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자들의 신사참배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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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主流인 장로교파의 칼빈주의가 日帝 때 신사참배를 거부한 신앙적인 힘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 한국 反共보수기독교단의 主流인 고신파와 합동파가 아시아 기독교중에선 유일하게 천황에 대한 경배를 거부하고 수많은 성직자들의 옥살이와 옥사로써 신앙의 자유를 지켜낸 뿌리를 갖고 있다. 반면 김일성 우상숭배주의에 호감이나 이해를 보이는 일부 기독교파의 뿌리를 거슬러올라가보면 日帝 때의 신사참배와 만나게 된다. 천황과 김일성은 칼빈주의자들의 눈에는 똑 같은 우상들이다. 하나님을 참칭하는 사탄의 제자들인 점에서 같다. 그런 점에서 우상숭배에 넘어가는 기독교가 反共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반대하는 속성을 가진 점도 이해가 간다.
  
  한국기독교의 칼빈주의 신학을 지켜온 가장 핵심적인 두 신학자가 있다. 고신과 합동파의 산실인 부산 고려신학교의 교장을 지낸 朴亨龍 朴允善 박사. 이 두 분은 미국 칼빈주의 신학의 거두였던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 박사의 제자였다. 메이첸 박사는 칼빈주의 신학의 본산이던 프린스턴 신학교가 자유주의 신학으로 변질된다고 판단하여 이 학교교수직을 그만두고 필라델피아로 가서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을 세운 분이다. 朴亨龍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메이첸 교수로부터 칼빈주의 신학을 배운 뒤 귀국하여 평양신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한국의 초창기 장로교 총회는 신학의 정통성을 지켜가기 위하여 1901년에 벌써 평양신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에서 朴亨龍은 '좌경화된 자유주의 신학'과 맞섰다. 그는 김재준, 송창근 같은 신학자들의 글을 학술지에 싣는 데 대하여 반발하여 편집위원직 사표를 내기도 했다. 日帝가 기독교에 대하여 신사참배, 즉 천황에 대한 경배를 강요하자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결의를 하고 말았다. 이에 반대한 평양신학교는 자진폐교로써 대응했다. 朴亨龍 박사는 신사참배 강요가 없는 만주국 봉천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주기철 목사 등 많은 칼빈주의 목사들이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투옥되고 옥사했다. 특히 경남지방의 목사들이 많이 투옥되었다. 주남선(거창읍교회), 최상림(남해), 황철도(진주), 김을길(거제), 이인제(경남), 손양원(경남), 한상동(경남), 손명복(경남), 이원영(안동) 목사들이 투옥되었던 분들이다.
  
  광복 직후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목사들이 박형룡 박윤선 박사를 모시고 세운 신학교가 부산의 고려신학교였다. 이 신학교를 모태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파(나중에 합동파가 분리되어 나감)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목사들은 신사참배를 했던 기독교인들의 반성을 촉구했다. 이 논란 과정에서 예장은 고신, 합동, 통합측으로 갈라졌다.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했던 사람들이나 자유주의적 성경관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김재준 박사의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세운 것이 기독교장로회이다. 基長은 197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에 있어선 고신파보다 더 활발하게 참여했다. 이 종파 소속 목사중에는 김일성 김정일 정권에 대해서 호의적이거나 비판을 삼가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칼빈대학교의 金義煥 총장은 최근에 쓴 '메이첸과 한국 보수신학의 형성'이란 논문에서 '한국 교회의 분열은 성경불신의 자유주의 신학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칼빈주의자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주권론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세상만물을 주재한다고 믿는데 어떻게 천황을 하나님처럴 숭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金총장은 '아시아에서 신사참배를 정면에서 거부하여 신앙의 정통을 지켜간 것은 한국뿐이다. 대만과 일본의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수용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세가 미미하다'라고 말했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했으나 소수의 반대자들이 목숨을 걸고 신앙의 자유를 불씨처럼 지켜간 것이 한국 기독교 전체의 정통성을 확보한 셈이다.
  
  한국 칼빈주의 신학의 완성자인 朴允善 목사는 신구약 성경에 대한 註釋集을 완간한 분이기도 하다. 이는 칼빈주의 신앙을 한국화한 세계적 업적으로 꼽힌다.
  칼빈주의는 준법정신, 근면 성실의 직업정신, 끊임 없는 자기반성과 개혁, 신앙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신념체계로 하고 있으므로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딱 맞는 논리와 윤리를 제공했다. 칼빈주의 신앙은 개화기, 독립운동기, 근대화의 시기에 한국의 교회들을 통해서 역사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유통일기에 무엇을 할 것이냐일 것이다. 이는 김정일 정권에 대해서 칼빈주의자들이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인가로써 결정될 노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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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 하나는 일제 당국이나 일제에 영향력 있는 기관 또는 인사들을 찾아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 것을 청원 내지 경고한 ‘신사참배 강요 금지 청원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일제의 강요와 제도권 교회의 불법적 결의에 순교를 각오하고 끝까지 저항하여 신앙과 교회를 지키고자 한 ‘신사참배 거부 권유운동’이다.
  
  1932년 초부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각 지역 기독교계 학교에서 해마다 문제가 되자, 1934년 장로회 총회장은 총독에게 2차에 걸쳐 청원서를 제출하려 하였으나, 일제 당국자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듬해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 사건 이후 일제는 신사참배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마저도 금지시켜 이러한 청원운동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평남의 박관준(朴寬俊) 장로는 신사참배 거부로 교사직을 사직하고 거부운동을 하던 안이숙(安利淑)을 대동하고 1939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요인들을 만나 신사참배 강요 저지를 호소하고, 같은 해 3월 종교통제를 목적으로 한 ‘종교단체법안’을 심의하던 제74회 일본제국회의 중의원 회의장에 방청객으로 들어가, 종교법안 제정 반대, 기독교의 국교화 ·신사참배 강요 금지, 양심적 교역자 투옥 철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경고장을 단상을 향해 투척하였다.
  
  김선두(金善斗) 목사도 일본 유학생 김두영(金斗英)과 함께 신사참배 강요 금지를 일본 정계 요로에 진정하고자 1938년 8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였으며, 이에 동조하는 일본 정계 요인들과 함께 다시 한국에 돌아와 장로회 총회의 강제 신사참배 결의를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제 경찰에 알려지자 김목사는 사전에 구속되고 총회도 삼엄한 경찰의 압력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 시행함으로써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물론 이러한 청원운동은 일제에 의하여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고, 청원자측이 일제의 권력구조 내지 식민통치 체제를 인정한 체제 내의 운동이라는 점에서는 한계를 가지는 것이지만, 이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일제의 종교탄압에 대항하여 문제를 확산 폭로하고 불의를 담대히 경고하였다는 점에서는 일정한 의의를 지닌 운동이었다. 일제의 강압으로 38년 이후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하자, 이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신도들은 서로 연대를 맺고 조직적 ·집단적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 당국과, 이를 결의 실행하는 제도권 교회를 비판하면서 신자들을 대상으로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고 거부자들 간의 결속을 강화하는 운동을 폈다. 그 중심 인물은 평남의 주기철(朱基徹), 평북의 이기선(李基善), 경남의 한상동(韓尙東) ·주남선(朱南善), 전남의 손양원(孫良源), 함남의 이계실 등으로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만주 지역에서도 박의흠(朴義欽) ·김형락 ·김윤섭 등이 활약하였다.
  
  일제는 이들을 수차례 검속 탄압하다가 1940년 6월경부터 9월경에 걸쳐서 본격적인 검거에 착수하고 재판에 회부하여 해방되기까지 옥고를 치르게 하였다. 1940년에 나온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지도 방침’이나 같은해 9월 20일 새벽을 기하여 전국에 걸쳐서 실시된 ‘조선 기독교도 불온분자 일제 검거령’은 바로 이들을 탄압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용학 ·주기철 ·최봉석 ·최상민 ·김윤섭 ·박의흠 등의 순교자가 나왔다.
  
  이상과 같은 조직적 집단적 신사참배 거부운동과는 달리 보다 규모가 작거나 개인적 차원의 신사참배 거부항쟁은 전국 어디서나 볼 수가 있었다. 일제 경찰은 이들을 민족주의자로 규정하고 치안유지법 ·보안법 ·불경죄 등을 적용하여 탄압하였는데, 이렇게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투옥된 이는 대략 2천 여 명에 이르고 2백 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순교자만도 50여 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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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한국 교회의 분열과 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大韓-敎長老會, 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
  
  
  
  구분 종교단체
  
  설립연도 1912년 9월 1일
  
  소재지 서울 종로구 연지동 135
  
  설립목적 장로교회간 협력, 장로교 전파
  
  주요활동 선교활동, 신앙교육활동, 사회봉사활동
  
  규모 노회 60개, 교회 6,494개, 목사 1만 3409명, 전도사 4,036명
  
  
  
  장로교의 대표적 중도교단으로 예장통합측이라고도 한다. 성서를 하느님의 절대적인 말씀으로 믿고, 이를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으로 삼으며, 칼뱅주의에 입각한 장로회헌법과 12신조 및 대소교리문답의 교리를 기본신조로 한다.
  
  
  
  1884년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앨런(H.Allen)이 고종의 지시에 따라 광혜원을 운영하고,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소속 로스(J.Ross)가 신약성서를 번역하여《예수셩교젼서》를 출간하면서 장로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1893년 선교사들이 장로회선교공의회를 조직하였고 이것은 1901년 한국교회 대표들이 함께 참여하는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로 발전하였다. 1907년 9월 17일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한로회가 조직되어 독로회(獨老會)라 불리었으며, 같은 해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이 최초의 한국장로교회 목사가 되었다. 1912년 9월 1일 독로회시대를 청산하고 7개 노회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조직하였으며, 1922년에는 헌법을 제정하여 장로교의 신앙노선과 교리체계를 확립하였다.
  
  
  
  1938년 9월 10일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으나, 이에 반대하는 50여 명의 목 사들이 순교하고 평양신학교는 폐쇄당하였다. 1943년 일제의 강압으로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된 뒤 1945년 7월 18일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통합되었다. 광복후 1947년 총회를 재건하고 1949년 4월 22일 교단 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바꾸었다. 1952년 9월 11일 고려신학교측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를 조직하여 분리해나가고, 1953년 6월 10일 조선신학교측이 대한기독교장로회를 조직하여 분리해나갔다. 1959년 9월 28일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이 분리해나갔으며, 그 이후 50개가 넘는 교단이 생겼다.
  
  
  
  주요 활동은 ① 선교, ② 총회산하 각 교회의 신앙교육 장려, 총회산하 각 기독교학교의 신앙교육 장려, 교육부 산하 각 연합회 지도 관리, ③ 노회 및 지교회의 사회선교·사회봉사 활동을 위한 지원활동, ④ 사회선교를 위한 인력 발굴, ⑤ 효과적인 구호를 위한 정책개발과 집행, ⑥ 소외된 농어촌교역자 재교육, ⑦ 각노회 농어촌부 활성화, ⑧ 농어촌살리기 운동, ⑨ 군종목사 지원, ⑩ 선교사 파송 및 관리업무 등이다. 기관지로는《기독공보》를 발행한다.
  
  
  
  최고의결기관인 총회의 임원은 총회장·부총회장·서기·부서기·회계·부회계·회록서기·부회록서기로 구성되며, 총무단은 총무·사무국장·기획국장·7개부로 구성된다. 산하기구로는 10개 상임부, 10개 위원회, 24개 특별위원회, 4개 재단, 2개 기관, 7개 신학대학교, 19개 자치단체, 18개 국내연합선교기관, 해외선교협력교단, 해외교회연합기관,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이 있다. 그밖에 노회 60개, 교회 6,494개, 목사 1만 3409명, 전도사 4,036명, 장로 1만 6138명이 있다. 본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135번지에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大韓-敎長老會(合同), The General Assembly of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한국 프로테스탄트교회의 한 교파.
  
  
  
  구분 한국 장로교 교단
  
  설립연도 1912년(1959년 통합 측과 분리)
  
  소재지 서울 강남구 대치3동 1007-3
  
  설립목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
  
  주요활동 복음 전파, 해외 선교, 교역자 약성
  
  규모 노회 86개, 교회 6,795개, 교역자 1만 8038명, 평신도 230만 명, 선교사 1,076명(2002)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 1901년 시작된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를 모체로 1912년 창립되었는데, 창립 당시의 명칭은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였다. 1949년 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바꾼 뒤,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에큐머니즘 신학에 대한 이견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과 분리되면서 WCC를 영구히 탈퇴하였다.
  
  
  
  1963년 문교부(지금의 교육인적자원부)에 총회를 사회단체로 등록하고, 1965년부터 《기독신보》(지금의 기독신문)를 발행하였다. 1977년 주교교사통신대학을 설립하고, 1982년 총회유지재단 설립 인가를 받은 뒤, 1986년 연건평 2,300평의 총회 회관을 준공하였다.
  
  
  
  개혁주의 신학을 근본 이념으로 하여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교리문답)을 교리의 표준으로 삼는다. 또 장로교 헌법의 정치원리를 가지며, 교회의 성례전적 전통과 권위·질서의 준수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와 함께 예수교장로교단를 대표하는 교단으로, 2002년 현재 전국에 86개의 노회와 6,795개의 교회가 있다. 목사·전도사 등 교역자는 1만 8038명, 평신도는 230만 명이며, 해외 86개국 53개 지부에 1,076명의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다. 그 밖에 총신대학교·총신대학원·신학대학원·교육대학원·선교대학원 등 5개의 직영 총회신학원과 10개의 총회 인준 신학교가 있다. 총회 회관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3동 1007-3번지에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정통)[大韓-敎長老會(合同正統)]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
  
  
  
  구분 한국 장로교단
  
  설립연도 1980년 5월 16일
  
  소재지 서울 서초구 방배3동 1031-1(총회 회관)
  
  설립목적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정통성 수호
  
  주요활동 칼뱅주의 신앙을 근거로 한 개혁주의 신앙 전파, 해외 선교, 목회자 양성
  
  규모 소속 교회 2,200개(2001), 산하 노회 52개(2002), 목회자 3,900명, 선교사 130명
  
  
  
  1980년 5월 16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합동진리라는 이름으로 출범해 이듬해 합동진리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연합을 합해 합동정통으로 교단 명칭을 변경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으며, 보수정통주의를 표방한다.
  
  
  
  신앙은 칼뱅주의를 특징으로 한 개혁주의적 신앙관을 가지며, 교리는 《사도신경》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기조로 하고 있다. 1984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을 완성하였고, 1995년 10월 연건평 340평에 지하 2층, 지상 6층의 총회관을 마련하였다.
  
  
  
  교단에 소속된 교회의 수는 2,200개(2001), 산하 노회는 52개(2002), 목사·강도사·전도사 등 목회자 수는 3,900여 명이다. 교단 내 교인의 수는 80만 명이고, 미국·러시아·아르헨티나·브라질·필리핀·유럽 등 16개국에 파송된 선교사 수는 130명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천안대학교를 비롯해 4개의 신학계 대학원, 5개의 특수대학원, 기독신학교, 총신예술학교, 천안외국어대학 등이 있으며, 《기독교연합신문》을 발행한다. 총회 회관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3동 1031-3번지에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大韓-敎長老會(高神), The Presbyterian Church in Korea(PCK:Kosin)]
  
  웨스트민스터 교리표준서를 신조로 하는 한국 프로테스탄트교회의 한 교파.
  
  
  
  구분 한국 장로교 교단
  
  설립연도 1952년 9월 11일
  
  소재지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58-10(총회 본부)
  
  설립목적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유지, 칼뱅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신앙
  
  주요활동 복음 전파, 해외 선교
  
  규모 노회 34개, 교회 1,578개, 교인 43만 8283명, 목회자 3,682명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 투옥되었다가 8·15 광복과 함께 출옥한 한상동·주남선 목사 등 초창기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1952년 9월 11일 경상남도 진주(晉州) 성남교회당에서 제1회 총노회를 개최하면서 출범하였다. 이들은 본래 다른 교파를 세우려 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고신 측 총대들을 거부하고 총회로부터 축출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고신 교단을 출범시킨 것이다.
  
  
  
  고신 교단의 역사는 고려신학교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는데, 초기 지도자들은 1946년 6월 진해(鎭海)에 하기 신학강좌를 개설하고, 이어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후 복음병원을 설립하고 얼마 뒤 고려신학대학으로 인가받았으며, 다시 부산광역시 송도의 고신대학교와 천안의 고려신학대학원으로 발전하였다.
  
  
  
  교단 출범 이후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부르짖으며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생활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고 있다. 또 웨스트민스터 교리 표준서를 신조로 삼아 칼뱅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신학을 견지하면서 한국 교계의 바른 길을 제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02년 현재 34개 노회에 1,578개의 교회가 있으며, 교인은 43만 8283명, 목회자는 3,682명(목사 2,230명, 강도사 425명, 전도사 1,027명)이다. 총회 본부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58-10번지에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大韓-敎長老會(大神), The General Assembly of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Daeshin]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신조로 삼고 있는 한국 프로테스탄트교회의 한 교파.
  
  
  
  구분 한국 장로교 교단
  
  설립연도 1961년
  
  소재지 경기 안양시 동안구 신촌동 1073
  
  설립목적 평양신학의 전통에 근거를 둔 성경적 복음과 개혁주의 신학 전파
  
  주요활동 국내 복음 전파, 해외 선교, 목회자 양성
  
  규모 노회 37개(국내 34, 해외 3), 교회 1,400개, 목회자 1,500명, 선교사 111명
  
  
  
  1961년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로 출범해 1972년 한국 장로교 총회의 명칭이 다양화됨에 따라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로 개칭하였다. 1974년 교단 교회선언문을 채택하고, 이듬해 교단 교회 헌법을 제정하였다. 1980년 통합·개혁·기독교장로회·고신 등과 한국장로교협의회를 창립하고, 1985년에는 재일대한기독교연합회 회원교단이 되었다.
  
  
  
  1986년 총회신학원을 설립하고, 1994년 한국기독교평화통일추진협의회 창립 교단으로 참여한 뒤, 같은 해 재단법인으로 총회 유지재단 설립 허가를 받았다. 1995년 대지 6,463평에 건평 443평의 총회 회관을 매입하고, 1998년 3월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를 개교하였다.
  
  
  
  평양신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순수한 성경적 복음과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감 없이 신뢰해 이를 가장 잘 표현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신조로 삼는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정통) 교단과는 신앙적 뿌리가 같다.
  
  
  
  2002년 현재 국내에 34개, 해외에 3개의 노회가 있으며, 교단 소속 교회는 1,400여 개, 목회자는 1,500명, 해외 파송 선교사는 111명이다. 그 밖에 직영 신학원으로 대한신학교와 대신대학원이 있으며, 인준 신학원인 안양대학교·안양신학대학원에서 목회자를 양성하고 있다. 총회 본부는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신촌동 1073번지에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韓國基督敎長老會,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Republic of Korea]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분립, 김재준(金在俊) 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1953년에 형성된 교단.
  
  
  구분 한국 장로교 교단
  
  
  
  설립연도 1953년 6월
  
  소재지 서울 종로구 연지동 136-56 한국기독교연합회관 1501호(총회 본부)
  
  주요활동 국내 선교, 해외 선교, 교회일치운동 전개, 북한 선교 및 사회 민주화, 목회자 양성
  
  규모 노회 24개, 교회 1,509개, 교인수 32만 2465명(2000년 12월)
  
  
  
  
  예수교장로회(약칭 예장)와 그 뿌리는 같다. 그러나 1947년 제33회 총회 이후 김재준 등이 주축이 되어 세운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의 전신) 문제를 둘러싸고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분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어 1952년 4월 제37회 총회에서 당시 한국신학대학 졸업생에 대한 목회자격 박탈, 김재준 목사의 교수직 파면과 아울러 소속 경기노회에서 목사직 박탈이 의결되면서 이듬해 6월 완전한 분립이 이루어졌다.
  
  
  
  조선신학교는 17세기 정통주의 신학과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중간노선인 신정통주의 입장을 취했으나, 성서의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을 신봉하는 박형룡(朴亨龍) 목사를 주축으로 한 보수진영에서 성서문자의 무오(無誤)를 주장하여 기독교장로교측을 극단적 자유주의로 혹평함으로써 완전 결별로 치닫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54년 6월 10일 제39회 총회에서 '대한기독교장로회'로 개칭하고, 세계장로교회의 주류를 좇아 에큐머니컬운동(교회일치운동)에 앞장섰다. 같은 해 목포노회의 동참을 필두로, 이듬해 전남·경남 두 노회가 가담한 데 이어 캐나다 연합교회가 예장과 결별을 선언하고, 선교사 21명을 파송해 줌으로써 활기를 띠어갔다.
  
  
  
  1956년 제41회 총회에서는 한국교회사상 최초로 부목사·여자장로제 등을 채택하고, 이듬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가입해 국내교회 연합사업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1960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도 가입하였다. 1961년 18개 노회를 9개 노회로 통합하고, 교단명을 '한국기독교장로회'로 개칭하면서 새로운 도약기를 맞았다.
  
  
  
  1969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유지재단 설립인가를 받고, 1971년 사회선언지침을 채택해 도시산업선교·반독재 투쟁에 가톨릭 지도자 등과 보조를 맞추어 사회참여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1974년 여목사 제도를 채택하였고, 1979년에는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실행위원회 및 신학협의회를 예장 측과 공동으로 개최하였다. 1993년 통일헌법특별연구위원회를 설치한 뒤, 1997년에는 북한선교복지회관 설립 추진운동을 결의하였다.
  
  
  
  2000년 12월 현재 교회는 1,509개, 목사는 2,090명, 교인은 32만 2465명이다. 또 2002년 현재 전국에 24개의 노회가 있고, 총회 기관으로는 한신대학교와 영생고등학교를 비롯해 14개의 장애인 선교기관, 8개의 사회복지법인, 6개의 특수 선교기관이 있다. 총회본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136-56번지 한국기독교연합회관 1501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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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장로교회의 분열
  
  장로 교회의 분열은 가장 큰 교단으로 큰 교단인 만큼 많은 분열의 아픔이 있었다. 분열의 큰 원인 들을 살펴 보면,
  
  첫째로 신사참배 문제로 인한 분열이 있었으며,
  
  둘째로는 자유주의 신학사상 대두로 인한 분열과
  
  셋째로는 N.A.E.와 W.C.C의 대립으로 인한 분열의 세가지 큰 사건으로 나눌수 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을때 한국 교회는 해방 이전의 교회가 내포 했던 문제들을 극복하면서 부흥 재건 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 하나는 주체성을 상실하고 교회로서의 정체를 상실 하였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본래의 한국 교회의 모습으로 재건 하는 일 이었다. 그중 하나가 교회의 정통이 일제하의 강요에 따라서 신사참배나 일본 기독교조선교단으로서의 통합 때문에 패멸되었다고 보고, 그 이전의 순수 정통에로 회기한다는 운동이었다.
  
  
  
  그 이후 소위 고신파의 분립이 1950년 4월에 표면화되기 시작 하였고 이 즈음에 조신파 (현재의기독교 장로회) 역시 신학적 사상에 대한 성서의 소위 고등비평과 역사적 비판등을 이유로 예장과 분립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조신파의 방법론들은 보수주의나 근본주의 일색으로 목회자양성을 실시해온 장로교에 충격을 주었다.
  
  
  
  김재준 목사와 박형용목사 두 거목의 사상은 대립하게 되었고 박목사는 김 교수가 한국교회를 능욕한다고 까지 힐책 하였다. 이러한 문제로 장로교회는 총회에서 새로운 장로회 신학교를 개교하고 기존의 조선 신학교와(한국신학대학) 두개의 신학적 대립의 신학교가 탄생된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장총회는 '대한민국에는 예장 총회는 하나밖에 없다'고 성명서를 제출하게 되었고 조선신학교 측은 새로운 대한 기독교 장로회라는 교단을 조직하게 되었다.(1954)
  
  
  
  그 이후 기장은 1957년 10월에 한국 기독교교회 연합회(NCC)에 가입하였고 같은해 한국 세계기독교봉사회에가입하였으며,1959년에는 동남아시아 기독교협의회(EACC,CCA의 전신)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여 교단으로써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독립된 교회의 기구로서의 출발을 다짐하였다.
  
  
  
  그런데 1959년 예장은 다시 합동파와 통합파로 분립 하게 되었다. 합동파에서는 1960년 12월 비상 사태속에서 고신파와 합동해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총회'를 조직하게 된것이다. NAE계의 목사들은 WCC가 용공적이라고 공격하고, 한국교회의 반공이념과 신앙의 순수성보존을 위해 WCC에서 탈퇴할것을 그동안 주장해 왔다.
  
  
  
  그런데 1959년 대전총회에서 경기노회의 총대 명단의 조작성 여부의 문제로 양쪽의 주장이 충돌하여 마침내 분립까지 치닫게 되었던것이다. 통합파는 곧 서울 연동 교회에서 속회를 가지고 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WCC에서의 잠정적 탈퇴를 하면서 합동파와의 재결합을 모색 한다고 하였으나 그것이 그 시기에 제출된 제안은 아니었다.
  
  
  
  반대로 합동파에서는 서울 승동 교회 에서 속회하여 당장 WCC에서 영구 탈퇴 하고 어떠한 형태의 에큐메니칼 운동도 반대하며, 한국NCC와도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언 하였던것이다.
  
  
  
  그런데 합동파의 역사도 그이후 기복이 많았다. 1962년에는 ICCC탈퇴 문제로 박병훈계가 호헌파로 분열되고 1963년 9월 고려파가 옛 고려파 총회로 그산하 노회들이 환원 되었다. 그리고 같은해에 개혁파교회 세계대회에 가입하였다가 1972년 9원 57회 총회에서 이 곳으로 부터 탈퇴를 결의하였다.
  
  
  
  합동파 교회가 다시 사당동파와 방배동파로 다시 분열된 것은 1979년 9월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파들의 분립과 조직 과정을 정확 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계보상 뚜렷한 파생 경로 없이 단독 생성된 장로교 교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내용출처 : http://cafe.naver.com/historyth.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64 + 백과사전 + 신학자료참조
  
  
  
  
[ 2005-07-30, 11:1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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