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를 살린 토번의 唐 침공
문무대왕이 간다(11)/금세 토번과 唐이 다시 긴장관계로 돌아섰다. 675년 2월, 唐고종은 칠중성을 막 점령한 유인궤를 서역 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본국으로 소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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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5년 9월29일, 신라 9군은 이근행이 지휘하던 말갈군단 20만 명과 매소성에서 대치했다. 설인귀의 임진강 하구의 泉城 전투 패배로 병참선을 유지할 수 없었던 이근행 軍은 전면 퇴각을 서둘렀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戰馬 3만380 필과 많은 무기·장비를 노획했다. 보급이 끊긴 이근행의 말갈군단은 퇴각하면서 약탈전을 자행했다.

674년 1월, 唐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취소하면서, 문무왕의 동생인 金仁問(김인문)을 신라국왕으로 명한다는 조서를 반포하고, 劉仁軌(유인궤)를 鷄林道(계림도)대총관, 衛尉卿 李弼(위위경 이필)과 右領軍대장군 이근행을 副총관으로 삼아 김인문의 귀국을 호위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그 시점의 唐은 신라와 대규모 전투를 벌일 형편이 아니었다.

673년 12월, 토번의 배후조종을 받은 궁월 등 天山산맥 주변 西돌걸의 여러 유목부족들이 天山北路(스텝路‧ 草原의 길)를 봉쇄하려 들자, 唐고종은 소정방 등 여러 장수들을 파견해 대대적 군사작전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唐은 신라 전선에서 공세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로써 羅唐전쟁은 그로부터 약 14개월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신라로서는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는 천금 같은 시간을 얻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문무왕은 백제 유민들로 구성된 「白衿誓幢(백금서당)」을 편성했다. 백금서당의 병력은 670년 신라군이 백제 故土의 82개 성을 점령하면서 신라 內地로 이사시켰던 백제 유민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당군의 주력이 왜 천산북로로 이동했던 것일까? 670년 토번에 天山南路(오아시스의 길)의 경영권을 상실한 당은 그 대안으로 천산산맥 북쪽으로 우회하는 스탭路(草原의 길)를 이용했는데, 이 길마저 위협당했기 때문이다.  

말갈군으로부터 戰馬 3만380 필 탈취  

그러나 상황이 반전된다. 675년 1월, 토번의 사절단이 長安에 들어가 唐과 토번 간에 일시 평화무드가 감돌았다. 이로써 서역 방면의 긴장이 일시 완화되자, 당은 즉시 한반도 작전을 재개했다. 675년 2월, 유인궤의 당군은 임진강 남안의 칠중성을 함락시켰다. 이어 칠중성을 전진기지로 삼아 이근행의 말갈군은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 남안의 買肖城(매소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금세 토번과 당이 다시 긴장관계로 돌아섰다. 675년 2월, 唐고종은 칠중성을 막 점령한 유인궤를 서역 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본국으로 소환하고, 그 이후 이근행이 安東진무대사로서 지휘권을 행사하게 했다. 말갈군과 거란군을 主力으로 삼은 당군이 남하하자 신라는 9軍을 출동시켜 방어전을 벌였다.

675년 9월, 설인귀의 水軍은 宿衛학생인 風訓(풍훈)을 향도로 삼아 임진강 하구로 침입했다. 風訓은 兵部令 재임 중 「근무에 태만하다」는 이유로 문무왕에 의해 숙청된 金眞珠(김진주)의 아들로서 唐에 유학 중이었다.

이때 金文訓(김문훈)이 지휘하는 신라 수군이 임진강 하구 泉城(천성: 교하읍 오두산성) 앞바다에서 설인귀의 수군을 강타했다. 이때 신라 수군은 적선 40여 척을 노획하고, 적병 1400명을 살상하는 승전을 거두었다. 설인귀는 戰馬 1000 필을 내버려 둔 채 포위망을 빠져 도주했다. 唐의 水陸(수륙) 연결작전이 이번에도 실패했던 것이다.

675년 9월29일, 신라 9군은 이근행이 지휘하던 말갈군단 20만 명과 매소성에서 대치했다. 설인귀의 임진강 하구의 泉城 전투 패배로 병참선을 유지할 수 없었던 이근행 軍은 전면 퇴각을 서둘렀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戰馬 3만380 필과 많은 무기·장비를 노획했다. 보급이 끊긴 이근행의 말갈군단은 퇴각하면서 약탈전을 자행했다. 다음은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말갈이 阿達城(아달성)에 들어와 약탈하자 성주 素那(소나)가 전세를 역전시켰으나, 전사했다. 당군이 거란 및 말갈 군사와 함께 칠중성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小守(소수: 지방무관직) 儒冬(유동)이 전사했다. 말갈이 또 赤木城(적목성)을 포위 공격하자 현령 脫起(탈기)가 백성들을 이끌고 대항하다가 힘이 다하여 백성들과 함께 전사했다. 당군이 또한 石峴城을 포위 점령하려 하자 현령 仙伯(선백)과 悉毛(실모) 등이 힘써 싸우다가 전사했다. 우리 군사가 당군과 크고 작은 열여덟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여 6047 명의 머리를 베고, 200 필의 전마를 얻었다.>

신라는 强小國(강소국)의 모델이라고 할 만하다. 신라의 武官들에게 敵前後退(적진후퇴)는 최대의 수치였다. 한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는 위와 같은 신라 사람들의 희생정신에 의해 성립되었다.

말갈족 출신 적장 李謹行 

매소성 전투 직후 이근행의 말갈군은 한반도를 떠나 西域(서역) 전선으로 급히 이동했다. 그는 羅唐전쟁 기간에 신라군과 가장 많은 전투를 벌인 적장이었다. <<舊唐書>>(구당서) 말갈傳에는 이근행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突地稽(돌지계)의 아들 근행은 외모가 빼어나고 무력이 남달랐다. 麟德(인덕: 664~666) 연간에 營州都督(영주도독)으로 부임했는데, 그 부락의 집이 수천이고 재력으로써 변방의 영웅이 되니 夷人(이인: 동쪽 오랑캐)이 모두 그를 두려했다. 우령군대장군에 累拜(누배)되어 積石道經略大使(적석도경략대사)에 임명되었다. 토번의 論欽陵(논흠릉) 등이 무리 10만을 거느리고 湟中(황중)에 쳐들어오자 이근행은 병사들에게 나무를 하도록 하면서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적이 도착한 것을 듣고, 드디어 旗(기)를 세우고 북을 치며 陣門(진문)을 열고 그들을 기다렸다. 토번군이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감히 진군하지 못하였다. 上元 3년(676) 또 토번의 수만 무리를 靑海에서 무찌르니 황제(唐高宗)가 璽書(새서)를 내려 그 노고를 격려해 주었다.> 

이근행의 아비 돌지계는 원래 營州(영주)에 자리 잡은 속말말갈 가운데 한 분파의 추장이었다. 돌지계는 일찍이 隋(수)나라에 항복했지만, 속말말갈은 원래 고구려의 附庸(부용)세력이었다.

속말말갈은 고구려가 隋(수)나라의 遼西(요서)지역을 선제공격했을 때 동원된 ‘말갈 기병 1만’이 바로 그들이다. 이근행은 충성의 공적으로 唐고종으로부터 國姓(국성: 李氏)을 받았다. 그와 靑海(청해)에서 싸운 논흠릉은 토번의 병권을 잡았던 인물로 뒤에서 詳論(상론)할 것이다.

676년 윤3월, 토번이 당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는 시기에 이근행은 靑海 전선에 나타났다. 靑海에서 이근행은 劉仁軌(유인궤)와 합동작전을 벌였다. <<舊唐書>> 토번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上元 3년(676) 토번이 선주·廓州(곽주) 등 여러 州를 노략질하고, 人吏(인리)를 약탈하고 죽였다. 高宗이 尙書左僕射(상서좌복야) 유인궤에게 명하여 조하군 鎭守(진수)로 가서 이를 막게 했다. 儀鳳 3년(678) 중서령 李敬玄(이경현)에게 명하여 선주도독을 겸하게 하고, 그곳에 가서 劉仁軌를 대신해 조하진을 지키게 했다. >

676년 윤4월, 토번은 감숙성의 선주·곽주·하주·방주를 침공했다. 유인궤는 후임자인 이경현이 부임해 올 때까지 2년간 토번군의 대공세를 막았던 것이다. 이때 적석도경략대사 이근행은 전공이 혁혁하여 燕國公(연국공)으로 책봉되었다. 

[ 2016-09-27, 16:5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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