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투성이 시체, 부러진 몽둥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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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경찰관 아내의 「斷腸의 喪夫記」
  
  '공산당에게 맞아죽은 屍身들 속에 남편은 없었다
  남편이 차라리 北으로 끌려가 목숨이라도 부지했으면 하는 가냘픈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50여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박 순 애 서울 금천구 시흥2동
  
  이리市에서 맞은 6·25
  
  생각조차 하기 싫은 지난날을 더듬어보면 슬프고 고통스러웠던 시절의 기억들이 영화 필름 돌아가듯 선명하게 떠오른다.
  
  얼굴은 주름투성이이고 머리는 흰 눈이 쌓인 듯 백발이 되어버렸으며 이빨은 대부분 義齒(의치) 신세가 된 지금의 나는 몸 어느 구석을 보나 인생의 황혼기에 서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다. 그런데 기억의 필름이 한참 되돌아가다 멈춘 순간에 보여진 나의 모습은 20代의 아름다운 자태였다.
  
  6·25 당시 나는 26세였고, 자상하고 가정적이었던 나의 남편은 34세였다. 우리는 슬하에 3형제를 두었는데 많은 재산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남들이 부러워하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때 큰 아이는 여섯 살, 둘째는 네 살, 막내는 한 살이었다.
  
  전쟁이 나기 두 해 전에 남편은 전북 이리(현 익산) 경찰서 총무과 과장으로 있었는데,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사표를 냈다. 그리고는 양계장을 운영하여 성공해보겠다는 꿈을 안고 퇴직금과 옷가지를 저당 잡히고 빌린 돈으로 이리市에서 약 2㎞ 떨어진 신고현洞에 땅을 사서 양계를 시작하였다. 두 해 동안의 노력 끝에 어느 정도 안정된 수입이 있게 되었는데 이때 닭이 300수 가량 되었다. 성실한 노력으로 소박한 꿈이 현실 속에 이뤄져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행복을 느끼고 있던 우리 가정에 날벼락 같은 북한의 6·25 남침의 광풍이 불어닥쳤던 것이다.
  
  전쟁을 위한 軍備(군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았던 남한의 국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의 기습 남침에 맨주먹으로 대항하는 형국이었다. 북한 인민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거침 없이 南으로 南으로 내려왔다. 어느새 북한의 전투기들은 이리 상공에까지 날아와서는 철도 기관차실에 폭격을 가하였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참혹하게 죽었다. 얼마 후 인민군들은 행렬을 지어 철모에 풀과 나뭇가지를 꽂고 人共旗(인공기)를 달고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남부지방 모든 도시와 마을들을 휩쓸고 손아귀에 넣어가고 있었다.
  
  인민군이 들이닥치자 전부터 남한에 잠복해 있던 공산당원들과 평소 이들에게 동정적이었던 소위 「빨갱이들」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날뛰기 시작하였다. 「이젠 우리들 세상이다」라고 기세가 등등하였다. 그들은 팔에 붉은 완장을 차고 돌아다니면서 과거 남한 정부에 충성했던 인사, 재산 있고 교육받은 사람, 그리고 평소에 惡感(악감)을 갖고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붙잡아다가 「반동분자」라는 누명을 씌워 가두기도 하고 혹은 죽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소위 「반동분자」의 집에 들어가 재산을 빼앗고 가축을 잡아먹고 돌아다니면서 온갖 권세를 부렸다.
  
  한밤중에 끌려간 남편
  
  남편은 사직한 지 이미 2년이 지났지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서 피신하려던 중 전직 경찰은 손대지 않는다는 선전을 전해 듣고 안심을 하고 있었다. 나는 불안하여 집 걱정은 하지 말고 피신하라고 권고하였다. 가정과 집안 일들이 걱정이 되어 바로 집을 떠나지 못하던 남편은 엉거주춤하고 있다가 결국 당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강제적으로라도 피신하도록 밀어냈어야 했는데 후회가 되지만 어찌 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어느 날 밤 인민군과 동네의 「빨갱이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왔다. 남편을 불러내어 『너 경찰 했지?』하고 큰 소리로 묻고는 끌고 가는 것이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안고 따라가면서 아무 죄 없는 사람을 무엇 때문에 붙잡아 가느냐고 항의하며 울고불고 애걸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는 분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이 악질 공산당 놈들아!』
  
  그러나 물은 이미 엎질러진 것, 감정을 가라앉히고 대책을 강구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큰 아이 두 형제를 이웃집 할머니에게 맡기고 어린 막내는 업은 채 남편의 옷가지를 싸 가지고 소위 보안서로 갔다. 팔에 완장을 찬 무지막지해 보이는 「빨갱이들」이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였다.
  
  그중에 과거 우리 동네 반장을 했던 이가 있기에 반가워서 인사를 하며 우리 집 주인 좀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하였다. 그는 쳐다 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손짓만 하였다. 아는 사람이 이럴 수가 있나 하고 분한 마음이 치솟았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또 다시 옆에 있던 다른 이에게 간곡하게 부탁을 하였더니 그 사람은 등에 업고 있는 아이를 한참이나 들여다 보더니 전주형무소에 가 있으니 걱정 말고 돌아가라고 말하였다.
  
  믿어지지 않아 유치장 쪽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았지만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어찌 되었기에 안 보일까, 진짜 전주 형무소로 보냈나?』하고 생각하다가 점점 불길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발이 떨리어 간신히 보안서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중 폭격기가 시내를 돌며 폭격을 해서 계속 나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를 기다리며 울고 있을 어린 두 형제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내가 없으면 누가 키워줄까, 애들을 위하여 살아야 해」 이렇게 생각하면서 등에 업은 아이를 안고 엎드렸다.
  
  폭격기가 지나가면 또 다시 걷고 이렇게 하면서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양계장의 닭은 다 없어졌다. 내가 시집 오고 나서 남편이 사다 줘 애지중지하던 오르간은 인민군이 인민의 노래를 배운다고 그들이 점거하고 있던 교회로 가져갔다. 뿐만 아니라 된장 고추장을 항아리째 다 가져가기에 조금은 남겨두고 가라고 하니 『당신네는 반역자다. 그러니 여기저기 다니며 얻어다 먹어라. 이것은 모두 인민병원에 보낼 것이다』 하며 오히려 자기 것인 양 당당하였다.
  
  가구며 이부자리며 옷가지 등은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한쪽 방에 몰아넣고는 문을 잠가버렸다. 그밖에 저희들이 필요한 것들을 다 가져가 버렸다. 심지어 김일성 사진을 건다고 몇 개 안되는 사진 액자까지도 가져갔다. 또다른 방은 공산당들이 사무실로 점거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래 부르며 떠들어댔다.
  
  한편 그들은 우리를 감시하는 눈초리를 떼지 않았다. 우리 이웃 사람들은 피난 가고 없었고 할머니 한 분만 남아 계셨는데 밤이 되면 무서워서 할머니와 같이 있었지만 불안하여 마음 놓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인민군이 남침하여 난동을 부린 것은 불과 3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3년도 더 되는 듯 지루했고 지긋지긋했다. 심적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두 아이 업고, 끌고 전주 형무소로
  
  공포의 날들은 그래도 흘러갔다. 어느 날 밤 방 안이 조용해져서 들으니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였다는 소문과 9·28 서울 수복 소식도 이리에까지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전주 형무소도 문이 열렸다고 수군대는 소리도 들렸다. 그 소리에 너무나 반가워 춤이라도 출 것 같았고, 『유엔군 감사합니다!』 하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이 기쁜 소식을 전할 그이는 우리 곁에 없었다.
  
  아직 사방에서 설치고 있는 공산당 잔당들이 도망가면서 우리 가족을 해치면 어찌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즉시 먼 길을 걸을 수 없을 둘째 아들을 이웃 할머니에게 부탁하고 큰 아이는 걸리고 막내는 업고서 전주로 향하였다. 『전주 형무소의 문이 열렸다니 이제는 그 이를 만날 수 있을 거야』 마음은 급하고 마구 뛰었다. 집에서 전주 형무소까지는 100리 길이었다. 밤을 새워 걷다 보니 밤이슬이 내려 몸이 축축하고 추웠다.
  
  큰 아이는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거렸다. 두 아이를 함께 업을 수도 없고 안타까워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달래가며 쉬었다 걷고 또 걸었다. 길을 몰라 헤매며 어두운 밤길을 무서움도 무릅쓰고 걷다 보니 어느새 동쪽 하늘에서 불그스름한 햇살이 비쳐 불쌍한 우리 母子(모자)를 반겨주는 듯하였다. 우리 세 모자는 활짝 웃으며 떠오르는 햇님을 보자 생기가 나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외쳤다.
  
  바로 이 새벽 시간에는 차도 없었고 지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가다가 앞을 쳐다보니 내복 바람에 머리는 길고 얼굴은 창백해 보이는 40대 가량의 한 남자가 비슬거리며 오솔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전주 형무소에서 갓 나오는 사람 같아 보였다. 가까이 왔을 때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오늘 새벽 형무소 문이 열려서 막 나오는 길인데 아직 못 나온 사람도 있다고 전해주었다.
  
  인민군이 문을 열어주자마자 와! 하고 몰려나오는 도중 지방 공산당들이 막아서서 인민군들에게 항의하면서 『왜 너희가 문을 열어주어 우리의 원수들을 풀어주느냐?』 하고 항의하고는 문을 도로 닫아버려서 나머지 사람들은 못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창백한 얼굴의 그 남자는 나에게 몇 가지 정보를 더 말해 주었다.
  
  9·28 수복 3~4일 전부터 밤이 되면 형무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내어다가 몽둥이로 두들겨 패곤 했는데 너무 아파 부르짖는 애절한 소리에 감방에 남아 있는 사람들까지도 몸의 피가 마를 정도였고 바로 지옥 같은 순간이었다고 했다. 불려나가 맞아 죽은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고 했다.
  
  그는 계속해서 힘없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후에 열렸던 문이 닫혀 못 나온 사람들도 결국 그렇게 죽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런 끔찍하고 잔인한 소식을 듣게 되자 혹시 남편이 형무소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마저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비규환, 지옥 그대로의 모습
  
  공중에서는 제트기가 「색 색」 소리를 내면서 빠른 속도로 전주 시내를 누비며 귀를 찢는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시내에 남아 있을 인민군을 몰아내기 위한 작전인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잠잠해지자 전주에 사는 먼 친척집에 들러 아이들을 맡겨놓고는 형무소로 급히 달려갔다.
  
  형무소에 들어서자 이미 광장에는 무수한 屍身(시신)이 널려 있었다. 이를 찾으러 온 가족들이 경악과 슬픔 속에서 묵묵히 시체를 찾고 있었다. 큰 운동장에는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시체를 한 구씩 한 구씩 눕혀 놓았던 것이다. 손을 뒤로 결박하여 철사나 단단한 끈으로 묶고 몽둥이로 패서 죽게 된 屍身들이어서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어 있었다. 그래서 입고 있는 옷을 보면서 찾아가고 있었다. 아비규환, 지옥 그대로였다.
  
  나도 남편을 찾으려고 수백 구의 屍身을 찾아다녔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남편은 거기에 없었다. 없기를 바라면서도 그러나 한편으로는 『만일 죽었다면 屍身이라도 찾아서 양지바른 곳에 고이 잠들게 해야지』하고 마음 먹었지만 떨리고 슬퍼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재차 현장을 돌면서 행여나 빠지지 않았을까 하여 찾아보았다. 그러나 남편의 屍身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행여나 어디엔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느 야산 골짜기를 지나게 되었다. 자수하면 무조건 용서한다는 공산당들의 감언이설을 믿고 3개월간을 숨어서 고생하다가 9·28 수복 전날 가족들의 권유로 자수하러 갔다가 간악한 저들의 마수에 이곳으로 끌려와 참혹하게 맞아 죽은 시체들이었다.
  
  신사복 차림 그대로 몽둥이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여섯 구의 시체였다. 근처에 부러진 몽둥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차라리 총살을 했다면 이 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고 죽었을 텐데 하고 생각하였다. 참으로 짐승도 아닌 사람으로서 이런 끔찍한 만행을 할 수 있을까? 벌레도 죽이지 못했던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원수를 사랑하라」
  
  끝끝내 남편의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어 한편으로는 체념도 하고 또다른 한편으로 그들에게 끌려 北으로 납북되어 가가서라도 행여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있으면 하는 가냘픈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어린 3형제를 키우며 악착같이 살아오다 보니 어언 50년의 긴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아직도 남북 통일이 안 된 채, 이산가족이 되어 왕래는 물론 서로의 생사조차도 모르는 가운데 살아 있는 6·25 전쟁 1세대는 이제 70~80세가 넘어 인생의 황혼 길을 걷고 있다. 조급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족을 재회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은 한결 같이 명절 때면 고향의 부모 형제를 그리며 눈물 짖는 분들이 아닌가.
  
  남북회담 때면 남한은 최우선 순위로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제기하는 데, 북한은 자기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이산가족의 상봉이 이뤄지도록 하겠다고 협상에 응하는 체하지만 지금까지 흥정거리로 이용할 뿐 인도주의적인 자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공산당들에게 그런 기대를 건다는 것이 헛된 것일 뿐이라는 생각도 하면서도 이산가족들의 심정은 이번만은 하는 기대를 가져보는 것이다. 북한의 남침으로 인하여 이 땅 위에서 생긴 수많은 전쟁 고아들, 미망인들, 상이군인들, 그리고 이산가족들이 그들 생전에 통일을 보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단란했던 우리 가정의 행복을 산산조각 나게 한 6·25! 그리고 이 전쟁을 일으킨 원흉을 증오하기도 하였지만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으니 주님의 제자된 나는 이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
  
  비옵기는 주님, 북한의 동족상잔의 비극의 주모자들과 6·25 때 이 땅 위에 무죄한 피를 흘리고 무자비하게 强暴(강포)를 행한 자들을 회개하게 하시고 그들의 죄과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이 북한 방방곡곡에 넘치도록 하여 주셔서 평화로운 통일이 성취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2005-09-26, 01:5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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