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의 정보정치

조갑제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1974년10월1일부터 15일까지 보름간 朴대통령의 면담일지를 분석해보니 재미 있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1960년대의 1일 평균 면담자수보다 절반 이하로 줄었다. 이 기간에 朴대통령이 가장 자주 만난 사람은 申稙秀 중앙정보부장이었다.
  대통령은 정보부장을 11회에 걸쳐 16시간52분간을 만났다. 국회의원을 만난 회수는 6회에 3시간30분이었다. 朴대통령의 정치輕視 정보부重視 자세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대화輕視 정보공작重視의 정치행태이다. 당시 정보부는 對北 기능과 함께 학생동향과 야당공작 등 시국대책에 주력하고 있었다.
  정보부를 앞세운 朴대통령의 국내통치는 국회를 중심으로 한 여야대화를 형해화하고 있었다. 정보부의 對野공작은 논리적 설득이 아닌 협박과 회유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金泳三 金大中의 선명투쟁파에 대한 탄압과 중도온건파에 대한 회유로 나타났다. 정보부의 정치 개입은 야당을 이간질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강경파를 거리로 내몰아 在野세력과 손잡도록 했고, 야당의 온건파를 어용화시킴으로써 여야대치를 더욱 살벌하게 만들었다.
  
  1974년 가을에 朴대통령이 중점적으로 챙기고 있었던 國政은 대략 이런 항목들이었다.
  1. 북한이 판 땅굴에 대한 대책수립
  2. 한국군 현대화 계획인 율곡사업
  3. 핵무기 개발을 위한 재처리 시설도입 및 유도탄 개발사업
  4. 중화학공업 및 방위산업 건설
  5. 석유쇼크 후유증을 앓고 있던 경제의 회복과 수출진흥책
  6. 중동건설시장 진출 지원책
  7. 새마을운동의 전국적인 확산
  8. 악화되는 월남정세 점검 및 미국 포드 행정부 대책
  9. 공무원기강잡기
  10. 야당과 언론 및 在野운동 대책
  
  이들 가운데 朴대통령은 경제문제에 대해서는 상공부장관 및 재무장관을 역임했던 金正濂 비서실장에게 권한을 크게 위임했다. 金실장은 경제기획원장관을 중심으로 한 경제팀을 사실상 조정했다. 그는 뒤에서 조용히 일했기 때문에 오히려 실력자로서의 영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朴대통령은 金실장에게 경제를 거의 전담시피다시피해놓고 자신은 국방 외교 등 안보에 집중했다. 일반 행정은 金鍾泌 국무총리에게 맡겼다. 李厚洛 정보부장이 물러난 1973년12월부터 약2년간 金鍾泌 국무총리는 역대 어느 총리보다도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金총리는 申정보부장과도 관계가 좋았다.
  이 시기 핵심적은 역할을 한 또 한 사람은 吳源哲 제2경제수석비서관이다. 중화학공업 및 방위산업 건설, 그리고 무기개발 및 도입사업이기도 한 율곡사업을 책임졌던 그는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속에서 金실장과 호흡을 잘 맞추었다.
  -------------------------------------------
  
  
  1972년 5월 崔亨燮 과기처 장관은 프랑스를 방문하여 원자력기술 협력과 재처리 시절 도입에 관해 논의했다.
  1973년3월엔 프랑스원자력청과 그 산하 재처리 회사인 SGN(Saint Gobin Techniques Nouvelles) 대표단이
  와서 원자력연구소와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했다. SGN社는 원자력청 산하 국영회사였는데 파키스탄 등 핵무기 개발
  을 꾀하는 나라들에 대해 재처리 시설을 수출하여 외교분쟁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우리 원자력연구소는 일단
  SGN사에 대해서 시험용재처리시설의 개념설계를 요청했다. 그해 9월 尹容九 원자력연구소장이 이 회사를 찾아가
  정부가 차관교섭이 매듭지어지는대로 공장건설계약을 맺자는 합의를 보았다. 1975년4월 원자력연구소와 SGN 사이에
  재처리시설 건설을 위한 기술용역 및 공급계약이 체결되었다.
  핵폭탄용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한 재처리시설 도입건은 崔亨燮 과기처장관-朱載陽 원자력연구소 부소장-金哲원자력연구소
  대덕분소공정개발실장을 축으로 하여 추진되었다. 재처리시설 도입의 실무책임자인 朱박사는 미국 MIT공대에서 화공분야를
  전공하고 핵연료관계 연구를 했다. 그는 吳源哲 수석이 건의한 해외 인력 유치사업에 따라 1973년3월에 원자력연구소
  특수사업담당 부소장으로 영입되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인재확보였다. 국내에서는 재처리 시설에 관계했던 기술자
  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1973년5월23일부터 7월12일까지 캐나다와 미국을 방문하여 젊은 한국학자들을 이 사업에
  끌어들이는 일을 했다. 金哲 박사는 매사추세츠의 나티크 육군연구소에서 폐기문서 완전 분해과정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가 朱박사에게 설득당해 원자력연구소로 온 경우이다. 원자력연구소가 이 특수사업을 위해 해외에서 유치해온
  한국 과학자들은 약20명. 거의가 화공, 화학전공자들이었다.
[ 2005-08-07, 23:0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