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불러 면접시험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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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면접시험을 거쳐 수괴로 임명된 김일성
미국 대통령에게 '고얀 사람'이라고 호통 쳤던 李承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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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3월5일 소련 독재자 스탈린이 사망하자 넉 달 뒤 2년간 끌던 한국전쟁 휴전협상이 타결되었다. 毛澤東(모택동)과 김일성의 호소를 무시하고 전쟁을 계속하도록 시킨 것은 스탈린이었다. 오늘의 한반도 분단, 오늘의 북한 참상엔 스탈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스탈린은 트루먼과 함께 오늘을 사는 한국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외국인이다.
  
   金學俊(김학준) 전 동아일보 회장(전 서울대 교수)이 펴낸 '북한의 역사'(1,2권)는 두 권을 합쳐서 2000페이지나 되는 大作(대작)이다. 東西 냉전이 끝난 후 공개된 문서를 충분히 활용하여 쓴 이 책은 秘話(비화)가 많아 흥미진진하다. 1946년 7월에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불러 일종의 면접시험을 친 뒤 김일성을 북한정권의 수괴로 선택하는 장면은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이 왜 김일성을 무시하고 스탈린과 상대하려 하였고 북한을 항상 北傀(북괴)라고 불렀는지를 깨닫게 한다.
  
   金學俊 박사에 따르면, 스탈린은 모스크바로 호출된 두 사람에게 조선반도의 정세, 남조선의 정세, 북조선의 정세를 자세히 물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시험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고 한다. <(소련인) 레베제프는 이 경우에 대비해 이미 金을 꼼꼼하게 준비시켰었다>는 것이다. 스탈린이 무엇을 물어볼 것인가를 예측한 뒤 예상 질문들에 관한 대답을 미리 마련했었다는 것이다. 레베제프는 金에게 특히 군사문제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라고 충고했었다고 한다. 그 결과 김일성의 대답은 대체로 충실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특히 “군사 및 전략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가장 완벽하게 내보일 수 있었다”라고 레베제프는 회상했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소련군에 호의적으로 언급했다고 한다. 그는 스탈린의 배려, 그리고 소련군의 주둔 및 협조가 북한에서 여러 개혁들을 가능하게 했다는 말을 되풀이 함으로써 스탈린의 환심을 사려 했다.
  
   박헌영의 통역을 맡았던 샤브신의 부인 샤브시나의 회상에 따르면, 스탈린의 지시에 대해 朴이 “인민들과 상의를 해봐야 한다'고 대답하자, 스탈린은 그 자리에서 자기 스타일대로 “인민이라니? 인민이야 땅을 가는 사람들이잖소. 결정은 우리가 해야지”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북한의 역사'는 이렇게 썼다.
   <스탈린은 자신의 별장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의 일행을 초청해 연회를 베푼 뒤 朴을 모스크바에 며칠 머물게 해 기업소들과 공장들을 견학시키라고 지시했다. 스탈린의 통역들의 회상에 따르면, 金은 “무서운 지도자”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중급의 黨(당)간부처럼 보였으며, “아첨하는 어조로” 말했을 뿐만 아니라 내내 스탈린에게 동의하곤 했다. 당시 그들에 따르면, 김은 긴장해 있었고 언제라도 스탈린의 명령을 따를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으며 스탈린은 김이 마음에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제자처럼 대하면서 강의하고 지시했다. 통역들에 따르면, “스탈린은 군사에 관한 깊은 지식으로 김을 감동시키면서 戰爭史(전쟁사)로부터 예들을 자주 인용했다. […] 김은 진심에서 우러난 감격과 환희를 나타내며 입을 벌린 채 그것을 들었다.”
   레베제프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김은 열광적인 단어를 그치지 않고 반복했다. […] ‘어린 지도자’는 스탈린의 손에 의해서 그가 차지한 ‘영웅’의 권위가 ‘커다란 지도자’의 작은 손짓만으로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음을 분명히 이해했다.>
  
   여러 증언들을 종합하면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아부하였고, 박헌영은 깐깐한 자세였던 듯하다. 김일성은 생전에 黃長燁(황장엽) 비서에게 자신이 스탈린에게 불려가 시험을 잘 쳐서 박헌영을 누르고 지도자로 뽑혔다고 자랑하더라고 한다.
   한편 李承晩 대통령은 1954년 미국을 방문,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때 미국측이 韓日(한일)수교를 압박하자 '내가 살아 있는 한 수교는 없다'고 잘라 말하였다. 화가 난 아이젠하워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회의장을 나가자 李 대통령은 그의 등을 향하여 '저런 고얀 X이 있나, 저런'이라고 호통을 쳤다. 미국 대통령에게 호통 친 한국 대통령과 소련 독재자에게 아부한 북한 지도자의 차이가 오늘의 남북한 차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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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크 향해서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1954년 7월 李承晩 대통령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기 위하여 미국을 방문했다. 그는 미국 의회 연설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어중간한 對공산권 정책을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방문국의 대통령을 그 나라 국회에서 비판한 이 연설에 대해서 李承晩은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7월30일 백악관에서 2차 頂上(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영빈관인 블레어 하우스에 묵고 있던 李 대통령에게 미 국무성 副의전장이 정상회담 후 발표할 공동성명서 초안을 들고 왔다. 이 초안에는 李 대통령이 싫어하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한국은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호적으로 운운'하는 대목이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수립하여 동아시아에서 미군 작전이 원활하게 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여기에 李承晩 대통령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李 대통령은 미국이 일본을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싫었고, 한국의 國力(국력)이 약하므로 일본과 수교하는 데는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李 대통령은 즉각 참모들을 불러 모았다. 백두진, 양유찬, 김정렬씨 등이었다.
   '이 친구들이 나를 불러놓고 올가미를 씌우려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날 필요가 없지.'
   제2차 韓美 정상회담 시간은 오전 10시부터인데 李承晩 대통령은 움직이지 않았다. 백악관에서 '왜 안 오느냐'고 전화가 걸려왔다. 측근들이 '그래도 회담은 하셔야 합니다'라고 설득하여 李 대통령은 10분쯤 늦게 백악관 내 회담장에 도착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韓日 국교 수립이 필요하다고 말을 꺼냈다. 화가 나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내가 있는 한 일본하고는 상종을 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해버렸다. 아이젠하워(愛稱이 아이크) 대통령은 화를 내면서 일어나 옆방으로 들어갔다. 李 대통령은 이때 아이크의 등을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저런'
   물론 이 말은 통역되지 않았다. 아이크는 가까스로 화를 식히고 회담장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李承晩 대통령이 일어났다.
   '외신 기자 클럽에서 연설하려면 준비를 해야 합니다. 먼저 갑니다'
   李 대통령에 이어 아이크도 나가버렸다. 양유찬 駐美(주미)대사가 덜레스 국무장관을 설득하여 실무자들끼리 회담을 계속했다. 그래도 미국은 군사원조 4억2000만 달러, 경제원조 2억8000만 달러, 도합 7억 달러의 對韓원조를 약속했다(한표욱 지음, '이승만과 한미외교' 참고. 중앙일보사 발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때 유럽전선의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다. 독특한 웃음이 그의 매력이었다. 1952년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나와 큰 표차로 당선되었다. 이때 선거구호는 'I Like Ike'(나는 아이크를 좋아한다)였다. 아이크는 당선자 시절 한국전선을 방문했었다. 이때부터 李承晩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1875년생인 李承晩은 정상회담 당시 79세로서 아이크보다 15세가 더 많았다.
[ 2017-11-03, 00:0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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