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갈 출신 대장군 이근행
문무대왕이 간다(17) 한반도 戰線과 西域 전선을 오간 역사 인물들 2

정순태(작가)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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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5년 매소성 전투 직후 李謹行(이근행)의 말갈군은 임진강 전선을 떠나 서역 전선으로 급히 이동했다. 그는 나당전쟁 기간에 신라군과 가장 많이 싸운 적장이다. 《舊唐書·구당서》 말갈傳에는 이근행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근행은 외모가 빼어나고 무력이 남달랐다. 인덕 연간(664~666)에 영주도독(營州都督)으로 부임했는데, 그 부락의 집이 수천이고 재력으로써 변방의 영웅이 되니 이인(夷人: 동쪽오랑캐)들이 그를 꺼려했다. 우령군대장군에 올라 적석도경략대사(積石道經略大使)에 임명되었다. 토번의 논흠릉(論欽陵)이 무리 10만을 거느리고 황중(皇中)에 처들어오자, 이근행은 병사들에게 나무를 하게 하는 등 전혀 걱정하지 않는 체했다. 적이 도착한 것을 듣고, 그제야 기(旗)를 세우고 북을 치며 진문(陣門)을 열고, 그들을 기다렸다. 토번군이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감히 진군하지 못했다. 上元 3년(676), 또 靑海에서 토번을 무찌르니 황제(당고종)가 새서(璽書: 옥새를 찍은 글)를 내려 그 노고를 격려하여 주었다.>

이근행이 부임한 적석도는 지금의 靑海省(청해성)에 인접한 감숙성 임하현(臨夏縣) 방면인데, 대사(大使)는 그 방면의 총사령관을 말한다. 토번군이 침입한 황중(湟中)은 지금의 청해성 성도인 서녕(西寧: 시닝) 남쪽 교외로서 당시 당-토번 국경지대의 군사적 요충이었다. 토번은 7세기 후반부터 당과 실크로드의 패권을 다툰 나라로서, 전성기에는 서장(티베트)뿐만 아니라 지금의 청해성, 감숙성, 신강위구르자치구 등지를 판도에 넣고, 한때 장안(長安)까지 점령한 강국이었다. 논흠릉은 토번 전성기의 총사령관 겸 재상이었다.

그러면 이근행의 출신배경은 무엇일까? 《舊唐書》 말갈傳에 따르면 이근행의 아버지 돌지계(突地稽)는 粟末靺鞨(속말말갈)에 속한 한 부족의 추장으로서 590년경 고구려에 대한 말갈의 저항을 주도했던 최후의 맹주였다.

고구려에 패한 그는 부족민 1000여 명을 거느리고 수양제(隋煬帝)에게 귀부(歸附)했다. 수양제는 그를 영주(營州: 지금의 요녕성 朝陽)에 거주시키고, 금자광록대부 요서태수(遼西太守)로 임명했다.

아직도 천하의 주인이 결정되지 않았던 수말당초의 大혼란기에 돌지계는 이번에는 당고조 이연(李淵)에게 密使(밀사)를 파견해 조공을 바쳤다. 당고조는 연주(燕州)를 설치하고, 돌지계를 그 摠管(총관)으로 삼았다. 中原(중원)의 사슴(패권)을 다투던 군웅 중 1인인 유흑달(劉黑達)의 반란 때 돌지계가 그의 부족을 이끌고 정주(定州)에 와서 당태종에게 사자를 보내 節度(절도) 벼슬을 청했다.

당태종은 전공의 보답으로 그를 기國公(기국공)에 봉했다. 貞觀(정관) 초, 당태종은 돌지계에게 右衛將軍(우위장군)을 제수하고, 국성 李씨를 내렸다. 얼마 후 돌지계가 죽고 이근행이 그 뒤를 이었다.  

고구려-당 전쟁 시기에 이근행이 도독을 지낸 營州(영주)는 당의 동방정책을 추진하던 최전선 군사기지로서 지금의 요녕성 조양(朝陽)이다. 영주라면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들의 일부가 집단 거주했던 곳이다. 그로부터 30년 후(698년)의 일이지만, 고구려 유민 대조영(大祚榮)는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영주로부터 탈출, 震國(진국: 훗날 발해로 개명)을 세웠다.

이근행이 토번과 전투를 했던 황중(湟中)은 현재 청해성의 省都(상도)인 서녕(西寧․ 시닝)의 속현(屬縣)이다. 필자는 2010년 6월 티베트 불교의 발상지이기도 한 황중을 답사했다. 서녕에서 26km 남서쪽에 위치한 황중으로 가는 국도 옆 산봉우리에는 봉수대(烽燧臺) 수십 개가 눈에 띈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부흥군 출신 당나라 장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서녕 일대에 70여개의 봉수대를 설치했다. 실은 서녕도 흑치상치가 개척했던 關防都市(관방도시: 군사도시)였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세하게 밝힐 것이다. 황중에는 티베트 불교 중 게루派(파)의 본산인 타얼스(塔爾寺․ 탑이사)가 자리잡고 있다.

탑이사는 티베트 불교 최고의 학승이었던 쫑가파(宗喀巴)가 태어난 곳이다. 쫑가파가 창시한 게루파(派)의 승려들은 노란색 모자를 쓰기 때문에 황모파(黃帽派)라고 불린다. 현재 인도(印度) 서북부 달람살라에서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붉은 모자를 써 홍모파(紅帽派)라고 불린다. 한반도 중부 한탄강변 매소성에서 패전하고 퇴각한 이근행은 1만5000리를 행군해 청해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근행은 황중에서 토번을 막았으나, 승전 후 1년도 못돼 진중에서 병사했다.

677년 후반에서 678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티베트 고원에서 토번의 병권을 장악한 갈이(噶爾)씨 가문과 羊同(양동) 사이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런 시기에도 당고종과 무측천은 신라 공략에 집착하고 있었다. 다음은 ⟪자치통감⟫의봉 3년(678) 9월 조의 관련 기사이다.

<9월, …고종이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토벌하고자 했다. 병으로 집에 있던 시중 장문관(張文瓘)이 입궐하여 고종에게 간했다. “지금 토번이 침구(侵寇)하니, 바야흐로 군사를 일으켜 서쪽을 토벌해야 합니다. 신라는 비록 자주 불순하지만, 일찍이 변방을 침범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또 신라를 친다면, 臣(신)은 그 폐해가 공사간에 심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에 고종은 (신라 정벌 작전을) 중지했다. 계해(癸亥)에 시중 장문관이 죽었다.>

병석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던 늙은 신하의 충언은 당고종을 움직였다. 당고종은 신라 원정을 중지하고, 토번과의 결전을 결심했다. 이에 따라 진중(陣中)에서 병사한 이근행을 대신해 靑海 지역을 지키는 하원(河源) 방면 대총관이 된 인물이 중서령 이경현(李敬玄)이었다. 그러나 679년 9월, 이경현 휘하 당군 18만 명은 토번의 명장 논흠릉(論欽陵)과의 전투에서 참패했다. 그렇다면 이경현의 패전 원인은 무엇일까?

이경현은 재상급 문사인 자신을 청해 戰線에 투입한 당고종과 무측천(武則天)의 인사에 불만을 품은 끝에 처음부터 전투에 소극적이었다. 《禮論·예론》 등의 저서를 남긴 학자관료였던 그는 휘하의 좌위대장군 유심례(劉審禮)에게 부대 지휘를 맡겼는데, 유심례는 졸전 끝에 토번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경현의 패전도 당군이 언제 다시 침입해 올지 몰라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하던 문무대왕에게 약간의 여유를 주었다. 이때 이경현 휘하의 백제 출신 장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 2016-10-19, 16:5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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