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죽었다가 살아난 가짜 ‘眞犯(진범)’ 탐방기
[實錄연재]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16)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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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注―‘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는 1981~1982년에 걸쳐 월간 〈마당〉에 연재 후, 1987년 한길사에서 나온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에 포함되었다가 2011년 조갑제닷컴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현재는 절판)되었다. 조갑제 기자가 가장 애착 가는 기사로 꼽은 이 글을 조갑제닷컴에 재연재한다.
‘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 4장 공소시효 끝나다 ③

  
  
  두 번 죽었다가 살아난 가짜 ‘眞犯(진범)’ 탐방기(上)
   드디어 찾은 정대범 씨

  
   내가 정대범 씨의 사는 곳을 알게 된 것은 1982년 8월22일이었다. 서둘러 지급 전보를 쳤다.
   “전화 요망.”
   전보배달원은 서울 강서구 신정2동 ○○의 ○번지엔 수백 세대가 살고 있어 통반을 모르면 찾기가 매우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하더니 몇 시간 뒤 정대범 씨 주소지의 관할 통장에게 전보를 전했다는 연락이 왔다.
  
   한 시간쯤 뒤 전화가 왔다. 정대범 씨의 어머니였다. “왜 대범이를 찾느냐!”고 따지는 것이었다. 나는 15년 전의 사진을 연상했다. 한복을 입고 아들이 선 법정에 나와 “이 사건은 조작이다”고 호통치는 장면을 찍은 사진, 젊고 후덕한 인상의 중년 부인이었는데 전화 목소리는 불안에 찬 할머니의 음성이었다. “대범 씨를 그저 잘 아는 사람이다”는 나의 말에 대범 씨 어머니는 “아들이 오면 전화를 걸도록 하겠다”고 하며 전화기를 놓았다.
  
   이틀은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또 전보를 쳤다. 또 대범 씨 어머니의 전화가 왔다. “대범이는 오늘 막 강원도로 일하러 떠났는데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강원도에서 편지가 오면 주소를 알아 나에게 연락해주겠다고 했다. 한 20분 뒤 이번엔 대범 씨의 부인이란 여자가 전화를 걸었다. 시어머니로부터 얘기를 전해들을 듯했다.
   “왜 그러느냐?”고 불안스레 다그쳐 물어도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하게 되자 당장 나를 찾아오겠다고 했다.
  
   그날 오후 7시, 30대 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나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대범 씨의 부인이었다. 전북 완주가 고향이라고 했다. 대범 씨가 군에서 제대한 직후인 1971년 1월에 결혼, 지금은 1남 2녀를 두고 있다고 했다. 대범 씨는 용접공으로 일하고 있는데 고정된 직장이 없고 하청업주를 따라 지방의 큰 공사장으로 자주 돌아다닌다고 했다.
   근하 사건 때문에 대범 씨를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고 했더니 대범 씨의 아내 김부순 씨(당시 31세)는 안도하는 낯빛을 보였다. 김 씨는 다른 골치 아픈 문제로 내가 전화질을 한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을 태산같이 한 모양이었다.
  
   나는 <김기철씨는 왜 요절했나?>가 실린 1981년 10월호 <마당> 한 권을 김 씨에게 주었다. 다음날 오후 대범 씨의 어머니 김성순 씨(당시 55세)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어제 며느리한테서 이야기를 들었고 지금 막 그 책의 기사를 다 읽었다”고 했다. 목소리에선 경계심이 사라져 있었고 “눈물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는 말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언제 한번 놀러오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두 번 죽었다가 살아난 사나이의 집으로 초대장을 받은 것이었다.
  
  스물한 살의 살인마 代役
  
   정대범 씨는 이 해괴한 근하 사건의 드라마에서도 특이한 배역을 맡았었다. 그는 군 복무 중 체포돼 근하 군의 가슴에 칼을 꽂은 바로 그 살해 하수범으로 기소되었다. 그때 나이 스물한 살. 정 씨는 이 드라마의 우등생이었다. 현장검증에선 수사관들이 이래라 저래라 시키기 전에 스스럼없이 범행(?)을 再演(재연)했다. “저런 뻔뻔한 놈들은 코를 꿰어 끌고 다녀야 한다”는 구경꾼들의 욕설을 가장 많이 듣기도 했다.
   범행 再演을 거부하는 김기철 씨와 최형욱 씨에겐 “비겁하게 지금 와서 발뺌을 해!”라고 추궁을 하기도 했다. 그는 황덕수 씨의 手記(수기)에서처럼 기자들 앞에선 뉘우침 뒤의 정의감에 불타는 열변을 늘어놓았다.
  
   鄭 씨는 재판이 시작되면서부터는 범행을 전부 부인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1심의 사형 선고를 면할 수는 없었다. 그는 군인이었으므로 군사 법정에서 분리 재판을 받았다. 2심 軍裁(군재)가 열리기 전 대구고법이 김기철 씨 등 민간인들에게 무죄를 선고, 정대범 씨도 같은 선고를 받을 것으로 기대 되었다. 그러나 고등군법회의는 또다시 鄭 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똑같은 사건에 대해 민간 재판은 무죄, 군사 재판은 사형을 선고한 사례는 한국 재판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대법원이 김기철 씨 등 민간인에게 無罪(무죄) 확정 판결을 내린 뒤에야 鄭 씨도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鄭 씨는 근하 사건 피고인들 중 가장 긴 1년 9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그리고 다시 군에 복귀, 1971년 1월에 만기 제대를 했다. 옥살이 기간엔 진급이 없었으므로 일병으로 제대했다.
  
  15년 만에 털어놓은 사연들
  
   鄭 씨의 셋방과 鄭 씨의 어머니 집은 칼산이라고 불리는 신정2동의 야트막한 야산 비탈에 있었다. 이른바 불량 주택들이 다닥다닥 성냥곽처럼 붙어 있는 마을, 간선도로에서 약 2킬로미터쯤 떨어진 이 후진 마을의 주변엔 채소, 과일밭이 있어 농촌 분위기까지 풍기고 있었다.
  
   나는 鄭 씨의 어머니를 찾아갔다. 방 한 칸, 부엌 한 칸, 손바닥만한 마루가 붙은 열 평 남짓한 집이었다. 사진을 통해 낯이 익은 김성순 할머니는 내가 마루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터진 봇물처럼 이야기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그동안 마땅한 말 상대가 없어 가슴에 쌓아두기만 했던 사연들을 줄줄 외듯 털어놓았다. 젊었을 때는 상당한 미모였음을 암시해주는 김 씨는 연방 기침을 해대었다. 천식이라고 했다. “그 사건 때문에 심장도 약해졌다. 자그만 일에도 가슴이 울렁울렁하며 자주 놀란다”고 했다. 비탈을 오르내리면 숨이 차다는 김 씨는 허리가 벌써 굽어 있었다.
  
   약 두 시간쯤 지나서 정대범 씨가 나타났다. “강원도에 갔다”는 건 사실과 달랐다. 그의 얼굴도 나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근하 사건을 직접 취재한 적은 없다. 사진이나 기사를 통해 상상해본 鄭 씨의 인상은 유도와 합기도 유단자이며 ‘깡다구’가 있고 날렵한 청년이었다.
   이날 내 앞에 등장한 서른여섯 살의 鄭 씨는 짓눌리고 찌든 인상을 주었다. 방금 일터에서 돌아온 탓만은 아니었다. 말투는 느릿느릿했다. 표현력이 약한 그는 꼬치꼬치 묻는 나의 질문 앞에서 자주 말머리를 잊었다. 키는 작지만 근육질의 대범 씨는 ‘비가 오는 걸 하루 전에 아는’ 신경통 환자이기도 했다. 물론 그 책임은 수사와 옥살이에 있다고 했다.
  
   “이렇게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는 건 그 사건 뒤 처음이다”고 鄭 씨는 말했다. 옆자리에서 鄭 씨의 어머니와 아내도 鄭 씨가 그처럼 속을 풀어놓은 게 신기한 듯 우리의 이야기에 숨을 죽이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鄭 씨는 가끔 “그놈의 새끼들”이니 “개새끼!”하고 욕을 하곤 했지만 대체로 담담하게 15년 전을 회상했다.
   鄭 씨의 세 아들딸과 이웃에 사는 鄭 씨의 동생까지 둘러앉아 평소엔 말이 없는 그의 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오후 11시까지 듣고 싶은 얘기를 거의 끌어낸 나는 사진 촬영 약속을 하고 물러났다.
  
   사흘 뒤 사진 기자와 함께 鄭 씨를 다시 찾아갔다. 鄭 씨의 표정은 다시 굳어 있었다. 김성순 씨가 말했다.
   “선생님이 다녀가신 날 밤에는 나도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새웠답니다. 새삼 가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분통이 터지는 거예요. 대범이도 속에 들었던 것을 다 뱉어놓았으면 시원해야 할 텐데 되레 마음이 편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래도 정대범 씨는 일터(철물공장)와 집에서 사진 촬영에 협조를 해주었다. 원래부터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사람 같았다. 요절한 김기철 씨와 비슷한 그런 순덕이,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희생물이 되기에 딱 알맞은 그런 사람 같아 보였다.
  
  “제 일자리는 변변히 찾지 못하면서 남을 취직시키는 데는 선수”라고 아들을 평한 김성순 씨는 그래서 따르는 동네 젊은이들이 많다고 했다. 대범 씨의 아내에 따르면 鄭 씨는 최근 여덟 달쯤 창원의 한국중공업(주) 공장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무리한 지출을 하여 큰돈을 모아오지 못하게 되자 가족들 볼 면목이 없다고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다른 지방의 일터로 떠나려고 해 남편을 어르고 달래어 歸家(귀가)시키는 데 애를 먹었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가상 재판
  
   정 씨 집에서 사진을 찍은 다음날 나는 인천의 황덕수 씨를 서울로 올라오게 했다. 그날 오후 10시쯤 나와 황 씨는 정 씨 어머니 집으로 쳐들어갔다. 김성순 씨는 손녀를 보내 아들을 데려오게 했다. 10분쯤 뒤 반바지 차림의 대범 씨가 눈을 비비며 슬리퍼를 끌면서 들어섰다. 대범 씨는 자고 있다가 나온 것이었다.
   “야, 오랜만이다.”
   黃 씨는 단번에 말을 놓으며 손을 내밀었다. 대범 씨도 그 손을 받아 악수를 했지만 黃 씨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우리는 그 집을 나와 비탈길 옆 구멍가게로 자리를 옮겼다.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재꼈다. 鄭 씨의 어머니도 걱정이 되는지 따라 내려왔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黃 씨는 마치 피의자를 신문하는 검사처럼 鄭 씨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鄭 씨는 덤덤하게 설명을 해나갔다. 나도 黃 씨의 질문 사이사이로 보충 질문을 했다. 정대범 씨는 두 사람의 집요한 질문을 처리해야 할 입장이었다. 나는 문득 며칠 전에 보았던 연극 <신화 1900> 생각을 했다. 무죄 석방 뒤 정신병자가 된 김기창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와 작가가 정신병동에서 벌이는 가상 재판. 김기창은 자신이 겪었던 억지 수사와 재판을 다시 경험하도록 강요받는다. 사이코 드라마식 치료란 이름 아래서.
  
   황 씨와 나는 정대범 씨에게 그 같은 ‘체험의 再生(재생)’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밤 12시가 되자 가게 문을 닫아야 하게 되었다. 우리는 바깥으로 나와 가게 앞의 긴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계속했다. 대범 씨 어머니는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말참견을 했다. 어둠 속에서 모기들이 달려들었다. 드문드문 행인들이 지나치며 우리의 좌담 광경을 힐끔힐끔 바라 보았다. 우리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대범 씨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 잠 깨겠다’고 말렸지만 대화에 열중한 세 사람은 들은 척만 할 뿐이었다.
  
  때리고 어르고 달래고 술 먹이고 돈 주고
  
   황덕수: 너는 어째서 근하 사건에 말려들었나?
   정대범: 모든 게 구영근이한테서 비롯되었어. 난 고등학교 다닐 때 구영근이가 사범으로 있던 유도 도장에서 유도를 배웠어. 기골이 장대한 具 사범은 그때 6단이었지. 나는 그때 한창 실력이 오르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具 사범이 아니면 상대할 사람이 없었어. 그래서 저절로 친해졌는데, 그것이 그런 인연이 될 줄이야….
   고등학교를 졸업한 무렵 우리는 동대신동에서 밀양으로 이사를 갔어. 나는 가끔 부산으로 내려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우리가 셋방살이하던 집에서 며칠 묵고 가기도 했지.
  
   황덕수: 근하 사건으로 그 전에 조사받은 적이 있었나?
   정대범: 한 번 있었지. 그때야 동대신동이나 영남극장 근방에서 좀 논다는 아이들치고 경찰에 안 붙들려간 사람 있었나? 밀양 집에서 서부경찰서에 연행돼 일주일쯤 뭇매만 맞고 나왔지. 형사들은 무조건 때리면서 ‘불어라’, ‘불어라’ 했지만 불 게 있어야 불지. 형사들은 나 혼자 여관방에 자게 하고 다음날 아침에 경찰서로 오도록 하곤 했는데 나는 바보처럼 달아나지도 않고 시키는 대로 했어. 아침마다 얻어맞으려고 경찰서로 출근하는 거였지. 그런 바보스러운 정직 때문인지 무혐의로 풀려났고. 얼마 안 있다가, 그러니까 1968년 3월에 논산훈련소에 입대했어.
  
   황덕수: 훈련소에서 붙들려 왔지?
   정대범: 훈련을 다 받고 부대 배속을 기다리고 있는데 헌병들이 오더니 나에게 수갑을 채우고 지프에 태우더군. 그 자리에서 구 사범을 보았어. 난 영문도 모르고 부산으로 끌려왔단 말이야.
   황덕수: 나는 그때 널 만나러 논산으로 갈 뻔했어. 구 사범이 날 보고 이렇게 지시하는 거야. 논산훈련소에 들어가게 해줄 테니까, 거기서 대범이와 싸워 같이 영창에 들어가라. 함께 감방에 있으면서 대범이와 친해져 근하 사건에 대해 물어보라는 거였어. 그래서 입대 준비를 하고 있는데 너가 끌려왔더군.
  
   조갑제: 그런데 왜 자백을 하게 되었죠?
   정대범: 난, 말입니다. 모 수사기관에 먼저 끌려가 뭇매를 맞기 시작했어요. 한두 사람도 아니고 십여 명이 빙 둘러서서 날 쥐어 패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고문 받는 현장도 보여줍디다. “너 저렇게 병신 되고 싶니?” 하는 겁니다. 그래도 난 부인을 했지요. 그런데 웬 키가 큰 사나이가 들어오더니 날 보고 “군대에서 욕봤지”하면서 다정하게 대하지 않겠습니까? “당신 누구요?” 하니까 “자네, 날 모르나?”고 능청을 떱디다. 그게 바로 김금식이었답니다.
  
   난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제가 사회 경험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감방 경험이 있습니까. 철없는 어린아이와 마찬가지였죠. 훈련소를 갓 졸업한 때라 배는 오죽 고플 땝니까? 얻어맞고 배고프면 무섭고 이런 상황에서 구 사범이 어르고 달래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하면 징역도 조금만 주겠다. 감방에서 군대생활하는 셈 치면 될 것이다. 그런 뒤에는 평생 잘 먹고 살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 이러는 거였습니다. 금식이도 옆에서 “내가 하는 대로,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한 수 거들어줍디다.
   그리고는 맥주를 먹이는 거예요. 그때 맥주 마시기가 그렇게 쉬웠나요. 맥주에, 좋은 음식에, 그리고 김태현 검사는 수시로 저에게 용돈을 주었지요. 헌병대 감방에 있으면서 내 호주머니에선 돈이 떨어진 적이 없었어요. 그렇게 날 위협하고 삶아놓고 술 먹여놓고, 그래서 나의 마음도 붕 떠있을 때 그들은 부산지검의 김 검사 사무실로 불러내 신문 조서를 받았습니다.
  
   그것도 꼭 밤에, 잠이 퍼부을 때 말입니다. 난 무조건 예, 예, 했지요. 이렇게, 저렇게 된 게 아니냐고 물으면 예, 예, 너가 이렇게 하고 금식이가 저렇게 했지 하면, 예, 예, 그런 식이었어요. 또 예, 예만 하면 되는 식으로 묻습디다. 그때의 신문 조서를 보면 아시겠지만 저의 진술 내용은 앞뒤가 안 맞고 앞에 받은 것과 뒤에 받은 조서 내용이 틀려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가 근하 사건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신문 기사 읽은 정도인데 자백을 잘하려 해도 뭐 아는 게 있어야죠.
  
   저는 꾸벅꾸벅 졸면서 신문에 응했어요. 나중엔 그것도 견딜 수 없어 수사관이나 검사에게 당신들이 적당히 써놓으면 나중에 내가 도장을 찍어줄 터이니 잠이나 좀 자자고 하면서 코를 곤 적도 있습니다. 그때는 모든 걸 포기한 상태였고 어서 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생각뿐이었죠. 수사는 처음부터 조작이었습니다.
  
   조갑제: 검찰이 최형욱 씨와 김기철 씨를 붙들어와 대질시켰을 때도 당신은 저놈들이 살해 교사범임에 틀림없다고 찍었죠?
   정대범: 기철 씨와 최 씨를 제가 어떻게 압니까? 검찰 측에서 미리 암시를 주면서 아는 척하라고 해서 그런 거지요? 난 그때는 一流(일류) 꼭두각시였으니까요. 한번은 근하 살해범을 당시에 검문했다가 놓친 적이 있는 백 순경이 검사실에 불려와 대면한 적이 있었어요. 김 검사가 나를 가리키며 저 사람을 알겠느냐고 하니까 백 순경은 고개를 갸우뚱거립디다. 그러니까 김 검사가 고함을 빽 지르면서 “그래 가지고 어떻게 순경질 해먹느냐?”고 호통을 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무슨 답이 나올지는 뻔한 것 아닙니까?
  
   조갑제: 검은 야광시계를 범행 때 찼다고 진술했는데….
   정대범: 난 검은 야광시계를 본 적도 없어요.
   조갑제: 범행 때 입었다는 옷은?
   정대범: 그 옷에서 피 흔적이 발견 안 된다고 신문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걸 쉽게 풀어가는 게 좋겠다 싶어 범행을 저지른 뒤 피 묻은 옷을 버렸다고 했지요.
   김성순: 검찰에서 말한 그 옷은 대범이 옷이 아니라 대범이 동생 옷이었다구요. 밀양 집에 구 사범이 와서는 신분을 사칭하고 하는 말이 대범이가 군 수사기관에 배속되었는데 私服(사복) 근무이기 때문에 사복을 한 벌 갖다 주어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동생이 입고 있던 옷을 벗겨 건네준 것인데 대범이가 범행 때 입은 걸로 둔갑을 했습니다.
  
   정대범: 그때 검사실에 불려 가면 다른 피의자들과 함께 만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면 崔 씨와 기철이 등 다른 피의자들은 “너가 날 어떻게 아느냐?”고 우리를 보고 삿대질을 하곤 했지요.
   그러면 나는 금식이보고 “넌 나를 어떻게 아느냐? 나이 차이가 열 살이 넘는데 우리가 언제 어떻게 알았느냐?”고 새삼 원망을 하기도 했지요 그러면 금식이는 나에게 “이게 모두 쇼다. 감방에서 편하게 지내기나 하자”고 말합디다. 나중에는 얼굴을 맞보고 웃었어요.
  
  (계속)
[ 2020-07-27, 10: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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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건     2020-07-27 오후 9:00
이렇게 뻔뻔하게 조작해서 얻으려는 것이 뭐였을 가
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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