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죄 확정보다 더 고통스러운 ‘진범일지 모른다’는 의심
[實錄연재]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12)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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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注―‘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는 1981~1982년에 걸쳐 월간 〈마당〉에 연재 후, 1987년 한길사에서 나온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에 포함되었다가 2011년 조갑제닷컴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현재는 절판)되었다. 조갑제 기자가 가장 애착 가는 기사로 꼽은 이 글을 조갑제닷컴에 재연재한다.
‘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 3장 하느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④

  
  
  “피고인 등은 각 무죄”
  
   선고 공판을 3월21일에 열렸다. 김태현 부장판사는 200자 원고지 약 200장분의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는 주로 피고인들의 진술이 고쳐지고 추가되고 번복되어간 과정을 짚어가며 논고를 해갔다.
  
   “…김금식은 1968년 5월9일 검찰 진술에서는 범행을 저지른 날 밤 대구로 돌아와 사창가에서 잤다고 했다가 5월13일에는 참새구이집에서 잤다고 수정했다. 5월18일 검찰 진술에선 마분지 종이를 살 때 정대범이 함께 따라갔다고 또 진술을 수정했으며 5월26일에는 만기 출소날은 1967년 10월16일이라고 했다가 사흘 뒤 11월17일이라고 또 고치고 6월5일에는 이 사건은 공산당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 하여 박영태 위에 최형욱, 그 위에 김마담, 다시 그 위에 황선생이 있고 자신도 공산당에 가입했다고 횡설수설했다. 7월18일에는 또 칼과 노끈을 산 것은 자기였다고 앞의 진술을 뒤엎었고 10월4일의 진술에선 불법 출소할 때 1舍 14방에 다시 들어가 죄수복으로 갈아 입었다고 또 앞의 진술을 고치는 등…”
  
   김 판사는 정대범 씨의 진술 내용도 시간별로 나열, 대비하여 범행 사항이 진술 때마다 바뀌어져간 과정을 설명한 다음 결론에 들어갔다.
  
   “무릇 살해 사실인 무거운 사실을 자백하는 사람이 그 주변적 사실인 가벼운 사실을 자백하게 됨은 우리의 경험률이다. 이와 반대로 주변적 사실이 여러 번 변경 또는 추가되는 경우는 무거운 사실에 관한 자백도 허위라고 보아야 한다. 김금식과 정대범의 진술을 볼 것 같으면 오로지 공소사실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주변적 사실이 변경 또는 추가되고 있음을 간취할 수 있다. 이는 숨겼던 사실을 점차 자백해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할지 모르나 그런 경우는 가벼운 사실을 점차 자백하고 무거운 사실을 숨겼던 자에 해당하는 이론이고 이 사건과 같이 무거운 사실을 먼저 자백한 경우는 가벼운 사실에 관하여도 알지 못하는 자가 공소 사실에 맞추어가는 과정이며 이는 필경 무거운 사실에 관하여도 알지 못한 자가 허위 자백한 경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살인이란 무거운 사실을 이미 자백한 金, 鄭 피고인이 범행 모의, 범행 도구 구입, 불법 출소 따위의 가벼운 주변적 사실의 진술에서는 앞뒤가 맞지 않은 얘기를 되풀이한 것으로 미뤄 무거운 사실(살인)의 자백 자체도 믿을 수 없다는 논고였다. 金 판사는 또 정대범의 현장검증 때 칼질과 剖檢(부검)에 나타난 상처가 서로 맞지 않다는 사실, 김기철의 배차표에 의한 알리바이 성립, 김금식의 감방 동료에 의한 알리바이 증명, 가공인물 박영태의 문제 따위를 들어 검찰의 기소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金 재판장은 판결 이유문을 다 읽은 뒤 주문을 짤막하게 낭독했다.
   “원심 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 등은 각 무죄. 검사의 소를 기각한다.”
   피고인들의 침통했던 얼굴에는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그들은 잠시 눈을 지그시 감고 선고가 끝났는데도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최형욱씨는 “내가 무죄선고를 받아서 기쁜 것이 아니다. 조카를 잃고 범인으로 몰려서야 말이 안 된다”고 울먹였다. 김금식씨는 “흑백이 가려질 줄 알았다. 정의는 꼭 승리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별로 기쁜 줄은 모르겠다”고 말했다. 여광석씨는 “사필귀정이다”고 했다.
  
   한편 이 지긋지긋한 사건과 씨름해온 김태현, 이원형, 정경식 검사의 얼굴에는 피로한 빛이 완연했다. 이때까지 피고인들을 노리개처럼 갖고 놀며 온갖 저주, 모욕, 비난, 꼬집음, 경멸을 다 쏟아 부었던 신문들은 뒤집힌 선고에 ‘그럼 그렇지’란 제목을 달기도 했다.
  
   검찰은 2심 판결에 불복, 대법원에 상고했다. 1969년 7월15일 이 기괴한 사건에 또 다른 기록을 덧붙이는 판결이 나왔다. 육군 고등군법회의는 정대범 피고인에게 또 사형을 선고한 것이었다. 같은 사건에 대해 상반되는 판결이 나온 것이었다. 재판장 홍순호 대령은 鄭씨의 자백은 진실성이 있다고 판단, 鄭씨의 항소를 기각하고 그같이 판결한 것이었다.
   아무리 판결이 판사의 자유심증주의에 따른 것이라고 해도 이처럼 같은 사건에 대해 한쪽은 ‘죽음’을 요구하고 다른 쪽은 무죄를 선고한 사례는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7월19일 검찰은 738쪽에 달하는 상고이유서를 대법원에 냈다. 큰 사건이래야 상고이유서는 30~40쪽인데 이 상고이유서는 한국 재판사상 가장 긴 것이라고 보도되었다.
   이 상고이유서를 만들기 위해 김태현 검사 팀은 한 달 동안 다른 업무를 제쳐놓고 호텔에서 철야작업을 해왔다는 것이었다. 그때 金 검사는 서울지검으로 전보발령을 받은 뒤 였으나이 사건에서 손을 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검찰은 이 상고이유서에서도 “이 사건은 초인적인 지능 범죄의 특수성을 갖고 있으므로 특수한 논리로써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범인들이 미리 준비한 계략에 따라 허점을 남기는 진술 전법을 쓰는 등 다른 사건과 다른 점이 많은데도 2심 재판부가 이를 입체적 총괄적으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합리적인 이유 없이 증거를 배척했다”고 주장했다.
   이 상고이유서를 읽어본 나의 소감은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논리성이나 상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끔찍이도 긴 상고이유서는 언어의 타락, 언어의 낭비성을 연구하는 데 꼭 참고해야 할 자료일 것이다.
  
  “대한민국을 다 뒤져도 다른 범인은 없다”
  
   1969년 7월25일 오후 대법원 형사1부(재판장 홍순엽, 주심 주재광, 배석 양희경·이영섭 판사)는 상고심 선고 공판을 열고 검찰 측 상고를 이유 없다고 기각, 원심대로 일곱 피고인들에게 無罪(무죄)를 확정 시켰다. 이날 재판부는 “공소 사실이 적법한 증거에 의해 유죄의 확신 단계에 들어서지 않는 한 법원은 그 피고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전제, “검사가 제출한 증거자료를 분석해볼 때 범행을 정황적으로 보강해주는 피고인들의 자백 진술 등 증거만이 대강을 이루고 있고 이런 진술을 제외하면 나머지 증거들은 단독으로나 종합적으로나 피고인들이 진범임을 증명시켜주지 못하고 있음은 기록상 명백하므로 原審(원심)에서 피고인들이 이 같은 진술을 하게 된 과정과 그 내용에 비추어 신빙성이 없다 하여 배척하고 무죄를 선고한 것은 採證(채증) 법칙에 잘못이 없다”고 판시했다. 이로써 1년 반 동안이나 피고인들을 生死(생사)의 갈림길에서 오락가락하게 했던 근하군 수사와 재판은 終章(종장)을 맞았다. ‘정의의 승리’나 ‘법의 현명한 판단’으로 부르기에는 그동안의 인권 침해가 너무나 심했다.
  
   이날 오후 2시 김기철 씨는 감방에서 교도관이 달려와 “기철아! 모두 무죄가 되었단다”는 알림에 접했다. 그는 기쁨보다는 허탈감을 느끼고 “무죄, 무죄, 당연하지”라고 중얼거려다.
   최형욱 씨도 무죄 확정 소식에 별 기쁜 줄을 모르겠더라는 것이다. 이미 예상했던 판결이었고 ‘이젠 더 당할래야 당할 수가 없다’는 악이 치받쳐 올라와 있어 어떤 판결도 두렵지 않았던 것이다. 기철 씨와 형욱 씨는 구속된 뒤로는 한 번도 가족과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었다. 혈육과의 再會(재회)가 임박했다는 설레임을 안고 그들은 출소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근하 사건의 스타 김금식 씨는 교도소장실에 불려나가 기자들과 회견을 가졌다. 그는 너털웃음까지 터뜨리며 勝者(승자)의 기분을 냈다.
   “전과자를 무시하는 사직 당국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말한 그는 “억울한 관련자에게는 미안하나 통쾌하다”고 했다. 한편 1심에서 전원 유죄를 선고했던 박정표 판사는 “증거에 대한 법관들의 견해 차이에서 온 결과이며 법관으로서 양심에 부끄럼 없이 최선을 다했으므로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고 했다. 서윤학 변호사는 “검찰의 수사 잘못으로 그렇게도 인권이 짓밟힌 것은 유감이며 이로써 眞犯(진범)을 잡는 데도 커다란 지장이 초래됐고 자칫하면 이 사건은 영영 풀리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정경식 검사는 “수사 재기는 당치도 않다”면서 “할 일은 다했다”고 말했다, 김태현 부장 검사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국 신문에 일제히 보도됐다.
   “재판 결과야 어떻든 피고인들이 진범임에 틀림없다. 앞으로 대한민국의 全수사력을 동원한다 해도 다른 진범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피고인들의 진술이 번복되어 신빙성이 없다고 하나 그것 말고도 범행을 증명할 증거는 충분한 것이며 지금 마음 같아서는 모든 기록을 법조계에 공개하여 의견을 묻고 싶다.”
   이 金 검사의 마지막 말은 누명을 벗고 이 사회에 나온 김기철 씨 등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한번 따져보아야 할 문제다.
  
   영원한 꼬리표
  
   보통 사람들은 워낙 근하 사건이 어지럽게 엎치락뒤치락하는 바람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독자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당시 일반인들의 판단 자료는 거의 신문에서 얻는 것이었다. 그런데 판단의 준거를 제공해야 할 신문기자들이 더욱 종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취재 능력이 없는 일반 독자들이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들이 범인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다만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으니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었던 모양이다’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7월26일의 <조선일보> 사설은 “자백을 증거의 여왕이라고 했던 야만적 시대를 우리는 또다시 이 나라에 부활시킬 수는 없다. 기분이나 추리로 수사를 전개할 때 이 땅에는 다시 중세기적 암흑이 엄습하게 될 것이다”고 검찰을 나무라면서도 “그들이 진범이야, 아니냐 하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검찰 측의 불만도 약간은 이유가 있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金 검사가 “재판이야 어찌 되었든 저들은 범인임에 틀림없다”고 했으니 많은 사람들이 ‘역시 그들은 범인인데 유죄 증거가 없어 풀려난 것이구나’라는 의혹을 갖게 됐다고 해도 놀랄 일이 못된다.
  
   金 검사의 소감 피력은 감옥에서 풀려난 여덟 명의 무고한 사람들(정대범 씨도 얼마 뒤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에게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의혹의 꼬리표’를 선물한 셈이었다.
   요절한 김기철 씨가 끝내 이웃 사람들로부터는 완전 결백의 公證(공증)을 받지 못하고 고독하게 죽어간 것이나 최형욱 씨가 이웃의 이상한 눈길이 싫어 출감 뒤 이사를 해버린 일들은 그들이 평생 이 의혹의 꼬리표와 싸우며 살아가야 할 것임을 생생한 증거로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재판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3심제란 것을 만들어 착오에 의한 ‘사법 살인’ 같은 것을 막아보려 했다.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3심제는 인간이 만든 지혜의 소산이며 그 결과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일단 승복해야 할 의무를 진다.
  
   金 검사는 이런 법조인의 직업윤리에서 벗어나 440여 일간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감옥을 나서는 김기철, 최형욱 씨 등에게 ‘저들이 진범이다’고 말했다. 어느 기자는 “김 검사도 잘못했지만 그런 말을 기사화한 기자들의 양식도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듣고도 흘려버렸어야 했을 얘기를 필요 없이 보도했다는 뜻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진범일지 모른다’는 의심은 유죄 확정보다도 더 고통스러울 수가 있다. 더구나 근하 사건의 경우, 범인이 안 잡혔기 때문에 그들은 ‘저것 봐라, 나는 정말 무고하지 않느냐’고 간단명료하게 자신의 무죄를 설명할 수도 없게 됐다. ‘범인으로 벌할 수 없다는 증명’은 법정의 무죄 확정으로 이루어진 셈이지만 그것이 곧 사회에서 ‘결백의 증명’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이 사건을 취재한 나의 견해를 굳이 여기에 밝힌다면 근하 사건 피고인들은 의심할 바 없는 결백의 인간들이란 것이다. 검찰이 증거를 못 세워 無罪가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처음부터 무고했던 것이다. 김태현 검사 팀도 어떤 점에선 이 사건의 피해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이 드라마의 작가나 연출가라기보다는 배우들이었다. 이 인형극의 진정한 연출가는 김금식 씨였다. 가해자를 꼽으라면 金 씨를 가리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출감 뒤 <국제신보> 기자를 통해 구술한 수기의 끝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은 물론이다. 수사기관이나 법을 우롱하겠다는 발상부터가 용서받지 못할 짓이었다. 마지막에 내가 생명을 빈 것은 법이었으니까. 이제 그 어둡고 긴 터널에서 만났던 잊지 못할 사람들에게 사죄를 해야 할 차례다. 나와 같이 생사의 기로를 헤맨 사람들에게는 죄스러움을 금할 길 없다. 그중에서도 기철에게는 더욱 더―. 그는 나 같은 못난 인간을 알았다는 죄 하나로 지독한 고행을 치렀다. 나는 이겼지만 진 것이기도 했다. 내가 불신했던, 그래서 우롱하려 했던 ‘법’은 건재하고 있었다. 나는 송구스럽게도 그 법에 의해 목숨을 건진 것이다.>
  
   검사들은 출세가도 달려
  
   김금식 씨는 출감 뒤 운전사가 됐다. 그러다가 몇 년 뒤에는 과속으로 택시를 몰다가 부산시 남구 수영동에서 세 사람을 들이받아 그 가운데 두 사람을 죽게 했다. 운명이란 참 기묘한 것이었다. 운명의 손은 법을 통해 金 씨의 목숨을 구해 올렸으나 그를 통해 또 두 사람의 생명을 끊었으니.
  
   金 씨는 그 뒤에도 업무상 과실치상, 폭력 등 자질구레한 혐의로 몇 번 교도소 신세를 졌고 서윤학 변호사의 변론 도움을 받기도 했다. 김 씨에게는 미안한 표현이지만 김기철 씨의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김기철 씨는 ‘법이 없어도 살 사람’, 김금식 씨를 ‘법이 없었더라면 벌써 전에 맞아 죽었을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다.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은 결국 ‘법이 없었다면 맞아 죽었을 사람’과의 운명적인 인연에 의해 요절해버렸다.
  
   근하 아버지 김용선 씨는 환갑을 넘긴 노인이 됐다. 중풍에 걸려 반신불수에 말을 제대로 못하는 그에게서 근하 군 사건의 지워지지 않은 그림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친척들은 사건의 충격으로 중풍에 걸린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네 교도관은 무죄 확정 뒤 모두 복직, 대구교도소에 근무하다가 세 명은 퇴직, 다른 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여 교도관은 어느 교도소의 과장으로 근무 중이다. 나의 전화를 받고 그는 “그 사건 생각만 하면 또 열이 난다”고 치를 떨었다.
  
   이 사건 수사는 전경렬 씨를 병자로 만들었고 김기철 씨의 어머니를 화병으로 죽게 했으며 김기철 씨를 나이 42세에 요절케 했고 그의 아버지로 하여금 한을 품고 세상을 하직하게 했다. 근하 군 살해 사건 수사는 또 외삼촌의 인생행로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날씨만 흐리면 그 지긋지긋한 기억과 함께 어김없이 옆구리의 통증이 찾아오도록 만들었다.
  
   김태현 검사는 그 실수 뒤에도 승진을 거듭 1973년에 대전지검 차장, 1974년에 서울지검 차장, 1975년에 대검 검사 겸 검찰 사무부장, 1978년에 대검 공안부장, 1979년에 대검 송무부장, 1980년에 부산지검장 등 검찰 요직을 두루 거치고 퇴직,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그는 홍조근정훈장도 받았다. 이원형 검사는 지금(注-이 글이 쓰인 1981년 당시) 신정당 국회의원 이원형 씨로 변신해 있고, 정경식 검사는 서울지검 부장검사로 활약하고 있다(필자注: 그 뒤 이원형 씨는 12대 총선에서 낙선, 지금은 변호사로 있고, 정경식 검사는 서울지검 차장을 거쳐 법무부 고위직에서 근무 중이다). 한봉세 변호사와 김태현 판사는 그 뒤 대법관으로 임명돼 법조계의 정상에서 일하다가 물러나 변호사 일을 하고 있다. 서윤학 씨도 줄곧 부산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지금까지 세 차례 <마당>에 실린 기사는 헛된 수사, 그것도 범인을 잡으려다가 생사람을 잡은 지나간 수사에 대한 얘기 뿐이었다. 결국 수사관들이나 기자들은 이 사건의 허상을 좇다가 주저앉아버린 셈이 됐다. 범인은 저만큼 달아나 있는데 수사관들과 기자들은 그의 그림자를 향해 몽둥이질을 하다가 무고한 사람들에게만 상처를 입힌 것이었다.
  
   이 사건의 발생지 관할 경찰서인 서부경찰서의 동대신동 담당 형사들에게도 근하 사건 수사는 벌써 전, 그러니까 김태현 검사가 “저들이 진범이다. 다시 수사할 필요도 없다”고 했을 때 끝나버렸고 지금은 고전적인 永久未濟(영구미제) 사건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수사는 흔히 끈기가 없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사건 발생 뒤 한두 달 전력투구를 하여 범인을 못 잡으면 손을 떼어버리는 것이 관습처럼 돼 있다. 언론이 그 사건에 흥미를 잃고 취재를 중단하는 것과 경찰이 수사에서 사실상 손을 떼는 시기는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경찰은 언론을 위해 수사한다”는 말까지 듣고 있다.
  
   상부로부터의 책임추궁이나 언론의 질타가 경찰을 몰아붙이는 動機(동기)이지 범법자를 붙잡아야겠다는 정의감이나 사명감은 부차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현상의 근본 원인을 캐보면 경찰에 대한 처우가 사명감을 살릴 수 없는 수준이라는 데 귀착된다. 형사들이 수사본부에 얽매여 한두 달 담당지역에서 떠나 있으면 副(부)수입원을 잃게 되어 집에서 돈을 가져와 버스를 타고 다니며 수사를 하게 된다.
  
   이런 경제적 문제가 해결된다면 한국의 형사들도 일본처럼 평생 전담 수사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3억 엔 탈취사건’은 1975년에 공소시효 완성으로 수사가 끝났다. 그때까지 일본 경시청이 보여준 집념의 수사는 그 결과야 어떻든 간에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그들은 10년 동안 전담반을 해체하지 않고 그 수사만 맡겼으며 범인 체포 실패로 공소시효가 끝나자 수사 책임자가 사직하는 책임 수사의 모범을 보였었다.
  
   근하 사건의 경우, 경찰 및 검찰이 수사의 잘못을 속죄하고 김기철 씨의 원혼을 달래며 무고한 피해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방법은 범인을 잡는 길 밖에 없었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이런 수사를 할 바에야 처음부터 수사를 하지 말았더라면 범인은 못 잡더라도 엉뚱한 피해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근하 군의 가족은 근하 군의 죽음에서보다도 그 수사에서 훨씬 더 큰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계속)
  
[ 2020-07-21, 10:0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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