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과자에게 농락당한 집념의 檢事(검사)
[實錄연재]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10)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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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注―‘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는 1981~1982년에 걸쳐 월간 〈마당〉에 연재 후, 1987년 한길사에서 나온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에 포함되었다가 2011년 조갑제닷컴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현재는 절판)되었다. 조갑제 기자가 가장 애착 가는 기사로 꼽은 이 글을 조갑제닷컴에 재연재한다.
‘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 3장 하느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②

“날 죽여?”
 
  김금식 씨의 심경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징조는 그 며칠 앞에 있었다.
  <대구교도소 현장검증을 마치고 대구역에 나갔을 대 나(김기철)는 금식이와 마주쳤다. 나는 그를 원망에 찬 눈초리로 쳐다봤다. 이때 그는 대뜸 ‘지금까지 한 일은 모두 연극이었다. 어쩔 수 없이 너를 몰고 들어갔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수사진에 말려서 나온다는 이름이 너밖에 없더라. 한 열 달만 고생해라.’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처음에는 이놈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런 말을 하는가 싶어 그의 말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투가 심각한 것을 보고는 ‘이제 제정신이 돌아오나 보다’고 생각했다.>(<부산일보> 1969년 8월1일 김기철 씨 수기)

 

  김금식 씨는 자신의 심경 변화를 뒤에 이렇게 설명했다.
  “형세는 점점 우리에게 불리해져갔다. 불법 출소가 굳어지면 범행을 부인해보았자 흉악범의 발버둥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임은 뻔한 일이었다. 이때 나는 연극을 너무 깊숙하게 끌고 가 이제 헤어날 길이 어렵게 됐음을 깨달았다.
  검찰이 기소하기 직전에 사실을 털어놓아 ‘검찰 우롱’에 대한 벌을 받는 것으로 연극의 종장을 삼으려 했던 나의 계획은 金 검사의 사건 해결에의 집념에 부딪쳐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밖에도 徐 변호사의 끈기 있는 설득과 이모의 울부짖음이 남긴 충격이 그의 전환을 몰고 온 요인들이었다.

  10월28일 10회 공판이 열렸다. 법정에서 김금식 씨는 최형욱 씨와 스치자 “오늘은 바른말 하겠다”고 했으나 崔 씨는 믿지 않았다. 공판이 시작된 직후 박정표 재판장은 김금식 씨에게 “이제까지 한 말에 잘못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 지루한 공판을 마무리 지을 때가 왔다고 판단, 금식 씨의 진술을 의례적으로 재확인하려고 했던 것 같다. 朴 판사의 물음에 金 씨는 폭탄선언으로 답했다.

  “지금까지의 진술은 모두 허위 자백이었다. 나는 전과자를 믿어주지 않는 법을 우롱하고 경찰과 검찰의 수사 능력을 테스트하려고 했다. 나는 불법 출소한 일이 없다. 불법 출소한 날에 했다는 행동은 모조리 만기 출소한 날에 한 행동이다. 허위 자백은 검찰청 직원 구영근 씨가 시키는 대로 맞춰 했다. 검사는 나를 자수자로 취급, 가벼운 형을 구형하기로 했으며 항소심의 관할 법원도 대구가 아닌 곳으로 바꿔주기로 했었다(필자注-그가 대구교도소 교도관들을 물고 들어갔으므로 대구교도소를 피하자는 뜻). 정대범은 모르는 사람이며 검찰 조사 때 가르쳐주어서 알게 됐다. 검찰이 말하는 박영태는 유령 인물이며 실제로는 박태형이 박영태란 이름으로 나를 면회했을 뿐이다. 옆에 서 있는 다른 피고인들은 모두 억울한 고생을 하고 있다. 이 연극의 발단은 지난 3월 서부서에 낸 나의 투서로서….”

  이것은 검사들에게 있어서 천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그동안 쌓아올렸던 범행 立證(입증)의 구조물이 그 뿌리에서부터 뒤집어지는 순간이었다. 수사 기간 중, 그리고 재판 진행 중 변덕 심한 金 씨를 달래는 데 그토록 공을 들인 보람도 없이 그는 ‘인간 선언’을 하고 만 것이었다. 이날 김기철 씨의 형 이만 씨는 방청석에 앉아 있다가 뒤를 돌아보는 금식 씨와 눈이 마주쳤다.
  “나의 성난 얼굴을 보자 그는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모아 잘못을 사죄하는 시늉을 하더군요.”

  그때까지 김금식 씨의 진술이 믿을 만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온 힘을 기울여왔던 검찰은 이제부터는 前科者(전과자) 김금식 씨는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인간인가를 증명해야 할 입장으로 뒤바뀌게 됐다. 검찰 측은 일단 다음 공판 때 김금식 씨의 자백 번복을 다시 번복시킬 자료를 제시하겠다고 재판부에 밝힌 뒤 이 충격을 가누어야 했다.
  7일 뒤 열린 제11회 공판에서 감찰 측이 내세운 증인은 성 모였다. 그는 1967년 가을에 김금식 씨와 술을 마셨는데 날짜는 17일이었고 그때 금식 씨는 얇은 잠바를 입고 있었다고 했다. 검찰 측은 ‘얇은 잠바’를 입었다면 10월17일이 틀림없다는 궁색한 논리를 펴려고 했던 것이다.

  이어서 김태현 검사의 서기 방두환 씨와 구영근 씨가 증인으로 나타났다. 방 씨는 수사과정을 이야기하면서 김금식 씨가 수십 번이나 시인과 번복을 되풀이 했다고 말했다. 구 씨는 금식 씨의 간첩 관계 거짓말 때문에 중앙정보부, 경찰, 검찰, 군 병력, 함정까지 동원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증언은 김금식 씨의 변덕보다는 그런 金 씨를 유일한 길잡이로 하여 수사를 해온 검찰 측의 작태를 폭로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넉 달을 끈 이 재판의 구형 공판은 11월12일 오후 2시부터 부산지법 제1호 법정에서 열렸다. 방청석은 피고들의 친척, 친지, 가족, 그리고 기자들로 꽉 메워졌다.
  이날 <국제신보> 사진부 김상업 기자는 김금식 씨와 또 마주쳤다. 금식 씨와 취재 기자들은 이젠 낯이 익어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돼 있었다. 金 기자는 넉 달 동안 거의 출근하다시피 부산지법을 드나들고 있었다. 금식 씨는 金 기자를 보더니 손가락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며 싱긋 웃었다. 金 기자는 금식 씨가 ‘오늘 나는 사형 구형을 받게 될 것이다’는 시늉을 하는 것으로 알았다. 金 기자는 “한 번 더 해봐”라고 했다. 금식씨는 같은 몸짓을 했다. ‘찰칵!’ 김 기자는 셔터를 눌렀다. 그날 <국제신보>엔 ‘나를 죽여?’라는 설명이 달린 금식 씨의 冷笑(냉소)하는 사진이 실렸다.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의 금식 씨는 뱅긋 웃고 있었다. 이때쯤 거의 모든 취재 기자들은 피고인들이 무고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나는 사진 기자라는 직업상 머리를 푹 숙이고 참회하는 모습의 피고인을 찍으려고 애썼습니다. 보통 피고들은 못에 힘을 주고 있다가도 재판이 진행되면 풀이 죽기 시작하여 고개를 떨구게 되고 그때를 기다려 셔터를 누르지요. 그런데 이들은 통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뻣뻣하게 치켜들고 성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김상업 기자)

  이날 검사들은 두 시간에 걸쳐 준엄한 斷罪(단죄)의 논고를 했다. 검찰 측은 이번 사건은 사상 최고의 지능범죄라고 말하고 다섯 가지의 범죄 특색을 들었다. ①완전범죄를 꾀한 치밀한 계획성, ②칼을 근하 군의 가슴에 꽂아둔 채 뽑지 않아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게 한 잔인성, ③살해 장소를 근하 군 집 근처로 택하고 시체유기 장소를 人家(인가) 근처인 해안통으로 선택한 대담성, ④인간성을 팔아가며 돈에 눈이 뒤집힌 외삼촌의 비인도적 소행, ⑤교도관과 짜고 당당히 불법 출소, 국가가 보장하는 알리바이를 조작한 기상천외의 지능. 김태현 검사는 이번 사건의 특수성을 그렇게 요약한 뒤 “이들의 천인공노할 범죄에 하늘은 편들지 않았기에 시체는 유기되기 직전에 발견되고 책가방 등 유류품이 남아 근하 군의 원혼을 달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검찰 측은 최형욱, 김금식, 김기철 씨 등 세 사람에게 사형, 여광석 교도에겐 징역 15년, 이석연 교도보에겐 징역 10년, 나머지 두 교도에겐 징역 1년씩을 구형했다
  사형이 구형되어도 피고인들이나 방청석의 가족들은 태연하기만 했다. 이 또한 보통 재판에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김금식 씨는 싱글싱글 웃으며 형사소송법 제309조를 기자들이 들으라고 줄줄 외고 있었다.
  “피고인의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신체 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또는 기망 기타의 방법으로 임의로 진술한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을 때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지 못한다.”
 
“내 죄를 아직도 모른다”
 
  기철, 형욱 씨는 표정 없이 담담한 모습이었고 울음보를 터뜨리는 가족들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검찰의 이 정도 구형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억울하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방청석에 나가 앉아 있어도, 사진 기자들이 셔터를 눌러대어도 도무지 부끄러운 줄을 모르겠더군요.”(최형욱 씨의 아내 ㄱ 씨)

  서윤학, 한봉세 두 변호인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변론을 했다.
  ‘검찰이 쫓고 있는 주범 박영태가 실존인물인지 가공인물인지 기록상으로 보아 희미하다. 변호인 측은 박태형 씨와 박영태는 동일 인물로 본다. 박영태가 없는 이상, 또 박태형이가 主犯이 아니라면 공소 유지를 할 수 없다. 검찰의 기소 사실과는 정반대로 근하 군의 아버지는 紙物(지물)을 밀수한 적이 없고 형욱 씨는 기철, 금식 씨와는 알지 못하는 사이다. 여 교도가 이 중대사건에 큰 돈은 커녕 외상 약속만 받고 죄수를 불법 출소시키겠나? 검찰이 제시한 증거는 증거 능력이 없는 것들이다. 수사에 관여해선 안 될 사람이 수사에 관여했다. 수사권이 없는 자가 어찌 검사를 보좌했는지…. 검찰 입회 서기가 참여하지 않고 한 검사의 피의자 신문은 증거 능력이 없다.’

  피고인들의 최후 진술요지는 이러했다.
  최형욱: 내가 왜 구속됐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억울한 죄를 받지 않도록 재판부서 잘 밝혀주었으면 싶다.
  김금식: 나는 어떠한 벌을 받아도 무방하다. 나의 거짓 자백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을 욕보이고 있으니 미안할 뿐이다. 검찰은 불가능을 가능케 만들었다. 하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면 그 말에 따라 증거를 만들었다.
  김기철: 자다가 생각해도 괘씸하다.
  여광석: 몇 사람의 연극에 의해 15년 징역이라니 억울하다. 죄가 있다면 그날 당직한 죄밖에 없다.
  이석연: 억울하다.
  고화욱: 잘 판결해달라.
  정시식: 직무 유기했다면 천벌을 받겠다. 왜 이 법정에 섰는지 억울해서 잠을 못 이룬다.
 
정대범도 자백 번복
 
  구형 공판 다음날인 11월13일 군수기지사령부 보통군법회의 법정에선 정대범 피고인에 대한 사실 심리가 있었다. 이날까지 적극적으로 자신의 범행을 자백해오던 그는 고분고분하던 태도를 바꿔 약 30분 동안 검찰관의 신문에 묵비권을 행사했다. 재판장은 30분 동안의 휴정을 선포했다. 속개된 공판에서 鄭 씨는 말문을 열었다.

  “나는 근하 군을 죽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모두 구영근 사범이 시킨 대로 한 거짓 자백이다. 나는 최형욱, 김금식, 박영태는 전혀 모른다. 김기철은 고등학교 다닐 때 알았고 구영근은 고교시절 유도 사범이었다. 지금껏 거짓 진술을 계속해온 것은 김태현 부장검사가 식사와 술, 용돈까지 주는 등 나에게 무척 잘 대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또 구영근이 금식 씨의 진술대로 말하지 않으면 간첩으로 고발한다고 해서 그렇게 했고 징역도 조금만 준다고 해서 허위 자백을 해온 것이다. 근하 군이 살해된 1967년 10월17일 밤에는 친구 영철이하고 탁구를 쳤다.”

  변호인은 ‘왜 갑자기 심경변화를 일으키게 됐느냐?’고 물었다. 鄭 씨는 방청석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보고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입을 뗐다.
  “오늘 법정에서 어머니를 보니 사실대로 말할 용기가 났다. 부산지법에 증인으로 나가 증언할 때도 허위 진술을 한 것은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법정에 서기 전 김태현 부장검사실에 불려갔다. 金 검사는 ‘김금식과 최형욱은 범행을 부인하고 너 혼자를 범인으로 몰고 있다’고 했다. 나는 저들만 살려고 한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졌고 그래서 네 사람이 공모, 근하 군을 죽였다고 말했다.”

  이어서 정대범 피고인은 검찰이 제시했던 물증까지 ‘조작’이라고 몰아 붙였다.
  “범행 당일에 입었다는 청색 바지, 잠바, 흰 무늬 운동화도 전부 날조된 것이다. 구영근이 그렇게 말하라고 해서 그랬을 뿐이다.”
  이로써 검찰 측에 가장 열성을 내어 협조를 해왔던 두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와서 자신들의 진술을 뒤엎으며 검찰 수사의 진상을 폭로하고 나온 것이었다. 검찰의 성채를 지키고 있던 두 수문장은 스스로 성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변호인단에 투항한 셈이었다.

  정대범 씨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바로 전날 검찰이 형욱, 기철, 금식 씨에게 사형을 구형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속았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철모르는 애송이 청년 정대범 씨는 “군대 생활하는 정도의 징역을 주겠다”는 具 사범의 말을 믿고 있었던 듯하다.
  불우한 소년기를 보낸 금식, 대범 씨 모두가 이모와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가슴속에 잠재워둔 양심과 용기를 다시 일깨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1심 선고 공판은 求刑(구형) 열흘 뒤인 11월22일에 있었다. 그동안 세 판사들은 부민동의 한 여관에 틀어박혀 공판 서류를 검토했다. 검찰의 공소 사실 기록만 해도 1만3000여 쪽에 이르렀고 변론 기록은 56쪽으로 매우 짧았다. 판사들은 이 방대한 기록을 세 번씩 검토했다.
  선고 공판 날 부산지법 법정에는 오전 10시부터 방청객들이 몰려들기 시작, 서로 먼저 들어가겠다고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10시37분 말쑥하게 면도를 한 일곱 피고인들이 입장했다. 김금식 씨는 늘 깨끗한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양심선언’ 이후에는 남루한 囚衣(수의)로 옷차림이 바뀌어져 있었다.

(계속)

[ 2020-07-18, 11:0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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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건     2020-07-18 오후 10:51
죄를 만들면 만드네요. 다행이도 언론이 자유화되어 거짓언론과 대응하여 진실언론도 있기에 이런 것이 제대로 밝혀지는데 - 저 북한은 죄를 만들면 만드는대로 되버리지요. 얼마나 억울하게 반동분자로 몰려 죽고 그 공로로 정치보위원들이 출세하는지 여기 분들은 잘 모를 겁니다. 언론이 없으니 그대로 묻혀버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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