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대 전반 나는 콩나물 교실인 초등학교에 다녔다. 교실 안에 그 사회의 풍경이 다 들어있었다. 부자 집은 기사를 시켜 아이의 점심을 보냈다. 구수한 버터를 발라 구운 빵 사이에 먹음직한 에그프라이와 싱싱한 야채를 넣은 샌드위치였다. 당시 먹기 힘들었던 따뜻한 미제 우유가 보온병에 담겨있었다. 부잣집 기사는 샌드위치와 우유를 담임선생 교탁에 별도로 올려놓았다. 우리는 특별 취급해달라는 메시지를 담은 일종의 뇌물인 셈이었다.
나는 그 아이가 먹는 마요네즈와 버무린 사과조각이 너무나 신기하고 먹고 싶었었다. 가난하게 산 어머니는 ‘마요네즈’라는 식자재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신 김치 조각 몇 개가 들어있는 양철로 만든 나의 도시락을 보면서 나도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샌드위치를 먹어봤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었었다.
내 옆에는 파란 눈을 가진 튀기아이가 있었다. 미군과 한국의 위안부 사이에 태어난 아이였다. 어린 내가 보기에 그 아이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의 도시락 반찬 그릇에도 거무튀튀한 김치줄거리 조각이 보였다. 나는 그 아이에게 너는 미국사람인데 왜 빵하고 버터를 안가지고 오고 보리밥을 가져오느냐고 철없이 물었었다. 그 아이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점심에 그마저도 먹을 게 없는 아이들은 미국의 원조를 받은 옥수수가루를 쪄서 만든 빵 한 개씩을 배급받았다. 맛은 없었다. 그냥 압축된 옥수수가루 자체였다.
매주 화요일 오전이면 나는 이웃빌딩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함께 차를 마시면서 같이 활동하는 변호사들과 겪었던 일들을 얘기하며 소통한다. 젊은 김 변호사의 말 중에 이런 내용이 귀에 들려왔다.
“저는 초등학교 때 영세민의 자식이었어요. 영세민 자식이면 학교에서 점심을 그냥 줬어요. 그런데 처음에 저한테 주는 우유나 빵에는 옆에 작게 ‘무상’이라고 적혀 있어요. 어린 마음에 그게 부끄러웠어요. 다른 아이들이 그걸 보고 저에게 ‘무상’이라고 별명을 붙였죠. 그런 현상이 생기니까 다음에는 무상이라는 표시가 없어지고 선생님들 수첩에만 무상급식을 받는 아이들의 표시가 써 있었어요.
그런데 교사들 중에는 철저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저만 해도 선생님이 교사 책상 위에 수첩을 펼쳐놓고 나간 적도 많았어요. 선생님의 수첩 내 이름 옆에 ‘무상’이라고 메모해 놓은 걸 보고 아이들이 또 나를 ‘무상’이라고 불렀어요. 무상으로 밥을 얻어먹던 나 같은 아이들은 콤플렉스가 있는 겁니다. 급식비를 낸 아이들은 우유나 빵이 상한 걸 보면 바꿔달라고 하면서 항의를 하는데 저같이 공짜로 얻어먹는 아이들은 그럴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복지혜택을 받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상처 난 마음도 헤아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이웃의 문제만이 아니다. 변호사로 간첩사건을 맡아 하다가 서류 속에서 우연히 북한의 고위직의 평가가 들어있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남쪽에서 식량이나 생필품을 도와주면 좀 조용히 도와주지 왜 꼭 정치인이나 비슷한 사람들이 와서 사진을 찍어가고 남쪽의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생색을 내느냐는 것이었다. 정말 자존심이 상한다는 내용이었다. 육십년대부터 ‘잘살아보세’라고 하고 내남없이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노력했다. 어떻게 하는 게 우리가 잘사는 걸까? 이제는 잘사는 껍데기에만 급급하던 걸 바꾸어 아름다운 내면으로 바꾸어야 진짜 잘사는 게 아닐까.
‘무상(無償)’이라고 불리는 아이
- 엄상익(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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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1-15, 2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