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中陵과 感恩寺에서 통일대왕과 만나다
文武大王이 간다(2)/감동적 유언에서 드러나는 위대한 人格

鄭淳台(작가)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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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의 수중릉(水中陵) 

문무왕과 시공(時空)을 뛰어넘는 대화는 어디에 가면 가능할 것인가? 역시 奉吉里(봉길리: 경주시 陽北面) 앞바다에 위치한 그의 수중릉(水中陵)부터 찾아가야 할 것 같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곳을 그의 뼈가 뿌려진 산골처(散骨處)라고 주장하는데, 그래도 좋다. 어떻든 그곳은 우리 민족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大王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고뇌했던 민족사 최고 영웅과 이 땅에 살고 있는 오늘의 인간들 사이에 血脈(혈맥)의 마디마디를 이어주는 민족 정체성(正體性)의 현장이기도 하다.

필자는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陽北面 奉吉里) 해변에서 동해 바다와 마주섰다. 포효하는 파도의 물결이 계속 밀려왔다 포말을 일으키며 하얗게 부서진다. 해변 모래사장에서 200m 거리의 바다 가운데에 그리 크지 않는 자연 바위가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문무왕의 수중릉이다. 1996년의 답사 때만 해도 봉길리 해수욕장에서 뱃삯을 지불하고 모터보트를 타면 주변 해역을 한 바퀴 빙 돈 뒤에 대왕암에 下船(하선)할 수 있었다.

대왕암은 멀리서 보면 바위섬이지만, 막상 그곳에 올라가 보면 바닷물이 드나드는 작은 못의 둘레에 자연 암석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못의 바닥에는 길이 3m 가량의 편평한 돌이 얹혀 있다. 사방이 열십자(十) 형으로 트인 좁은 수로(水路), 그 동쪽 수로를 통해 흘러들어온 동해의 바닷물이 서쪽 수로의 턱을 슬쩍 넘어서 다시 바다로 빠져나간다. 그날, 대왕암 바깥에서는 파도가 제법 거세게 쳤지만, 대왕암 안쪽의 바닷물은 의외로 잔잔했다.

혹시, 못 속의 편평한 바위 밑에 유골함을 안치했던 흔적이라도 남아 있지나 않을까? 필자는 바닷물 속에 얼굴을 파묻고 바위 밑바닥 주변을 샅샅이 살폈지만, 그런 것이 들어갈 만한 人工(인공) 구조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문무왕은 나당전쟁에 승리해 삼국통일을 완수한 우리 민족사의 대영웅이다. 그렇다면 그의 후계자는 왜 대왕의 능을 번듯하게 지어 모시지 않고, 하필이면 동해구(東海口)의 바위 속에다 장사를 지냈던 것일까? 역사의 기록(三國史記)에 따르면 수중릉에 문무왕의 유골을 모신 것은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문무왕의 유언은 참으로 산뜻하다.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오왕(吳王: 孫權·손권)의 北山 무덤에서 어찌 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을 것이며, 위주(魏主: 曹操·조조)의 西陵(서릉)은 동작(銅雀)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 옛날에 만기(萬機)를 총람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의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사서(史書)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혼백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문무왕은 합리적이고 겸허했다. 그는 매머드급(級) 무덤을 짓기 위해 백성들을 노역으로 모는 것이 후세의 비판거리이며, 무덤 주인공인 자신을 위해서도 부질없는 일임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이다. 이런 實用主義(실용주의) 노선이 아니었다면, 삼국통일의 완수는 불가능했고, 지금 한민족(韓民族)은 중국의 50여개 소수민족 중 하나로 전락해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사 최대의 역사발전 

삼국통일은 한국사 최대의 역사 발전이었다. 우선, 사람의 해골로 산야가 뒤덮혔던 300년의 난세를 치세(治世)로 바꿔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켰다. 삼국통일로 坐食者(좌식자), 즉 놀고 먹던 사람이 최소한 30% 이상 격감했기 때문이다.

사서(史書)에 다르면 고구려에는 좌식자의 수가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좌식자는 거의 전문전사(專門戰士)들이었다. 고구려의 전성기 영토는 백제+ 신라보다 5배 넓었지만, 당시의 첨단산업인 쌀 생산량은 한반도 남부지역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후세(조선왕조 영조 시기)의 지리지인《擇里志》(택리지) 등을 참고한 필자의 추정이다, 다음은 이어지는 문무왕의 유언으로, 간소한 장례를 거듭 당부했다.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 아니다. 숨을 거두면 바깥 뜰 창고 앞(庫門外庭)에서 나의 시신을 불교의 법식에 따라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輕重)은 본래의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

문무왕은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라고 지시한 우리 역사상 최초의 君主(군주)이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그 유골이 동해바다의 자연바위 안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임종의 자리에서도 당-왜 연합을 경계한 문무대왕

《三國遺事‧ 삼국유사》에 인용된 감은사사중기(感恩寺寺中記)에 의하면 문무왕은 왜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왕암 건너편 해안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별세했고, 죽어서는 동해의 해룡(海龍)이 되었다고 한다. 세계제국 당과의 7년전쟁에서 승리한 문무왕―그런 그가 사후(死後)에 호국룡(護國龍)이 되어 왜적을 막겠다고 서원(誓願)했다. 그럴 만큼 신라에게 왜국은 겁나는 존재였을까?

이 점에 대해선 뒤에서 상술(詳述)할 것이지만, 당시의 수퍼파워 唐과 사생결단의 전쟁을 벌였고, 문무왕의 임종 시점(681년)까지 나·당 간의 긴장관계가 해소되지 않았던 신라의 입장에서는 배후의 일본이 엄청 겁나는 존재였다. 비록 당군이 압록강 以北의 요동(676년)→무순 지역으로 철수하기는 했지만, 당시 급변하던 西域(서역)의 정세에 따라서는 언제든 한반도에 대한 再침략의 가능성이 있었다.

전쟁 재개의 결정권은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신라가 아니라 아직도 東아시아 최강국인 당이 보유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당과 일본이 제휴한다면 신라에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병력상의 절대 우위에다 공성전(攻城戰)에 능숙한 당군, 기마전에 숙달된 말갈군·거란군, 그리고 배후에서 침략군의 병참 지원이 가능한 일본군이 연합한다면 신라는 단 몇 달도 견뎌낼 수 없었을 터였다.

나당전쟁 전후(前後)의 신라-왜국 관계를 추적하면 문무대왕은 당-왜 동맹을 깨기 위해 혼신의 외교력을 기울였다. 겉으로는 왜국에 친선의 메시지를 계속 던지면서도, 속으로는 당-왜 연합의 침략에 대비하는 국가전략―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에 깔고 문무대왕의 수중릉을 마주 대하면 그것은 사무칠 만큼 장엄하다. 그는 피맺히게 고뇌했던 인간이었다.

한국 역사상 그처럼 파란만장한 亂世(난세)를 극복한 인물은 아무도 없다. 그의 유언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과인은 어지러운 때에 태어난 운명이어서 자주 전쟁과 마주했다. 서쪽을 치고, 북쪽을 정벌하여 강토를 평정하였으며, 반란자를 토벌하고, 화해를 원하는 자와 손을 잡아, 원근(遠近)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선조의 유훈(遺訓)을 받들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원수를 갚았으며, 전쟁 중에 죽은 자와 산 자에게 공평하게 상을 베풀었고, 안팎으로 고르게 관작을 주었다.>

676년 11월, 문무왕은 당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민족사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이후 5년간 그는 당의 재침에 대비하는 한편으로 민생의 안정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이어지는 문무왕의 유언이다.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천수(天壽)를 다하도록 하였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백성들은 제 집을 편안히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없어졌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 가히 선조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백성들에게도 짐진 것이 없었다고 할 것이다.> 

문무왕은 재위 21년 만인 681년 7월1일, 56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훨씬 후세인 조선왕조 임금의 평균 수명이 44세였던 만큼 문무왕이 단명(短命)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역시 삼국통일을 완수하는 데 一身(일신)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소진한 탓이라고 해도 좋다.  

<내가 풍상을 겪어 드디어 병이 생겼고, 정사(政事)에 힘이 들어 더욱 병이 중하게 되었다. 운명이 다하면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古今)에 동일하니, 홀연 죽음의 어두운 길로 되돌아감에 무슨 여한이 있으랴! 태자는 일찍부터 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동궁(東宮)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를 보내는 의리를 잊지 말고, 산 자를 섬기는 예를 잊지 말라. 종묘의 주인 자리는 잠시라도 비워서는 안 될 것이니, 태자는 내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그의 죽음 후에 정해진 文武大王(문무왕)이라는 시호(諡號)는 그냥 부여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마상(馬上)에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했고, 세계제국 당과의 7년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武 ’라는 글자를, 신라국가의 각종 제도 개혁 및 민생 개선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文’이란 字를 받았던 것이다. 그의 유언은 다음 구절로 끝을 맺는다.  

<변경의 성과 요새 및 州(주)·郡(군)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는 것은 잘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오, 법령과 격식(格式)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어서 알릴 것이며, 원근에 선포하여 이 뜻을 알게 하라. 태자는 왕이 되어 이를 시행하라! > 

봉길리 바로 북쪽 감포(甘浦) 해안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利見臺(이견대)로 올라갔다. 이견대에서 동해 바람을 맞받으면 오장육부가 시원해진다. 이곳은 문무왕의 화신인 해룡을 앞바다에서 보았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682년 5월, 신문왕(神文王)은 이곳에서 해룡으로 화한 선친(先親) 문무대왕으로부터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 만파식적이라 불리는 피리는, 그것을 불기만 하면 천하가 화평해진다 하여, 신라 국보로 삼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문무대왕은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하고, 나라를 지키는 해룡이 되려고 간절히 서원(誓願)했던 인물이다.  

감은사의 쌍탑은 오후 3시쯤에 더욱 빛난다  

이견대를 출발해 서쪽 1.5km 거리의 감은사지(感恩寺址)에 일부러 오후 3시에 도착했다. 이 시각이면 감은사지의 쌍탑이 햇볕을 정면으로 받아 그 위용이 더욱 돋보이기 때문이다. 역시 감은사지 3층 석탑은 삼국통일을 이룩해 낸 신라인의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감은사 터의 동·서 3층 석탑은 우리 국보 제112호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걸작으로서 장중하면서도 상승감을 느끼게 한다. 감은사는 신문왕(神文王)이 부왕(父王)인 문무대왕의 뜻을 이어 완공했던 절이다. 처음, 이곳에 절을 세우려 했던 창건주는 문무대왕이었다.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진국사(鎭國寺)라고 정했다. 그러나 대왕은 절이 완공되기 전에 죽었다.

생전에 문무대왕은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해룡이 되겠다”고 서원(誓願)했다. 그래서 금당(金堂) 아래에 용혈(龍穴)을 파서 해룡으로 환생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구조를 했다. 1996년, 필자는 보수공사 중인 감은사 금당(金堂) 바닥 아래에 높이 1m의 석조(石造) 통로가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는 감은사의 山門 바로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맞춰보면 그 의미가 심장하다. 과연, 석조 통로로 해룡이 드나들었지는 신심(信心) 차원의 문제인 만큼 필자로서는 거론할 영역이 아니다. 감은사는 황룡사·사천왕사와 함께 호국사찰로 명맥을 이어왔으나, 임진왜란을 전후(前後)한 시기에 폐사(廢寺)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두 탑은 같은 구조와 규모이다. 제일 윗부분인 찰주(擦柱)의 높이까지 합하면, 국내에 현존하는 석탑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신라 석탑 중에서 비교적 초기 형태지만, 조형미는 최고 수준이다. 높이는 각각 13.4m이며,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상·하 2층으로 형성된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이다. 1959년 서쪽 3층 석탑이 해체 복원되면서 왕이 타는 수레 모습의 보련형(寶輦形)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감은사는 일당쌍탑(一堂雙塔)의 가람으로서 남북 회랑(回廊)의 길이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게 구조된 점과 동서의 회랑을 연결하는 익랑(翼廊: 문의 좌우편에 잇대 지은 행랑)을 둔 점이 특이하다. 동·서탑의 중앙부 후면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금당(金堂) 터가 있다.  

[ 2016-09-01, 10:4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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