직장 동료들도 모이면 독일 이야기였다. 전쟁 때 태어나 나처럼 옮겨 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한 사람도 그 시절 드물 것이다. 독일로 가기 위해 시험도 치고 신체검사도 해야 하는데 몸무게가 살짝 부족해 돌멩이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통과했다.

훈련 기간 동안 獨語(독어) 공부도 하고 나라 사랑도 간직하며 독일 문화도 익혔다. 어릴 적 독일 신부님, 수녀님한테 사랑받았기에 낯설지 않았고, 고등학교 때 독어를 선택했기에 왠지 친숙했다.

1973년 봄 우리 일행들은 독일 국제공항 프랑크푸르트에 내려 각자 근무지로 이동했다. 근무지로 오는 동안 날씨가 개었다가 흐렸다가 비가 왔다. 셀 수 없이 변덕을 부렸다. 유럽날씨답다. 비가 내리는 창밖을 보니 괜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가 잘 살았다면 머나먼 이곳 낯설고 물설고 말도 안 통하는 독일에 일하러 왔겠는가! 생각하니 우울도 했고 처량하기도 했다. 그래도 내 인생에 좋은 기회로 삼았다. 나의 근무지는 북쪽 눈이 많이 내리는 스키 고장이었고, 아름다운 휴양지 강원도 같은 곳이었다. 크리스마스 카드 속 그림 같은 마을이었다.

지역 신문에는 예쁘고 기술이 뛰어나고 성실하고 친절한 세 명의 간호사가 우리 고장에도 왔다고 환영 기사와 함께 사진도 실어 주었다. 잘 사는 독일답게 깨끗하고 1인 1실, 냉온수가 나오는 샤워 시설에 공동 냉장고, 드럼 세탁기室이 있었다. 그때도 독일은 사람이 오면 불이 켜지고 없을 땐 꺼지는 자동 전기 절약형 시설이 있었다.

귀한 고기와 소시지는 식탁에 자주 올랐고, 美製(미제)로만 구경하던 잼, 빵은 말할 것도 없었다. 포장이 예쁜 유제품은 고급스러워 먹기도 아까웠다. 나에겐 어릴 적부터 따라다니던 피부병이 6개월 만에 싹 없어졌다. 인종차별도 있었지만, 대화가 익숙해지면서 불편을 못 느꼈다.

근무시간 분담은 독일사람답게 철저했고 다양한 혜택과 보험 가입은 근무하는 동안 도움이 많이 됐다. 우리를 통역해준 분은 광부 생활이 끝나고 크라우스탈 공대에서 공부하고 있던 키가 자그마한 양 선생님이었다. 동포로서 친절하게 알뜰히 챙겨주셨다. 세월이 흐른 지금 만나 밥 한 끼 대접하고 싶어도 만날 길이 없다. 만나 뵙고 싶다. 그때 독일은 경제 부흥이 한창 일어날 때라 노동력이 많이 필요했다.

잘사는 독일이 부러웠다. 개개인은 무척 검소했고 거피 한 톨, 소시지 한 쪽도 버리는 예가 없어 식탁 위에 음식이 남으면 집에 가져갔다. 우리는 체면 때문에 남아도 부끄러워 그냥 두고 왔다.

평소엔 ‘니베아’ 크림만 바르고 근무하는 사람들이 파티나 즐거운 날엔 몰라보게 화장을 한다. 때와 장소가 분명한 사람들이다. 예쁘게 꾸민 거실엔 항상 꽃이 탐스럽게 담겨 있다. 처음엔 우리를 보고 왜소한 체구로 어떻게 일을 할까 걱정했지만 능숙한 기술로 친화력 있게 일을 했다.

우리는 미국식 간호를 공부했기에 독일식 간호는 익숙지 못했다. 처음엔 이상했지만, 우리나라가 추구하는 ‘포괄적 간호’를 실천하고 있었다. 미국식 간호도 장점이 많겠지만, 독일식 간호는 인간적이고 따뜻했다. 이들은 동양에서 온 우리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돈을 벌면 공산 국가라 의무적으로 보내야 하는 줄 알고 있고, 아직도 전쟁 중인 줄 알고 있었다. 북한과 남한을 잘 몰랐다. 동생들 학비를 보낸다고 하면 게으른 사람이 된다면서 극구 말리며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황새가 까마귀 속을 어찌 알겠는가….


여유롭고 풍요로웠지만 검소했던 독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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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tea) 타임이나 식사 시간의 그들 대화는 ‘차를 바꾼다’. ‘부엌을 새로 꾸민다’, ‘휴가는 스페인으로 떠난다.’ 등 우리에겐 딴 세상 이야기였다. 기숙사엔 사과, 배나무, 꽃이 있는 넓은 정원도 있었지만,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자전거를 타고 멀리 나가기도 했다. 어린이도 타는 자전거를 어렵게 배워 타는 나를 보고 응원도 보내줬다. 동양 여성들은 운전도 못 하고 춤도 안 추고 연애도 안 하고 外食(외식) 때 와인 한 잔에 취해 얼굴이 빨개졌다. 돈은 집으로 보내니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가끔 물어온다. 서양 남자와 연애하면 감옥 가느냐고 놀렸다. 경제적인 속박에서 자유로운 기숙사에 있으면서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세 명의 처자들은 외로움에 고독을 씹으며 살았다.

대도시에 근무하는 광부·간호사들은 결혼도 한다는 데 한창 때 몸도 건강도 정신도 생활력도 강한 청춘 남녀가 당연한 것 아닌가 응원을 보냈다. 티 타임 시간에 자기 차례가 되면 예외 없이 커피를 내려야 하는데, 한국에서 커피 추출기를 본 적이 없으니 배워야 했다. 지금은 커피 마니아지만 독일에서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봉급은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이 많았고 물건도 풍족했지만 나도 독일인처럼 검소하게 살았다. 독일은 어느 도시를 가도 아름다운 붉은 벽돌집 창가에는 ‘줄리엣’이 나올 것 같은 레이스 커튼과 꽃이 있었다. 나를 위한 것도 있겠지만 지나가는 他人(타인)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개울물엔 물고기가 놀고, 넓은 들판엔 초록 밀밭이 바람결에 파도쳤다. 붉은 들양귀비 꽃은 풍경화 그림처럼 피어있고 숲 속은 요들송이 들리는 듯 새소리가 여유롭고 산천이 풍성하고 아름다우니 시인, 음악가, 철학자가 독일에서 많이 나왔나 싶다. 패전국이라 하기엔 너무 안정적이고 잘 살았다. 이런 독일이 부러워 한국에 안 가고 싶은 적도 있었다. 돌아오는 사람보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나이 많은 獨身(독신)은 세금을 많이 내고 어려운 결혼을 했거나 부양할 식구가 많으면 세금을 적게 낸다. 봉급날만 되면 독일은행으로 가서 첫째는 가족을 위해 나를 위해 돈을 쓰고, 둘째는 내가 잘해야 다음 사람들이 독일로 올 수 있다는 책임감과 애국심이었다. 여름엔 호수에서 수영도 즐기고 겨울엔 실내 체육시설에서 눈 내리는 창 밖을 보며 선진국 독일에서 여유를 즐겼다.

노동자들은 철저한 노동법에 의해 여행을 하며 휴식을 취했다. 휴식은 생활의 멋이기도 하고 건강도 챙기고 자기를 성찰할 수 있는 값진 시간이 아닌가 싶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하고 나도 모든 걸 잊고 여행을 떠났다. 교과서에 나오는 ‘미라보’ 다리가 있는 파리도 여행하고 작은 나라 ‘바스코’도 다녀오고 가톨릭 성지 ‘루르드’ 샘물도 오래 살려고 마셔보았다. 스페인에서는 ‘돈키호테’ 동상과 ‘가우디’ 건물도 만나봤다.


나에게 자신감을 준 독일 생활

독일은 나에게 풍요로움도 주고 넓은 세상을 경험할 기회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용기와 자신감도 주었다. 명절 특집 독일 편 ‘가요무대’를 보면서 나는 그리움에 울었다.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의 젊은 날이 안쓰러워 울었다. 우리는 함께 울었다. 많은 것을 얻고 배우고 왔지만 끝없는 자기 관리와 인내가 필요한, 결코 쉽지 않은 외국 생활이었다.

1976년 서서히 우리나라도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경제인들은 외국으로 눈을 돌렸다. 노동자들도 해외로 떠나는 길이 열렸다. 파독 광부들의 뜨거운 지하에서 퍼 올린 검은 눈물의 마르크, 간호사들의 인내의 눈물 젖은 마르크, 월남 전쟁터에서 피 흘려가며 부쳐온 달러, 中東 근로자들의 기름 묻은 사막의 모래바람 돈, 모두 사랑하는 가족과 애국심으로 열심히 일해 본국으로 송금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라 가능했다고 자부한다.

귀국하던 날 엄마가 공항에 나오셨다. 무사히 돌아온 딸이 반가워서도 우셨지만, 독일로 갈 때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내리는 것을 보고는 “맏이야 미안하구나!” 했다. 여동생은 언니가 보내준 돈으로 결혼도 했다고 고마워했다. 내가 보낸 독일 봉급은 適期(적기)에 마중물이 되어 가족에게 필요한 돈이 돼 몇 배로 돌아왔다. 그래서 행복했고 아무 조건이 없었다!


아 대한민국! 그리고 결혼

결혼이란 혼자 살 때보다 힘들고 어깨의 돌이 아니라 의무가 하나 더 추가돼 쇳덩어리가 돼 더 무거웠다. 독일에서 편리했던 생활이 한국에서는 불편했다. 다시 연탄을 갈아야 했고 대가족 大小事(대소사)도 챙겨야 하고 출산의 기쁨보다 男兒(남아), 女兒(여아)를 먼저 따졌다. 모든 생활이 불편하고 후회스러웠다. 편리한 독일로 다시 가고 싶었다.

남편 될 사람은 베트남 전쟁터로 가려고 준비하던 중 終戰(종전)이 됐다고 한다. 홀어머니에 집안을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이 강한 영화 ‘국제시장’ 덕수 같은 장남이었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동생들의 공부는 물론이고 짝을 찾아 시집 장가갈 때까지 뒷바라지하고 나니 우리 자식들도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가족 확대기가 되어 있었다. 어렵고 힘들지만 ‘덕수’, ‘덕순’이가 돼 힘차게 용감하게 숨막히게 살았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가족을 위해 아침밥을 먹이고, 초여름 오이지 냄새가 풍기고 겨울엔 김장을 하는 어머니의 힘이 살아 있는 나라다.

우리나라도 가정마다 세탁기로 빨래하고 냉온수가 나온다. 가정마다 차가 한두 대씩 있고 배고픔은 기억에도 없어 보인다. 살찐다고, 비만이 된다고 호들갑 떤다. TV마다 잘 먹고 잘사는 프로가 인기이고, 고기도 품질을 따져서 먹으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해외여행도 자유롭고, 먹는 음식도 입는 옷도 고급스러워 보인다. 우리나라는 의·식·주 문화도 깊고 수준도 매우 높은, 품격있는 나라다. 한국에 와 결혼을 하고 장성한 자녀들은 하나둘 짝지어 집을 떠났고, 자식보다 더 귀여운 손자들이 재롱을 부린다. 우리 부부는 兩家(양가) 맏아들 맏딸로 만나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대한민국에 태어나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숟가락 하나 없이 가난을 극복하고 근검절약하면서 집을 장만했다. 인생살이 짐도 무거웠지만, 일상적인 행복도 누렸고, 아들딸을 낳아 사회적 기본 의무도 요령 부리지 않고 충실히 이행했다. 몇 년 동안 자유롭게 알찬 취미 생활도 해봤고, 이젠 어머니가 아닌 할머니로 할 일이 또 남아 있다.

젊은 자식들이 일터로 가면 손자·손녀도 돌봐야 하고 제삿날을 기막히게 기억하는 치매 어머니도 맏이 몫으로 남았다. 이 나이에 나만 해야 하나 짜증도 나고 억울도 하지만 고생해본 맏이가 참고 해야지 누가 하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느 나라 가서도 적응도 잘하고 부지런히 살아간다. 독일 이민 1세대는 열심히 일해 어느 외국인들보다 잘살고, 외국인 2世들도 사회 적응도가 높고 훌륭하게 살아간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資産(자산)이 아니겠는가. 대한민국 만세다!

1945~1955년생들은 전쟁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자기 몫을 열심히 했다. 배고픔의 상징인 ‘보릿고개’도 극복했고 민주화도 이뤘다. 위기극복 능력은 우리나라를 따라올 나라가 없다! 미국 가루우유를 받아먹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되었다. 글 쓰면서도 신난다. 어느 나라가 우리나라만큼 도약했을까. 누구나 갈 수 있는 가까운 문화센터, 40년 전 독일에서 살다가 한국 올 때 수영장과 문화센터를 갖고 오고 싶었는데 이젠 독일이 부럽지 않다. 역동하는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국가에 감사한다. (끝)

[ 2016-01-13, 17:4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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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중히     2016-01-14 오전 9:29
같은 시기에 북한 놈들이 동독과 경제 교류를 했다는 이야기는 못들었습니다.
공산체제는 폐쇄적이고 그래서 도태될 수 밖에 없는 거겠죠..
이 분들의 개인적인 선택이 결국 대한민국의 국가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이 분들 스스로가 긍지를 가지셔도 될 것입니다..
다 지나보니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분들의 노고가 공산 정권과의 대결에서도 압승하게 되는 요인도 되었고요.
   알라는위대하다     2016-01-14 오전 5:09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면서 실용적인 사고의 독일인들이 부럽습니다. 한국도 이제는 量보다 質적인 면에 초점을 맞출 때입니다. 아직까지는 이 나라에 不滿이 많습니다. 특히 儉素한 생활이 맘에 드네요, 좀 더 마음의 餘有가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얼핏보다가     2016-01-13 오후 11:32
담담하게 써 내려간 한 인생에 글에...'대한민국의 역사'도 있고 '독일의 역사'도 보이네..

잘 산다는 것은 상대적인 법일진데, 대한민국이 보릿고개에 허덕일때 유렵최고의 부자국가인 독일의 풍요로움이 대비되고, 그당시 독일/유럽은 미국의 풍요로움에 비교되지 못했기에 '검소함'이 필수적이었으리라.

전쟁과 가난을 벗어나고자 발버둥쳤던 부모세대가 다들 고맙고 , 선배들의 희생으로 먼발치에서나 꿈꾸어보던 민주주의도 얻었으니 이또한 대견하지 않을 수 없는 대한민국.

이제는 나/우리를 벗어나, 대한민국의 풍요로움속에서...소외되고 힘들어하는 사회적약자가 비록 그 숫자가 적더라도, 그들은 다같이 못살았던 시대보다도 , 훨씬더 상대적으로 더 절망과 비참함을 느끼고 있을 것이며...
이제는 그들이 어디에서/무엇을/어떻게 사는지를.....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보듬아주는는 사회가 될 때....
대한민국이 더 자랑스러운 나라가 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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