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걸고 남북한의 지식인을 고발한 '고발'
드디어 세계가 주목하게 된 ‘북한의 솔제니친’ 반디의 ‘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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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세계 출판계에선 북한으로부터 밀반출된 단편소설 모음집 한 권이 단연 화제다.>(영국 가디언)
   *프랑스 번역본의 書評(피에르 리굴로): “독재 정권이 인간의 자유정신을 말살할 수 없다는 증거물이다.”
   *북한에서 온 讀後感: “김일성을 우상화하여 인민들을 속인 賣文 문학가를 고발한 작품.”
   *在美동포들, 노벨문학상 추천 운동 시작
   *‘백주의 암흑’ ‘동물농장’ ‘1984’ ‘닥터 지바고’의 反共문학을 잇는 걸작
   *북한의 본질을 ‘웃음꽃이 피는 지옥’으로 묘사한 게 화제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닥터 지바고'
  
   영화 '닥터 지바고'는 냉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중반에 제작되었다. 영국인인 데이비드 린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에게 "이 영화에는 이념을 담지 말고 사랑과 인간을 담으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닥터 지바고는 시인이기도 한데 이 역을 맡은 오마 샤리프는 데이비드 린 감독으로부터 이런 주문을 받았다고 한다.
   "당신은 연기할 생각을 하지 말라."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오마 샤리프는 울고 웃고 하는 연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표정이 거의 없거나 극도로 절제한다. 이런 무연기를 부탁한 것이다. 오마 샤리프는 영화를 찍던 중에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린 감독에게 "이렇게 해도 되는 거냐"고 물었다. 린 감독은 말했다.
   "정말 나를 못믿겠단 말인가.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이 영화를 본 사람은 결국 당신만을 기억할 거야."
   닥터 지바고를 보고나면 남는 인상은 역시 오마 샤리프의 눈동자 연기이다. 그는 말 없이 눈으로 연기한다. 憂愁(우수)에 찬 눈동자, 라라에 대한 애잔한 사랑이 깃든 눈동자,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스며 있는 눈동자, 비밀경찰의 감시망이 좁혀오는 것을 느끼면서 라라와의 마지막 나날들을 절박하게 보내는 초조한 눈동자, 그런 것들이 殘影(잔영)으로 남는다. 연기가 지나치면 관객들은 싫증이 난다. 연기가 적당하면 관객들은 만족한다. 연기가 절제되어 좀 모자란 것 같으면 그 아쉬움이 가슴에 오래 남는다.
   라라 役을 맡은 줄리 크리스티는 행운이었다. 이 영화 제작자인 이탈리아인 폰티가 부인 소피아 로렌을 데이이드 린 감독에게 추천하였으나 린은 로렌이 너무 몸이 크다면서 거절하고 크리스티를 썼다. 지바고의 본처 役으로는 오드리 헵번이 추천되기도 하였다.
   닥터 지바고에는 대평원과 눈덮인 雪原(설원)이 나온다. 어디서 찍었을까? 핀란드? 캐나다? 놀랍게도 스페인이다(부분적으로 필란드와 캐나다에서 찍기도 했다). 마드리드 북부 지방에 모스크바 시내를 본뜬 세트장을 지어놓고 찍었다고 한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평균 해발 고도가 가장 높다. 평균 600미터이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오는 곳도 있다. 황량한 대륙의 기분이 나는 곳이기도 하다.
   마드리드 근교에서 러시아 혁명 장면을 찍을 때의 에피소드. 붉은 혁명을 일으킨 군중들이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주제가인 '인터내셔널'을 합창했다. 엑스트라로 동원된 스페인 사람들은 이 노래를 아주 잘 불렀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스페인 內戰 때 좌익 공화파쪽에 섰던 사람들이나 2세들이 많이 있었던 때문이다. 난데 없이 불순한 노래가 울려나오자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노래를 들은 이웃 마을에선 "프랑코가 죽은 모양이다"고 좋아했다고도 한다.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은 댐이다. 이 댐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경에 있는 알데아다빌라 댐으로서 높이가 140m이다. 마지막 장면은 댐 위로 무지개가 걸리는 것인데, 공산주의의 미래를 밝게 그린 것이라고 말이 많았다. 원작을 시나리오로 바꾸는 데 영국 공산당 출신자가 참여하였다는 지적도 받았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정치엔 무관심한 이였다.
  
   역대 8위의 영화 수입
  
   이 영화에는 오마 샤리프 妻族(처족)이 탄 기차가 시베리아로 달리는데 한 어머니가 아기를 데리고 달려와 겨우 타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어머니가 기차를 타기 직전에 차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 다음 기차 안에 탄 사람의 손에 이끌려 올라간다. 실제 촬영에서 이 어머니는 기차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크게 다쳤다고 한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그 장면을 그대로 영화에 쓴 것이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오로지 영화밖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인공과 조연들의 옷 색깔도 린 감독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기차 기관차의 색깔을 붉게 칠한 것도 혁명을 상징하기 위함이었으며 戰線(전선)에서 간호부 라라가 떠나고 홀로 남은 유리(오마 샤리프)의 뒷모습, 그 옆에 놓여 있던 해바라기의 잎사귀가 하나 둘 떨어지는 장면은 유리의 마음속에서 터지는 울음을 상징하였다.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는 혹평도 많았다고 한다. 너무 길다는 게 주된 비판 포인트였다. 이 영화는 '사운드 오브 뮤직'과 같은 해에 개봉되었다. 오스카상은 '사운드 오브 뮤직'이 더 많이 받았다. 닥터 지바고의 주제가 '라라의 테마'는 러시아 전통 현악기의, 가슴을 쥐어 뜯는 듯한 애절한 멜로디로 유명하다. 이 노래는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았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러시아 음악인들과 교향악단의 협주로 녹음된 곡인데 작곡가는 프랑스 사람이다. 소설 닥터 지바고가 러시아에서 출판이 허용된 것은 1988년이고 영화가 상영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였다. '닥터 지바고'는 세월이 흐를수록 호평이 높아져 미국 영화 연구소는 미국 영화중 歷代 39등으로 꼽았다. 돈을 많이 벌기로는 역대 8등이다.
  
   1등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34억 달러
   2등: 아바타, 30억 달러
   3등: 스타 워즈, 28억 달러
   4등: 타이타닉, 25억 달러
   5등: 사운드 오브 뮤직, 24억 달러
   6등: ET, 23억 달러
   7등: 十戒, 22억 달러
   8등: 닥터 지바고, 21억 달러
   9등: 조스, 20억 달러
   10등: 백설공주, 18억 달러
  
  
   찬란한 반공문학
  
   소설 '닥터 지바고'는 소련에서는 출판될 수 없어 1958년에 이탈리아에서 나왔고, 著者(저자) 보리스 파스테라느크는 이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나 소련 정권의 압박으로 상을 받지 못하였다(1960년에 70세로 사망).
   '닥터 지바고'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1984',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 군도' 등을 잇는 반공문학의 주요 작품이다. 이 계열에서는 아서 쾨스틀러의 '백주의 암흑'이 1940년에 출판되어 가장 먼저 문학적 가치를 인정 받았다. 1938년 소련에서 벌어진 숙청 재판극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다. 공산주의라는 이상이 현실에서는 인간말살의 도구로 변질되는 메카니즘을 꿰뚫어본 소설이다. 쾨스틀러는 헝가리 출생의 유대인으로서 행동적인 공산주의자였다가 스탈린의 학정에 실망, 반공적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랜덤 하우스 계열의 모던 라이브러리 출판사에서 선정한 20세기의 100대 소설은 출판 편집자들이 꼽은 100편과 독자들이 뽑은 100편으로 나뉜다. 문학성을 기준으로 한 편집자 선정 100대 소설에서 '백주의 암흑'은 8위, '1984'는 13위, '동물농장'은 31위였다. 독자 선정 100대 소설에선 '1984'가 6등, '동물농장'이 20등이었다.
   '동물농장' '1984' '백주의 암흑' '닥터 지바고'는 모두 스탈린 시대와 독재를 배경이나 주제로 삼았다. 서구의 지식인들이 2차 대전 前後에 좌경화하여 스탈린의 전체주의 독재를 제대로 비판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지만 위대한 문학인들은 문학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을 한국에 적용한다면 20, 21세기의 가장 큰 비극중의 하나인 김일성 一家(일가)의 문제도 위대한 문학의 소재가 될 수 있는데, 좌경화된 문학 및 지식인 사회가 이를 외면, '인간의 탐구'라는 문학의 존재 목적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음이 自明(자명)해진다. 이런 가운데 북한의 한 작가가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내어보낸 소설이 서구에서 화제가 되기 시작하였다.
  
   세계 출판계의 화제
  
   윤희영 조선뉴스프레스 부장대우는 며칠 전 자신의 칼럼에서 영국 가디언紙를 인용, 이렇게 썼다.
   <요즘 세계 출판계에선 북한으로부터 밀반출된 단편소설 모음집 한 권이 단연 화제다. 오는 4월 런던 도서전시회를 앞두고 영어·불어·독어·스페인어·아랍어·중국어·일본어·네덜란드어판 출간 계약이 이미 끝났다. 소설책의 제목은 '고발(The Accusation).' 북한에 사는 '반디'라는 필명의 작가가 쓴 단편 7편을 묶은 것으로, 국내에선 2014년 조갑제닷컴을 통해 출간됐다. 조선작가동맹 소속 '반디'의 인척이 탈북하면서 빼내온 육필 원고를 피랍탈북인권연대 도희윤 대표가 입수해 알려지게 됐다.
   반디는 이미 탈북한 독재정권 비판자들과 달리 현재 북한에 살면서 反체제 소설을 썼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가디언은, 그의 부조리주의 풍자 방식은 옛 소련과 동유럽 反체제 작가들을 연상시켜 '북한의 솔제니친'으로 불린다고 분석하였다.>
   고발의 영국 출판권을 얻은 서펀트즈 테일 회사의 한나 웨스트랜드 씨는 이렇게 평하였다.
   "'고발'은 단순히 줗은 소설만이 아니다. 이 소설은 알렉세이 솔제니친의 작품처럼 완벽하게 구성된 소설 모음이며 진실의 직설적인 힘이 뒷받침하는 권위로써 표현되고 있다."
   작년부터터 在美교포들은 '고발'을 노벨문학상으로 추천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 3월초 프랑스 번역판이 나왔고, 일본에서도 번역이 끝나 출판을 기다리고 있다.
  
   왜 '고발'은 한국에서 냉대를 받나?
  
   프랑스의 언론인이자 북한인권운동가로 유명한 피에르 리굴로 씨가 최근 필자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는 북한인권운동가 도희윤 씨가 입수하고, 월간조선이 그 존재를 보도하고, 조갑제닷컴이 출간한 소설 '고발'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출간되는 데 도움을 주고 書評(서평)을 썼다.
   리굴로 씨는 고발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은 '문학적으로 완성된 걸작'이라면서 "프랑스에선 책이 나오기 전부터 화제인데, 왜 이런 책이 한국에선 관심을 받지 못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在美(재미) 동포들이 '고발'을 읽고 감동하여 노벨문학상 추천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변명하였지만 리굴로 씨는 "한국의 평론가 기자들이 뭣하고 있느냐"고 개탄하였다. 나중에 프랑스 번역판에 실린 리굴로 씨의 서평을 구해서 읽어보니 이런 대목이 있었다.
   <반디의 단편집 '고발'이 2014년 5월에 서울에서 출간되었음에도 어째서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인가? 어떤 어려움이 있길래, 도대체 얼마나 무지하고 관심이 없길래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인가?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인가? 정말 일부 순진한 남한 사람들은 그들 정부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전체주의 체제국가인 북한을 오히려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날마다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북한 정권에 맞서 투쟁하는 나의 남한 동지들은 어째서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인가? 공산주의적 日常(일상)에 대한 무지 때문인가?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명백하게 휴전상황에 놓여있는 현실에서 북한을 敵(적)으로 간주하는 것이 그토록 이상한 일이란 말인가? 남한의 반쪽이라 할 수 있는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直視(직시)하는 것이 그토록 불가능한 일인가? 그러고 나면 남한 정부를 어떻게 비난해야 할지 난감해지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이 일곱 개의 단편 소설들은 남한에도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올 수 있을 것이다.>
   '반디'는 북한에 사는 작가인데,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써두었던 단편 육필 원고를 수년 전 바깥으로 내어보냈다. 그는 '고발'이라고 이름 붙인 책 안에 일곱 편의 단편을 담았다. '탈북기'에서 시작, '빨간 버섯'으로 끝나도록 배열했다. 일곱 類型(유형)으로 압축된 북한인의 삶이다. 탈북이란 소극적 저항에서 시작하여 독재타도의 외침으로 발전하도록 순서를 매긴 것 같다.
   '유령의 도시'에선, 아기가 마르크스와 김일성의 초상화를 보고 경기를 일으키는 것을 막아 보려고 덧커튼을 달았다가 평양에서 추방당하는 엄마가 주인공이다. '준마의 일생'은 공산체제가 시키는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다가 좌절, 아끼던 느티나무를 찍어버리고 죽는 馬夫(마부)의 이야기이다. '지척만리'는 죽어가는 어머니를 지척에 두고도 여행 제한과 기차 운행의 결함으로 결국은 임종을 하지 못하는 아들의 안타까운 사연이다. '복마전'은 길을 가다가 김일성을 만나 선전자료로 이용당하는 할머니가 주인공이고, '무대'는 보위부원의 눈에 비친, 북한 체제의 연극성이 主題이다. 마지막 단편인 '빨간 버섯'에서 필자 반디는 비로소 본색을 드러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産室(산실)인 북한 노동당 黨舍(당사)를 타도하자고 외친다.
  
   북한이란 연극 무대의 본질
  
   리굴로 씨는 "이 단편은 그 어떤 북한 보고서보다도 북한 체제와 북한인의 삶을 가장 깊게 들여다 본 작품"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북한체제의 연극성과 마술성을 드러낸 두 단편('무대'와 '복마전')을 최고의 문학적 성취'라고 평하였다.
   ‘무대’는 제목대로 북한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연극적 삶의의 본질을 보여준다. ‘무대자감’이란 생소한 단어가 등장한다. 북한에서 나온 ‘조선말 대사전’을 찾아보았다.
   <자감(自感): 배우가 인물의 사상감정과 주어진 정황을 그대로 믿고 느낌으로써 役인물의 생활 속에 스스로 깊이 잠기는 것, 또는 그러한 창조적 상태.>
   북한인들의 ‘舞臺自感論(무대자감론)’에서 핵심은, 학살자인 김일성을 자애로운 ‘어버이 수령’ 役으로 설정한 정치의 무대에서는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實演(실연)’해야 한다는 점이다. 연극만으로는 부족하다. 役과 일체를 이뤄야 한다. 연극의 생활화를 넘어서 내면화 단계로까지 가야 한다. 이런 自感(자감)이 되려면 김일성을 두려워하면서도 정말로 사랑해야 한다.
   ‘무대’의 주인공은 연합기업소에 주재하는 보위부원 홍영표이다. 그는 반항기가 있는 아들(경훈) 때문에 속이 상해 있다. 아들이 하필이면 반동 집안의 딸인 숙이를 사랑한다. 숙이의 아버지는 정치범 수용소에 가 있다. 때는 1994년 7월 김일성이 죽은 직후이다. 북한 주민들은 곳곳에 설치된 弔意場(조의장)에 매일 몰려가서 통곡한다. 홍영표는 기업소의 조의장에 몰린 조문객들 사이로 들어가 누가 진심으로 조의를 표하는지를 조사한다.
   <막상 단 위에 꽃송이를 놓고 “어버이 수령님!”하며 묵도를 시작하는 큰 숙이 어머니와 마주 하는 순간 홍영표는 불시에 등이 으쓸해졌다. 정말 그녀의 두 볼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녕 그것이야말로 홍영표가 지금껏 생각해본 일도 없었고, 설사 생각해 보았댔자 믿을 수도 없었을 몸서리나는 광경이었다.>
   홍영표는 남편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 갔으니 숙이 어머니는 형식적으로 조의를 표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숙이 어머니는 ‘무대자감’에 충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령 큰 숙이 어미 같은 사람도 ‘어버이 수령님!’하는 슬픈 소리나 꺼이꺼이 대는 울음소리는 지어낼 수가 있다고 하자. 그러나 눈물까지야 어떻게 나올 수가 있는가 말이다.>
   이어지는 아들과의 想像(상상) 대화가 이 단편집의 名장면이다.
   “그게 바로 무대자감이라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 그 자감이라는 거면 큰 숙이 에미가 눈물까지도 흘릴 수가 있지. 허나 그건 배우들에게만 있는 거야.”
   “그럼 그가 배우라는 걸 아직도 모른단 말이요? 그 여자도 자감 연습극 <아프다 하하하>, <간지럽다 엉엉>의 45년생이라는 걸 아직두 모르는가 말이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매서운 눈들과 귀들과 주먹들로 그에게 45년간이나 직접 훈련을 시켜오고도 모른다니 말이 됩니까?”
   홍영표는 이 끔직한 ‘수령극’에서 감시자 역할을 해온 자신이 그 구미호 같은 숙이 어머니를 만들어낸 장본인이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자감 연극은 성공했지만 홍영표는 인간으로서 살아갈 의욕을 잃는다. 아니 의미를 잃는다.
   <한방의 권총 소리가 7월의 밤대(밤대기, 밤공기)를 찢었다. 자감극의 사나운 감독이자 그 역시 그 극의 일개 명배우였던 홍영표는 동업자들보다 한 발짝 앞서 자기 연극무대의 막을 내렸던 것이다.>
   체제유지의 첨병이었던 보위원의 자살은 체제의 자살을 상징한다.
  
   '웃음꽃이 피는 지옥'
  
   일곱 편의 단편에 연극이 소재로 자주 나오는 것은 북한 체제의 중요한 작동 원리가 연극이기 때문이다. 어버이 수령님과 인민은 지상 최대의 연극을 연기하듯이 살아간다. 평양은 그 중심 무대이다. 종국엔 연기와 삶이 일체화된다. ‘무대자감’인 것이다.
   연극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연극은 <아프다 하하하>, <간지럽다 엉엉>이다. 아파도 웃어야 하고, 간지러워도 울어야 한다. 보통 독재자는 公的 생활을 통제한다. 전체주의 독재자는 인간의 私생활까지 통제한다. 김일성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감정까지 통제한다. 아파도 웃도록. 전체주의 독재보다 더 심한 것이 이런 '감성독재'이다. 반디는 김일성이야말로 전체주의 독재에 머문 스탈린과 히틀러를 능가한 최악의 독재자였음을 고발한다.
   ‘복마전’은 길을 가다가 우연히 김일성을 만난 할머니가 수령님의 자애로움을 선전하는 자료로 이용되는 과정을 소재로 삼았다. 할머니가 김일성이 내어준 자동차를 타고 歸家(귀가)하는 사이에 영감(남편)과 손녀는 기차역에서 기다리다가 몰린 승객들 사이에서 압사당할 뻔한다. 두 사람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실려와 집에 누워 있는데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선 연일 수령의 미담 방송이 계속된다. 할머니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선전방송에 시달린다. 영감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화도 난다.
  <양쪽 손톱을 동시에 뽑히는 듯한 고통을 당한 오씨를 선창자로 하는 ‘행복의 웃음’ 소리!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을까? 그 어떤 잔학한 마술의 힘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뭇사람들의 고통의 울부짖음을 ‘행복의 웃음’으로 둔갑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반디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오늘까지 바로 그 마귀의 마술 속에서 진실과는 판이한, 완전히 전도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적었다. 아파도 “하하하”라고 웃을 수밖에 없는 북한은 늘 '웃음꽃이 피는 지옥'이다. 아파도 웃어야 하는 拷問(고문)이야말로 가장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복마전’은 맞아도 “아프다”고 할 자유가 말살된 체제의 정곡을 찌른 寓話(우화) 같은 작품이다.
  
   솔제니친보다 더 절박한 반디
  
   리굴로 씨는 프랑스 지식인들이 함께 쓴 '공산주의 黑書(흑서)' 중 북한 부분을 쓴 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고발'을 소련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 群島(군도)에 비교하면서 나에게 이렇게 충고하였다.
   "反共 인권 운동은 반드시 문학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고발'이 그런 힘을 갖고 있습니다."
   리굴로 씨는 프랑스 번역본 書評(서평)에서 이렇게 썼다.
   <폭압적인 체제를 고발하는 작가의 모습은 우리에게 舊소련에서 공산체제를 비판하는 소설을 쓰고 해외에서 발표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던 1970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솔제니친을 연상시킨다. ‘반디’는 여러모로 솔제니친과 매우 닮았다. 그는 주민들을 짓밟고 특혜를 누리며 직권을 남용하는 북한 정권의 간부와 경찰들을 고발하는 한편, 척박한 환경 속에서 단지 살아남기만을 소망하는 이들과, 조악하고 거짓된 감정에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우스꽝스러운 연극놀음에 참여할 것을 강요 받는 일 없이, 스스로 느끼는 진실된 감정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을 희망하는 이들에 대해 감탄 섞인 존경심을 표명한다. '무대'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단편 소설에서 작가는 북한주민 모두가 어린 시절부터 강제로 동원되는 슬픈 연극놀음에 대해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소련 시절 스탈린의 득의 양양한 거짓말을 폭로했던 솔제니친을 발견한다.>
   리굴로 씨는 반디가 솔제니친보다도 더 위험한 상황에서 소설을 쓴 점에서 차이도 있다고 지적한다.
   <솔제니친과 ‘반디’ 사이는 미묘한 차이점도 존재한다. 솔제니친은, 舊소련 정부의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기를 원했던 고르바초프가 1990년 그의 시민권을 복원시키고 1991년에는 반역 혐의를 기각하자, 自國으로 돌아와 스탈린 시대의 강제 노동 수용소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폭로한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출간할 수 있었다. 반면 ‘반디’는 단편 소설들을 모아 비밀리에 외부 세계로 보내 출판하였고, 솔제니친이 그랬던 것처럼 정권을 비판하거나 공개적으로 검열을 중단할 것을 호소할 수 없으며 솔제니친처럼 단순히 ‘암흑천지의 자본주의 사회’로 추방되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랄 수도 없다.>
  
   북한정권이 말살하지 못한 자유정신
  
   리굴로 씨는 단편의 특성에 어울리는 상징과 은유의 문학적 기법이 절묘하게 사용된 점을 높게 평가하였다.
   <‘반디’의 단편집에서도 독자들은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들을 찾아내야 한다. 빨간 버섯은 공산당이 뿌려놓은 독버섯이다. 새장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멧비둘기들을 떠나보내기 위해 새장을 부숴야만 하는 상황은 북한 주민들의 복잡한 실상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유령의 도시'에서는 연약한 아이를 두려움으로 몰아넣는 김일성의 초상화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의 폭압적인 면을 보여준다. 소설 전반에 걸쳐 독자들은 조롱, 嘲笑(조소), 어딘가 舊소련의 알렌산드로 지노비예프 작품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冷笑的(냉소적)인 유머가 조금씩 섞여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고발' 속 두 개의 단편 소설에서는 정말로 순수하게 인민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삶을 헌신했다가 체제에 기만 당하고 배신당하는 순진한 공산주의자들도 등장한다. '준마의 일생'에서 설용수와 그의 오랜 친구는 공산주의 체제가 약속했던 꿈을 이룩하고 실현하기 위해 북한 정권에 평생을 헌신한다. 그러나 설용수의 친구는 일평생 땀 흘려 고된 노동만 하다가 죽음을 맞게 된다. 공산당원으로 입당하던 날 기념으로 심은 느티나무, 그는 결국 참담한 현실을 인정하며 나무를 베어버리고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스탈린 체제를 풍자한 소설)에도 복서라는 말이 '나폴레옹'이란 별명을 가진 독재자(돼지)에게 충성을 다 바쳤으나 쓸모가 사라지자 비정하게 폐기처분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리굴로 씨는 '고발'이야말로 북한정권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살하는 데 실패하였다는 증거물이라고 평하였다.
   <북한정권은 삶을 파괴하고 희망을 짓밟으며 현재와 미래를 무너뜨리지만 인간의 감정까지 조정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인간의 知性(지성)과 감정은 살아서 저항하기 때문이다. ‘반디’라는 필명의 북한 작가가 이를 입증하는 산 증인이다.>
  
   선동
  
   반디는 일곱 편의 단편 중 마지막에 ‘빨간 버섯’을 배치하였다. '고발'의 결론이고, 鮮血(선혈)한 문학적 선동이다.
   주인공 고인식은 성실하기 짝이 없는 醬(장)공장 기사장이다. 한 도시의 된장 공급을 위하여 열심히 일했지만 그 성실성이 오히려 질투를 불러 공개 재판에 붙여진다. 市黨(시당)에선 된장 배급이 중단된 책임을 고인식에게 씌워 인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려 하는 것이다.
   군중들을 모아놓고 하는 공개재판에서 재판소장이 묻는다.
   “피고 고인식은 기소된 죄과들을 인정하는가?”
   고인식은 군중들의 머리 너머 시내 중심가 쪽을 멍청히 응시한 채 백치와도 같이 시물시물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빨간 버섯을 닮은 市黨(시당) 청사를 보면서 <족쇄 찬 두 손으로 무엇을 하나하나 비틀어 뽑듯 하며 ‘요거, 요거!’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그를 취재하였던) 허윤모 기자는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고인식은 외치듯 중얼거린다.
   “저기···. 저기에 아직두 있구나! 여보시오. 그 빨간 버섯을 뽑아버리고 가시오. 무서운 겁니다. 그게! 여보시오···”
   고인식의 ‘빨간 버섯’을 알 사람은, 고인식이 북한노동당에 의하여 이용당하고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과정을 지켜본 허윤모와 직장 동료들뿐이다. 고지식하던 고인식의 영혼이 이제야 불타 오른 것이다.
   <고인식의 백설 같던 넋은 이제야 이 땅에 뿌리박힌 독버섯을 알아보고 독재와 회유와 기만과 억압으로 얼룩진 그것을 뽑아보려 필사의 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 독버섯을 뽑아버려라'
  
   고인식을 동정해온 허윤모 기자도 ‘빨간 버섯을 뽑아 버리고 가시오’라는 말에 感化(감화)된다. 그에게 고인식은 ‘자기의 전부를 바쳤던 것으로 인해 자기의 전부를 잃은 사람’이다. 그도 고인식의 희생에 분노한 눈으로 시당 청사 ‘빨간 버섯’을 直視(직시)한다.
   <얼마나 많은 귀중한 생명들이 저 毒素(독소)에 희생되고 있는 것인가! 과연 그 사자머리의 마도로스 파이프가 지껄였다던 구라파의 붉은 유령이 이 땅에 뿌린 것이, 인간의 모든 불행과 고통의 禍根(화근)인 저 빨간 버섯의 씨앗 따위였단 말인가!>
   으스러지게 주먹을 들어 쥐고 ‘벽돌집’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허윤모의 가슴 속에서는 고인식이 미처 외치지 못한 절규가 처절하게 울려오고 있었다.
   “저 빨간 버섯, 저 독버섯을 뽑아버려라. 이 땅에서 아니, 지구 위에서 영영!”
   적어도 반디의 상상 속에선 프롤레타리아 독재 타도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고인식에 의하여 혁명가로 변신하게 되는 허윤모 기자는 반디 자신을 모델로 한 지식인일 것이다. 일곱 편의 단편 속에서 북한정권과 맞서기로 결심하는 이는 고인식과 허윤모 두 사람이다. 반디는 책의 마지막 문장을,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향하여 쏘았다.
   “저 빨간 버섯, 저 독버섯을 뽑아버려라. 이 땅에서 아니, 지구 위에서 영영!”이란 부르짖음은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에 대응한다. 이 소설이 북한에서 읽혀진다면 마지막 구절이 북한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큰 파문을 일으킬 것이다. 이 책은 南에서는 물론이고 北에서 읽혀져야 할 소설이다.
  
   북한인의 독후감
  
   '고발'을 읽은 북한 사람이 있다. 조갑제닷컴이 실시한 독후감 현상 공모에 응하여 아래와 같은 글을 중국을 통하여 보내왔다. 북한에 사는 작가가 쓴 反체제 소설을, 한국의 출판계를 매개로 하여 북한 사람이 읽었다는 건 하나의 사건이다.
   '刀盡(도진)'이라는 필명의 북한인은 <이 소설은 김일성을 우상화한 북한의 시인과 작가들을 고발한다>고 평하였다.
  
   <암흑의 땅 북녘에서 보냅니다.
   나의 감상문에서는 남한, 북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 그리고 '고발' 책을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는 여기에서 밝힐 수는 없다. 다만 책으로 만들어진 모습이 아니라 한 장 한 장 사진처럼 찍힌 것이라고만 이야기하겠다.
   반디의 고발을 세 번째로 읽어본다. 읽어볼수록 그 의미가 깊은 소설이라는 게 안겨온다. (중략). 반디의 소설은 남한 독자들에게는 수령독재에 신음하는 북한주민들에 대한 동정과 함께 안타까움을 느끼게 할 것이다. “왜 들고 일어나 싸우지 못하느냐? 3달째 배급을 못 타고 굶주리면서도, 남편을 수용소에 보낸 아내도 어버이 수령님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연기를 해야 하는 그런 독재체제를 반대하여 왜 들고 일어나지 못하느냐? 왜 자유를 위해 투쟁하지 못하느냐? 북한에는 무지렁이들만 모여 있단 말인가?”
   이것이 남한 독자들의 안타까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북한에 살고 있는 나도 늘 하는 것이다.
   반디의 소설을 곱씹어 읽어보면서 철학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거대한 집단 최면술에 걸린 것과 같은 북한 2000만 주민을 꼼짝 못하게 묶어놓은 정신적 근원이 어디 있는가를 사실 그대로의 이야기를 통해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수령만을 위한 사회 그 속에서 신음하면서도 자기의 감성마저 죽은 수령을 위하여 억제당하는 독재체제는 처형과 수용소라는 공포통치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수령 독재체제가 인민들의 정상적인 사고를 마비시키는 통치철학을 가지고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2000만 인민이 여기에 마취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내가 사는 이 땅의 암흑은 장본인이 김일성이다. 하지만 지금도 북한주민의 90%는 이런 생각을 못 가지고 있다.
   '김일성은 항일의 전설적 영웅이다. 락후했던 식민지 반봉건 국가였던 우리나라를 경제강국으로 올려 세워 놓았던 위대한 수령이고, 자애로운 인민의 어버이였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이 꼴이 된 것은 김정일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정치를 기대해볼 게 없지만 김일성이 만들어 놓은 이 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김일성처럼 정치를 잘 하면 이제라도 바로 잡힐 수 있다.'
   이런 인식이 있어 그렇듯 참혹한 인권유린 속에 신음하면서도 순한 송아지 마냥 눈물만 흘릴 뿐 뿔질 한번 없는 것이다. 이 인식을 바꾸어 놓지 않는다면 이 땅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기대하기 어렵다. 김일성과 같은 인민의 수령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릴 뿐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불길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반디는 소박하고 꾸밈새 없는 단편 이야기로 여기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하였다. 반디는 유령의 도시에서 이렇게 썼다.
   '저 마르크스가 내놓은 모든 리론 중에서 가장 위대한 리론이 뭔지 아오? 그건 자본론도 과학적 공산주의 건설 리론도 아닌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리론이요, 프롤레타리아 독재 리론!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에 이 도시 사람들은 누구나 다 토영삼굴을 따르며 살고 있는 거요.'
   한 마디의 말이지만 한 생에 걸쳐 깨달은 반디의 인식관이 집약되어 있다. 공산주의 리론은 모든 사람들이 착취와 압박이 없는 사회에서 살게 해주겠다는 약속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후려잡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그것은 계급투쟁을 말한다. 계급투쟁에는 원쑤의 구분을 국가나 민족 단위로 정하지 않는다. 재산과 지식의 유무(有無)나 사상이나 리념의 차이가 원쑤를 구분하는 기준점이다.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같은 민족이라도 같은 마을 사람이라도 다 죽이겠다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끝나는 시점이 공산주의라고 정의한다.
   결국 공산주의는 투쟁을 위하여 세상에 태어났다. 투쟁대상이 없어질 때까지 자기들끼리 싸워야 한다. 평양의 김일성 광장에는 마르크스와 김일성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마르크스가 내놓은 리론을 김일성이 실현시켜 준다는 의미이다. 결국 김일성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그 누구든 프롤레타리아 독재 대상이 되는 것이다. 반디는 유령의 도시라는 짧은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정신을 휘여 잡는 악마의 통치철학에 대하여 까밝히고 있다.(중략). 반디의 소설은 북한의 수령전체주의 실상을 폭로하였다는 데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김일성의 '인자함'의 본질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는 데 그 가치가 있다고 본다. 北 주민들은 자기들이 겪고 있는 불행과 고통을 절대로 김일성과 결부시켜 생각하지 않는다.
   어릴 때의 기억이 한 가지 나는 것이 있는데 국어시간에 배웠던 조기천의 장편서사시 '백두산' 이다.
   북쪽 땅에서 태어난 사람치고 이 시를 배우고 항일의 전설적 영웅 김일성에 대해 흠모하고 존경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던가? 나 역시 김일성의 위대함에 완전히 넋을 빼앗겼댔다. 그 시를 지금도 기억한다. 조기천은 시에서 김일성을 우리 민족을 구원한 빨찌산 대장,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하였다. 우리 민족을 이끌 위인으로 노래하였다. 거짓과 위선으로 이루어진 이 詩가 2000만의 넋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조기천은 이 시를 1946년에 썼다. 그 전까지는 우리 인민들이 김일성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김일성은 항일전의 공로가 아니라 이 시로 인하여 민족의 영웅으로 되었다.
   내가 시인 작가들을 혐오하는 리유가 여기에 있다. 아직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의 권리와 자유를 빼앗은 장본인이 김일성이라는 데 대해 생각하는 것을 죄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 나라의 시인 작가들은 독재자의 賣文(매문) 문필가로써 민족 앞에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질렀는가를 반디 선생의 분노의 작품 앞에서 돌이켜 보아야 한다.
   반디의 비판정신, 항거정신을 따라 배워야 한다. 반디의 작품은 이 땅의 매문 문필가들의 심장을 찌를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투쟁 방향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세습독재 하에서 신음하는 2000만 인민들에게, 독재정권의 창시자이며 봉건 조선을 재건한 김일성의 실체를 바로 알려주는 투쟁의 시작을 말이다.
   암흑의 땅 북녘에서 刀盡(도진) 올림.>
  
   남한 지식인의 위선에 대한 고발
  
   이 북한 사람은 반디의 목숨을 건 문학이, 김일성을 우상화한 北의 가짜 문학인을 고발하고 있다고 적었는데, 나는 '고발'이 북한정권을 고발하지 않는 남한의 문학인도 고발하고 있다고 본다. 이 단편집을 다 읽고 나면 반디의 自敍(자서)대로 '피눈물에 뼈로 적은' 글이란 실감이 온다. 대중 소설에 흔한 지나친 작위성도 없다. 名作처럼 자연스럽다.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한국어를 썼다. 한글專用으로 암호화된 한국어를 구사하는 문학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늘 의문이었는데, 반디는 土俗(토속) 한국어로 눈에 선한 光景(광경)과 心境(심경)을 그렸다. 漢字의 장점은 고급 언어에 필수적인 개념성과 관념성인데, 한글로만 표기할 수 있는 토속 한국어의 장점은 자연 현상을 표현하는 生動하는 맛이다.
   서구 지식인의 가장 큰 타락이 스탈린의 대학살을 비호한 것이었듯이 한국 지식인의 가장 큰 타락은 김일성을 비호하고 주체사상을 비판하지 못한 것이라는 역사적 평가가 머지 않아 내려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반디의 '고발'은 '붉은 魔王(마왕)'의 잔인한 압박을 이겨낸 인간승리이자 문학의 존재증명이며, 북한체제뿐 아니라 남한 지식인의 위선에 대한 고발장이기도 하다.
  
  
   반디의 ‘고발’이 세계적 관심사가 된 이유는 고발성보다는 문학성에 있다. 고발적 행동도 문학적으로 승화되어야 보편성을 갖게 되고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 반디는 단편집 '고발'과 함께 50여 편의 詩(시) 모음 원고도 보냈다. 한국적 韻律(운율)에 맞춘 풍자가 사실적 비판보다 더 신랄하다. 그의 문학성을 확인하는 뜻에서 몇 편을 골라 싣는다.
  
   붉은 백성의 노래
  
   수령님 수령님 수령님
   당신은 하늘 우리는 벌레
   아무런 벼락이나 다 내리십소
   그저그저 사랑한단 그 말만 말아줍쇼
   그 작은 소원만을 들어준대도 쭉 물어 찢을 생각 안 나오리다.
  
   수령님 수령님 수령님
   당신은 째찍 우리는 마소
   맘대로 때리고 내모시십소
   그저그저 굶지 않고 안춥게만 해주십쇼
   그 작은 소원만을 들어준대도
   씽 받아 넘길 생각 안나오리다.
  
   수령님 수령님 수령님
   당신은 철쇄 우리는 노예
   맘대로 얽어매고 묶으시십소
   그저그저 눈 귀 입만 틀어막지 말아줍쇼
   그 작은 소원만 들어준대도
   콱 둘러메칠 생각 안 나오리다.
  
   김주석의 노래
  
   우리 인민은 참 좋은 인민
   고삐만 툭 채여도 그 뜻을 제꺽 알고
   좌로 우로 앞으로 씨엉씨엉 나가네
   내 한생 총칼로 길들인 보람있어
   찍짹소린 애초 모르는 참 좋은 인민이네
  
   우리 인민은 참 좋은 인민
   채찍만 쳐들어도 그 뜻을 제꺽 알고
   돌발길 비탈길도 히엉히엉 오르네
   내 한생 총칼로 길들인 보람있어
   찍짹소린 애초 모르는 참 좋은 인민이네
  
   우리 인민은 참 좋은 인민
   헐입고 헐먹여도 천리만리 달리는
   누구에게 선보여도 손색없는 인민이네
   내 한생 총칼로 길들인 보람있어
   찍짹소린 애초 모르는 참 좋은 인민이네.
  
  
   오적 타령
  
   씨구씨구 씨구씨구 이놈세상 망할씨구
   먹물같은 가슴헤쳐 오적타령에 들어간다
  
   달구렁이 담넘듯이 번개불에 콩닦듯이
   잘도잘도 해제낀다 나라공금 나라식량
   당기관은 당당하게 소리치며 먹어대고
   행정부는 행방없이 엄벙덤벙 먹어댄다
   코끼리 과자먹듯 알방게 눈감추듯
   홀닥홀닥 다 삼킨다 백성들의 협낭까지
   보위부는 보이잖게 살금살짝 해치우고
   안전부는 안전하게 슬금슬금 해제낀다
  
   이 도적놈 저 도적놈 그중에도 왕도적은
   배뚱뚱이 김부자놈 천하제일 명적이라
   온나라의 공장 농촌 한엉치에 깔고앉아
   백주에도 뚝뚝뜯어 제맘대로 탕진한다
  
   씨구씨구 씨구씨구 이놈세상 망할씨구
   먹물같은 가슴터쳐 오적잡이에 떨쳐나세.
  
  
  
   꽃제비 노래
  
   걸친 것은 누더기 얼굴은야 까마귄데
   꽃제비라 우리 이름 어이 이리 고울까
   거지라고 이름 달면 공산세상 수치라고
   꽃제비라 로동당이 고운이름 달아줬소
   지지배배 우리는 세상에 없던 새
   지지배배 우리는 로동당이 낳은 새.
  
   아이제비 어른제비 늙은제비 부부제비
   쓰레기를 뒤져대며 다리밑을 헤메이며
   먹이찾아 요리조리 잘곳 찾아 이리저리
   제비처럼 헤멘다고 꽃제비라 달아줬소
   지지배배 우리는 세상에 없던 새
   지지배배 우리는 로동당이 낳은 새
  
   청제비는 한해에 한배새끼 치지마는
   꽃제비는 날마다 떼거리로 늘어나오
   방방곡곡 어디에나 꽃제비떼 넘쳐흘러
   북녁땅은 꽃제비 꽃제비 세상 됐소
   지지배배 우리는 세상에 없던 새
   지지배배 우리는 로동당이 낳은 새
  
  
  
  
   꿈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새 세상 밝았다 새날이 왔다
   자유의 종소리 뎅뎅 울리고
   저 하늘의 새들도 훨훨 춤춘다
  
   사슬소리 채찍소리 소름치더니
   철창문 열렸다 활짝 열렸다
   벗들아 자리차고 일어나거라
   자유의 저 종소리 못들었느냐
   아 만세만세 만만세 자유 만만세
  
   자갈을 물었던 입 맘껏 벌리고
   부르고 싶던 노래 맘껏 부르자
   빼앗겼던 눈과 귀고 마음껏 열고
   이 세상 넓은 세상 맘껏 맛보자
   아 만세만세 만만세 자유 만만세.
  
  
  
   기다리던 내 님은
  
   나의 님은 이성이 아니였소
   나의 님은 땅이였소 하늘이였소
   마음대로 디디고 숨 쉴 수 있는
   그런 하늘 그런 땅이 기다리던 내 님이였소
  
   한평생 그렸소 머리 희도록
   꿈속에서도 불렀소 피가 타도록
   철창 없는 감옥인 이북 땅에서
   기다리던 나의 님은 대한민국 품이였소.
  
  
  
  
   어머니 생각
  
   등잔불 등잔불이 조용히 불탔네
   언제나 찬바람 비껴드는 창가에서,
   바람결에 팔랑팔랑 끝없이 고달파도
   가냘픈 한몸으로 집안을 밝혀줬네
  
   밥상가에 오롱조롱 옷음꽃 날리며
   누구하나 못 돌봐도 저 홀로 그냥 탔네
   마른 기름 다 탄 심지 그래도 가물가물
   한몸다해 타고 타다 고요히 숨지였네.
  
   못견딜 괴로움도 홀로 안고 불태웠네
   말못할 외로움도 속절없이 불태웠네
   홀몸자식 다섯지켜 한생 타신 그 등불을
   나 왜 미처 몰랐던가 어머니 어머니.
  
  
  
  
  
  
  
  
  
  
  
  
  
  
  
  
  
  
  
[ 2016-04-02, 10:5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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