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박정희를 지지했나'

김형효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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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1984년8월호 월간조선에 썼던 '신40대기수론'의 일부이다.
  
  1970년대는 민중과 대중, 독재와 민주, 빵과 자유, 부의 축적과 부의 분배, 타율과 자율 등 대칭 개념들이 맞부딪친 시대였다. 고도 성장이 가져 온 성과와 부작용을 놓고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편이 갈렸다. 특히 지식층에서 양쪽의 대치는 첨예한 것이었다. 정부.여당 쪽에 참여한 지식인들은 도덕률을 뺀 기술만 팔아먹는 매판 지식인으로 매도됐다. 그 반대편 지식인들은 과격. 불순분자로 지목돼 감옥으로 가기가 일쑤였다.
  
  한쪽은 여론의 손가락질에 괴로워했고, 다른 쪽은 철권의 제압 아래서 스러져갔다. 金炯孝교수(당시 서강대학, 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공개적으로 새마을 정신을 지지한 소수의 학자 중 한사람이다. 그는 벨기에 루벵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을 때 서양 철학에 젖어 있었다. 그는 박사 논문의 대상이었던 가브리엘 마르셀에 심취해 있었다. 마르셀은 인격공동체의 가치를 중요시하고 혁명과 같은 열광성이 가진 사기성을 비판했다. 김씨는 인간의 불행한 면을 강조하는 사르뜨르가 싫었고 진실된 까뮤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귀국하여 장교 신분으로 공군사관학교 조교수로 일했다. 사관학교의 분위기는 딱딱했지만 부정과 협잡을 배척하는 학생들의 정의감에는 느끼는 바가 많았닥 한다. 김씨는 이즈음 고민을 많이 했다. 서양철학과 한국 현실과의 너무 큰 괴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승국(柳承國)교수(당시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교수. 전 정신문화연구원 원장)를 찾아가 동양철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이율곡과 원효를 좋아하게 됐다. 이율곡의 「기발이승」(氣發理乘) 사상이 마음에 들었다. 氣와 理, 즉 이상과 현실의 힘을 다 중시하고 조화시키려는 현실적인 학문 자세가 좋아졌다는 것이다.
  
  김형효씨는 조선왕조시대 지식인의 정신사를 이렇게 이해했다.
  
  ―개국 초기 두 가지 타입의 지식인이 있었다. 정도전은 현실, 정몽주는 이상을 중시했다. 조선조 시대에는 이 두 흐름이 줄곧 대치, 교차하면서 갈등하는 바람에 지식사회의 에너지가 탕진돼 갔다. 정도전을 계승한 학자들은 관학(官學)이라 하여 권력에 봉사하는 바 되었다. 정몽주의 맥을 잇는 학자들은 급진 이상론을 펴기 시작했으니 조광조가 그 대표다. 조광조의 실패 이후 이상파들은 현실에서 물러나 학문과 교육에만 힘썼다. 이율곡은 이 두 흐름을 종합하려 하나 당쟁에 휘말려 실패하고 만다. 官學은 이념이 없는 출세주의로 흘러 타락해 버린다. 말기에 실학이 나왔지만 실학의 이상은 현실 권력의 뒷받침을 못받아 실험으로만 그친다. 정몽주에서 시작된 순수주의는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으로 나타났고 해방 뒤에는 지식인의 비판적 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이 순수주의는 현실을 이상 속에서 증발시켜버리고 흑백논리를 몰고 올 위험성을 늘 갖고 있다. 순수주의.저항주의는 무엇을 창조하고 책임지는 자리에 서면 공허해진다.'
  
  국민의 평균 수준만큼만 발전
  
  이러한 생각에서 그는 朴대통령의 전통문화를 중시하는 자세나 새마을 정신을 좋아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朴대통령을 생전에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어용이란 비난을 학생들로부터 많이 받았는데 『학자로서 양심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다』고 했다.
  
  『당시 대학가는 朴대통령을 완전히 부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어떤 현상에도 양면이 있는 법인데, 그러한 완전부정은 비과학적이며, 그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유 없기는 피차 마찬가지였습니다. 朴대통령을 비판할 자유는 물리적 폭력에 의해, 지지할 자유는 여론이란 폭력에 의해 억압을 받았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협박 전화도 많이 왔어요. 이런 흑백 논리는 양쪽에 다 책임이 있어요. 저는 저항과 과학적 비판은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朴대통령이 아무리 나빠도 0.001%쯤은 좋은 점이 있을 테고, 저는 그 0.001%의 좋은 점을 대변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朴대통령의 단점은 통치철학이 그 개인에게 종속되었다는 점입니다. 그가 이념에 종속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는 10.26뒤에도 朴대통령을 계속 옹호했다.
  『國葬 때 TBC-TV에서 좌담회를 하는데 저를 불러요. 주변에서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말렸지만 나갔습니다. 저와 상대하게 돼 있었던 어느 원로는 朴대통령이 총애를 많이 받은 분인데 그 자리를 피하더군요. 인심 무상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공자가 제 나라의 관중을 평가한 말을 빌어 朴대통령과 같은 현실주의자의 역사적인 역할을 긍정적으로 말했습니다. 80년 봄에 저에 대한 중상과 비방이 쏟아져 저는 교수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끼고 차라리 行商이나 하겠다는 각오로 사표까지 썼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모든 목표를 한꺼번에 이루겠다는 동시적 이상주의의 환상이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그 국민의 평균 실력만큼만 발전하는 것이지, 만병통치약은 역사엔 절대 없습니다』
  
  
[ 2005-08-06, 10:4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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