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시효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람
[實錄연재]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17)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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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注―‘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는 1981~1982년에 걸쳐 월간 〈마당〉에 연재 후, 1987년 한길사에서 나온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에 포함되었다가 2011년 조갑제닷컴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현재는 절판)되었다. 조갑제 기자가 가장 애착 가는 기사로 꼽은 이 글을 조갑제닷컴에 재연재한다.
‘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 4장 공소시효 끝나다 ④

  
  
  두 번 죽었다가 살아난 가짜 ‘眞犯(진범)’ 탐방기(下)
  예행연습 뒤에 한 현장검증

  
   황덕수: 그래도 난 이해할 수 없는 게 많아. 넌 그때 이런 말을 했지. 금식이와 기철이 저놈들이 범행이 성공한 뒤에는 나까지 죽여 바다에 던져 넣고 완전범죄를 꾀하려 했다고. 그러면서 화를 냈지? 그리고 금식이와 너의 얘기를 따로따로 들어보면 일치했어. 더구나 면회 온 애인에게는 “아이를 죽였지만 덕분에 간첩 큰놈을 잡게 되었다”고 자랑도 하고.
  
   정대범: 난 지금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그랬을지도 모르지. 김금식이와 내가 한 말은 일치할 수밖에 없었어. 신문은 따로 받았지만 구 사범이 중간에서 연락병처럼 이쪽, 저쪽으로 귀띔을 해주었거든. 금식이는 이래, 저래 했다고 말하는데 넌 그렇게 하지 않았니. 이렇게 묻는 거야. 그러면 나는 아, 각본이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구나 하고 그랬었다고 시인했지. 모든 게 그렇게 맞추어져 간 거야.
   난 구 사범이 시키는 대로 手記(수기)도 썼어. 근하 사건의 경위와 참회하는 내용의 수기였어. 그것도 대부분 구 씨가 코치해주는 대로 따라 썼지.
  
   김성순: 수기 쓸 때 내가 헌병대로 면회 간 적이 있어요. 아무나 가면 면회를 안 시켜준다고 해서 구 사범과 함께 갔지요. 구 사범이 대범이를 면회실로 불러냈어요. 난 그때만 해도 대범이가 살인을 정말 한 줄로 알았지요. 신문에 그렇게 크게 났는데 안 믿을 도리가 있나요? 면회실에서 구 씨가 대범이 보고 “오늘 좀 썼나?”고 합디다. “오늘은 몸이 아파서 못 쓰겠다”고 저놈이 히죽 웃으며 대답하니까 구 씨는 “오늘 약 사 넣어주고 갈께”라고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틀려서 고함을 꽥 질렀습니다.
   “야, 이 새끼야! 운전사가 개를 치어 죽여도 종일 기분이 나쁜데 넌 사람 죽여 놓고 뭐가 좋아 웃고 자빠졌냐!”
   그러니까 저 녀석이 퉁명스럽게 불쑥 “내가 왜 사람을 죽였어요!”라고 해요. 구 사범의 얼굴빛이 단박에 달라집디다. “너 이제 와서 그러면 되나”고 중얼거리면서 “대범이가 아직 의리를 못 버려, 참 어리석긴…”하고 말합디다. 그때서야 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요.
  
   정대범: 김태현 검사실의 방 모 서기는 어느 날 나에게 충고도 합디다.
   “아무래도 너희들이 이상한데, 한 그대로 불어야 된다.”
   황덕수: 또 의문이 있어. 현장검증 때 나는 너를 묶은 포승을 잡고 다녔는데 너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그처럼 잘할 수 있었어?
   정대범: 야, 우리는 하루 전에 예행연습을 하고 나갔단 말야. 현장검증 자리의 略圖(약도)까지 구경해가며 한 동작, 한 동작까지 그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어. 넌 낮에 바깥에서 일어난 일만 보았지 밤에 검사실이나 감방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잖아?
  
   조갑제: 그러면 현장검증에서 근하를 뒤에서 왼손 칼로 찌르라고 시킨 것도 그들입니까?
   정대범: 그건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저는 무조건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요. 그리고 난 짝빼이(왼손잡이) 아닙니까? 나중에 보니 왼손으로 찌르면 剖檢(부검)에 나타난 그런 상처가 안 난다고 해서 無罪(무죄) 판결의 자료가 되었습니다만 난 시키는 대로 했고 그것이 틀렸다는 얘기도 못 들었으니까 저들도 워낙 조작에 신경을 쓰다가 보니 剖檢 결과를 잊어먹고 있었겠죠.
  
   조갑제: 사전 연습을 했는데도 왜 대구의 현장검증에서는 범행 모의했다는 부엉이집까지의 길을 몰라 엉뚱한 방향으로 갔지요?
   정대범: 아무리 사전 교육을 받아도 내가 한 일이 아닌데 제대로 됩니까? 현장검증에서 실수한 게 어디 그 하나뿐입니까? 박영태 씨 집을 못 찾아 머뭇거리면 옆에서 구 사범이 슬쩍슬쩍 코치를 해주었고 모의했다는 방이나 그곳에서 내가 앉았다는 자리를 잘못 짚으면 구영근이가 옆에서 친절하게 바로 잡아주었습니다. 전 현장검증이 모두 우습기만 했습니다. 완전한 연극이었어요. 내가 서둘러 연기를 잘해 보인 것도 그런 고역을 빨리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서였지요.
  
  어머니의 욕설 듣고 정신 차려
  
   조갑제: 모친은 어떻게 대처하셨습니까?
   김성순: 변호사(이영호)를 선임했는데 변호사 말씀이 지금은 대범이가 푹 삶기어 있으니까 아무 소용이 없다. 공판이 시작되면 그때부터 깨고 들어가겠다고 합디다. 나는 具 사범의 약점을 잡으려고 일부러 그를 만나 음식 대접, 술대접도 해주며 친해지려고 했지요. 한번은 나한테 서울 출장비 5만원을 빌려달라고까지 합디다. 또 한번은 해운대에서 돌부처를 하나 사준 적이 있었지요. 그 사실은 법정에서 폭로했습니다만. 첫 공판이 열리는 날 저는 미리 재판소 앞에 가서 기다렸습니다. 대범이가 출정하는 걸 보자마자 욕을 퍼부었지요.
   “다른 사람은 사람 죽이고도 안 죽였다고 하는데 저 새끼는 안 죽이고도 죽였다고 한다. 네가 죽으려고 환장했냐! 야, 이 등신, 바보 새끼야!”
  
   조갑제: 그래서 그날부터 범행을 부인하기 시작한 겁니까?
   정대범: 그 전부터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합디다. 감방 동료들도 “너 죽을 짓을 왜 하느냐?”고 충고를 했고요. 나도 곰곰 생각해보니 이래선 안 되겠다는 계산이 생기기 시작했지요. 재판 시작 전에는 변호사와는 만난 적도 없어요. 다만 具 사범은 변호사 말을 들으면 너는 죽게 된다고 겁을 주더군요. 그날 어머니로부터 욕을 먹자 정신이 더 들었지요.
  
   김성순: 대범이가 1967년 10월17일 밤에 옆방에서 잤다고 알리바이를 증언해준 사람도 있었어요. 우리가 밀양으로 이사 가기 전에 살았던 집의 아주머니인데 이 아주머니는 그런 증언을 했다고 그날 검찰에 붙들려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압니까? 그 다음에 증인으로 나와선 앞의 증언을 번복합디다만 이해가 가더군요.
  
  눈물로 지새다가 숨진 할머니
  
   조갑제: 사형 선고를 받으니까 기분이 어땠어요?
   정대범: 아랫도리에서 힘이 쫙 빠지는 것 같았어요. 악이 받쳐 고함을 질렀지요. 귀신이 되어서라도 너희들 뜯어먹겠다고.
   김성순: 나도 ‘오냐, 3심까지 가자!’고 응원 고함을 질렀지요.
   조갑제: 군 형무소에 가셨겠군요.
   정대범: 사형수들과 같은 감방을 썼습니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들어보더니 “넌, 살아 나간다”면서 위로를 하더군요. 그 감방에는 안동의 극장 앞에 수류탄을 던져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한 신 모 하사와 두 동료를 죽이고 형무소에 들어왔다가 형무소 안에서 또 다른 사람을 죽인 오 모 씨도 있었는데 생을 포기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신 하사는 변심한 애인이 면회를 오자 죽인다면서 쇠붙이까지 품고 간 사람인데 사형을 당하기 며칠 전에는 무슨 예감을 느꼈는지 비누 등 私物(사물)들을 우리에게 나눠주고 오락회를 열고는 노래를 실컷 부르는 거였습니다. 저는 2심에서도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기에 마음은 편했고 誤判(오판)으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은 별로 없었습니다.
  
   김성순: 야, 너는 편했는지 모르지만 집안은 콩가루가 됐단 말이다. 대범이 외할머니와 저는 밀양에서 바로 이곳으로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살인범의 가족이라는 눈총 때문에 도무지 바깥출입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야간도주하다시피 이곳으로 달려왔지요.
   그때는 지금 時勢(시세)로 200만 원짜리 집을 살 수 있는 돈은 갖고 있었지만 여기서 무허가 건물을 하나 짓고 남은 돈으로 대범이의 옥바라지를 하다가 다 날려 보냈습니다. 저는 블록을 이고 나르는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블록 한 개를 평지에서 언덕 위에까지 날라다 주면 1원을 받았지요. 육체노동의 경험이 없는 나는 두 개만 이고 걸어가도 땀이 비오듯 했는데 다섯 개까지 나르는 아주머니들도 있었죠. 그 아주머니들은 지금 모두 골병이 들어 비만 오면 온몸이 쑤신다고 야단이죠.
  
   대범이 외할머니는 저를 대신해서 어린 대범이를 키웠기 때문에 각별히 정이 들었어요. 대범이가 저렇게 되니 매일 울기만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시름시름 앓다가 대범이가 무죄 확정 판결을 받은 며칠 뒤, 회갑을 몇 달 앞두고 돌아가셨습니다. 대범이 동생도 형이 저렇게 됐는데 나 혼자 살아 뭘 하느냐고 술만 퍼마시고…. 온 집단이 제정신이 아니었지요.
  
   아들은 변호사로 키우고 싶다
  
   이야기가 이쯤 나가고 있을 때 대범 씨의 아내 김부순 씨가 아래쪽에서 올라왔다. 집에 돌아오니 남편이 없어 찾아나선 것이었다.
   김부순 씨는 정대범 씨가 제대한 직후 결혼을 했다. 정 씨 집에 셋방을 얻어 살고 있던 처녀가 친구인 부순 씨를 소개해준 것이었다. 부순 씨는 대범 씨의 그런 과거를 전혀 모르고 결혼을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방을 치우다가 남편이 보관하고 있던 근하 사건 관계 신문조각을 발견했다.
   “앞이 캄캄해집디다. 이런 사람하고 결혼했다니 하는 후회와 함께 앞으로 어떻게 하나 하는 절망감에 사로잡혔지요.”
  
   그날 며느리의 물음에 그제야 김성순 씨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김부순 씨는 남편의 좌절이 오히려 이해가 되더라고 했다. 정대범 씨는 결혼 뒤 일자리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상업고교를 나온 그였지만 취직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지 못했다. 더구나 ‘일병 제대’라는 이력이 그를 따라다녔다.
   “이력서를 여러 군데 내었지요. 그때마다 ‘일병 제대’에서 걸렸습니다. 군에서 사고를 쳤겠지 하는 선입감을 갖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사건을 회상하기가 싫어 일일이 변명할 마음도 내키지 않았습니다.”
  
   결혼 뒤 4년 동안 그는 방황했다. 공사판에 나가 막노동을 하다가 일이 없으면 술로 세월을 보내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문득문득 자신을 이 꼴로 만든 구영근 씨와 김태현 검사 생각이 나더라고 했다.
   “참말이지 그때는 차비가 없어 부산에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차비를 안 주었어요. 이제는 정말 살인을 한 번 하리라 이를 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대범 씨가 갑자기 흥분하여 말하니 김성순 씨가 옆에서 말린다.
   “이제는 자식새끼 생각해서 살아야지. 복수는 하늘이 할 게다.”
  
   정대범 씨는 그 사건 뒤 스스로 생각해도 성격이 변했다고 한다. 낯선 사람들 만나기를 무섭게 생각한다. 친구들이 아니면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 저 사람이 또 나에게 어떤 피해를 주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부터 든다고 한다. 근하 사건에 휘말린 것도 구영근 씨와의 親面(친면) 때문이었고 누구를 안다는 것이 災難(재난)이 될 수 있음을 체험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바깥출입도 거의 하지 않는다. 쉴 때는 집안이나 마을을 떠나지 않는다. 영화 보러 시내로 나가는 일도 없다. 그런 ‘세상과의 뒤섞임’이 귀찮기만 하다는 것이다.
  
   정대범 씨는 보증금 10만 원, 월세 3만 원짜리의 단칸 셋방에서 살고 있다.
   “이 정도라도 마음잡고 살게 된 것은 저 아이 덕택이지요.”
   김성순 씨는 입버릇처럼 며느리를 칭찬해 마지않았다. 정 씨의 아내는 장난감 행상을 하는 듯 했다. 손가방에 작은 장난감이나 인형들을 들고 나가 호텔 주위에서 외국 관광객들에게 파는 일이다. 김부순 씨는 해맑은 인상의 얌전한 30대 초반 아주머니지만 구영근 씨나 김태현 씨 얘기가 나오면 거침없이 극한적인 낱말을 내뱉곤 했다.
   “저의 소원이 있다면 막내아들을 변호사로 키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하고 불쌍한 사람을 많이 구해주는 거예요.”
   이렇게 말하는 김부순 씨는 둘째 딸이 왼손잡이라고 하며 웃었다.
   정대범 씨는 언론에 의해 ‘손이 고운, 왼손잡이의 冷血(냉혈) 살인마’로 묘사되었고 그 ‘왼손잡이’로 해서 현장 검증의 모순점을 만들었고 무죄 판결을 받는 데 실마리를 제공했던 것이다.
  
   정 씨는 10여 년 전부터 용접 기술을 배워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다. 큰 공장에 들어가야 고정 수입이 있을 텐데 정씨 같은 고참은 봉급을 높게 책정해야 한다고 받아주길 꺼린다고 한다. 그래서 하청업자를 따라 부정기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데 공치는 날이 잦다.
   지금은 자동차의 앞 범퍼를 제작하여 납품하는 일을 하고 있다. 월수입은 30만 원쯤 되지만 곧 일감이 끊어질 형편이다.
   정 씨는 황덕수 씨가 꼬치꼬치 캐물으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우리 이러지 말고 금식이, 구영근이, 김태현이까지 불러 텔레비전에 함께 나가자. 거기서 한판 벌이자”고 했다.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젠 집을 알았으니 자주 놀러오라”는 鄭 씨의 황덕수 씨에 대한 인사가 인사치레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인천행 택시 안에서 내가 물었다.
   “황덕수 씨는 지금도 정대범 씨를 의심합니까?”
   황 씨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그러나 또 말꼬리를 달았다.
   “대범이에 대한 의심은 풀렸습니다. 그 친구도 결국 금식이에게 당한 거군요. 그렇지만 금식이는 정말 무죄일까요? 그 사람은 판·검사보다도 더 머리 회전이 빠른, 무서운 사람입니다. ‘이 사건은 내 멋대로 돌릴 수 있다’고 중얼거리던 그의 말이 아직 귀에 쟁쟁합니다.”
   “김금식 씨가 이 재판극의 각본을 쓴 것은 맞아요. 그건 이미 다 알려져 있는 사실 아닙니까? 그렇지만 근하 군이 살해된 날 그는 대구교도소 안에 있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해요. 그렇다면 김금식 씨는 범인일 순 없지요.”
   “범인이 아니라 해도 범인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는 있을지 모르지요. 公訴(공소)시효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바로 금식이가 아닐까요?”―두 번 죽었다가 살아난 가짜 ‘眞犯(진범)’ 탐방기 끝
  
  
  (계속)
  
[ 2020-07-28, 10:4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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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건     2020-07-28 오후 1:02
역시 사실을 무시하고 거짓증언하도록 추긴 검찰이 나쁜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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