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검찰·언론에 깊은 감사와 경멸의 웃음을 보내고 있을 ‘진짜 범인’
[實錄연재]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13)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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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注―‘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는 1981~1982년에 걸쳐 월간 〈마당〉에 연재 후, 1987년 한길사에서 나온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에 포함되었다가 2011년 조갑제닷컴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현재는 절판)되었다. 조갑제 기자가 가장 애착 가는 기사로 꼽은 이 글을 조갑제닷컴에 재연재한다.
‘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 3장 하느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⑤

사람 잡은 집념

  이 사건 수사의 主役(주역)은 검찰이었다. 검찰은 경찰과는 달리 범인을 못 잡았다고 책임을 추궁당하는 예가 별로 없다. 김태현 검사 팀을 드라마의 길로 내몬 것은 그런 강박관념이 아니었을 것이다. 검찰 측이 무리를 한 動機(동기)는 사건 해결을 위한 집념이었다.
 문제는 이 집념이었다. 집념은 그 속성으로서 주변을 돌아보지도 않고 외가닥 길을 질주하는 심리상태로 빠질 가능성을 지닌다. 그 길이 비뚤어진 길이라는 것을 알려면 여유 있는, 종합적인, 또 巨視的(거시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불행히도 金 검사 팀은 김금식 씨를 길잡이로 하여 외골수로 달리고 말았다.

 수사관들의 이런 집념에 공명심이 덧붙여지면 무고한 사람들이 명예욕의 충족을 위해 희생되는 예를 가끔 볼 수 있다. 공명심은 수사관들을 열심히 뛰게도 하지만 판단력을 흐리게 하여 과잉 수사를 벌이게도 하는 것이다. 김태현 검사를 잘 아는 당시 부산지검 출입기자 ㅅ 씨는 이렇게 평했다.
 “金 검사의 수사 능력은 拔群(발군)이었고 집념은 무서울 정도였다. 문제는 그 집념을 단념시킬 수 있는 결단력이었다.”

 수사관의 집념은 과잉 수사로 나타나 사람 잡는 집념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집념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착오를 알아차렸을 때 궤도를 수정할 수 있는 ‘결단의 용기’일 것이다. 金 검사가 이런 결단을 내릴 기회는 몇 번 있었다. 첫 번째는 김금식 씨의 불법 출소를 대구교도소 측이 부인하고 나섰을 때, 두 번째는 主犯(주범)으로 쫓던 박영태 씨가 <국제신보>에 나타나 “나의 진짜 이름은 박태형이며 근하 군 사건과는 관계가 없다”고 호소했을 때.

 두 번 모두 金 검사는 그들의 ‘참말’을 거짓이라고 배척해버렸다. 이때엔 金 검사 팀이 너무 사건에 깊게 빠져버려 자신의 판단착오를 알았더라도 궤도 수정을 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이미 ‘근하 군 살해범 일당 일망타진’을 발표한 뒤여서 그런 궤도 수정, 곧 불기소에다가 무혐의 석방은 金 검사 자신의 인사 조치를 뜻했을 것이란 풀이다.

 그래서 당시의 일부 취재기자들은 검찰 측이 ‘이왕지사, 재판까지는 밀고 가자’고 생각했을 것이며 이런 생각은 ‘1심 판결에서만 유죄 선고가 나면 그 뒤에야 어찌되든 담당 검사는 감점이나 문책을 받지 않는다’는 그때의 검사 평가 방법 때문에 더욱 굳어졌을 것이란 추리를 하기도 했다.

 이 추리의 진실성은 김 검사가 대법원 확정 판결 뒤에도 ‘저들이 그래도 범인이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입증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하나의 참고사항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최형욱 씨에 따르면 자신이 검찰 신문을 받을 때 담당 검사들이 “사건이 된다”, “안 된다”로 서로 이견을 보이는 것을 몇 번 목격했다는 것이다. 이원형 씨도 김태현 검사가 김금식 씨를 특별 대우해가며 수사를 끌고 가는 데 대해 반대했었다고 했다. 어떤 신문기자는 “수사가 완전히 익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성급하게 범인 검거를 발표한 것이 문제였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 지적은 일단 검거 발표가 나간 뒤에는 검찰 측 스스로 그것을 번복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다. 스스로 잘못을 고쳐 잡도록 할 수 있는 힘은 검찰 내부의 진정한 ‘결단의 용기’와 언론의 집요한 문제 제기뿐이었을 것이다.
 
言論의 직무유기

 근하 사건에서 경찰, 검찰과 함께 제3의 가해자로 드러난 것은 언론이었다. 언론의 과욕, 언론의 태만이 모두 무고한 사람들을 두들기는 데 제 나름의 역할을 했다.
 전경렬 씨를 ‘眞犯(진범)’으로 제조한 것은 언론의 특종 경쟁이었다. 특종 경쟁이란 것은 언론계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헛된 노력’으로 보일지 모른다. 어차피 알려질 사실을 남보다 몇 시간 앞서 보도하는 것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고 거기에 그토록 많은 정력을 쏟는 것은 지식과 노력의 낭비같이 보일 수도 있다.

 이런 의문에 대해 기자들은 ‘그렇다면 올림픽에서 십 분의 몇 초 빨리 달렸다고 해서 금메달을 주며 찬양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0.1초쯤 빨리 달린다고 세상이 바뀌는가?’고 반문할지 모른다. 특종이나 달리기나 그 자체엔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특종을 하기 위한 과정일 것이다. 특종을 하기 위해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사실 뒤에 있는 진상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파묻힌 기사거리,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고, 보통 사람들이 지나쳐버리는 이 세상의 변화를 집어내는 것, 이런 부수입이 특종 자체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범죄사건 취재에서는 이 특종 경쟁이 추측보도, 과장보도, 또는 人權(인권)침해를 부산물로 남기기 쉽다. 전경렬 씨를 ‘진범’이라 하지 않고 ‘용의자’ 또는 ‘유력 용의자’로 보도했다면 그것은 정확한 기사였다. 그러나 <국제신보>는 다른 신문들보다도 먼저 ‘진범’이라고 밝혀 특종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기자들 사회에서는 용의자와 진범은 1단 기사와 머리기사의 차이를 뜻한다. 어느 신문이 범인임이 거의 확실한 사람을 확정 판결 이전이라 하여 용의자로 보도하는 良識(양식)을 보인 반면 다른 신문은 모험을 하여 진범이라고 못 받았다면, 그래서 그 ‘진범’이 정말 범인으로 밝혀졌다면 한국의 언론 풍토에서는 용의자로 표기한 ‘양식’은 경멸되고 진범으로 때린 도박은 ‘훌륭한 승부’로 칭찬받을 것이다.

 이런 풍토에서는 정확한 기사를 쓰기 위해 시간을 끄는 것보다는 부정확하더라도 빨리 보도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요령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좀 위험하더라도 ‘용의자’보다는 성큼 앞선 ‘진범’으로 밀고 나가는 도박을 하게 된다. 전경렬 씨의 경우는 이 도박이 실패하여 신문이 곤혹을 치른 예이지만 만약 맞아떨어졌다면 찬사를 받기에 바빴을 것이다.
 기자들이 전경렬 씨를 괴롭히려는 아무런 뜻을 갖지 않았는데도 그런 결과를 빚고 만 것은 한국 언론의 이런 구조적 문제점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검찰의 ‘2代 진범’ 수사 때에는 기자들이 사실 확인을 태만히 하여 인권 침해를 방치한 결과를 빚었다. 많은 기자들은 검찰의 발표 ‘사실’을 전달하는 데 그치고 그 ‘사실’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을 게을리 했던 것이다. 이 경우 언론은 ‘사실 전달’의 의무는 다 했지만 ‘진실 확인’의 의무는 소홀히 했다는 뜻이다. 기자가 사실 전달의 기능에만 만족하게 된다면 앵무새와 별 다름이 없을 것이다. 기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경찰이나 검찰이나 다른 어느 기관에도 자신의 판단 능력을 귀속시켜서는 안 되며 독자적인 판단력을 늘 유지하여 진실의 왜곡이나 조작을 검증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 못할 고통과 죽음을 준 장본인―근하 군 살해범은 지금 우리 속에서 태연히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그가 살아 있다면 자기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졌던 전경렬, 김기철, 최형욱 씨들과 자기 대신 생사람들을 잡은 경찰, 검찰, 언론에 깊은 감사나 경멸의 웃음을 보내고 있을지 모른다. 근하 사건 수사는 그러니 14년 동안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것이다.

 “말문을 닫고 열두 해를 살다 간 김기철 씨의 가슴에는 어떤 얘기가 들어있었을까?”
 “왜 김태현 검사는 ‘그래도 저들은 범인이다’고 말해야만 했던가?”
 “검사들은 왜 그런 사람들을 범인으로 몰려고 했던가?”
 “왜 1심 재판부는 그런 상황에서 세 사람의 죽음을 요구했을까?”
 “왜 육군 고등군법회의는 이미 무죄 선고가 난 사건의 피고에게 또 사형을 선고했던가?”
 “정말 범인은 어디에 있는가?”
  200자 원고지 450장분의 이 긴 기사는 이런 의문을 의문으로 남기고 끝나야 할 것 같다. 톨스토이의 글을 이들 의문에 대한 해답으로 남겨놓으며―.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취재 뒷얘기: 괴로운 기억들을 되살려야 했던 뜻

 ‘김기철 씨는 정말 억울한 옥살이 때문에 요절했나?’
 ‘어째서 희대의 민완 검사는 중학교도 안다닌 한 전과자의 각본에 얹히고 말았나?’
 ‘왜 언론은 그토록 갈팡질팡했나?’
 ‘그들은 정말 무고한 사람들인가?’

 이런 의문을 품고서 내가 한국의 이 대표적 미해결 살인 사건을 재구성하기 위해 취재에 손댄 것은 1981년 6월이었다. 앞으로 1년이면 공소시효가 끝난다는 타이밍을 의식한 기획이기도 했다. 내가 만난 이 사건의 관계자들은 대부분 그 쓰라린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괴로워했다. 이 사건의 수사·재판·취재엔 勝者(승자)는 없고 상처받은 사람들만 있는 것 같았다. 중풍으로 말과 몸놀림이 편치 못한 근하 군의 아버지를 만나 그의 초췌해진 모습과 정중한 대화 거절에서 이 사건의 지울 수 없는 그림자를 확인한 것은 차라리 이쪽의 고통이었다.

 기철 씨의 형수는 “다 지나간 일인데…” 하면서 면담을 꺼렸다. 나는 기철 씨의 큰형 이만 씨를 설득했다. 그는 “동생들과 의논해본 뒤라야…”면서 주저주저하다가 소주를 몇 잔 들이키더니 이야기를 쏟아놓았다. 원통함에 북받친 듯 눈물을 글썽이며 돌덩이 같은 주먹으로 이마를 쾅쾅 치면서 그는 ‘병신된 동생’의 哀史(애사)를 털어놓았다.

 나는 기철 씨의 自筆(자필) 手記(수기)와 재판 기록을 이만 씨가 불태워 없애버렸음을 알고는 아까움과 안타까움에 가슴을 쳤다. 재가 돼버린 그의 ‘목소리’를 복원시키려고 나는 기철 씨의 친구, 친척, 변호사, 기자, 감방 동료들을 전국으로 찾아나서야 했다. 그들의 증언을 종합하여 나는 ‘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에 대한 답을 써보았다.

 기철 씨가 최후를 마친 범천2동 안창 마을에서 나는 일부 사람들이 아직도 기철 씨를 前科者(전과자)로 알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언론 재판에서 흉악범으로 일단 묘사된 사람은 법정의 무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에서 영원한 前科者(전과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무서운 사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근하 삼촌 최형욱 씨를 서울 오류동에서 찾아낸 것은 다행이었다. 그는 출감 뒤 부산을 떴고 12년 동안 여러 군데로 옮겨 다녔기에 주민등록지 변경사항 조사로는 좀처럼 사는 곳을 알아낼 수 없었다.

 우연히 그가 오류동에 산다는 얘기를 전해 듣기는 했지만 주소는커녕 사는 통도 알 수 없었다. 형욱 씨가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고 어쩌면 그 아버지가 오류동 경로당에 자주 나올지 모른다는 추리가 맞아떨어질 줄이야.

 나를 만난 형욱 씨의 부인은 헤어질 때 “선생님은 김금식 씨와 닮았네요. 처음에는 김 씨인 줄 알고 소름이 끼칩디다”고 말했다. 최 씨의 부탁은 “제발 기사를 쓰더라도 딸아이가 모르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명을 쓰고 사진에서 그의 얼굴을 가리긴 했지만 그의 딸이 아버지임을 알아보았다 해도 ‘최형욱 씨는 법의 폭력 앞에서 결코 꺾이지 않았던 사람’임을 믿어주었으면 한다(변호사의 견해도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시종일관 범행을 부인했던 기철 씨와 형욱 씨뿐이란 것이었다).

‘초대 진범’ 전경렬 씨는 나의 친구 밑에서 회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나의 설명을 듣고서야 전 씨의 지나간 고통과 현재의 정상이 아닌 상태를 이해했다. 전 씨를 만난 나는 아직도 그를 의심하고 있는 형사들과 고참 사건기자들의 어리석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근하 사건에서 오직 한 사람 웃을 수 있는 이가 있었다면 그는 서윤학 변호사일 것이다. 환갑을 넘긴 그는 아직도 부산지검 앞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지키고 있지만 사건을 끌어들이는 데는 큰 관심이 없고 남은 생애를 즐겁게 보내는 데 더 신경을 쓰고 있는 듯했다. 그는 “그 사건 변호가 법조생활 중 가장 보람 있었다”고 유쾌하게 회고했다.
 
 내가 가장 곤혹스럽게 느낀 것은 당시 취재기자들에 대한 취재였다. 주로 誤報(오보)와 과장 보도의 배경 설명을 들어야 하는데 그들은 선배 기자들이기도 했다. 전경렬 씨 관계 誤報(오보)로 학생들의 항의 데모를 당하고 피신까지 해야 했던 어느 선배 기자는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진땀이 난다”면서도 기자답게 객관적인 상황 설명을 자세히 해주었다. <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를 읽고 “자신의 실수를 찬찬히 되돌아보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격려 전화를 걸어준 전직 기자도 있었다.

 세 번에 걸쳐 실린 이 기사보다 훨씬 상세한 근하 사건 기록은 지금 부산지검 문서보관 창고에서 잠자고 있다. 나는 그 기록을 열람하지는 못했다. 완결된 재판기록은 원칙적으로 일반인에게는 공개하지 못하게 돼 있다. 한국 재판사상 가장 방대하다는 2만 쪽 분량의 수사 및 재판 기록.

 언젠가는 그 기록도 보존 시효 만료로 재로 변해버릴 것이다. 근하 사건을 둘러싼 두 핵심 인물―김금식 씨와 김태현 전 검사는 만나지 못했다. 김금식 씨의 말은 그의 手記(수기)를 대신 신문에 써준 기자에게 정확성을 확인한 다음 手記(수기)에서 인용했다. 김태현 씨는 나와의 긴 통화를 거절했다. ―‘3장 하느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끝


(계속)

[ 2020-07-22, 10:0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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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건     2020-07-22 오후 10:55
기자정신이 무었인가를 잘 가르쳐주시네요.
그 정신으로 대북풍선문제가 왜 양에서 늑대이미지로 변화되었는지도 밝혀주시면 감사하겠네요. 한 사기꾼때문에 풍선최적지인 백령도에서 못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10년만에는 육지에서도 못하게 되었고 범죄자 취급, 경찰서에서 횡령혐의자로 또 풍선장비도 영치되고 아예 원천차단. 그럼에도 보수언론과 인사들은 아직도 사기꾼의 단체가 통일부에서 허가취소되었다고 인권탄압인양 보도하고 있으니 - 위의 잘못된 수사와 언론으로 진짜가 죽어나는 꼴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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