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핵무기 개발 秘話

조갑제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吳源哲 보고서
  
  朴正熙 대통령이 추진한 핵폭탄 개발은 증언자에 따라 상당히 과장되어 있다. 마치 朴대통령이 핵폭탄을 만들기 직전에 피살된 것처럼 소설을 쓰기도 한다. 이 비밀핵개발에 대한 최초이자 유일한 문서는 月刊朝鮮이 2년 전에 발굴했던, 吳源哲 당시 대통령 경제제2수석비서관이 작성한 ‘原子核연료 개발계획’이란 9페이지짜리 문서이다. 이 문서는 核彈 개발의 방향과 전략을 쓴 것인데, 그 뒤의 추진과정과 맞추어보면 朴대통령이 이 문서대로 했다는 느낌이 든다. 이 문서는 2급 비밀로 분류되었다가 해제된 것으로서 정부기록보존소에 있었다.
  吳수석은 자신이 이 문서를 작성했다는 사실만 인정하고 일체의 설명을 거부했다. 그는 중화학공업 및 방위산업 건설, 그리고 무기개발을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核개발에 있어서도 실무 책임자였다.
  이 보고서에서 吳수석은 플루토늄 核彈을 만들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우라늄 核彈을 만들 경우에는 막대한 자금과 고도의 기술이 든다는 것이었다. 우라늄 농축시설에 대한 투자액은 약9억 달러, 건설기간은 8년이 들고 이를 가동하는 데는 200만kw가 소요된다.
  플루토늄彈의 경우에는 재처리 시설에 3900만 달러, 건설기간 6년이 소요되고 대규모 전력이 필요하지 않으며 ‘약간의 기술도입으로 국내개발이 가능하다’고 했다. 吳수석은 재처리 시설에 공급할 사용후핵연료를 어떻게 얻을 것인가도 검토했다. 그는 캐나다에서 만드는 重水爐 원자로를 이용하면 연간 200kg의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플루토늄 생산을 전문하는 연구로를 도입할 경우에는 플루토늄 생산량이 적다는 단점이 있다. 吳수석은 원자력 발전소를 추가로 지을 때 캐나다 CANDU형 중수로를 도입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1980년대 초에 가면 플루토늄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吳수석은 결론에서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과 재정 능력으로 보아 플루토늄彈을 개발한다.
  *1973년도부터 과학기술처(원자력연구소)로 하여금 상공부(한국전력)와 합동으로 核연료 기본기술 개발에 착수한다.
  *1980년대 초에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한다.
  *해외 한국인 원자력 기술자를 채용하여 인원을 보강한다>
  
  프랑스에서 재처리시설 도입 추진
  
  1972년 5월 崔亨燮 과기처 장관은 프랑스를 방문하여 원자력기술 협력과 재처리 시절 도입에 관해 논의했다. 1973년3월엔 프랑스원자력청과 그 산하 재처리 회사인 SGN(Saint Gobin Techniques Nouvelles) 대표단이 한국에 와서 원자력연구소와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했다. SGN社는 프랑스 국영회사였는데 파키스탄 등 핵무기 개발
  을 꾀하는 나라들에 재처리 시설을 수출하여 외교분쟁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우리 원자력연구소는 일단 SGN사에 대해서 시험용재처리시설의 개념설계를 요청했다. 그해 9월 尹容九 원자력연구소장이 이 회사를 찾아가 정부간 차관교섭이 매듭지어지는대로 공장건설계약을 맺자는 합의를 보았다. 1975년4월 원자력연구소와 SGN 사이에
  재처리시설 건설을 위한 기술용역 및 공급계약이 체결되었다.
  나는 지금 모 연구기관에 보관되어 있는 SGN사의 플루토늄 재처리시설 개념설계도를 볼 수 있었다. 1974년10월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설계도에 나타난 재처리 시설은 연간 약20kg의 플루토늄을 뽑아낸다. 이는 작은 핵폭탄을 네 개 만들 수 있는 양이다. 건설비는 3900만 달러, 건설기간은 5년.
  건물은 약50m 사방의 높이 27.5m, 공장운영에는 책임자급 기술자 15명과 165명의 기술요원 및 74명의 노동자가 소요된다.
  핵폭탄용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한 재처리시설 도입건은 崔亨燮 과기처장관-朱載陽 원자력연구소 부소장-金哲원자력연구소 대덕분소공정개발실장을 축으로 하여 추진되었다. 재처리시설 도입의 실무책임자인 朱박사는 미국 MIT공대에서 화공분야를 전공하고 핵연료관계 연구를 했다. 그는 吳源哲 수석이 건의한 해외 인력 유치사업에 따라 1973년3월에 원자력연구소 특수사업담당 부소장으로 영입되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인재확보였다. 국내에서는 재처리 시설에 관계했던 기술자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1973년5월23일부터 7월12일까지 캐나다와 미국을 방문하여 젊은 한국학자들을 이 사업에 끌어들이는 일을 했다. 金哲 박사는 매사추세츠의 나티크 육군연구소에서 폐기문서 완전 분해과정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가 朱박사에게 설득당해 원자력연구소로 온 경우이다. 원자력연구소가 이 특수사업을 위해 해외에서 모셔온 한국 과학자들은 약20명. 거의가 화공, 화학전공자들이었다.
  
  인도 핵실험으로 지장 초래
  
  朱載陽 부소장은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에 들어갈 원료인 사용후 핵연료를 생산하기 위한 NRX형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하는 일도 맡았다. 朴正熙정부는 캐나다로부터 중수로와 NRX 연구로를 함께 도입한다는
  계획을 세웠었다. 朱박사는 1973년11월에 대만과 인도를 방문한다. '원자력연구소 20년사'는 이 출장목적을 'NRX 원자로 도입에 따른 기술문제 협의차'라고 적고 있다. 이때 대만과 인도는 이 연구로를 가동하여 핵폭탄 제조를 추진하고 있었으므로 그에 관한 정보수집차 간 것으로 보인다. 1974년3월 드디어 朱박사는 캐나다를 방문하여 NRX 도입을 논의하고 왔다.
  한편 대량의 플루토늄 원료물질을 만들어내는 중수로형 원자로 도입계획도 동시에 추진되었다. 吳수석이 이 방향으로 추진할 것을 朴대통령에게 건의한 두 달 뒤인 1972년11월 이스라엘인으로서 한국이 외자를 도입할 때 수많은 중개를 해주었던 사울 아이젠버그가 캐나다 원자력공사와 대리인 계약을 맺고 한국전력측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1973년4월 캐나다 원자력공사 사장 존 그레이가 방한하여 월성에 세워질 60만KW짜리 원자력발전소 건설사업에 중수로를 팔고 싶다는 뜻을 한국정부측에 전했다. 당시 한전 사장은 閔忠植. 그는 朴대통령의 뜻을 읽고서 반대를 무릅쓰고 캐나다측을 주계약자로 선정하기로 하고 밀고나갔다.
  NRX연구로에 쓸 重水와 천연우라늄을 미국측에서 얻어올 수는 없으니 캐나다측에 기대기로 한 것이다. 重水爐에는 중수와 천연우라늄이 쓰이므로 우리는 미국측에 의존하지 않고 캐나다를 통해서 NRX연구로用까지도 도입할 수 있다고 보았다.
  朴대통령이 1972년부터 입체적으로 진행하던 核개발계획은 1974년5월에 인도가 라자스탄 사막에서 핵실험을 함으로써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인도 핵개발의 중심인물인 호미 바바 박사는 인도 재벌들이 제공한 초기 자금과 네루 수상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가 핵폭탄용 플루토늄을 뽑아낸 것이 바로 朴대통령이 도입하려고 했던 캐나다 NRX 연구로였다. 캐나다가 이 연구로를 기술원조의 일환으로 제공했던 것이다. 이 연구로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봉을 재처리하여 플루토늄을 추출했던 시설은 미국이 비밀을 해제하여 기술이 공개되었던 휴렉스 방식이었다. 이것도 미국회사의 기술적 도움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미국, 核개발 저지 결심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 등 기존 핵보유국들은 핵탄제조에 쓰일 기술과 장비의 수출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세계에 뻗어 있는 정보망을 동원하여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나라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미국은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가 '항공공업계획'이란 위장명칭하에서 地對地 미사일개발에 착수한 사실과 함께 프랑스로부터의 재처리 시설을 도입하려는 움직임과 캐나다와의 수상한 거래를 주시하게 되었다.
  1974년10월28일, 駐韓미국대사관은 국무부로 보낸 電文에서 '대사관은 현재 한국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분석중이며, 이것을 바탕으로 地對地 미사일 개발에 대해서도 주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미국측은 한국이 개발에 착수한 地對地 미사일이 핵탄 운반용이라고 판단했다는 이야기이다.
  1975년2월4일 미 국무부는 백악관의 대통령안보보좌관 브렌트 스코우그로프트 중장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이렇게 단정한다.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는 미사일뿐 아니라 핵무기의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이는 한반도 정세에 대단히 심각한 전략적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다>
  그해 3월4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서울, 오타와, 파리, 도쿄, 빈 주재 미국대사관으로 긴급발송한 電文에서 이렇게 말했다.
  <워싱턴의 정보기관들은 한국이 향후 10년안에 제한된 범위의 핵무기 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한국의 핵무기 보유는 일본, 소련, 중국, 그리고 미국까지 직접 관련되는 이 지역의 가장 큰 불안정 요인이 될 것이다. 이는 분쟁이 생길 경우 소련과 중국이 북한에 대해 핵무기를 지원토록 만들 것이다. 한미동맹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 개발계획은 미국의 對韓 안보공약에 대해서 한국측의 신뢰가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朴대통령은 對美군사의존도를 줄이려 하고 있다. 이 문제에서 우리의 근본적 목표는 한국 정부로 하여금 그 계획을 포기하도록 하거나, 핵무기 또는 그 운반능력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노력은 多者間 협력을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 우리는 최근 프랑스에 대해 한국에 재처리 시설을 제공할 것인가의 여부를 묻고 있는 상태이다. 가까운 시일내에 한국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한 정책을 수립할 계획이다>
  
[ 2005-08-09, 22:1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