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을 유엔 사무총장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볼튼과 라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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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볼튼 전 유엔 주재 美 대사의 회고록 ‘항복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 유엔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미국을 지키다(Surrender is Not An Option: Defending America at the United Nations and Abroad)’ 10장에는 2006년 당시 한국 외교통상부 장관이었던 潘基文(반기문) 씨가 유엔 사무총장 자리에 오르는 과정의 秘話(비화)가 담겨 있다.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가나 출신의 코피 아난이었다. 임기 1년을 앞두고 코피 아난은 ‘석유-식량’ 스캔들에 휘말렸다. 석유-식량 프로그램은 이라크에 대한 人道主義(인도주의)적 지원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금융제재로 인해 합법적 석유 수출이 불가능했던 이라크에 돈 대신 음식으로 代價(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돈으로 석유를 구매하면 이라크가 軍費(군비) 확장에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피 아난의 아들인 코조 아난이 아버지의 지위를 남용, ‘석유-식량’ 프로그램의 관계자로 이름을 올린 뒤 돈을 횡령한 사실이 밝혀졌다. 액수는 몇만 불 수준이었고 내부 조사결과 코피 아난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유엔 회원국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유엔이 腐敗(부패)했다는 인식이 팽배한 시점, 즉 改革(개혁)이 불가피한 시점과 새로운 사무총장 선출 시기가 겹친 것이다.
  
   2006년 사무총장 선출 당시 이번에는 아시아에서 나올 차례라는 의견이 많았다. 대륙별로 돌아가면서 사무총장 직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흔히들 알고 있지만 이는 정해진 규칙은 아니다. 사무총장은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국가들이 결정, 총회의 추인을 받는다. 안보리에 속하지 않은 유엔 회원국들은 후보를 등록시키는 것 이외에는 선출에 있어 실질적 권한이 없다.
  
   1991년 이후 아프리카 출신 사무총장 두 명이 15년 동안 자리를 지켰다. 임기는 5년이다. 존 볼튼에 따르면 코피 아난 사무총장을, 아시아 국가들이 밀어줬으며 다음 번에는 아프리카가 아시아 후보를 도와주기로 했다고 한다.
  
   2006년 당시 사무총장 후보로는 태국 부총리를 지낸 수라키앗 사티라타이, 스리랑카 출신으로 駐워싱턴 대사 및 유엔 군축담당 사무차장을 역임한 자얀타 다나팔라, 인도 국적으로 유엔 사무차장에 올랐던 샤쉬 타로어가 거론됐다. 존 볼튼은 이들 후보들에게는 여러 문제점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사티라타이의 경우는 그냥 부잣집 아들이라는 이미지가 짙었다. 다나팔라의 경우는 동남아 국가 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도의 지지가 필요했지만 인도가 자체적 후보를 내면서 사실상 가능성이 사라졌다.
  
   가장 유력했던 후보는 인도의 타로어였다. 하지만 볼튼은 타로어의 사상과 이념이 미국이 추구하는 유엔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설명했다. 타로어는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을 비난해왔다. 一例(일례)로는 그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이다. 그는 칼럼에서 인도의 대표 스포츠인 “크리켓과 (미국의 대표 스포츠) 야구의 차이는 微積分(미적분)과 단순 덧셈 뺄셈의 차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인도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들어가고 싶은 야심이 있던 국가였다. 하지만 인도 출신이 사무총장에 오르는 것은, 유엔에서 不文律(불문율)로 지켜지던 ‘강대국은 후보를 내지 않는다’와 배치되는 것이었다. 파키스탄의 反撥(반발)도 거셌다.
  
   그러한 과정에서 한국의 반기문 이름이 거론됐다. 반기문은 외교관을 지내며 뉴욕과 워싱턴 등에서 근무하는 등 전형적인 ‘미국통’이었다. 볼튼은 조지 부시(41대, 아버지 부시) 대통령 재임 당시 한국과 북한이 동시 유엔 가입을 할 때 반기문과 같이 일을 한 인연도 있었다고 했다.
  
   볼튼은 2005년 8월 뉴욕을 방문한 반기문과 만나 北核과 6자 회담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반기문씨는 자신이 갖고 있던 유엔 개혁 방안 등을 털어놨다고 한다. 반기문씨의 구상을 들은 볼튼은 그의 생각이 미국이 추구하는 것과 거의 비슷했다고 자신의 책에서 회고했다.
  
   반기문은 2006년 초 다시 뉴욕을 방문해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국무부 장관 등과 회동했다. 이날 반기문은 미국이 지지하는 후보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볼튼에 따르면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이 누구를 적극적으로 밀어줄지 결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2006년 6월, 라이스는 볼튼에게 반기문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볼튼은 회고록에서 “콘돌리자 라이스는 2006년 4월 나에게 자신은 강력한 사무총장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썼다.
  
   2006년 7월25일, 안보리 이사국 대표들 간의 1차 비공식 투표가 있었다. 이날 반기문이 찬성 12표, 인도의 타로어가 10표를 받아 1~2위로 조사됐다.
  
   볼튼은 2006년 9월18일에 있었던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과 중국의 리 외무장관의 회담에서 두 나라가 반기문 장관을 총장으로 밀기로 합의함으로써 사실상 결론이 났다고 썼다.
  
   같은 해 9월 14일 열린 비공식 투표에서 반기문은 찬성 14표, 반대 1표를 받았다. 10표를 받은 타로어와의 격차는 4표로 늘었지만 볼튼은 반대 한 표가 신경이 쓰였다고 했다. 만약 거부권(veto)을 가진 안보리 상임이사국 중 한 국가가 반대를 한다면 사무총장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볼튼은 중국 측 대표와 얘기를 해본 결과 중국은 반기문에 긍정적이었다고 했다. 볼튼은 반대표가 한국과 각종 외교적 마찰을 겪고 있는 일본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측했다.
  
   반기문은 볼튼을 만나 반대표가 가나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했다. 반기문은, “나에게 반대표를 낸 사람이 타로어에게는 찬성표를 던졌다. 타로어는 코피 아난이 밀어주는 사람이다. 타로어가 아난의 치부를 낱낱이 밝히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서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볼튼은 중국과 상의해본 결과 반대표는 일본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반기문에게 말했다. 이에 대해 반기문은 자신이 직접 일본 측과 대화를 해봤으며 그들이 반대표를 내지 않았다고 했다. 볼튼은 자신이 직접 일본 대표와 만나봐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책에서 설명했다.
  
   켄조 오시마 일본측 유엔 대표는 볼튼과 만난 자리에서 일본이 반대표를 던졌다는 점을 시사했다. 볼튼은 이미 大勢는 반기문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반대를 한다고 하면 외톨이가 될 뿐이라고 조언했다. 오시마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국을 10월에 방문할 것이기 때문에 그 때까지는 투표를 보류해달라고 요청했다.
  
   다음 열린 예비 투표에서 반기문은 찬성 14표, 기권 1표를 받았다. 일본의 반대표가 기권으로 이동한 것으로 볼튼은 추측했다. 다른 후보들은 하나둘씩 사퇴 의사를 밝혔다.
  
   10월 9일 열린 안보리 정식 투표에서 단독 후보로 이름을 올린 반기문이 선출됐다. 이날은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한 날과 겹친다.
  
   10월 13일 볼튼을 만난 반기문은 북핵 문제 때문에 외교부장관직을 빨라야 11월에나 그만둘 수 있다고 했다. 볼튼은 반기문에게 고위직 임명과 관련해 소신 있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이어 미국은 유엔의 행정조직에서 평화유지활동(DPKO) 임무를 맡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볼튼은 안보리가 추천한 반기문 장관을 신임 사무총장으로 공식 선출한 유엔 총회에서 반 총장이 한 연설 일부를 자신의 책에서 소개했다. 반기문은 1950년 북한의 南侵(남침) 이후 유엔이 준 도움 등을 언급했다. 볼튼은 이날 취재진에게 유엔 사무총장을 탄생시킨 한국과, 핵실험이나 하고 있는 북한과의 차이에 대해 강조했다고 회고했다.
  
   10월 17일 반기문은 조지 부시 대통령을 만났다. 조지 부시는 이날 반기문에게 미국이 평화유지 활동을 관리하고 싶다고 했다고 볼튼은 전했다. 반기문은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에 중점을 두고 싶다고 했지만 부시는 유엔의 개혁을 요청하였다. 참모진을 확 바꿨으면 한다고 했다. 부시는 특히 유엔사무차장인 말로흐 브라운(영국인)을 특정, 그를 '반미주의자'로 부르면서 쫓아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부시는 유엔의 비효율성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임기를 이제 1년 남짓 남겨둔 반기문 사무총장의 최대 업적은 아무래도 지난해 말 채택된 ‘파리 기후변화 협약’이다.
  
   온실가스 문제를 비롯한 기후변화 대책은 일부 기업의 生死(생사)와 관련되기 때문에 모든 국가의 동의를 얻어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潘 사무총장은 지난 9년간 북극과 남극, 아마존과 태평양 국가 곳곳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기후변화 대책의 중요성을 강조, 역사적 합의를 이끌어냈다.
  
   지난해 9월 유엔 총회에서 반기문은 “가난을 끝내는 첫 세대, 지구 온난화를 막는 마지막 세대가 되자”고 강조하기도 했다.
  
   각국 언론들은 파리 협정의 최대 공로자로 반기문 사무총장을 꼽았다. 협정 채택 이후 195개국 중 187개국이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제시한 것 역시 매우 이례적이었다. 반 사무총장은 年末에 발표한 신년사에서 파리 협정을 유엔의 대표적인 성과였다고 밝힌 바 있다.
  
[ 2019-03-21, 22:0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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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丁     2019-03-22 오전 2:11
음… 미국이 강력한 사무총장을 원치 않아 만만한 기름장어를 밀었군. 어쨌거나 유엔사무총장 자리까지 누린 양반이 말년에 무슨 영화를 또 누려보겠다고 문재인이 내민 감투를 덥석 받아쓰나. 미세먼지 똥바가지 덮어씌우고 저는 빠지려는 속셈도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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