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의 極東方面軍 최고사령관 설인귀
문무대왕이 간다(16) 한반도戰線과 西域(서역)전선을 오간 역사인물들 1

정순태(작가)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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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極東에서 싸운 적장 설인귀
 
나당전쟁 초기에는 지상군을, 막바지에는 당 수군을 총지휘했던 설인귀(薛仁貴)는 끝내 당 육군과 수군의 연계작전에 실패하고 進退兩難(진퇴양난)의 처지에서 한반도의 서해안을 떠돌다 회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인귀(薛仁貴)는 중국의 민간에서는‘정동(征東)의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다.

吉林省 臨江市(길림성 임강시)의 압록강 北岸(북안)에는 등 뒤로 칼을 움켜쥐고 한반도를 노려보고 있는 설인귀의 소상(塑像)이 세워져 있다. 臨江(린장)이라면 한반도에서 가장 춥다는 압록강 남안 中江鎭(중강진)의 對岸(대안)이다.

중국 내 설인귀 유적은 무려 65개소가 현존하고, 설인귀 관련 소설‧ 평전 32개, 설인귀 관련 희곡이 20여개나 전해오고 있다.

조선 성종대에 발간된 ⟪東國輿地勝覽‧ 동국여지승람⟫에는, 설인귀를 신라 때부터 임진강 유역의 名山인 감악산(紺岳山)의 귀신으로 조정(坐定)시켜놓고 이 지역의 평안을 지켜주는 魂魄(혼백․ 넋)으로 받들게 했다고 적혀 있다. 감악산의 정상에 있는 감악사의 돌계단은 높이가 3길(丈), 그 단 위에 산비(山碑)가 있는데, 오랜 세월의 풍우로 글자가 마멸되어 있다. 그 곁에 설인귀의 사당이라는 淫祠(음사)가 있는데, 그 신이 능히 요사스런 조화를 일으키고, 화복(禍福)을 내린다고 하여 사람들에게 공양을 받아왔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토속신들은 최영(崔瑩) 장군, 남이(南怡) 장군, 단종비(端宗妃) 宋씨, 임경업(林慶業) 장군 등 모두 억울하게 죽어 백성들의 동정이나 공감대 속에서 永生(영생)해 온 넋들이다. 우리 땅에서 설인귀가 억울한 귀신으로 끼어들어 제삿밥을 얻어먹는 까닭이 도대체 무엇일까?

당태종 침략 이후 중공군의 6·25 남침전쟁의 개입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침략의 전초기지였던 압록강 북방 100리에 위치한 마을인 설유참(薛劉站)의 입구에는‘薛礼站’(설례참)이란 돌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설인귀의 본명이 바로 薛礼(설례)이다.

설례의 字(자)가 바로 仁貴이다. 예컨대 한국인도 누군인지 잘 아는 曹操(조조)의 자는 孟德(맹덕), 劉備(유비)의 字는 玄德(현덕), 關羽(관우)의 자는 雲長(운장)인 것에 알 수 있듯이 薛仁貴는 薛礼를 높인 호칭이다. 字는 대체로 어른이 되면 붙여주는 이름이다.

우리나라를 침략한 장수에게 존칭을 붙이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그렇다면 백제를 멸망시킨 장수도 蘇定方(소정방)이 아니라 蘇烈(소열)로 불러야 한다. 소정방의 본명은 소열이며, 정방은 소열의 字이다.

그러나 입에 익은 고유명사를 갑자기 바꾸면 혼란이 일어난다. 관행은 좀처럼 고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 교과서에서부터 소정방, 설인귀가 아니라 소열, 설례로 고쳐 써야 할 것이다.

위에서 나온 薛礼站(설례참)은 “설인귀가 주둔했던 역참”이라는 뜻이다. 6·25 때도 중공군 대부대들이 도하를 위해 압록강의 결빙(結氷)을 기다리며 설례참에서 주둔했다고 한다.  

작가 미상의 우리나라 고대소설 ⟪설인귀전⟫도 국립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나당전쟁 중의 결전인 천성(泉城) 전투와 기벌포 전투의 패장인 그가 왜 이렇게 한‧ 중 양국에서 회자되고 있는 것일까?

사서에 따르면 설인귀(613-682)는 강주 용문(龍門: 지금의 산서성 河津)의 문벌 없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본명은 설례(薛礼), 仁貴는 그의 자(字)이다. 그는 밭을 갈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예도 닦았다.

그의 아내 柳씨가 “지금 天子(천자: 당태종)가 동정(東征)을 위해 명장을 구하는데, 왜 가지 않느냐”고 재촉해 그는 장군 장사귀(張士貴)의 軍門에 자원 응모해 사졸이 되었다. 낭장 유군공(劉君邛)이 반란군에 포위되어 위기에 처했을 때 설인귀는 匹馬單騎(필마단기)로 적장(賊將)을 베어 그 首級(수급)을 안장에 달고 돌아와 그 용맹이 알려졌다.

645년 4월,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에 32세의 나이로 종군했다. 당태종의 병력이 안시성(安市城)을 포위하고 있던 상황에서 고구려 장수 고연수(高延壽)‧ 고혜진(高惠眞)이 15만의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왔을 때 설인귀는 스스로 백색 갑옷을 입고, 창을 휘두르며 좌충우돌하여 당태종의 눈길을 끌었다. 전투 후 당태종은 설인귀를 불러 유격장군으로 발탁하고, 금과 비단을 부상(副賞)으로 내렸다.

654년, 만년궁(萬年宮)에서 복무하다가 대홍수를 만나 위기에 처한 당고종와 측천무후를 구한 것도 설인귀였다. 이때 다른 숙위(宿衛: 경호원)들은 모두 제 살길을 찾아 흩어졌는데, 설인귀만은 침전 가까이로 달려가 고종을 깨워 피난하게 했다. 그 공로로 그에게 어마(御馬)가 하사되었다.

그 후 설인귀의 공과(功過)가 교차했음에도 벼슬길이 대체로 순탄했던 것은 이때 당고종을 수몰 위기에서 구한 공로가 고려되었음이 물론이지만, 그가 최고의 권력자인 무측천(武則天)과 동향인 河東道(하동도: 지금의 山西省)이라는 점에 힘입은 바 컸던 것 같다. 무측천은 당나라 창업의 핵심 세력인 관롱(關隴: 섬서성과 감숙성 출신)집단을 배격하고, 동관(潼關: 장안 동쪽의 요새) 이동(以東) 출신을 일컫는 이른바 山東인맥을 양성했다.

655월 3월, 정명진(程明振)‧ 소정방(蘇定方)이 고구려 서북변경 침공할 때 설인귀는 부장으로 출전했다. 657년 소정방이 西돌궐을 정복할 때도 부장(副將)으로 출전했고, 658년에는 정명진 휘하의 우령군 중랑장으로서 고구려의 적봉진(赤烽鎭: 현재의 요녕성 적봉시) 등을 함락시켰다.

659년에는 고구려에 침입, 횡산(橫山)에서 고구려 장군 온사문(溫沙門)에게 패해 철군했다.

661년 중국 대륙 서북지역에서 철륵(鐵勒: 투르크족)의 일파인 회흘(回紇: 위구르)이 당군의 동방을 원정하는 틈을 타 대규모 침공을 감행한 위기 상황이 발생했다. 이에 당은 좌무위대장군 정인태(鄭仁泰)와 설인귀 등을 지휘관으로 하는 토벌군을 형성해 급파했다. 이때 당군은 위구르의 10만 대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잔적을 추격하여 적진 깊숙이 진격한 설인귀의 부대 1만4000 명은 열악한 지형과 악화된 기상에 견디지 못해 자멸하고, 겨우 800 명만 살아서 돌아오는 타격을 받았다. 이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자, 당은 부득이 고구려 침공부대에서 병력 일부를 차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대(對) 고구려 전선의 병력이 감소되어 옥저도총관 방효태(龐孝泰)의 부대가 연개소문의 고구려군과 사수(蛇水)에서 접전하여 대패했고, 이 싸움에서 방효태의 아들 13명이 모두 전사했다.

또 패강도행군총관 임아상(任雅相)은 진중에서 병사(662년 2월)해 평양성 공략작전은 실패했다. 3로군 중 소정방軍만 버티고 있었지만, 혹한 속에 보급이 끊어져 붕괴 직전에 대동강 연안까지 진격한 김유신의 군량지원을 받고, 662년 3월 겨우 회군했다.

 安東都護는 당의 極東方面軍 최고사령관

667년, 이적(李勣)이 이끄는 당의 육군이 신성(新城: 무순)을 함락시키자 그 주변 16성이 모두 항복했다. 이때 설인귀 부대는 助攻(조공)이 되어 남소성(南蘇城)‧ 목저성(木氐城)‧ 창암성(蒼巖城)을 빼앗았다.

668년 2월, 이적(李勣) 휘하의 장수로서 金山을 공파하고 부여성을 함락시키자, 그 주변 40여 성이 항복했다. 사서에 따르면 이때 설인귀의 위엄이 요해(遼海)에 떨쳤다고 한다. 연남건(淵南建)이 군사 5만을 급파, 부여성을 구하려 했으나 설하수(薛賀水)에서 패하여 3만여 명이 전사했고, 이적의 당군은 大行城(대행성)을 점령했다.

이윽고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됨으로써 고구려는 멸망했다. 설인귀는 우위위대장군 평양군공 安東都護(안동도호)로 출세했다. 설인귀의 직책인 安東都護는 시쳇말로 하면 極東方面軍(극동방면군) 최고사령관인 셈이다.

669년, 토번이 군사 일으켜 白州(백주) 등 18개 州를 점령하자 안동도호 설인귀로 나파도(羅婆道)행군대총관이 전보되어 670년 4월 청해(靑海)전선에 도착했음은 앞에서 썼다. 그리고 동년 7월, 대비천(大非川) 전투에서 토번군에게 대패해, 무측천은 그를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대비천전투의 현장답사는 뒤에서 기술할 것이다.

그러나 무측천은 곧(671년) 그를 계림도(鷄林道)행군총관으로 再기용했다. 그 직후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보낸 항의서한과 문무왕의 답서는 나당전쟁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설인귀는 上元 연간(674-675)에 상주(象州)로 유배를 갔지만 곧 풀려났다.

675년 9월, 설인귀의 보급함대는 숙위 김풍훈(金風訓)을 길잡이로 임진강 전선으로 침입하려다가 임진강 하구 천성(泉城)에서 신라 김문훈(金文訓)의 수군에 포착되어 패퇴했음은 앞에서 썼다.

이때 설인귀의 수군은 1400여 명이 전사했고, 전선 40여척과 전마 1000 필을 신라군에게 빼앗겼다. 설인귀의 함대는 交河(교하)의 천성에서 신라 수군에게 패해 임진강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었다.

신라 유학생 김풍운(金豊訓)의 부친이며 신라의 병부령(국방장관)과 대당총관(大幢摠管: 중앙군단의 장)을 역임했던 김진주(金眞珠)는 문무왕2년(662) 8월에 백제부흥군 토벌전을 태만히 한 죄로 처형되었다. 김진주는 친당파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 16년(676) 11월, 설인귀의 함대는, 서해안을 우회하여 금강하구로 진입하려고 기도했다. 백제 고토에서 제2 전선을 구축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찬 김시득(金施得)이 지휘한 신라 수군에게 백강(금강) 하구 기벌포에서 포착되어 패배했음은 앞에서 기술했다. 이 무렵, 설인귀는 다시 서인(庶人)으로 강등당했다.

그러나 설인귀는 681년 고종에게 불려가 우령군위장군 대주(代州)도독으로 부활했다. 682년엔 운주(云州)를 침범한 돌궐군을 맞받아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다음해(683년)에 안문관(雁門關)에서 70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좌효위대장군 유주(幽州: 지금의 북경)도독이 추증되었다.

[ 2016-10-14, 17:3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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