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침몰인가 浮上인가

조갑제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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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필자가 월간조선에 썼던 기사의 도입부를 소개한다. 당시 예상했던 문제들이 그 뒤 어떻게 되었는가를 비교해서 읽으면 재미 있을 것이다.
  
  
  한국, 沈沒이냐 浮上이냐 - 1990년대의 위기구도
  
  한국인의 집단적 변심과 각계각층의 끝없는 이기주의 추구는 도덕성의 황폐를 불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전반적인 지반 沈下(침하)를 재촉하고 있다. 1990년대의 청사진이 아닌 1990년대의 악마의 시나리오.
  
  <1990년 1월 월간조선>
  
  90년대로의 절벽
  
  원래 기자는 1990년대 한국의 변화를 전망하는 기사를 쓰기 위해서 이 취재를 시작했었다. 며칠 뒤 기자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넘어 가는 문턱이 절벽만큼이나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1990년대의 모습은 이 절벽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 절벽을 넘는 데 1990년대의 10년이 다 소모될지 모르는 판국인데 절벽 뒤의 10년을 그린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히려 이 절벽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의해서 앞으로 10년의 모양새가 결정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기자는 1990년대로의 진입로를 가로막고 있는 절의 모습을 그려보는 쪽으로 취재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 절벽은 평지돌출 식으로 생긴 지형이 아니다. 1980년대의 대폭발이 뿜어낸 화산재와 용암이 쌓이고 굳으면서 빚어낸 모습인 것이다.
  
  1980년 5월17일의 전국계엄확대조치는 5·16에 이은 두 번째 군사쿠데타였다. 全斗煥그룹은 朴正熙소장과는 달리 5·17쿠데타를 혁명적 상황으로 선언하지 않고 합법적 정권이양으로 위장하려고 하였다. 「혁명적 상황」아래서만 가능한 언론통폐합, 삼청교육, 과외수업금지, 공무원 숙정, 그리고 국가보위상임위원회 설치 및 崔圭夏대통령 퇴진을 연출해 놓고도 이를 「합법적 조치」로 꾸미려 했다는 데서 全斗煥정권의 죄의식을 읽을 수 있다. 全정권은 이 죄의식을 「대통령단임의 약속」으로써 지우려고 하였으나 그 단임이 군사정권 내부에서의 수평적 교대인 것을 간파한 민중의 분노와 불신을 달랠 수는 없었다. 이들의 개혁의지는 1982년의 장영자(張玲子)·이철희(李哲熙)사건으로 꺾였다. 사회개혁에 의한 정의사회 구현으로써 정통성의 결함을 보완하려던 全정권은 물가안정을 기조로 하는 고도경제성장을 추진하였다. 그 성공으로써도 정권의 정통성 문제를 덮어둘 수는 없었다.
  
  1984년의 학원자율화 조치에서 비롯된 학생시위의 격화에 이어 1985년 2·12총선에서 민의의 대전환이 일어났다.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란 대의명분 앞에서 야당, 민중, 학생은 단결하였다. 1985년 2월 12일부터 1987년 6월 29일까지의 2년4개월간은 대다수 한국인들이 민주화라는 역사적 사명감 앞에서 지역 이해관계까지 접어둔 채 분노하고 외치며 참여하였던 열정의 시기였다.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는 현장에서 새 역사를 스스로 만들고 있다는 보람으로 열병 같은 흥분을 많은 사람들이 맛보았다. 한국인들은 두고두고 이 시기의 집단적 열정을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되씹게 될 것이다. 6월 사태는 민중과 군사정권의 한판 힘겨루기였다. 6월 19일 全정권은 군 3개 사단의 동원령을 내렸다가 취소함으로써 물리력에 의한 문제해결을 포기하였다. 그 바탕에서 6·29선언이라는 군사정권의 자체 궤도수정이 이루어졌다.
  
  민주화의 두 사생아
  
  6·29선언은 金大中, 金泳三씨가 대통령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 아래서 이뤄진 全정권의 대도박 이었다. 두 金씨는 1980년 봄에도 호시탐탐 정권탈취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全장군 그룹을 앞에 두고 분열하여 5·17쿠데타의 틈을 제공한 전비(前非)가 있었다. 두 金씨는 1983년 8월15일에 서울과 워싱턴에서 동시에 발표한 성명서를 통해서 이 前非에 대해 사과하고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6·29선언 뒤 정권이 눈 앞에 보이자 金大中씨는 86년 11월의 「대통령 불출마 선언」을 이상한 논리로써 뒤엎었다. 金泳三민주당총재도 『마음을 비웠다』는 다짐에 어울리는 대승적 결단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全정권의 계산은 맞아떨어졌고, 盧泰愚민정당 대통령후보는 양金씨의 동시출마 덕분으로 36·6%의 지지로써도 당선될 수 있었다.
  87년 12월16일의 대통령선거는 지역감정의 악화라는 민족적 비극을 낳았다. 이 대통령선거 이후 양金씨에 대한 대다수 국민들의 분노는 두 사람을 정치무대에서 퇴장시킬 듯하였다. 그러나 소선거구제의 채택과 또 한 번의 지역감정 분출은 양金씨를 기사회생시켰고 1盧3金씨의 여소야대(與小野大) 정치구도는 고착되었다. 1盧3金씨는 그들이 저지른 지역분할이란 역사적 과오 덕분에 다시 정치지도자로서 생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5공비리 문제는 야당이 먼저 제기한 것이라기보다는 盧대통령 측이 全 전 대통령의 영향력을 단절시키기 위하여 벌인 현직 대통령의 지도력 강화캠페인에서 비롯되었다. 대통령 측근의 그 시나리오는, 권력이 잘 먹혀들지 않게 된 한국의 언론이 적당한 선에서 멈추지 않고 경쟁적으로 5共비리를 폭로해감으로써 그들이 예측하지 못했던 통제불능의 정치상황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88서울올림픽은 섬광처럼 한국의 위대한 잠재력을 순간적으로 노출시키는 데 그쳤다. 한국은 이 짧았던 정치휴전이 끝나자 다시 5共비리, 노사분규, 주사파 등장이란 북새통 속으로 들어갔다.
  
  한국의 갈등 구조
  
  이런 정치·사회불안은 드디어 한국의 고속경제를 감속시키게 되었다. 정치·사회불안은 「과거와 기성세대 및 기존질서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 「성장의 과실을 나누어 먹자」 「모든 문제의 책임은 全斗煥으로 대표되는 지배세력에 있다」 「자기변명」 「남 탓하기」 따위의 풍조로 나타났다. 이런 풍조는 일에 대한 한국인의 열의를 냉각시켰고 조직의 인간관계와 규율을 약화시켰다. 이런 현상에 위기의식을 갖고 있는 정치인과 언론인들도 전비(前非)에 대한 콤플렉스, 지역감정에 대한 눈치보기, 그리고 계층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재야·학생·노동자에게 용기 있는 충고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한 단계에서는 지도력을 발휘했던 지식인들은 힘겹게 얻은 민주화의 실천단계에서는 분열상과 무력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런 모든 진통은 국가의 생산력과 효율성, 그리고 사회윤리를 떨어뜨리는 방향으로 집약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느낌과 통계로써 이미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독재정권으로부터의 해방은 어느 정도 이룩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두 사생아가 탄생했으니, 그것은 2세대에 걸친 군사정권에의 반발심리에서 생긴 편협한 혁명이론과 지역감정이었다.
  
  이 땅의 어느 누구도 이 두 사생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그런 점에서 한국인은 바깥의 독재자를 내모는 사이에 우리 마음속에 또 다른 독재자를 만들어버린 셈이 되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늘 주의하여야 한다」는 경고는 불행히도 그 진실성을 입증하고 말았다. 문제는 이 두 사생아의 생모(生母)들인 1盧3金씨가 이 나라를 이끌고 있다는 현실인 것이다. 정치판이 全 전 대통령이 벗어놓고 가버린 5공비리란 옷을 서로 찢어발기고 있고 그 사이에 한국은 서서히 침몰하고 있다. 그 침몰을 확인해주는 지표들이 1990년대의 새아침에 뚜렷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로의 진입로를 막고 있는 이 절벽, 이름하여 「1990년 한국의 위기」는 대강 이런 갈등구조를 갖고 잇는 것 같다.
  
  그 심각성에 따라 차례대로 얘기한다면 한국사회는 노사분규와 과소비로 상징되는 소득계층간의 갈등, 지역갈등, 그리고 30대 이하 젊은 층과 40대 이상의 기성층을 갈라놓고 있는 세대갈등의 세 방향성 균열을 보이고 있다. 이 3대 갈등으로 갈라진 하부구조를 딛고 있는 상부구조-경제·사회·언론·정치도 저마다의 위기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경제는 생산성의 약화, 사회는 도덕률의 혼란, 언론은 사실 전달력의 취약성, 정치는 지도력의 마비증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는 언론이 국민과 기성정치판을 제대로 연결시켜줄 때 제대로 기능하게 돼 있다.
  한국의 언론은 외부적 자유는 얻었지만 계층, 지역, 세대간 갈등으로 내부적 자유를 스스로 제약함으로써 정치를 위한 토론의 광장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남북분단 때문에, 독재권력 때문에 진실마저 분단되던 과거의 상황은 지역, 계층, 세대간의 갈등 속에서 진실마저 해체되는 상황으로 대체되었다.
  
  6공화국에 들어와서 더욱 많아진 설(說)-컴퓨터부정설, 6·29선언 이설(異說), 이철규(李哲揆)군 타살설, 朴哲彦장관 평양축전 참관설, 金大中총재의 북한공작자금 1만 달러 수수설 등은 기자들이 그 진실을 알고 있거나 알 수 있으면서도 기사쓰기를 포기함으로써 탄생한 「현대의 신화」인 것이다. 정확한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이 안 되는 분위기 속에서 민주적 토론이 있을 수 없고, 토론이 없는 곳에서 국민적 공감대는 만들어지기 어렵다. 이런 공감대를 발판으로 삼아야 하는 민주적 정치지도력은 취약할 수밖에 없다.
[ 2005-08-06, 01:1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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