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크리스마스 선물은 잘 받았나?”
대한전선에서 30년간 수출해온 수출인의 奮鬪記(1)“앞으로 당신 수수료는 한 푼도 없게 될 수 있다. 우리가 수출 代錢(대전)을 받지 못하면 너에게도 돈을 못 보내준다. 어떤 이유로라도 안 준다.”

金珍漢(체험수기 최우수상 수상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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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연재할 手記는 최우수상 작품인 金珍漢 씨의 '아프리카에서도 전선공장이 되나?'입니다.

너 무역회사에 취직해 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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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남아공 CEO 60人에 뽑혔을 당시의
필자

1980년 4월경, 대학 선배가 제안했다. 육군 제대 후, 가을 졸업이 예정되어 있는 대학교 마지막 학기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학교는 수시로 벌어지는 反정부 데모로 인하여 툭하면 휴강을 하였고, 학교 앞 신촌 일대는 최루탄 냄새로 고통스러웠다. 우리는 대학교 4년을 다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2년 다닌 셈이구나 하고 우울해하던 시절이었다. 취직도 잘 안 됐다. 신입사원을 뽑는 회사가 있어야 응시라도 하지. 1980년도는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소위 대기업을 찾기가 어려웠다.
 
기회가 된다면, 혹시 외국에서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돈도 잘 벌고, 영어를 하면서 생활하면, 어휘력의 부족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말들을 하지 않으면서 살아도 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던 시절이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Sears에 스키장갑을 수출

 
그래서 내가 대학교 과 선배의 소개로 처음 입사했던 회사는 ㈜성일통상이다. 해외영업을 할 수만 있다면 좋다고 생각했다. 빵을 만들어서 그 당시 연간 매출액이 1000억을 상회하던 ‘삼립’의 子會社(자회사)인데, 동양 최대의 피혁공장을 전라북도 이리(지금의 익산)에 가지고 있었고, 여기서 냄새 나는 여러 가지 공정을 거쳐서 피혁을 제조한 후, 이 피혁을 국내의 수 많은 완제품 업체에게 판매하는 일들을 국내영업부에서 했고, 일부 피혁으로 서울 구로구 독산동에 있던 자체 봉제 공장에서 장갑, 가방 등을 만들어 미국 및 유럽에 수출하는 일은 해외영업부에서 했다.
 
나는 완제품 가죽장갑을 외국에 수출하는 일을 했다. 아주 열심히 했다. 특별 승진도 했다. 포니 자동차를 타고 하청공장들에 대한 생산 점검을 다니는 것도 즐거웠고, 거래처인 미국인과 식사도 하고 상담하여 계약을 하는 것도 흥분되는 일이었다. 당시 회사의 청색 구형 포니 차량번호는 ‘5818’이었다.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외국인들은 모두 멋있고, 미남 미녀로 보였다.
 
당시 미국의 최대 통신판매업체였던 시어즈 로벅(Sears Roebuck)에게, 한국에서는 우리 회사가 처음으로 스키장갑을 수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었다. 그 시절의 영어회화 책에는, “어디에 갑니까?” “시어즈에 XX 상품을 사러 갑니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그때 내가 시어즈에 판매하던 제품이, 두꺼운 전화번호부만한 시어즈 로벅의 판매책자에 실렸는데, 그 페이지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어느 해인가, 수출 실적이 나빠지니, 삼립의 창업주인 허창성 회장께서 매주 한 번씩 수출영업회의를 주관했던 적이 있었다. 수요일 아침 9시가 되면 어김없이 회사에 회장님의 벤츠 승용차가 나타난다. 지방의 어느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시고, 6․ 25 사변 후 부산 피난 중에 부부가 함께 길거리에서 밀가루 풀빵 장사를 시작하여, 마침내는 ‘삼립’을 창업하셨던 분을 매주 직접 만나 뵙는다는 것이, 기대도 되고 무섭기도 했다.
 
영업실적 향상을 위하여 다그치는 말씀은 하지 않으시면서, 젊은 수출부 직원들과 함께 월급, 인사고과, 직원들에 대한 처우 및 회장이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가 하는 주제들을 주로 다루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분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작고하셨다.
 
몇 년 후, 미국 출장을 갈 기회가 생겼다. 비자 신청을 위해서는 미국대사관 근처 여관에서 하루를 자고, 새벽 4시에 미국대사관에 가서 줄을 서야 했다. 난생 처음 국제선을 타고 뉴욕을 가는데, 입국심사는 첫 기착지인 로스앤젤레스에서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당시에는 뉴욕 직항이 없었기 때문에, 동경에 가서 미국 비행기로 바꾸어 탔었다. “치킨 or 비프?”라고 외치다시피 하며 통로를 오가던 노랑머리 미국 여승무원들의 당당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저녁 무렵에 뉴욕의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을 하기 위해서 旋回(선회)를 하는데, 바깥을 내다보니, 뻘건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한 수많은 고층건물들이 보이는데 어찌나 놀랍던지, 이것이 마천루구나 이것이 미국의 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 존 F. 케네디 공항에 착륙한다는 미국 기장의 영어 안내 발음은 왜 그렇게 능숙하고도 멋있게 들리던지. 약 3주에 걸쳐서 미국의 여러 지역을 다니는 업무를 간신히 끝마친 후, 귀국해서는 병원에 입원했다. 과로가 원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수출품의 원재료인 피혁이 원활하게 공급이 되지 않아서 납기 지연사태가 자주 발생하였는데, 당시 이리의 피혁생산공장에서 원재료인 피혁을 생산해서 본사 영업부에 공급해주는 공장장의 위세는 대단했었다. 나의 요청은 씨알도 안 먹혔다. 수출은 찬밥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본사 담당 중역과 면담을 했었다.
 
본사 담당중역은 창업주의 2세들 중의 한 분이었는데, 생산한 피혁 공급에 대한 회사의 방침은 국내영업 우선이고, 수출은 그 다음 순위라면서 앞으로도 이 방침은 바꿀 생각이 없으며, 정 어려우면 수출은 별로 남지도 않으니 안 해도 그만이라는 담당중역인 2세 社主의 말을 듣고, 나는 이직을 결심했다.
 
수출 계약을 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우리는 이것을 오다 딴다고 했다. 수출 납기가 얼마나 중요한데. 납기를 맞추기 위해서 대부분이 어린 여자인 공장의 작업자들은 종종 밤을 새우기도 했었다. 수출은 총력전이었다. 나는 수출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회사에서 일하고 싶었다.
 

대한전선과 나는 한 길을 간다
 
1983년 5월에 공채로 입사하여 27년을 일한 회사다. ‘대한’이 포함되는 회사 이름도 당당해 보였고, 면접시 대한전선은 수출을 중요시하는 회사라는, 키가 작게 느껴졌던 어느 중역의 말이 매우 좋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렇게 말씀해주셨던 면접관은 당시 사장님이셨다. 수출업무를 하고 싶고, 제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공장에서 근무를 하게 해달라는 것이 나의 요청이었다. 그대로 되었다.
 
대한전선과 나는 한 길을 간다. 다만 공장에서 근무를 하게 해달라는 내용은 약간 바뀌어서, 서울 본사 수출부에서 근무를 하되 이란 체신청(TCI)에서 파견된 검사관 4명 중 주간 근무자들과 함께 공장에 출근하고, 하루종일 공장에서 필요시 통역을 해주며, 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역할을 전임자로부터 인계 받아서 수행했다. 주말에는 같이 관광도 다니면서 돈도 많이 썼다. 당시 이란 체신청은 대한전선의 주요 고객이었다.
 
대부분의 이란 검사관들과는 친하게 지냈고, 어느 검사관과는 훗날 여러 해 동안 서로 연락을 하고 지내기도 했는데, 어떤 검사관과의 오해로 인한 불화로 나는 검사관 수행업무를 다른 사람에게 인계하고 수출부 본연의 업무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프리카 및 중동에 대한 통신케이블 및 전력케이블 수출에 종사하고, 특히 積算電力量計(적산전력량계) 수출에 관해서는 전담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이 제품은 거의 수출실적이 없는 제품으로서, 주로 신입사원이 맡게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한국에서 적산전력량계 생산에 있어서는, ‘기술의 상징’을 내세우는 그룹사 중의 하나인 K계전과 함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쌍벽을 이루고 있는데, 왜 K계전은 수출을 많이 하는 회사이고, 우리 회사는 수출실적이 없는가? 이것은 관심부족이다. 생산력과 기술이 있으니, 수출에 대한 의지와 노력만 있으면 잘 될 것으로 믿었다. 연말에 다음 해의 수출계획을 낼 때 내가 제출한 계획은 단계적으로 상사들에게 제출될 때마다 잘렸다. 그 동안 실적이 없던 제품인데 어떻게 갑자기 실적이 생길 수 있나? 그것이 이유였다.
 
상사들의 의견에 따라서 줄이고 또 줄였던 수출 계획이나마 첫 해가 가고 보니,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달성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상사들 말이 맞았다. 나는 돈키호테가 되었다.
 
나라마다 전력청의 사양이 약간씩 다른데, 케이블과는 달리 적산전력량계는, 기술적으로 똑같이 만든 제품이라야만 인정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세계에서 우리의 사양과 가장 비슷한 제품을 사용하는 나라들을 찾아서, 이 나라에서 요구하는 사양대로 만드는 노력을 계속하도록 하고, 부품 수출도 추진하였다. 그 결과, 몇 년 후에는 적산전력량계 수출에 관해서, K계전을 제치고 부동의 1위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1980년대에는, 담당하는 지역만 넓었지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케이블의 직수출은 거의 없었고, 중동에서는 여전히 이란 및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된 수출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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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남아공 SASOL社와 전력 케이블 공급 계약 체결 장면(우측이 필자)


 
눈 덮인 앨브로우스 마운틴
 
1990년도 11월 말경, 이란의 테헤란으로 약 한 달간 출장을 갈 일이 생겼다. 당시 이란 체신청과의 통신케이블 수출계약을 오랜 기간 동안 추진하였으나, 계약이 쉽사리 성사되지는 않았다. 계약 예정인 두 건 금액은 미화 약 5000만 달러(한화 약 400억 원) 가량이었다.
 
이란 정부의 외환 부족으로 인하여, 정부 수입 물자에 대한 일체의 신용장 개설이 금지되고, 물건을 모두 납품한 후에 수출대전을 한꺼번에 송금해주겠다고 하는데, 이것을 받아들이면 계약을 하고 그렇지 않다면 계약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대리점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난감하다. 가뜩이나 외화가 부족하여서 신용장을 못 열겠다는 나라에서, 2년의 납품기간이 지나서 목돈의 수출 代錢(대전)을 한꺼번에 지불하겠다는 말을 어떻게 믿나? 한두 푼도 아니고, 이런저런 구실로 5000만 달러를 지불하지 않고 지연이라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렇다고 계약을 포기할 수도 없고.
 
내가 현지에 가서 부딪쳐보겠다고 했다. 당시의 수출 총책임자인 CY 중역은 고향이 이북이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설원량 대한전선 회장과는 대학 동창이기도 한데, 자존심이 세고, 성깔도 있으면서, 멋있고 또한 능력 있는 분이었다. 워낙 해박한 지식이 있었던 분으로서 전선업계에서는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분이었다. 무섭기도 하고, 유머도 많으셨는데, 나는 그 분이 하시는 말씀에 대해서는 늘 명심하게 되고, 나중에는 그 분을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이 분은 오랜 기간 동안 나의 회사 생활에 아주 크게 영향을 끼쳤던 두 분 중 한 분이었다. CY 중역은 이란 출장 하루 전에, “나니까 너에게 말해주는데”라고 하면서, “너는 주변 사람과의 원만한 인간관계에 대해서 신경 좀 써야 한다”라는 충고를 해주기도 하셨다.

테헤란은 추웠다. 아침마다 흰 구름이 떠있는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눈 덮인 앨브로우스 마운틴을 보면서, 대리점 사무실로 출근하였다.
 
외국 정부 상대로 일을 할 때는 현지인 대리점이 매우 중요하다. 대리점은 현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공급자인 대한전선에게 알려주어서, 대한전선으로 하여금 適期(적기)에 올바른 결정을 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대리점은 공급자의 눈과 귀다. 그리고, 체신청에서의 모든 대화는 이란어인 파르시로 한다. 대리인이 완벽하게 나의 편이 되어야만 미리 의논한 대로 나의 생각을 전해줄 것이며, 회의 중 통역도 정확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대리인이 내 주장에 완벽하게 동의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대리인은 체신청의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계약이 된다는 입장이었다. 이란은 ‘예스 or 노 마켓이다’라고 가르치면서 나보고 일을 힘들게 만들지 말라고 했다. 사실 이 자가 오랫동안 상대했던 대한전선 사람들 중에서 내가 제일 졸병이었다. 과장이었다. 나의 방문을 달갑게 여기지도 않는 눈치였다. 체신청의 요구를 받아들여야만 계약이 된다고 본사에 보고하면 되지 않겠느냐라고도 했다. 나는 우선 이 사람부터 설득해야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당신 수수료는 한 푼도 없게 될 수 있다. 우리가 수출 代錢(대전)을 받지 못하면 너에게도 돈을 못 보내준다. 어떤 이유로라도 안 준다. 체신청에서도 유산스 신용장을 통해서 전체 5000만 달러를 쪼개서 납품할 때마다 2년간 지불해야 부담이 적지, 한꺼번에 몰아서 현금으로 지불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 그렇게 해야 너도 납품할 때마다 수수료를 받을 수 있다. 모두 납품한 후에 사정이 생겨서 돈을 못 주면 어떡하냐?”
 
“우리는 절대, 절대로 우리가 수출대전을 받기 전에는 너에게 수수료를 못 준다. 유산스 신용장이라도 받아야 모두가 편해진다. 이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떤 경우에라도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 조건이다. 이것이 네가 수수료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돈을 절대 못 준다고 악악대니까 내 주장을 대리점이 확실히 이해했다. 이래서 체신청에서의 순회공연이 시작되었다. 매일매일 이 부서 저 부서로 다니면서 우리의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앵무새같이 같은 설명을 하고 또 했다.
 
외국인에게 선물을 줄 때, 나는 늘 국적 있는 선물을 주고 싶어했다. 이것도 내가 존경했던 CY 중역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人蔘(인삼) 캡슐, 인삼 성분이 함유된 화장품 등. 한국의 화장품을 잘 알아주지도 않을 때였지만. 이란 체신청에 가보니, 히잡 또는 검은 차도르를 뒤집어쓰고 앉아서 일하는 여자들이 꽤 많았다. 이 사람들과는 악수를 해도 안 된다. 몸에 닿는 행위를 해서는 안되며, 말도 조심해야 된다. 폐쇄된 사회인데도 불구하고, 관청에서 일하는 요직의 여자들이 의외로 많았다. 이런 상황은 이집트의 체신청에서도 비슷했다.
 
화장품 사용법을 알려주는 것이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외국인이, 특히 남자가 화장품 사용법을 열심히, 진지하게 설명해주니까 무척이나 재미있어했다. 나 같은 사람을 처음 본다고도 했다. 인삼캡슐의 경우에는 사포닌의 효능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그 시절에는 이메일이 없고, 외국과의 교신은 팩스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텔렉스를 주로 사용했다. 나는 본사에 출근할 때, 같은 층에서는 거의 매일 내가 제일 먼저 출근하는 직원이었다. 9시가 출근 시간이나 나는 통상 7시 30분경에는 회사에 도착했다. 우선 텔렉스실에 가서 수출부로 온 노란 텔렉스 용지를 몽땅 가져다가 각각의 담당자 책상 위에 놓아주는 것으로 내 일과를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같은 층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출근 시간을 모두 알았다. 존경했던 CY 중역은 정확하게 8시 40분경에 출근하셨고, 어떤 자는 수시로 9시부터 9시 5분 사이에 땀을 흘리며 출근하는 바람에 상사로부터 욕먹는 장면도 수시로 연출되었다. 한편, CY 중역은 나를 종종 서울 깍쟁이라고 하셨지만, 매우 부지런한 사람이라고도 하셨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잘 받았나?”
 
약 2주 가량 지나니까, 체신청 분위기가 신용장을 열 수도 있다는 것으로 감지되었다. 구매부서에서 이란 말로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며 한참 웃기에 나중에 대리점으로부터 그 내용을 들어보니, 다음과 같았다.
 
중앙은행에 2년 유산스 신용장 개설 요청을 해보는데, 이자는 공급자가 부담한다고 하면 어떻겠느냐라고 하니까,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실제로는 저 자가 물품대전에 이자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하니, 그러면 실제 이자 지불은 체신청에서 하는 것인데 저 자가 이러한 사실을 중앙은행에 고자질이라도 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 저 자의 입 단속은 어떻게 해야 되지? 라고 하면서 그렇게 키득거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도 가감 없이 나에게 전하는 것으로 보아서, 나는 대리인을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는 의논도 없이, 본사로부터 대리점 사무실로 엉뚱한 텔렉스가 왔다. 수신자는 대리점 사람이었다. 대리점 사람과 체신청을 믿으니, 체신청의 조건을 수락한다는 내용이었다. 대리점 사람은 손가락으로 이제는 됐다는 신호를 만들며 다시 마음이 바뀌었고, 나는 거의 미치광이가 되었다. 나는 대리인에게 다시 처음부터 설명을 해서 내 주장을 따르게 설득시켜야 하는 불쌍하고도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호텔로 돌아와서, 서울 시간에 맞추어 직속상사에게 전화를 했다. 외쳤다.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신용장을 열 수도 있는 분위기인데, 나와는 의논도 없이 왜 깽판치냐고. 나를 출장 보냈으면, 나에게 맡기고 제발 내 일을 방해하지는 말아달라는 심한 말도 했다. 말인즉은, 아무래도 내가 고집부리다가 계약이 깨질 것 같아서 내부적으로 의논한 결과를 대리점에게 통보한 것이라고 했다.
 
인도네시아에 출장 중인 CY 중역에게도 보고드려서 승인 받은 사항이라고 했다. 말도 안 된다. 나는 오늘 당장 본사에서 보낸 텔렉스 내용을 취소한다는 텔렉스를 다시 보내달라고 했다. 신용장은 곧 열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본사에서 약속을 지켰다. 다음 날 대리점 사무실에 가보니, 어제의 텔렉스 내용을 취소하면서 신용장을 받도록 노력해달라는 내용의 텔렉스가 와있었고, 우리는 다시 체신청 순회공연을 계속 하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크리스마스 전에는 제발 나를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신용장이 개설되기 전에는 나는 한국에 안 간다고 하면서.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 전날, 두 건의 신용장 번호가 각각 나왔다. 체신청 사람 중에는 나보고 “크리스마스 선물은 잘 받았나?”라고 웃으며 농담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란 중앙은행인 ‘뱅크 마카지’는, 신용장에 비록 오타는 많을지라도 신용장에 의한 지불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가 없는 은행이다. 믿어도 된다.
 
총 5000만 달러. 그때까지 과거 10년간 이란에 판매했던 수출 금액은 대략 1억 달러였다. 납품기간 2년 동안에 이자율은 뚝뚝 떨어졌다. 물품 대전에 이자로 얹은 고정금액은 10% 였다. 2년 지나고 보니, 이자 차이로 말미암아 생긴 예상치 못했던 추가 이득이 수백만 달러 가량 되었다.
 
한편 2년이 지나 우리의 납품이 끝난 후, 이란 정부는 외화 부족으로 인하여 마침내 국가지불 유예(moratorium)를 선언한다. 이란 정부 사절단이 한국에 와서 한국 회사들에 대한 지불 일정을 장기간 연장하기 위한 협의를 시작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주로 건설회사들이 수억 달러씩 물렸다. 아! 우리가 2년 전에 신용장을 받지 못하고 납품 후 돈을 받기로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계속)

[ 2016-02-10, 20:4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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